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5. 챕터57. 진군하다 (16)
심양과 철령, 청양, 개원 등지의 북부지역에도 요동기병이 존재하겠지만, 계획대로 육군이 움직였으면 요동기병이 활약하기도 전에 일제히 얻어맞았을 거다.
오히려 전마를 조선에게 헌납한 셈이 됐겠지.
그런 이유를 빼고도, 지금 오고 있는 적 기병은 아마도 요동군 중에서도 최정예기병일 거다.
저들은 요서회랑을 놓고 북평부 기병과 산발적인 교전을 해오던 이들.
물론 기병대끼리 싸워봐야 요서회랑을 차지할 수도, 성을 함락시킬 수도 없으니 죽기 살기로 싸우진 않았겠지만... 어찌됐건 진짜 실전을 경험했을 테니까.
해군병들 사이에선 긴장감이 물씬 풍겼고, 그럴수록 소대장과 중대장들이 더욱더 목청 높여 전의를 일깨웠다.
두두두... 지축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먼지구름이 보이기 시작하고, 해군병들은 더욱더 바짝 붙어 전열을 형성했다.
“후...”
“...”
성벽 나무구조물에서 뜯어내서 대충 만든 지휘망루에 올라 있던 이백현. 그는 자기도 모르게 심호흡을 내뱉으며, 먼지구름을 노려봤다.
“몇이나 왔을까...?”
적 기병의 수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첩보에 의하면 대략 일천 정도.
그 병력을 다 보냈을지 안 보냈을 진 모르지만, 다 보냈을 가능성이 컸다.
“다 보냈겠지?”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적들은 아군이 이렇게 빨리 연산항을 함락시킬 줄은 몰랐을 테니까요.”
“음...”
상륙작전을 막는 가장 쉽고 효과적인 방법은 배에서 해안으로 딱 내리는 시점이다.
배를 타고 순차적으로 상륙을 해야 하니 병력이 적을 수밖에 없고, 또 배에서 내리는 순간에는 전열과 진영을 짜지 못해 약할 수밖에 없으니까.
이건 고대부터 미래까지 변하지 않는 진리이니, 광녕성에선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동원해서, 최대한 빨리 부두로 향해서 상륙을 막으려고 했을 거다.
다만 광녕성을 마냥 비워둘 수 없는 노릇이니, 빠르게 기동할 수 있으면서 수성에는 당장 필요하지 않은 기병대를 보냈을 거고.
‘맞아. 저들은 신형조운선의 존재에 대해서 모를 테니까.’
신형조운선이 있는 건 알지만 정확히는 모르지 않나. 과거의 맹선이나 중국의 배를 생각했다면, 아주 큰 오산이다.
이백현은 의심의 고리를 하나씩 풀 듯, 다른 우려를 입에 담았다.
“그럼 우리가 이렇게 성 밖으로 나와, 진을 친 걸 알고도 싸우겠나?”
“오히려 더욱 싸우려 들지 않겠습니까? 상륙이 계속 이어질 거라고 착각하는 이상, 만약 아군이 성벽에 의지해 싸우면 아군 병력이 더 늘어날 거라고 판단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내로 진입하려 할 겁니다.”
“맞습니다. 서문 말고는 광녕성과 이어진 곳이 없고, 북문이나 동문으로 돌아가는 건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겠습니까.”
부관은 저 멀리. 연산항 북쪽에 걸쳐 있는 산맥을 가리켰다. 요서회랑이 만들어진 이유가 바로 저 산맥 때문인데, 저길 돌아서 가겠나.
“음.”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이백현은 다시금 주먹을 꽉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충돌을 피할 수 없으니, 계획했던 대로 시원하게 풀어 가면 될 것 같다.
부웅! 먼지구름 사이에서 나팔소리가 들려오고, 반대로 해군병들 사이에서도 북소리가 요란하게 터지기 시작했다.
“역시 기병이군.”
“경기병과 중기병이 혼합되어 있는 모양입니다.”
“어...!? 저기 보시죠. 부함장님.”
진군해 오는 적 기병을 망원경으로 살펴보던 부관 중에서, 누군가 한쪽을 가리키며 히죽 미소를 지었다.
“뭔가?”
“적들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군요.”
“오!” “뭐라!?”
