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1. 챕터58. 함락하다 (6)
“여러 곳에서 기사대가 큰 활약을 했다지?”
“예. 뭐...”
한선후는 연오랑의 공치사에 멋쩍어하며, 괜히 먼 산만 바라봤다.
틀린 말은 아닌데, 또 완전히 맞는 말도 아니었으니까. 결국 양심을 이기지 못하고 한마디 거들고 말았다.
“기사대가 아니어도 비슷한 성과를 냈을 겁니다.”
“그야 뭐... 그래도 성과가 없는 건 아니지.”
“감사합니다. 대감.”
“판금갑옷에 대한 평은?”
“음...”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한선후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을 가다듬었다.
판금갑옷을 전쟁에 활용한 건 처음이니 당연히 이런저런 보고서가 올라왔고, 소대, 중대 단위의 개별부대의 평은 제각각이었으니까.
“전반적인 평은 기존의 갑옷과 비교해서 효과가 없는 건 아니지만, 압도적으로 우월한 성능을 발휘했다고 보긴 어렵다는 평이 많습니다.”
“예상대로군.”
“예.”
이건 전부터 판금갑옷으로 훈련을 하면서 나왔던 이야기인데, 실전에서도 비슷한 반응이 나오는 모양이다.
“그래도 방어력 측면에서는 효과가 있을 텐데?”
“그건 그렇습니다만 아무래도 기병돌파가 주가 되었지 않습니까? 비슷한 수준의 무장을 한 적과 상대해봐야 확실히 증명될 것 같은데, 요동군 보병들을 상대로 한 결과만 봐서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음.”
한마디로 흡사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썼다는 말이었다.
판금갑옷을 입은 기사대나, 두정갑을 입은 연대기병이나, 요동군 보병을 상대로는 압살할 수 있으니까.
“다만 시각적 공포는 확실하더군요. 저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것 같습니다.”
“흐음... 그 정도란 말이지?”
“예.”
연오랑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한선후는 재깍 뒤로 눈빛을 보냈고, 따라온 행정군관 중 한명이 보고서를 내밀었다.
보고서는 기사대 소대장들이 직접 올린 평가를 취합해서 요약해 놨는데,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부분이 있었다.
단점으로는 두정갑에 비해 입고 벗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불편하다는 점. 장점으로는 시각적 공포감을 확실히 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완전 무장한 강철 인간에 얼마나 놀랐는지, 기세 좋게 싸우러 와서는 꽁무니를 빼고 등을 보이며 도망친 요동군병들에 대한 이야기가 줄줄이 적혀 있었다.
“허면... 북평군도 같은 반응을 보이겠군?”
“편제가 같으니 그렇지 않겠습니까?”
연오랑의 은근한 물음에, 한선후는 히죽 미소를 지으며 자신감을 표현했다.
그나마 몽골, 여진과 붙어 살면서 기병이 많고 기병에 익숙한 요동군도 혼비백산했는데, 그보다 기병을 접하기 힘든 북평군은 더 증폭된 효과가 나오지 않겠나.
그의 자신감이 마냥 터무니없는 건 아니었다.
연오랑과 한선후 일행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계속 걸음을 옮겨갔다.
최전선 후방에서 전장을 가로지르며 북문으로 서문으로 쪽으로 향했는데... 금군과 함께 장군기를 휘날리며 가서 그럴까?
연오랑이 행차한 걸 알아차리고, 일단의 깃발과 함께 속속 지휘관들이 그의 곁으로 하나둘씩 모여 들었다.
북문과 서문에서 살짝 떨어진 곳에 주둔지를 세워 포위하고, 또 시시때때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심양군을 압박하고 있던 연대의 지휘관들이다.
“대감!”
“나오셨습니까!”
“오냐.”
한걸음에 달려와 두서없이 경례를 건넸고, 연오랑은 쓱 훑으며 자기도 모르게 히죽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야. 다들 제대로 컸단 말이지.’
그는 속마음을 숨기며 한명씩 찍어가며 얼굴을 살폈다.
삼군을 이끌고 심양을 먼저 포위하고, 본대를 기다렸던 사단장 조비형.
사주에서 출발한 일군을 이끌고 요서 변경요새를 점령하고 온 사단장 이순몽, 유은지. 마찬가지로 일군을 이끌고 개원을 함락시키고 조비형과 합류한 사단장 하경복.
초창기 착호군 시절부터 함께 했던 인물들이, 태종과 세종의 바람대로 무럭무럭 쑥쑥 커서 조선군의 핵심 장군이 되어 있었다.
