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467화 (467/538)

467. 챕터58. 함락하다 (2)

어찌 신기하지 않을까.

그간 어깨가 빠지도록 타작을 해야 했던 것에 반해서, 조선이 가져온 거대한 빗처럼 생긴 홀테를 사용하면 어린아이도 쉽게 탈곡할 수 있었으니까.

“신통방통하고만.”

“거참. 별거 없어 보이는데, 용하네 그려.”

“암암.”

홀테 주변에 모여 있던 농부들은 다들 한마디씩 하기 바빴고, 이내 곧 다른 물건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놀랄 게 고작 이거 하나 뿐일까. 홀테, 족발식 탈곡기 등을 비롯한 조선의 농기구는 시대를 뛰어넘는 면이 있었으니, 농부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했다.

심지어 지금 저기 먼 곳에선, 공성전이 벌어지고 있는 데도 말이다.

조선 농기구를 구경하는 농부들 저편에서도,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 있는 곳이 있었는데... 어째 이곳은 더욱 시끌시끌했다.

캉캉캉! 귀를 아리게 하는 날카로운 소음이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이걸, 그걸로 바꿔 주신단 말씀이시지요?”

뗏물이 잔뜩 묻은 옷을 입은 농부는 믿기지 않는 눈길을 숨기지 못했다. 그저 자신이 쥐고 있는 녹슨 쟁기와, 기름칠을 한 것 마냥 윤기 나는 새 쟁기를 번갈아 가리켰다.

“맞네. 공짜는 아니고, 돈은 받을 걸세. 물론 자네에게 무리되는 금액은 아니지. 알고 있지?”

“예...”

농부는 유창한 한어로 말하는 관원에게 고개를 마구 끄덕여댔다.

사실 관복을 입은 관원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하는 건, 요동 백성들에게는 꽤 낯설고 두려운 일이었다.

허나 어째 자신들을 지배했던 요동관원들에 비해 조선관원은 꽤나 친절한 편이었고, 실제로도 피부에 와닿는 도움을 주고 있었다.

그렇다보니 지금 전쟁이 벌어지든 말든... 농부들 입장에선 관심 밖으로 점점 멀어졌고, 오히려 바로 눈앞에 놓인 꿀단지에 현혹되고 말았다.

“어때? 자네가 쓰는 것보다 훨씬 좋지?”

“...”

관원은 흡사 장사치마냥 손에 든 쟁기를 휙휙 휘두르며 자랑했고, 농부는 자신의 손에 들린 쟁기를 번갈아 보다가 다시금 감탄해 고개를 끄덕여댔다.

괜히 자기만 추태를 부리는가 싶어서, 슬쩍 고개를 돌려 다른 이들을 살피자... 하나같이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날붙이도 아니고 고작해야 쟁기가, 이렇게 튼튼하고 정련된 강철로 만들어진 건 처음 봤으니까.

쟁기만 그럴까. 흡사 창고마냥 우르르 쌓여 있는 낫, 괭이, 갈퀴등. 모든 농기구가 조선의 것이 압도적으로 품질이 좋았고, 아예 처음 보는 농기구도 꽤 많았다.

“마음은 정한 것 같고... 돈은 있나? 홍무통보겠지?”

“예. 나리. 여기...”

관원의 상술 아닌 상술에 홀라당 넘어간 농부는 냉큼 속을 뒤져 동전을 꺼냈고.

“쯧쯧. 역시 영 별로군.”

“...”

관원은 쓱쓱 손가락으로 비벼가며, 살피고는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조선주화가 발행된 지 몇 년 지나지 않았지만, 이젠 언제 없었냐고 할 만큼 일상으로 파고들었다.

예술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조선동화를 보다가, 원형임에도 울퉁불퉁한 홍무통보를 보자... 관원은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차고 말았다.

홍무제가 만든 동전인 홍무통보는 명이 망한 이후에도 여전히 통용되고 있었다. 요동에서도 마찬가지.

