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0. 챕터58. 함락하다 (5)
허나 지금처럼 백보 안쪽으로 진입하면, 공성포와 야전화포를 박격포처럼 사용할 수가 있었다.
이 시대의 화포는 미래처럼 그렇게 거대하고 정교한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땅을 파서 경사를 만들어 쏘는 게 가능했다.
그냥 놓고 쏘는 것보단 정확도가 떨어지지만, 얼마든지 곡사로 쏠 수 있었던 거지.
“물론 곡사로 쏘면 제대로 된 효과를 내긴 힘들겠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성문은 보수하는 족족 부서지고, 포격이 성벽을 넘어 성내로 떨어지기 시작하면...”
“확실히 사기가 꺾이지 않겠어요? 그럼 우리가 왜 성문을 부수고, 성벽포대를 무력화 시켰는데도 달라붙지 않는지 확실히 깨닫게 될 거에요.”
“그럴 거다.”
연오랑은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는 걸 보며, 만족스런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다만 혹시 모를 걱정거리가 있다면...
“네 생각은 어떠냐? 심양에 투석기를 다룰 수 있는 병사가 있을 것 같냐?”
“글쎄요...”
명이 등장한 후로, 투석기의 시대가 저물고 화포의 시대로 빠르게 진입했다.
투석기에 비해 높은 정확도, 쉬운 활용법, 강한 파괴력 등. 화포가 공성병기에 대항한 수성병기로 시작한 만큼, 투석기의 역할을 빠르게 대체했으니까.
다만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말처럼, 화포가 없다면 투석기를 활용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특히나 곡사공격을 하는 투석기는 성벽을 넘어 날릴 수 있으니, 곡사포의 공격에 반격할 지도 모르겠다.
“힘들지 않을까요?”
허나 녀석은 기연가미연가하면서도, 부정의 답을 던졌다.
“명이 요동을 장악한 후로 심양과 요양에서 수성을 해본 적이 없잖아요? 명이 망한 후로는 더욱 그렇고요. 만약 그나마 있다고 치면, 광녕성에나 있겠죠.”
“하긴...”
명이 망했어도 요동은 큰 싸움, 특히나 공성전과 같은 싸움은 없었지 않나.
아무리 우랑카이 3위와 여진이 까불었어도 감히 요양과 심양을 직접 공격하는 일은 없었고, 조선이 북방으로 올라온 후로는 아예 자잘한 충돌조차 없어졌지.
당연히 요동군은 변경요새에 대한 빠른 지원을 위한 기병과 경기병이 주가 된 몽골,여진기병에 대항하기 위한 창보병에 중점을 뒀을 거다.
“투석기 기술자가 남아 있지 않을 거라는 거군?”
“그럴 가능성이 크죠.”
공성병기는 대충 나무 잘라서 못 박아 고정시킨다고 되는 물건이 아니다.
설계도를 가지고 장인이 만들어야 하는데... 상위호환인 화포가 존재하고, 공성전이나 수성전도 없는데 투석기에 대한 투자가 있었겠는가.
“게다가 투석기가 있어봐야 과거 명군이 사용하던 회회포일 테니, 아군의 포격에 대항하는 건 힘들 겠죠. 그게 얼마나 손이 많이 가고 사람이 많이 필요한지 아시잖아요? 서방의 투석기도 아국의 화포에 미치지 못하는데, 회회포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겠죠.”
“음...”
‘맞는 말이야.’
연오랑은 박강의 반문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녀석은 과거 서방사절단에 속해 로마국에 갔다왔고, 그곳에서 투석기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트리뷰셋을 보고 왔다. 회회포도 지렛대 원리를 활용한 투석기라지만, 그래도 이 시기 서방 트리뷰셋보단 못하지 않나.
‘애초에 회회포가 만들어진 시절에서, 백년 넘게 흘렀는데 당연하겠지.’
설령 투석기가 있다고 해도, 아국의 화포에 대항하는 건 불가능할 거 같다.
“그럼 성내 포격은 문제 없다는 거군?”
“예. 그리고 투석기로 쏴봐야 뭐 얼마나 피해를 입겠어요? 포탄을 막으려고 이렇게 포진지와 참호를 만들어놨으니, 투석기가 쏴대는 돌멩이 정도는 무리 없이 막을 거에요.”
