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464화 (464/538)

464. 챕터57. 진군하다 (15)

이 난장판 속에서 제대로 정신을 차린 병사는 극소수였고, 그들의 외침은 혼란에 빠진 대다수에 의해 묻히고 말았지.

콰쾅! 그렇게 기사대는 선두는 대로를 메웠던 적 백호대를 완전히 관통해서 뚫고 나왔고, 속속 뒤를 따라 나오는 기사대원들에 의해 학살이 이어졌다.

방진이 아예 관통당해서 두동강이 나버리자, 점점 두터워지는 기사대의 물결에 찌그러지기 마련.

대로와 벽 사이에 끼인 적병들은 오도가도 못 하고 편곤과 기창에 맞아 쓰러졌고, 운 좋게 골목길로 삐져나간 이들은 무기를 내팽개치고 오줌을 지리며 도망쳤다.

“계속 간다!”

“충성!”

안장 끝자락에 매달아 놨지만, 어느새 피가 잔뜩 묻은 중대깃발.

기사대 중대장은 중대 깃발을 정면으로 세우고, 부하들을 독려하며 달려 나갔다.

기사대가 관아를 향해 달려가고, 후발대로 내린 해군병들이 연산 성내를 장악해 나가는 동안.

성벽 밖으로 나간 해군병들 또한 바쁘게 움직였다.

이곳 또한 성 밖에 경작지가 있었는데, 용케 추수를 끝마쳤는지 밭들은 휑하게 비어있었다.

그렇게 비어 있는 밭에, 삽을 들고서 개미떼처럼 달라붙은 해군병들.

그들은 참호를 파는 것이 아니라, 특이하게도 종아리가 쏙 들어갈 정도의 구덩이를 불규칙적으로 파고 있었다.

다만 하늘 위에서 본다면 불규칙 속에서 규칙을 찾을 수 있었는데, 낙마 함정은 성문에서부터 방사형으로 퍼지고 있었다.

갑자기 삽이 어디서 났는지 의아할 수도 있지만, 이들의 움직임은 상륙하기 전부터 계획되어 있었던 작업. 해서 미리미리 챙겨왔지.

육군, 해군 따질 것 없이, 삽질은 조선군의 특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흠...”

“선임부함장님. 걱정되십니까?”

“아무리 훈련을 했어도 실전은 처음이지 않나.”

“예...”

선임부함장 이백현은 삽질에 열중하는 해군병들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말았다.

이 시대는 해군과 육군이 따로 없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나마 수군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노꾼이나, 바람과 물길을 읽고 배를 몰 수 있는 선원들이었지.

다만 이런 이들은 수군 중에서도 나름 정예였고, 진짜 전투를 치르는 평범한 병사들은 육군과 다를 게 하나 없었다.

지금의 조선군은 과거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수군호가 해체되고 해군 상비군이 등장하면서, 이들은 육군과 똑같이 무기술 집체훈련과 전법훈련을 받았다. 다른 점은 기마무술 추가로 익히는 대신 항해에 필요한 기술을 배웠다는 점.

그러니 뭐랄까... 해군이라고 해서, 육군 보병과 크게 다를 게 없었던 거지.

“게다가 대기병장창도 아니고 일반 장창을 소지하지 않았나. 적 기병의 수준을 정확히 알 수 없으니 불안한 게 사실이지.”

“그래도... 육군기병을 상대로 대기병훈련을 해오지 않았습니까? 요동기병이 아군보다 뛰어나진 않을 겁니다.”

“음...”

또 다른 부함장의 위안에 선임부함장 이백현은 다시금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육군과 해군이 완전히 분리된 조선군인데, 해군이 장창을 주력무기로 쓰고 또 장창진법을 훈련하는 건... 얼핏 보면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

자리가 비좁고 장애물이 많은 갑판 위에선, 장창을 주력무기로 쓸 일이 없으니까.

허나 이 또한 조선군에게는 예외였다.

조선전함은 외국함선에 비해 월등히 컸고, 백병전을 하기 위해선 공성전을 하듯 조선전함에 달라붙어야 했다. 이런 적을 상대하기 위해선, 해군 또한 장창을 사용하는 게 효율적이었던 거지.