문제는 요동은 동전조제소라 할 수 있는 보천국 자체가 없었고, 요동의 기술과 체급으론 홍무통보를 만들 수도 없지 않나.

헌데 시간이 흐를수록 해서 망실되는 홍무통보가 늘어나자, 급기야 중국본토에서 은원보를 홍무통보로 교환해서 가져올 정도였다.

이것도 갈수록 힘들어지자... 그냥 은원보를 자른 은편을 사용하거나, 예전 조선처럼 물물교환도 심심치 않게 벌어졌지.

실제로도 지금 이 농부는 운 좋게 홍무통보를 가져왔지만, 다른 농부는 은편을 가져와 바꿔 갔었다.

“아무튼 이 정도면 되겠네.”

관원은 상념을 날리곤,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는데... 너무 쉽게 넘어가자, 오히려 농부가 지례 겁 먹고 되묻고 말았다.

“저... 정말 그 정도면 됩니까?”

“그럼 뭐. 우리가 자네에게 사기라도 칠까? 아국을 저 파렴치한 요동관원들이라고 생각하지 말게.”

“예예. 나리.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관원은 헛소리 하지 말라는 듯 눈을 흘겼고, 농부는 혹시나 무를까 싶어서 넙죽넙죽 고개를 숙여댔다.

쟁기를 바꿔서 가는 농부 등판에, 길게 줄을 서 있던 다른 농부들의 시선이 화살처럼 꽂혔다.

벌써 며칠 동안 이 광경이 되풀이 되고 있었지만, 봐도 봐도 신기했으니까.

농기구를 바꿔가는 임시천막의 한참 옆에서도, 비슷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니다. 이쪽은 더욱 본격적이라고 해야 할 거다. 아예 임시 장터마냥, 좌판이 줄줄이 깔리면서 시장이 열렸으니까.

심지어 관원과 조선상인이 반반 섞여서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요동의 일반 백성들이 큰돈을 주고 구입했어야할 조선산 물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돈이 없어도 그냥 구경만 해도 신나는 지, 아낙내의 손을 잡고 나온 아이들까지 시장거리를 조심스럽게 누비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의외로 인기를 끄는 상품은 절인생선들.

요동 백성들도 민물고기를 먹었는데, 심양 인근에서 바다생선을 먹는 건 힘들지 않았나. 다들 소문으로만 듣던 조선의 절인생선을 보며, 한 두름씩 사가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임시 시장에서 살짝 떨어진 곳에서도, 요동 백성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다만 이곳은 사람이 몰려 있는데도 쥐 죽은 듯이 조용했는데, 까닭은 별거 아니었다.

요동 백성들도 멀리서 몇 번 봤던 조선군병들이, 딱 봐도 무시무시한 검은두정갑을 자랑하며 근처를 서성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으로 만든 검은 숲 사이로 길게 줄이 서 있었는데, 안쪽에선 사락사락 붓이 노는 소리만 조용히 울리고 있었다.

“다 된 겁니까? 나리?”

“그렇네.”

쿵. 인적사항을 모두 정리한 후 직인을 찍자, 요동 농부는 자기도 모르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별거 아닌 것 같아보이지만... 저 직인이 자신의 목숨을 살려줄 증명이라는 걸, 눈치로 알아차렸으니까.

“자. 받게.”

“...”

농부는 관원이 내미는 종이를 넘겨받아 조심스럽게 살펴 내려갔다. 모르는 글자도 있지만 얼추 알아볼 수 있었는데, 대충 이름과 가족. 사는 곳이 적혀 있었다.

“가지고 옆방으로 가서 기다리게.”

“예이.”

휙휙 손을 내젓는 관원에게 허리 굽혀 인사하고선, 농부는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임시로 만든 옆 막사로 향했다.

“쿨럭.” “큼큼.”