“좋아. 그럼...”
연오랑이 말을 끊고 발걸음을 돌리려고 할 때.
두두두. 전령인 걸 알리는 깃발을 든 기병이 포진지로 다가와, 훌쩍 말에서 내려 연오랑에게 경례했다.
“충성!”
“오냐.”
“참모부의 전언입니다. 오늘도 이대로 보낼까 하는데, 첨삭하실 게 있으십니까?”
연오랑은 전령이 내민 문서를 빠르게 훑어 내려갔다.
이걸 격문이라고 해야할지, 투항독려서라고 해야할지... 명확히 말할 수 없지만, 항복을 꼬드기는 서신은 공성전을 할 때 흔히 날려 보내는 물건 아닌가.
이건 본대가 도착해서 심양을 포위한 후에 꾸준히 날린 터라, 전과 딱히 달라질 건 없었다.
다만 지금 조선군이 날리는 전단傳單은 확실히 특별한 점이 있었다.
이런저런 수사를 빼고 간략히 요약하면...
“지금 심양과 요양을 제외하고 전부 함락된 거 알지? 빨리 항복해라. 항복하면 목숨을 부지하는 건 물론, 재산까지 보존해 준다. 만약 중국본토로 이주를 원한다면, 재산을 가지고 가는 것까지 허락하겠다.” 라는 것이었지.
전례 없는 요상한 제안이라서 그럴까? 박강은 문서를 힐끔 보고선,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왜?”
“아니요. 그냥...”
“네가 생각해도 너무 후하게 대접하는 것 같아 보이냐?”
“조금 그런 것도 있고... 다른 곳은 몰수하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뭐...”
연오랑은 박강의 말에, 딱히 할 말이 없어서 말을 흐렸다.
지금껏 조선이 강역을 넓히고 타민족을 귀화시키면서 가장 중시했던 건, 본래 터 잡고 있던 호족이나 지방권력자를 썰어내어 구심점을 없애는 일이었다.
점령한 요동지역에서도 달라질 건 없었고, 오히려 더욱 철저히 털어내야 했다.
이곳은 엄연히 한족이 살고 있는 땅이고, 역사 깊은 호족까진 아니어도 호족과 지주가 유사 신분계층으로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
“얼마 안 됐지만, 쓸려나간 호족집안이 은근히 있잖아요? 상인집안도 그렇고... 불평등하다고 투정을 부리지 않을까 걱정되는데요.”
“별 수 있나. 아쉬우면 요동을 떠나야지. 조선인으로 살고 싶으면 아국의 정책을 따라야 하고.”
“그건 그렇죠.”
“그리고 벅차더라도, 요동 집안들이 우리의 칼을 무서워하는 지금. 후다닥 해치우는 게 나중을 생각하면 나아.”
“예.”
개혁세대에 가까운 박강은 바뀐 조선이 원래 조선보다 훨씬 익숙하지 않나. 반문 없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요동도 명나라의 체제와 한족문화권에 있었으니, 호족중심의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지주, 상인, 호족할 것 없이 중국본토와 크게 다를 게 없고, 다른 점이라면 요동의 체급 때문에 그나마 덩치가 작다는 점이었다.
그럼에도 조선의 옛 양반집안, 지금의 기업집안과는 비교할 수 없이 거대했기에, 조선 입장에선 아무리 항복했다고 해도 요동 지주와 호족들을 그대로 놔둘 순 없었다.
해서 기업법을 들이밀고 따르지 않는 이들은 사정없이 때려잡았고, 저항하는 이들이 있으면 창과 칼로서 본보기를 보였다.
요새와 도시가 유혈 충돌없이 항복한 곳이 부지기수지만, 그 안에서는 빼앗으려는 조선군과 저항하려는 지주, 호족 사병들 간의 충돌이 여럿 발생했던 거지.
헌데 지금 이 문서는 심양호족의 경우에 재산을 보존해 준다고 하지 않나.
차별로 느껴질 수 있는 거지.
“차이는 또 있다. 알지? 심양과 요양에 있는 이들은 굳이 따지면 중앙호족이고, 지금 때려잡고 있는 이들은 지방호족이라는 점이지.”
