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8. 챕터58. 함락하다 (3)
“심양은 어찌될까...”
“그 놈들이야 뻔하지 않나. 퉤.”
농부가 포위된 심양을 상상하며 중얼거리자, 친우는 거칠게 침을 뱉으며 성질을 냈다.
심양군부의 호족들 혹은 군관들에게 뜯긴 게 어디 한두번인가. 지금 눈앞에 있는 조선군을 방비한답시고, 당장 올해도 죽기 직전까지 내몰렸다.
헌데 그렇게 닥치는 대로 뜯어가 놓고, 정작 결과는 어떤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지리멸렬하게 패배해서,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심양이 포위됐다.
“안 그런가?”
“그야 그렇지만...”
“반대로 조선은 이렇게 쌀을 주는 데 말이야.”
“끄응...”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쌀이 귀한 곡식인 것도 맞지만, 그보단 제대로 씨도 못 심고 추수도 못해서 올해 겨울을 나는 게 위태로웠으니... 요동 백성들이 괜히 조선군이 내주는 쌀을 기꺼워하는 게 아니었다.
“자네도 얼른 가서 받게.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
“그래야겠네. 들어가 보게.”
“자네도.”
농부와 친우는 두려움과 반가움이 뒤섞인 눈빛을 날리고선, 등을 보이며 발길을 옮겼다.
먼지구름을 풍기며 스쳐지나간 연락병은 계속 심양을 향해 나아갔고, 심양에 도착하기 무섭게 인파의 무리에 휩쓸려 사라졌다.
그리고 그 인파의 시작점에선, 낯설면서도 익숙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핫! 핫!”
“천천히! 천천히!”
“그렇게 뭉치지 말고! 간격을 맞춰서 뛰어!”
일단의 병사들이 꼬리물기를 하며 달리고 있었는데, 한참을 달리다가 갑자기 멈춰서 창을 내지르고, 또 달려가다가 멈추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옆에 있는 병사들은 어눌한 발음으로 조선군가를 열창하고 있었는데, 그들 또한 살짝 쌀쌀해진 바람을 밀어내며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쉬어!”
그렇게 열심히 빙빙 돌며 뜀박질을 하던 병사들은 교관의 구령에 맞춰 발을 멈췄고, 이내 머리를 짓누르는 투구를 벗고 다들 맨땅에 대충 널브러졌다.
“후...”
“하... 힘들군.”
“이게 끝이 아니지? 조금 있다가 기마훈련도 한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그럴 거야.”
병사들은 누가 들을까 싶어 소곤소곤 귓속말을 했고,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인물 또한 엉거주춤 땅에 엉덩이를 비비며 동료에게 다가갔다.
“한유.”
“백경.”
요서의 변경요새 지휘관이었으나 항복한 천호장 한유.
그는 자신과 똑같은 처지에 몰려 있었던 천호장인 백경을 보며, 옆에 앉으라는 듯 땅을 탁탁 때렸다.
“봐도봐도 놀랍군.”
“뭐가 말인가?”
“저거.”
한유는 저기 지평선을 가르며 우뚝 선 심양성벽을 가리켰고, 그 성벽 앞으로 듬성듬성 구축되어 있는 조선군진지. 그리고 그 진지 사이를 돌아다니는 기병대를 가리켰다.
한유와 백경이 지켜보고 있는 걸 알기라도 한 걸까? 쾅쾅쾅! 진지에서 살짝 떨어진 공성진지에서 화포의 폭음과 함께, 회색빛 연기가 포진지를 감싸며 하늘로 치솟는 게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상상하고 봤던 건, 새발의 피 정도 밖에 안됐던 모양이야.”
“흠...”
천호장 백경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삼갔다.
그도 한유와 똑같이 조선군에게 기습을 당하고 항복하지 않았나. 그 때 봤던 조선군의 모습이 아직도 꿈에 나올 정도로 생생한데...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조선군을 보니 절로 기가 질렸다.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이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러했다.