나무먼지가 잔뜩 피어오른 터라 자기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고, 가족은 괜히 몸을 움츠리고선 애써 손으로 입을 막았다.

슬그머니 다가가자 막사를 지키고 있던 연대병이 손짓했고, 얌전히 연대병의 인도에 따라 구석진 곳 한쪽에 자리잡았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 자기 차례가 다가왔고, 다시금 손짓하는 관원의 앞에 서자.

“가족은 여섯이 전부인가?”

“예. 나리.”

관원은 피곤을 애써 밀어내려는 듯 고개를 까닥이고선, 옆에 앉아서 열심히 나무를 깎고 있던 장인에게 서류를 넘겼다.

휙휙. 싹싹. 마술처럼 순식간에 음각으로 새겨지는 호패를, 농부 가족들은 넋을 잃고 바라봤다.

장인 옆에는 작게 조각난 나무조각이 산처럼 쌓여 있었는데, 그게 전부 장인의 빠른 손아귀에 들어가자 호패로 변신하고 있었다.

그렇게 조각을 마치고 옆으로 넘기자, 다른 장인이 얇게 꼰 가죽끈으로 목걸이를 만들어줬다.

“한사람씩 나눠 받게.”

“예예.”

농부는 얼른 가족들을 불러 하나씩 챙겼고, “히히.” “헤에...” 멋모르는 꼬마들은 이게 무슨 장신구라도 되는 것 마냥 쾌활하게 웃어댔다.

“저... 나리?”

“...?”

“이걸 가져가면 정말로 쌀을 주시는 겁니까?”

“맞네. 때에 맞춰서 꼬박꼬박 줄 걸세. 기일을 놓치면 못 받는 걸 명심하고.”

“오...”

“와!”

이미 소문을 듣고, 또 직접 받는 걸 눈으로 봤으면서도... 좀처럼 쉽게 믿기지가 않아 가족들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심양 인근에서 쌀을 먹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 농부 가족 또한 잔칫날에만 먹을 수 있는 게 쌀 아니었나.

그걸 공짜로 준다는 말에 눈이 뒤집힐 수밖에.

“혹시 군호에 속해 있었나?”

“아. 아닙니다! 나리.”

농부는 혹여나 못 받을까 싶어서, 정신없이 손사래를 치며 부인했다.

“혹여 집에나 마을 주민 중에서 무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빨리 가져오라고 하게. 나중에 경을 치지 말고.”

“예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농부는 옆에서 시립하고 있는 연대병을 힐끔 살피며, 연신 허리를 굽혀댔다.

조선군이 이 마을을 점령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무기를 수거하는 일 아니었나. 식칼과 도끼, 망치쯤은 생활용품이니 남겨뒀지만, 갑옷, 창칼이나 활은 전부 수거해서 가져간 상태였다.

반항은 당연히 꿈도 못 꿨다. 마을 주민보다 많은 수의 기병이 나타났는데, 뭔 수로 거부할 수 있을까. 유혈충돌조차 벌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놀란 가슴을 다독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조선군이 공격해 온다는 뜬소문이 제대로 돌기도 전에, 이미 조선군이 도착해 버렸으니 말이다.

“오늘은... 지금가면 받을 수 있을 거네. 가보게.”

“예. 나리.”

“다음!”

농부 가족은 나가라고 손짓하는 관원을 뒤로하고 얼른 막사를 빠져나왔고, 곧장 연대병이 가리키는 곳으로 종종걸음을 옮겨갔다.

그리곤 진짜로 쌀섬을 받고 나오는 친우와 마주쳤다.

“왕형.”

“호형도 왔나?”

농부는 누가 볼까 싶어서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고, 힐끔 친우가 등에 메고 있는 쌀섬을 가리켰다.

“진짜로 주는 모양이구려?”

“맞네. 섬이 작긴 한데... 이 정도면 그래도 한동안 충분히 먹을 수 있지 않겠나?”