“동원할 수 있는 진짜 힘을 가진 이들과, 추상적인 권력을 가진 이들의 차이란 말이죠?”
“그렇지.”
연오랑은 곧장 알아듣는 박강을 보며, 히죽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라와 시대를 불문하고 중앙호족과 지방호족은 항상 대립해 왔다.
명문가, 권세가로 칭해지며 수도를 비롯한 중앙 터 잡고, 권력자와 가까이 있으면서 권력을 행사하는 중앙호족.
고향과 지방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오랫동안 한곳에 자리 잡은 지방호족.
중앙호족은 지방호족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조정이라는 권력을 활용해 끊임없이 압박했고, 지방호족은 중앙정계로 진출해 지방을 넘는 영향력을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이건 군부가 장악한 요동 또한 마찬가지였고, 심양파와 요양파는 지방호족과 지주에게 직위를 던져주며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안간힘을 써왔지.
“허면 우리 입장에서 누가 더 거슬리는 존재지?”
“아무래도... 지방호족이겠죠?”
“그렇지.”
조선군이 심양과 요동에서 파견한 지방 관원을 치우더라도, 지방호족의 영향력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고 이들은 단순히 오래되고 존경받는 걸 넘어서, 사병과 노비를 동원해 실질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자들 아닌가.
반대로 심양과 요양의 중앙호족의 경우에는 직위가 높고 권력은 높다지만, 지방호족에 비해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이 적고... 요양수비군과 심양수비군 또한 요양,심양 출신이 아니라 지방출신이 부지기수.
결국 명분이나 권력, 지위를 내려놓고 보면, 조선군에게는 지방호족이 실질적으로 더 위협적인 존재였다.
“아국의 옛 향리나 양반사대부집안과 같은 꼴이군요?”
“맞아. 그러니 우리 입장에선 뭘 중점적으로 처리해야겠냐?”
“그야... 앞으로 진행될 양전사업을 생각하면, 지방이 먼저겠죠?”
“그렇지.”
연오랑은 곧잘 따라오는 박강을 보며, 또 다시 만족스런 웃음을 흘렸다.
이건 지난날 개혁을 하면서 꾸준히 진행되어 온 대업.
요동을 빨리 안정화 시킨다는 명분도 있지만, 철저한 중앙집권을 이룩한다는 지금까지의 기조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요동의 지방호족은 다 찢어서 분해시켜야 했다.
그러니 이런 차별대우는 불만이 있더라도 진행될 수밖에 없고... 이런 당근을 던져줘야 심양의 군부와 호족이 빨리 항복할 것 아닌가.
“생각할 시간은 이미 충분히 주고도 남았으니... 이제 곧 결정을 내릴 거다. 이젠 발등에 불이 떨어졌으니까.”
조선군이 북상해서 간을 본 세월이 얼마인데, 심양군부가 아무 생각도 없었겠는가.
개원의 상인집안이 조선에 귀화하기로 결정내린 것처럼, 그들 또한 남에게 내보이진 않아도 속으로 전전긍긍하며 온갖 가능성을 따져봤을 거다.
“그렇겠죠? 아무리 바보라도, 아국이 자신들에게 기회를 주고 있는 건 알아차렸을 테니까요.”
“음.”
연오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저기 개미새끼 한 마리 올라와 있지 않은 심양성벽을 굽어봤다.
조선군의 공성방법은 전례가 없던 방법이지만, 그럼에도 핵심을 관통하는 건 있다.
성문을 부수고 진입하고, 또 성벽을 기어올라 점령하는 것.
허나 후자도 결국 성문을 열기 위함이니, 수성전은 성문을 어떻게 사수하냐에 달려 있었다.
하지만 지금 보라.
조선군은 화포를 이용해서 성벽 위의 포대와 목재구조물을 다 때려 부셔서, 성벽 위에 병사를 배치하기 위해선 청소부터 먼저 해야 될 판이다.
성문은 또 어떤가.
공성포를 활용해 일찍이 부셔놨고, 심양군은 성문이 부서진 것에 놀라 화들짝 놀라 밤낮을 잊고 보수공사를 감행했는데... 다음날이면 또 공성포탄에 맞아 성문이 박살나길 반복했다.