심양을 포위하고 있는 조선군은 육군만 2만명이 넘어갔고, 보조군과 해군까지 합치면 3만명을 넘어 4만명에 가까웠으니까.
게다가 조선군은 분명 요동군과 비슷해 보였는데, 파고 들면 들수록 모든 게 낯설었다.
‘당장 저기만 봐도 그렇지.’
지금 자신들이 훈련받고 있는 벌판 옆에 펼쳐진 주둔지만 봐도 그랬다.
중국은 고대로부터 보병위주의 전투와 진법을 연구하면서, 당연히 주둔지를 건설하는 방법을 발달시켜왔었다. 유목민족의 특성이 살아 있는 원나라를 거치면서, 또 한번 상승을 이뤘지.
그러니 중국과 크게 다를 게 없어야 하는데... 조선군 진지는 훨씬 체계적이고 명확했고, 뭐랄까. 쓸데없는 겉치레가 없었다.
살펴보면 하나하나 다 귀찮은 일인 건 맞는데, 모두다 쓸모가 있었던 것이었지.
“모든 게 다 비슷하면서도 낯설군. 하다못해 공용화장실조차 그렇지 않나. 조선에선 화장실이 일상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주둔지에서도 이렇게 철저하게 관리할 줄은 몰랐네.”
“음.”
본래 이쪽에 관심이 깊은 백경인터라, 조선군의 철저한 주둔지 관리가 먼저 눈에 띄었나 보다. 허나 생각해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천호장이라는 자들조차, 적응을 못한다고 눈총을 받았으니까.’
한유는 고작 며칠 사이에, 천지가 뒤바뀐 경험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당장 식사할 때 손을 안 씻었다고 욕을 먹고, 화장실을 제대로 사용 안했다고 욕을 먹고, 목욕탕을 함부로 사용한다고 욕을 먹지 않았나.
신병들이나 할 법한 실수를 지휘관들이 연발했으니, 조선군이 자신들을 어떻게 봤을 지는... 굳이 보지 않아도 훤했다.
콰콰콰쾅! 또 다시 터지는 폭음을 뒤로 하고, 이번엔 한유가 말을 이어갔다.
“그것도 그렇지만. 난 주둔지의 막사가 지휘관이나 병사나 다를 게 없다는 점과 귀찮은 규율과 규범을 모두 지키는 것이 놀랍더군. 우리가 부리던 병사들하고는 차원이 달라.”
“...”
백경도 본 게 있는 터라,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나라 군대든, 장군은 장군이고 지휘관은 지휘관이다.
그리고 권위와 기강을 위해서라도 티를 내기 마련이고, 이게 심해져 주객전도가 되면... 지휘관이 월권을 행사하거나 과하게 치장하기 마련이지.
허나 조선군은 그런 게 없어보였다.
규율과 규범을 따르는 것도 그렇다. 주둔지를 만들 때. 참호를 파고, 배수로를 파고, 목책을 만들고, 장애물 등을 만드는 것.
이건 요동군에도 똑같이 있는 규율과 규범 아닌가.
다만 이걸 완벽히 곧이곧대로 시키는 지휘관도 없고 따르는 병사도 없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박혀 있으니, ‘쓸데없이 귀찮은 일을 왜 하냐?’라는 속내가 밖으로 표출되는 거지.
“그러니 이 완벽한 주둔지 하나만 봐도, 확신할 수 있지 않겠나?”
“...”
“조선군 지휘관들은 허례허식이나 허풍도 없이 오롯이 효율과 실리만을 따라서 움직일 거고, 병사들은 명이 떨어지면 뒤도 보지 않고 군말 없이 따를 거라는 걸 말이야.”
“음...”
이 둘이 합쳐진 결과가 바로 지금의 모습으로, 한유의 눈에 보이는 조선군은 흡사 전쟁기계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없나보군?”
이야기를 모두 들은 백경은 은근한 눈으로 한유에게 물었고.
“자신이 없다기보다는... 아직도 스스로에게 확신을 못하겠군.”