모두는 자기도 모르게 기함을 하고선, 냉큼 부관이 가리킨 곳을 살폈다.
먼지구름 때문에 정확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확연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티가 났다.
급하게 달려오느라 꼴이 말이 아닌 건 당연하겠지만, 그 중에서도 완전히 흙더미가 되어 있거나 갑옷이 찢어져 덜렁거리는 이들이 보였으니까.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흡사 패잔병처럼 보이는 상태 아닌가. 저들이 저런 꼴이 된 건, 딱 하나밖에 없다.
“함포사격을 맞은 게 분명하군.”
“예. 그럴 겁니다!”
모두는 반가운 기색을 참지 못하고 작게 환호를 지었다.
이들은 본인이 해군이니 함포사격이 어떻게 펼쳐졌는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지 않나.
대비하지 못한 상황에서 무턱대고 함포사격을 얻어맞았다면, 단 한번의 포격에 못해도 수십, 많게는 백여명 넘게 쓰러졌을 거다. 그 위에 또 다시 포격을 맞았으면, 피해는 배로 불어났을 거고.
그리고 그렇게 얻어맞은 울분을 풀기 위해서, 적 기병은 진영을 짠 아군을 알아봤음에도 거침없이 달려오고 있었다.
“와아아!”
“준비하라!”
“뭉쳐! 퍼지지 마라!”
둥둥둥! 심장을 뒤흔드는 북소리와 함께, 삐빅! 하급지휘관들의 호각소리가 하늘을 흔들며 퍼져나갔다.
아무리 해군병들이 훈련을 잘 받았어도, 기병 돌격은 무섭다.
전면 시야를 온통 가리는 먼지구름, 몸이 울릴 정도로 지축을 흔드는 진동, 귀가 얼얼해지는 말발굽소리.
이 모든 효과는 기병에겐 승리의 증거처럼 다가와 사기를 높여주고, 반대편에겐 죽음의 손길처럼 다가와 두려움을 전염시킨다.
“겁먹지 마라!”
“사격 준비!”
“제대 간격을 좁혀라! 틈을 보이지마!”
그랬기에 소대장, 중대장들은 검은 깃발을 거칠게 휘두르며, 목이 터져라 외쳐댔다. 그 또한 사람이니 두려움이 밀려왔지만, 스스로 세뇌시키기라도 하듯 소리쳤다.
“속도가 줄지 않는군요. 거리는 1천보!”
부관은 망원경으로 살피는 것 만으로도 용케 거리를 알아봤다.
이들은 매일같이 바다를 떠돌며 지형을 살피고, 또 흔들리는 배 위에서도 거리를 측정해 포격 연습을 하지 않았나. 그 실력이 단단한 땅 위에서는 더욱 빛을 보나보다.
“전 제대를 뒤로 물려라.”
“옙!”
부웅! 이백현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퇴각신호와 함께 장군기가 흔들리고 곧장 제대가 깨지며 움직였다.
조선군은 총 5개의 제대로 나뉘어서 일렬로 배치되어 있었는데, 전 제대가 뒤로 빠지는 동안, 중앙 제대는 더 후퇴해서 살짝 굽은 일렬로 변했다.
다만 정면에서 보면 다 똑같이 보일 정도로 애매했고... 만약 이걸 알아차릴 때쯤 되면, 적 기병은 이미 뒤로 물러설 수 없을 정도로 바짝 붙은 상황일 거다.
“발 조심해라!”
“빨리! 움직여라! 이제 곧 온다!”
미리 계획되어 있던 작전인 터라, 퇴각명령에도 제대는 흔들리지 않고 일제히 뒤로 물러섰다.
해군병들이 판 함정은 너무 마구잡이라서 자신들도 어디에 팠는지 정확히 모르지 않나.
그 탓에 몇몇 병사들이 구덩이에 발이 빠져 넘어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큰 무리 없이 일제히 뒤로 물러 설 수 있었다.
“함정을 알아차렸을까?”
“거리가 멀어 보이지 않으니, 확신할 순 없겠지요.”
“어쩌면 겁을 먹고 퇴각한 걸로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걸 떠나서... 적들 입장에선 아군이 버티든 물리든, 멈추지 않을 겁니다. 어찌됐건 성내로 들어가야 하는 건 변하지 않을 테니까요.”
“좋아.”