그러고 이렇게 장창을 쓰기로 했으면, 어차피 전법훈련을 하면서 장창진법 훈련도 함께 하게 된 것이었다.

아까 말했듯. 해군은 육군 보병과 다를 게 없었기에, 어찌 보면 지금의 조선해군은 미래의 해병대와 오히려 흡사했던 거지.

해군의 편제가 육군과 달라진 것도, 이와 연관되어 있었다.

해군은 함선이 최우선이니... 함선이 곧 부대고, 함장이 지휘관이며 독립부대의 사령관이었다. 다만 병력수를 생각하면 육군의 1개 대대도 못되는 수준.

하여 육상에서 작전을 펼칠 때는 전함 한 척당 대대로 취급. 육상전투 또한 할 줄 알아야 했기에, 부함장들은 따로 육군에 파견되어 육상전투지휘를 훈련받아야 했다.

선임부함장인 이백현이 총지휘관이 되고, 다른 부함장들이 대대장이 되어 병력을 통솔하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그럼 다른 문제는...’

이백현은 또 다른 걱정거리를 입에 담았다.

“병사들의 사기는 어떤가? 굳이 성벽을 놔두고 밖으로 나와서 싸워야 하니 동요할 법도 할 텐데...?”

“중대장과 소대장들이 다독이고 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걱정마시지요. 다들 연산항구의 중요성은 숙지하고 있습니다. 군기가 빠질 일은 없습니다.”

그가 말을 꺼내기 무섭게, 부함장들이 재깍 대답을 이어 붙였다.

작전의 세세한 부분까지 전부 말단 병사들이 알게 되면, 지휘부의 결정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나오기 마련.

그러니 모든 걸 알려줄 순 없어도, 큰 틀에서는 작전계획에 대해선 하급지휘관들이 알고 있는 게 나았다.

목표와 이유가 명확해야 사기가 떨어지지 않고, 혹여나 패했을 때도 재정비를 하며 뒤를 도모할 수 있으니까.

지금 열심히 땅을 파고 있는 하급지휘관들도 마찬가지였다.

연산과 이 일대의 마을에는 대략 6천가호, 약 3만명 정도가 사는 꽤 큰 도시이자 지역이었다.

아무리 기습을 받아 수비군이 항복을 했어도, 이곳 코앞에는 광녕성이 위치해 있다. 코앞이라는 말이 결코 틀리지 않는 게, 연산과 광녕성까지의 거리는 고작해야 20키로미터도 안 되니까.

그러니 조선군의 기습을 받기 무섭게 전령이 광녕성으로 달렸을 거고, 광녕성에선 연산항을 구원하기 위해 병력을 보낼 게 분명.

“그런데 아군이 만약 성벽을 끼고 수성을 하면, 변수가 너무 커지겠지.”

“물론입니다. 애써 수군을 항복시키고 수비군을 무너뜨렸는데, 굳이 꺼진 불씨를 되살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오히려 더욱 확실히 불씨를 짓밟아 꺼야겠지요.”

“맞습니다. 광녕성에서 지원군이 온 걸 보고, 또 아군이 수세에 몰렸다고 착각한다면 포로나 연산 백성들의 항전의지가 되살아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군이 질리는 없지만...”

누군가의 말에, 이백현이 다짐을 재확인하듯 말을 빼앗았다.

“그렇게 연산백성들을 마구 죽이면 결국 작전은 실패나 마찬가지겠지. 이 고생을 하면서 상륙할 필요도 없었을 거고 말이야.”

“예.”

“다음 계획을 생각하면, 반드시 연산항을 온전히 손에 넣어야 하니까요.”

그의 말에 모두가 동의하며, 각오를 다지듯 눈빛을 빛냈다.

요동이 과연 짐작이나 할까만, 이번 출병은 그저 요동을 먹는 걸로 끝나지 않는다. 궁극적인 목표는 북평부고, 북평부를 공략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보급기지가 바로 연산항이었다. 이곳이 천진 및 산해관과 가장 가까운 항구였으니까.

여기가 포화에 쑥대밭이 되면, 숨겨둔 대계가 헝클어지는 꼴.