한유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 이렇게 조선군의 특별하면서도 유별난 훈련을 받고 있는 와중에도, 과연 자신이 잘한 선택을 한 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항복한 변경요새와 도시, 천호소등의 지휘관, 참모, 기병들은 타의 반, 자의 반으로 전부 이곳으로 끌려 왔다.
군호제를 택하고 있는 요동의 일반 병사들은 백성과 다를 게 없으니, 그대로 해산시켜도 되지만... 이들은 과거 조선으로 치면 무관, 갑사에 해당하는 이들이다.
이미 물이 엎질러진 판국에 조선에 대항하진 않겠지만, 혹시 또 모르는 일. 하여 반항이나 저항의 구심점이 되고, 군을 이끌 수 있는 머리를 치워버린 거지.
자의 반이라는 건... 항복한 이들은 요동군부의 차별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어찌됐건 출세와 성공을 위해 노력해왔었다.
조선이 요동을 집어삼키기 일보직전인데, 그런 이들이 과연 뭘 해야 할까. 어떻게든 조선군에게 잘 보이고 스며들어야, 동아줄을 잡고 위로 올라갈 수 있지 않겠나.
‘심양과 요양의 공성전에 투입된다면 고민이 됐겠지만... 그것도 아니지 않나.’
한유는 슬쩍 백경을 살피고선,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연줄도 배경이 없다고 해도, 일반 평민이 요동군부에서 지휘관이 되는 건 불가능했다.
그 말인 즉. 다들 떵떵거리는 호족은 아니어도 최소한 과거 조선의 양반가문 쯤은 된다는 뜻이고, 요동의 핵심지역이라 할 수 있는 심양과 요양에 집안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니 요양과 심양 공성전에 자신들이 손을 거들면, 집안이 애꿎게 해코지를 당할지도 모르는 일.
뭐... 충성을 시험하기 위해서 그렇게 성벽에 밀어 넣을 수도 있지만, 요동을 온전히 삼키려는 조선군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고... 오히려 다른 제안을 꺼냈다.
“북평부... 정말 조선이 북평부를 칠 수 있을까?”
“...?”
상념의 끈을 타고 혼잣말을 내뱉는 한유를 보며, 백경은 의아한 눈빛을 흘렸다.
“자네나 나나 북평부를 친다는 말에 혹해서, 이렇게 조선군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고 있지 않나.”
“음... 그저 허세나 모략이 아니라, 진짜라고 보나 보군?”
“난 칠거라고 봐. 그게 아니고서야 지금까지 산해관을 공격했을 이유가 없겠지. 더불어 이미 심양과 요양을 포위공성하고 있는데, 누굴 속이려고 그런 수를 쓰겠나?”
“그럼... 이렇게 공성하고 있는 중인데도, 조선군은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겠군?”
“그래서 자네나 나나... 어떻게든 조선군에 들어가려고, 이렇게 구르고 있는 거 아니겠나?”
백경은 자조하듯 피식 웃었고, 한유 또한 살짝 얼굴이 굳어지고 말았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요동이 사실은 조선 입장에선 한주먹거리도 안 된다는 현실에, ‘대체 뭘 위해서 이렇게 아득바득 버텼나?’라는 한탄이 밀려왔다.
동시에 그런 조선군이기에 “북평부를 칠 수 있다!”는 상상이, 현실이 될 거라는 확신도 함께 들었고... 그 기회를 잡고 올라갈 거라는 각오도 함께 섰다.
“급보입니다.”
“깃발은 여기 두고, 안으로 들어가라.”
“옙! 충성!”
빛나는 승전보를 가지고 달려온 연락병. 그는 부관에게 공손히 요동군 깃발을 넘기고선, 지휘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음... 얼추 다 된 건가?”
부관은 깃발을 쥐고 천천히 걸어가며 홀로 중얼거렸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빛나는 전공의 상징이 눈에 들어왔다.