이백현은 다시금 각오를 다지고선, 제대들이 수십보 뒤로 밀려나 진영을 갖추는 걸 살폈다.
특히나 유심히 살핀 건 사각형 모양으로 뭉쳐 있는 제대 중간에 위치한 이들. 천만다행이도 실수한 이들 없이, 전부 제대로 빠진 모양이다.
조선군이 그렇게 진영을 바꾸는 동안, 적 기병이 가만히 있었을까.
보병과 기병의 이동속도는 비교할 수도 없는 탓에, 조선군이 자리를 잡았을 때쯤에는 이미 코앞까지 도착한 상태였다.
거리는 고작해야 백오십보정도.
“발사!”
“쏴라!”
쉐에엑! 굳이 명을 내리지 않아도, 창병들 뒤에 서 있던 해군병들이 일제히 화살을 쏴대기 시작했다.
오히려 해상전이야 말로 화력전이 주력인 탓에, 해군병들은 육군병들 만큼이나 활을 잘 쏘지 않나.
방수처리를 한 흑각궁은 일제히 허리를 접으며 휘어졌고, 태양을 꿰뚫듯 하늘로 치솟아 떨어졌다.
퍼퍼퍽! 양 제대에서 마구잡이로 쏟아진 화살은 먼지구름을 잘게 찢으며 쏟아져, 적 기병대를 집어삼켰다.
허나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서도, 제대 최선두에 위치한 소대장, 중대장들은 긴장을 풀지 않고 목청을 높여댔다. 거꾸로 먼지구름을 뚫고 적들에게서도 화살이 쏟아졌으니까.
저들이 아무리 한족기병이라고 한들, 마상사격이 불가능한 건 아니지 않나. 게다가 이들은 과거 여진, 몽골과 매일같이 드잡이질을 했던 요동기병이다.
더불어 북평부 기병과 꼬리물기를 하며 실전을 겪어온 광녕성 기병들이니, 마상사격을 할 줄 알았지. 다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닌지, 조선군이 쏘아낸 화살비보다는 훨씬 적은 수였다.
“겁먹지 마라! 고개만 숙이고 버텨!”
“갑옷을 믿어라!”
“움직이지 마! 맞아도 안 죽는다! 참아!”
“유효사거리가 아니다! 버텨!”
소대장과 중대장들은 창병들을 독려하며 계속해서 목청을 높여댔다.
고작해야 저런 사격에 겁먹고 물러서면 절대 돌파를 못 막는다.
게다가 마구잡이로 날아오는 눈 없는 화살에 맞아죽으려고 비싼 두정갑, 그것도 예전에 비해 개량된 두정갑을 껴입은 게 아니지 않나.
해군병들은 훈련한 대로 허리만 살짝 굽혀 안면을 가리고선,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자유사격!”
“계속 쏴! 적들을 돈좌시켜라!”
반대로 창병 뒤에 위치한 궁병들은 미친 듯이 손을 놀려 화살을 날려댔다.
일제사격이라지만, 활은 총이 아니다. 첫 사격은 함께 하더라도 그 뒤는 개인에 맞춰 달라지기 마련.
조선군 제대에서 쏟아지는 화살은 불규칙적이면서도, 또 한편으론 규칙적으로 적 기병을 향해 쏟아졌다.
퍽퍽! 적들 또한 갑옷을 챙겨 입은 건 마찬가지인터라, 화살에 맞아 우르르 쓰러지는 건 아니었다.
전마가 맞아도 마찬가지. 전마는 사람보다 훨씬 덩치가 큰데, 급소에 맞는 게 아니고서야 화살 한두방 맞았다고 즉사할 리가 없지 않나.
안 그래도 조준사격이 아닌 화망을 형성한 광역사격인 터라, 화살비는 허무하게 땅에 박히는 게 대다수였다.
다만 거리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속속 쓰러지는 기병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퍼퍽! 재수 없게 눈먼 화살 수십대가 전마 한 마리에 꽂혔는데, 피할 수도 없이 위에서 날아와 경추에 틀어박혔다.
히히힝! 전마는 단발마의 울음만 남기고 머리를 처박았고, “크헉!” 위에 타 있던 기수 또한 전마와 하나가 되어 땅을 뒹굴었다.
“피해!”
“계속 달려라!”