“음...”

농부는 친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쌀섬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요동에서 쓰는 섬에 비해 크기가 퍽 작았는데, ‘이게 조선에서 쓰는 섬인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다.

“게다가 이거 보게. 이렇게 촘촘한 섬을 봤나?”

“신기하군. 그래.”

“듣자하니 이 섬을 만드는 틀이 따로 있다고 하더군. 조선 물건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게 참으로 많으이.”

“맞네.”

농부는 감히 반문하지 못하고 고개를 마구 끄덕여댔다.

사실 미래에 흔히 부르는 가마니는 일제 강점기에 들어온 물건으로, 그 전까지 조선의 가마니는 섬이라 부르는 물건이었다.

둘 다 짚으로 만드는 건 같았는데, 이 시대의 섬은 틈새가 성기어 낱알이 작은 곡식을 담기 힘들었지. 이건 요동이나 중국도 마찬가지였지만... 지금 조선에선 사정이 달랐다.

천일염전이 늘어나 막대한 양의 소금이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소금을 운반하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형태의 가마니가 필요해졌으니까.

더불어 개혁 이후에 도량형의 통일이 시작되자. 기존에 쓰던 무식하게 크던 섬과는 다른, 다양한 규격의 가마니가 만들어진 거지.

그랬기에 생전 처음 보는 가마니를 보며, 요동 농부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안에서 별 일 없었나?”

“별 일이 있을 리가 있나. 그냥 가족들이 다 왔는지 확인하는 게 끝이었네.”

“해코지를 하진 않고?”

“해코지를 하려면 진작했겠지. 안 그런가?”

“그건 그렇지...”

피식 웃는 친우를 보며, 농부는 작게 말을 흐렸다.

맞는 말이다. 조선군이 마을에 눌러 앉은 지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 일이 터졌으면 진작 터졌을 테니까.

“그럼 진짜로 쌀을 준건가?”

“이 사람이 속고만 살았나. 보게.”

친우는 계속 물음을 던지는 농부를 보며, 쌀섬을 열어서 내용물을 확인해줬다. 말끔하게 도정되어 눈처럼 하얀 쌀알이, 친우의 손가락에서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자네도 얼른 가서 받게.”

“그래야...”

이제야 불신을 거둔 농부가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두두두. 저편에서 요리조리 말을 몰아가며 먼지구름을 피워내는 일단의 기병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검은 물결이 파향을 그리며 나아갈 때 마다, 마을에 군데군데 서 있던 연대병들이 “와아아!” 함성을 질러댔다.

“음...”

“...”

환호하는 조선군과 반대로, 마을 주민들의 반응은 씁쓸했다.

두 사람은 물론이고, 근처에 있던 모든 마을 주민들의 눈이 스쳐지나가는 기병대에게 쏠렸는데... 하늘 높이 꼬나 든 깃발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이 걸리고 말았으니까.

이젠 눈에 익어버린 조선군의 검은 깃발 말고, 다른 글자가 쓰인 깃발이 조선기병의 손에 들려 흔들리고 있었다.

“북쪽의 성보가 또 항복했나 보군.”

“심양이 포위됐는데 별 수 있겠나.”

둘은 자기도 모르게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심양도 한성처럼 성저십리 비슷한 경작지가 감싸고 있었고, 이 마을은 심양을 둘러싸고 있는 마을 중에서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더불어 심양으로 향하는 길목과도 같은 곳이었는데... 요 며칠 사이에 마을 주민들은, 항복을 알리는 조선군 연락기병을 몇 번이나 보고 말았다.

처음에는 혹시나 싶어서 눈치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쉴 틈 없이 계속해서 항복소식이 전해지자... 이제는 무감각해지고 말았다.

전쟁이 시작된 지, 뭐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됐고, 자기 백성마냥 요동백성들을 챙겨주는 조선군의 구휼 또한 좋으면서도 당황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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