몇 발짝 가기도 전에 흙을 쌓아 올려놓은 단이 있었는데, 흡사 자랑이라도 하듯 요동군 깃발이 우르르 박혀 있었다.
그리고 진짜로 자랑이 맞았다. 지금 여기에 박혀 있는 요동군 깃발은 조선군이 함락한 변경요새와 도시의 군기였으니까.
‘서쪽과 북쪽에서 온 깃발이 여기에 모였고, 남쪽에서 온 깃발은 요양에 모였겠지.’
이곳에 모인 깃발만 수가 무려 스무개가 넘어가니... 이젠 심양과 요양을 제외한 나머지 도시는 전부 조선군의 손아귀에 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황급히 지휘막사로 들어간 연락병은 그간의 전황을 풀며 장계를 내밀었고, 곧장 군사부 소속 행정군관이 받아 현황판을 수정했다.
연락병은 나가기 전에 잠시 먹물냄새가 풀풀 풍기는 작전실을 슬쩍 살펴봤다.
이렇게 최심장부를 직접 구경할 수 있는 경우가 어디 흔하겠나. 나중에 동료들에게 뒷이야기를 풀기 위해서라도 빠르게 눈을 굴렸다.
작전실은 막사 하나를 전부 차지하고 있었는데, 한쪽에는 탁자 위에서 열심히 연필과 붓을 놀리고 있는 군관들이, 다른 한쪽에선 주판과 함께 서류를 뒤적이는 군관들이 공존했다.
하나같이 서류가 산처럼 쌓여 있는 걸로 보아 군수부 소속으로 보였는데... 조선말이 아닌 한어로 작성된 서책과 장부가 있는 걸로 보아, 요동관아에서 긁어온 문서도 함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작전실을 한 바퀴 살피고 나선, 슬쩍 눈을 돌려 작전실 옆에 이어져 있는 막사를 힐끔 살폈다.
저기. 심양 전도가 놓인 큼지막한 간이탁자 앞에, 그 이름도 유명한 인물이 팔짱을 끼고 서있었기 때문.
‘오...’
과연 소문대로 머리 하나는 더 큰 거한이, 한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백호갑옷을 입고 거암처럼 박혀 있었다.
연락병은 동료들에게 해줄 말이 하나 더 생겼다는 생각에 히죽 웃고선, 다시 발걸음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대감. 영형 천호소가 항복했습니다.”
“피해는?”
“한차례 충돌 후에 잘 회유한 탓인지, 크게 번지진 않았습니다. 아군 사상자는 무, 적 사상자는 32명입니다.”
“나쁘지 않군.”
“예.”
연오랑이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행정군관 또한 히죽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 진짜 심양과 요양밖에 안 남았군.’
그는 앞에 놓인 지도를 보며, 다시금 생각을 가다듬었다.
지도에는 조선군을 상징하는 말과 요동군을 상징하는 말이 겹쳐 있었는데... 모르는 사람이 봐도, 조선군의 말이 크게 세 구역으로 나눠진 걸 확인할 수 있었을 거다.
조선군이 한날한시에 요동전역을 공격해 들어간 지, 보름이 흘렀는데... 계획한 대로 지체되지 않고 요동 분할 작전을 성공시켰다.
첫째는 사주에서 출발한 병력으로, 둘로 쪼개져 움직였다.
하나는 서쪽으로 향해 요서의 변경요새를 점령하며 남하했고, 광녕위 일대를 전부 장악한 후에 연산항에 다다랐다.
그러는 동안 해군은 연산항에 상륙했고, 육군과 합류해 광녕성을 포위했다.
광녕위를 접수한 후에, 육군은 요택을 피해 해안가로 질주하며 요동 서쪽을 분할했고 해군은 연산항을 보급기지로 만들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사주에서 그대로 남하.
개원을 함락시키기 무섭게 곧장 철령위를 점령하고 병력을 쪼갰다. 분견대가 심양 주위의 위성도시와 요새를 노리는 동시에, 본대는 곧장 심양을 향해 달려 포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