“그러니 얼이 빠져 있는 연산백성들에게 확실히 보여줘야지. 이미 연산은 함락됐고, 자신들을 구원하러 올 지원군은 아무도 없다고 말이야.”

“옙!”

“그렇습니다!”

그래서 굳이 이렇게 성 밖으로 나와서, 야전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광녕성에서 올 지원군을 아예 박살내서 포위조차 못하게 만들어버리면, 안 그래도 꺾인 항전의지를 완전히 매몰시킬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촉박한 시간은 계속 흘러갔고, 구슬땀을 흘리며 적에게 대항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을 때.

“저기 보시죠!”

“신호입니다!”

“음...”

모두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저기 서남쪽 해안가에서, 펑펑! 붉은 꽃이 연거푸 피어오르는 게 눈에 들어왔기 때문.

“보이나?”

“잘 모르겠습니다.”

이백현은 광녕성과 연산항 사이에 펼쳐진 평야를 굽어보며 물어봤지만, 다들 살포시 고개를 내저었다.

가시거리 밖에서 벌어진 일이라서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병력을 넘겨준 신형전함 두 척은 연산항구를 빠져나가, 서남쪽 해안을 따라 남하해 광녕성과 연산항 사이의 해안가에 바짝 붙어 있었다.

이곳은 엄연히 요서회랑의 일부고, 그 말인 즉. 산맥과 해안 사이의 좁은 평야만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작은 구릉과 얕은 산지가 있지만 거의 평야나 다름없었고, 명나라나 그 이전 시대에 만들어진 관도는 최단경로인 해안가를 따라 만들어져 있었다.

비록 다른 도로가 없는 건 아니지만, 한시가 급한 적은 돌아가는 길 대신 최단경로를 택하지 않겠나. 해서 미리 대기를 하고 있다가, 적 기병이 보이면 포격을 날리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더불어 폭죽신호를 보내서 떨어져 있는 다른 전함에게 적의 출현을 알리고, 또 연산항의 해군에게도 알리기로 되어 있었지.

그 신호가 바로 모두의 눈에 보인 폭죽이었으니, 이제 곧 적이 당도한다는 뜻이나 다름 없었다.

“준비하게.”

“옙!”

“정렬!” “모여라!”

선임부함장 이벽현이 무운을 빌며 명을 내리기 무섭게, 부함장들 모두 각자의 대대로 재빨리 걸음을 옮겨갔다.

동시에 기다렸던 지원군. 성 밖에서 함정을 파는 동안 성내를 정리하고 온 기사대 중대장이 피냄새를 풀풀 풍기며 다가왔다.

“고생했네. 성내의 수비군은?”

“해군병들이 격리하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혹시나 싶어서 화포를 써볼까 하고 봤는데...”

말을 하다말고, 기사대 중대장은 피식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엉망이었나 보군?”

“예. 당장 써먹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화포와 화약은 수성의 핵심인데, 제대로 관리를 안했더군요.”

“성주가 빼돌린 건가?”

“제가 성주를 취조하지 않아서 그것까진 모르겠습니다.”

“흐음... 아국 해군의 위용을 알면, 화포와 화약 관리를 허술히 할 수가 없을 텐데...?”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포로들의 말을 들어보니, 아군이 이곳을 공격할 거라고 예측을 못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중대장이 말을 흐리자, 이백현은 얼른 되물었다.

“그리고?”

“성주를 비롯해서 하급지휘관들은 만약 전쟁이 벌어진다면 요양과 심양에서 결판이 날 거니, 눈치를 볼 생각이었나 봅니다.”

기사대 중대장은 자기가 말을 하고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피를 닦아낸 강철장갑으로 머쓱하게 턱을 매만졌다.

“첩보가 맞은 건가?”

“예. 그런 모양입니다.”

“흐음...”

‘나쁘지 않아. 좋은 징조군.’

이백현은 쓴웃음인지 미소인지 모를 표정을 지으며, 오면서 열심히 외웠던 요동 지휘관들의 인명을 떠올렸다.