적 기병들 사이에서 상반된 명령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쓰러진 동료를 피해 황급히 말머리를 돌리거나, 아예 훌쩍 뛰어넘는 이들이 있던 반면. 반대로 더욱 맹렬하게 조선군을 향해 달려가는 이들이 있었다.
화살을 교환하는 화력전으로 가면, 땅에 발을 붙이고 있고 병력수가 많은 조선군이 당연히 유리하지 않겠나.
무조건 조선군에게 달라붙어 진영을 무너뜨리고, 할 수 있다면 전열을 아예 반토막 내버리는 게 최선이었다.
그랬기에 적기병은 쐐기진영을 갖추고 조선군 중앙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는데... 그런 적 기병의 움직임을 읽고 조선군 중앙 제대는 슬쩍슬쩍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이 또한 계산된 움직임 아닌가.
앞에서 맹렬하게 달려오는 기병을 앞에 두고도, 조선군은 묵묵히 뒷걸음질을 치며 제대를 깨트리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 화살비를 교환하고, 슬그머니 진형이 바뀌는 동안. 서로간의 거리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화살비가 5번 정도 교차하며 쏟아지기 무섭게, 적 기병은 어느새 백보 안쪽으로 다가온 상황. 기병의 속도를 생각하면 고작해야 한 호흡도 안 되서, 서로의 눈동자가 보일 정도의 거리.
그때. 두두둥! 우렁찬 북소리와 함께 임시 망루에 서 있던 깃발병의 손에서 지휘군기가 힘차게 흔들렸다.
이 시간만을 기다리며, 뒤통수를 노리는 기병을 애써 무시하고 후방의 지휘부만 살피고 있던 소대장들.
“비켜!”
“자리를 벌려!”
그들은 제대 선두를 지키고 있던 창병들을 직접 끌어내며, 미친 듯이 목청을 높였다.
이 또한 준비된 작전이고, 대기병전술로서 조선본토에 있을 적에 익히 해왔던 훈련 아닌가.
창병들은 재깍 자리를 비켜 동료의 등 뒤로 모였고, 그렇게 빈 공간에 적 기병을 위한 깜짝 선물이 등장했다.
“발사!”
“쏴라!”
이미 조준을 끝마치고 짧은 심지까지 박아 놓은 야전화포. 그 심지가 불에 타기 시작하기 무섭게 우렁찬 굉음이 천지를 흔들었다.
콰콰쾅! 화포 안에 있던 화약이 일제히 폭발하며 격목을 밀어냈고, 격목 앞에 놓여 있던 천주머니가 찢어지듯 튀어나왔다.
힘을 이기지 못한 천주머니는 하늘을 보기 무섭게 찢어졌고, 안에 담겨 있던 엄지손가락만한 자갈들이 순식간에 전장을 휩쓸며 사라졌다.
“크헉!” “컥!”
“억!” “화포다!”
백보도 안 되는 거리에서 쏘아진 조란탄을 피할 수가 있나.
보이지도 않는 자갈들이 정면에서 튀어나와, 선두에 선 적 기병들을 일제히 함몰시켰다.
개량되고 개량된 조선화약은 갑옷조차 무용지물로 만들어줄 수 있는 바. 자갈비는 전마든 갑옷을 입은 적기병이든 가리지 않고, 모조리 구멍 내며 적진을 뒤흔들어 놨다.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순식간에 전장을 휩쓸고 지나가고, 뒤이어 붉은 핏줄기가 먼지구름을 삼킬 정도로 사방에서 피어났다.
전마와 함께 선두 기병들은 도미노처럼 우수수 쓰러졌고, 바짝 붙어서 따라오는 탓에 그 사체를 미처 피하지 못한 기병 또한 발이 걸려 넘어져 목이 부러졌다.
선두가 고기방패가 되었다고 해서, 뒤따르던 이들이 무사할 성 싶은가.
조란탄은 사방에서 골고루 날아왔고, 빈 공간을 파고든 자갈비는 뒤따르던 기병들의 머리와 손, 발을 사정없이 짓이기고 나서야 힘을 잃고 떨어졌다.
눈앞에서 동료들이 속절없이 죽어나가는 걸 보며, 순식간에 분위기가 반전되어 돌파하는 기세가 꺾이는 듯 했으나... 적 기병들은 오히려 발악하듯 더욱 고삐를 잡아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