결국 옛 전법에 따른다면 조선군은 언제든 심양성내로 진입할 준비가 끝난 상태인데도, 성내로 공격해 오지 않고 있었다.
조선이 자랑하는 그 많은 기병대를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결국 바보가 아니고서야, 조선군이 항복할 기회를 주고 있는 걸 모를 리가 없다.
“다 알면서도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건... 우리가 더 후한 조건을 제안하길 기다리던가, 아니면 겨울이 찾아오길 기다리는 거겠지.”
“겨울이 오면 우리가 포위를 풀 거라고 착각할까요?”
“믿을 건 그것밖에 없으니, 어떻게든 희망찬 상상을 하는 거 아니겠냐? 하지만 이제 곧 그런 희망도 사라지겠지.”
“예.”
박강은 연오랑이 말하지 않은 뒷말을 읽어내고,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간다. 고생해라.”
“예. 살펴 가십시오.”
연오랑은 다시 발길을 돌려, 최전선에서 빠져나와 휘적휘적 후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는 와중에도 전령의 명령서를 받은 기병은 재깍 몸을 움직였다.
부르르. 날개를 터는 벌떼마냥 우르르 일어선 기병대가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몸을 풀고, 이내 꼬리를 물며 전장 최전선을 향해 날쌘 매처럼 달려갔다.
궁병조차 세워놓지 못하고 군데군데 정찰병만 세워놓은 심양성벽에 부딪칠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서는, 쉐에엑! 말을 탄 상태에서 허리만 돌려 일제히 시위를 놓았다.
후두둑. 소대로 쪼개졌다고는 허나, 무려 연대 하나가 기동하지 않았나.
북문을 넘어 서문과 남문까지 기병대는 달려갔고, 서신을 허리에 매단 화살은 성벽을 넘어 마구잡이로 쏟아졌다.
기와에 부딪쳐 튕겨나가기도 하고, 애꿎은 기둥에 박히기도 하고, 맨땅에 부딪쳐 머리가 꺾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전부 심양성내로 떨어졌다.
그리고 저렇게 중구난방으로 마구 날렸으니, 심양의 지휘관들을 병사들을 부려 저걸 수거하는 것도 고생일 거다.
‘아니지. 벌써 5일째 저러고 있으니, 볼 만한 사람은 다 주워서 봤겠지.’
연오랑은 화살을 날리는 기병대를 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아마도 화살에 묶인 전단傳單을 발견한 백성은, 몰래몰래 이웃주민과 돌려가며 보지 않았을까?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또 동요하는 백성들을 어떻게 감당할지 궁금했다.
“대감!”
연오랑이 전선을 살피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걸까? 한바탕 말을 몰고 돌아다녔는지, 흙먼지가 살포시 내려앉은 판금갑옷을 자랑하며 일단의 기병이 달려왔다.
“여기 계셨습니까.”
“오냐. 주변을 돌고 온 모양이군?”
“예. 혹시나 싶어서 살펴봤는데, 역시나 적은 성문을 나올 낌새를 안보이더군요.”
기사대장 한선후. 지금은 사단장 급인 독립연대장으로 진급한 그가, 손에 들린 기창을 휙휙 흔들며 웃어댔다.
성이 포위되면 당연히 이 포위를 흔들고, 또 화포와 같은 공성병기를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성 밖으로 출진하는 건 당연한 전술이었다.
사위가 어두워 방비하기가 어려운 야습을 감행하거나, 아니면 빠른 기동력을 활용한 기병을 출격시키는 게 대표적인 방법이었지.
심양군도 당연히 그렇게 움직였는데, 전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좁은 전장에서 펼쳐지는 기병끼리의 단거리 접전에서, 기사대를 따라올 기병이 없고.
조선군은 요충지마다 요새에 가까운 주둔지를 듬성듬성 박아놔, 전장 전체를 얼추 방어하고 있지 않나. 더불어 아군이 심양군보다 병력이 훨씬 많고 말이다.
해서 나오는 족족 기사대와 특전대에 갈려버렸고, 지금은 아예 거북이처럼 등껍질에 숨어서 나올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