요양파와 심양파로 쪼개져 출세를 위한 자리가 정해지고, 한탕 해먹을 수 있는 자리를 따라 한직과 요직이 결정됐다고 하지 않았나.

문제 아닌 문제는 바로 광녕성과 광녕성을 지탱해주는 연산항이었다.

만약 북평부와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 첫 불씨는 광녕성에서 터질 거다. 그러니 요서의 다른 변경요새처럼 허술하게 놔둘 수 없다.

그럼 광녕성에는 요양파나 심양파의 핵심인물이 부임해야 하는데... 견원지간인 둘 모두를 만족시킬, 중립적인 인물을 찾는 건 쉽지가 않다.

더불어 북평부와 거래가 끊어진 이상, 광녕성은 뜯어먹을 거라곤 전혀 없는 한직이나 마찬가지.

나아가 요서회랑을 놓고 산해관과 산발적인 교전이 펼쳐지는 최전선이니, 오히려 목숨이 위험한 자리 아닌가.

물론 이런 자리일수록 전공을 세워 승진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 요동군부는 인맥과 파벌로 자리가 결정되는 구조가 된지 오래다.

뭐랄까. 계륵이라고 불러야 할 자리가 되어버린 거지.

또 하나. 조선에 의해 강제적으로 북방에 평화가 도래 하자, 요양과 심양에선 다른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요동에서 가장 정예하고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는 곳이 광녕성인데, 이곳 지휘관이 만약 칼을 거꾸로 쥐고 자신들을 노리면 곤란하지 않겠나.

아무리 충성스러운 인물을 내려 보내도 굳게 믿는 건 쉽지 않았고, 해서 거의 해마다 지휘관이 바뀌곤 했었다.

“그렇게 계속 고위지휘관이 교체되면 병력들을 제대로 통솔할 수가 없고, 실무자들인 하급지휘관은 한직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광녕성과 연산항에서 복무하는 걸 좋아할 리가 없었겠지.”

“예. 뭐... 산해관을 앞에 두고 있으니,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훈련은 열심히 했나본데... 사기는 엉망이더군요. 고위지휘관은 부임해서 한탕 해먹고 떠날 생각만 하고 있는데, 밑에 부하들이 그걸 보며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음.”

이백현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절래절래 내젓고 말았다.

이게 비단 요동에서만 벌어질 수 있는 특별한 일이 아니지 않나. 조선에서도 얼마든지 펼쳐질 수 있는 일이고, 천만다행이도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군부는 이럴 일이 없을 거는 것에 안도했다.

“광녕성이 그러하면, 연산항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고 말이야.”

“그렇지요.”

천진수군이 있을 때는 이곳에 적이 상륙해 광녕성을 양쪽으로 포위할 위험이 있으니, 나름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을 거다.

허나 그런 위험이 사라진지 몇 년이 흘렀고, 요동수군마저 축소된 상황. 연산항은 무역항으로서의 이점이 없으니, 굳이 열심히 방어해야할 필요를 못 느꼈을 거다.

“분위기가 그렇다면, 성벽을 끼고 싸워도 됐겠군.”

“그럴 수도 있지만, 변수는 확실히 제거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미 늦었고 말이죠.”

이미 적 기병이 오는 신호를 봤는데, 성문까지 다 부셔놓은 마당에 다시 들어갈 수나 있겠나.

중대장은 히죽 웃으며 말을 마무리 지었다.

“좋아. 그나저나 한바탕 더 뛰어야 하는데, 가능하겠나?”

“물론입니다.”

그는 또 다시 자신만 믿으라는 듯, 가슴을 쿵쿵 때렸다.

“성내에 있다가, 언제든 출격할 수 있게 준비하게.”

“옙! 충성!”

그는 곧장 말을 몰아, 부하들이 기다리고 있는 성 안으로 되돌아갔다.

해군병은 오매불망 적 기병이 오기를 기다렸고, 이내 곧 얼마 지나지 않아 평원 한편에서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적이다!”

“준비!”

“함정에서 물러서라!”

“줄 맞춰서! 장창대 앞으로!”

삐빅! 요란한 호각소리와 함께 조선군 전체가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켰고, 이내 곧 대대별로 쪼개져서 군진을 만들어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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