‘저 녀석들도 그렇고 말이야.’
말에서 내려 사단장들 뒤에 조용히 시립하고 있는 연대장들에게, 연오랑의 시선이 닿았다.
사단장들보다 한 배분 나이가 어린 친구들로, 이젠 나름 경력을 쌓아 연대장이 된 이들.
착호군에 들어와 일찍이 정신을 차리고, 군문에 들어와 차근차근 위로 올라온 연대장 이징석. 이징옥 형제.
원래 역사에서 파저강 전투에서 활약했고, 지금 역사에서도 낭중지추의 능력을 뽐내며 연대장이 된 홍사석, 이진, 김한생.
이젠 세상을 떠난 먼터무의 아들로, 지금까지 꾸준히 북방에서 활약한 이고.
북평부 출신으로 오래전 조선에 귀부해, 한족 귀화인들에게 모범이자 지침서가 되고 있는 진강까지.
원래 역사 속 위인과 있는 줄도 몰랐던 인물들이 뒤섞여, 이렇게 요동정벌의 마지막 순간을 남겨두고 있으니... 연오랑으로선 뭐라 말할 수 없는 감회가 밀려왔다.
허나 속마음과 달리, 연오랑은 슬쩍 눈을 흘기며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뭐 구경할 게 있다고, 이렇게 다 몰려왔어?”
“에이. 대감께서 먹물냄새만 진탕 맡는 터라, 얼굴을 보기가 힘들지 않았습니까.”
“그렇지요. 행정군관들이 어련히 알아서 잘 할 텐데...”
“쯧쯧.”
연오랑과 오래 구르면서 그의 성격에 익숙한 이순몽과 유은지가, 만담을 이어가며 능청맞게 굴었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고 계셨습니까?”
“그냥 이런저런...”
연오랑은 한선후를 가볍게 때리며 말을 흐렸고, 한선후가 대신 혀를 놀렸다. 다들 아는 내용인터라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고, 이번엔 연오랑이 입을 열었다.
“해서 말인데.”
“...?”
“병사들의 반응은 어떠냐? 심양이 항복하는 걸 기다리는 것에 대해서 말이야.”
“뭐... 다들 대충 대계는 알고 있어서 그러려니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굳이 병력을 소모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반대로 보급을 걱정할 거면, 차라리 빨리 쳐서 함락시키는 게 낫지 않냐는 말도 있는데... 소수입니다.”
“대감과 지휘부의 뜻을 따르겠다는 쪽에 훨씬 많죠.”
“내 뜻은 무슨...”
마지막으로 아부 아닌 아부를 하는 이순몽을 보며, 연오랑은 피식 웃고 말았다.
“흐음... 군기가 흐트러지진 않는 모양이네.”
“그렇습니다!”
“승리가 눈앞에 있는데, 누가 방심을 하겠습니까.”
“맞습니다.”
그가 조용히 중얼거리자, 모두가 목청을 높여댔다.
하지만 만족하지 못한 걸까? 워낙 높은 사람들이 많은 탓에... 있는 듯 없는 듯 쥐 죽은 듯이 행정군관에게, 까닥까닥 연오랑이 손을 흔들었다.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행정군관은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와서, 보고서 뭉치를 내밀었다.
군수부 소속이니 당연히 보급에 관한 내용이었지.
“다들 알고 있겠지만, 우린 쌈짓돈까지 꺼내서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동원했다.”
“예.”
“...”
“그러니 이번 원정은 4개월 이상 끌 수 없어.”
그가 입을 열자, 다들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개혁 후 눈부신 성장을 하며, 원래 역사의 조선을 몇 배나 뛰어넘었다지만... 기존의 체급을 아득히 뛰어넘을 순 없다.
게다가 요동정벌은 단순히 전쟁을 하는 게 아니라, 정복과 통치를 해야 하지 않나. 조선군이 소모하는 군비와 보급 말고도, 요동백성들에 대한 지원이 추가 됐지.
이걸 모두 계산한 결과. 지난 몇 년간 재원과 군량, 보급품들을 축적해 놨어도... 4개월이 조선의 성장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원정을 치를 수 있는 최대기간이었다.
이 이상 진행되게 되면 원정을 못하진 않겠지만... 필연적으로 조선내부에 투자해야 될 재원을 군비로 써먹게 된다.
나아가 7개월 이상 끌게 되면 성장세가 꺾이는 건 물론, 조선 백성들을 슬슬 쥐어짜서 세금을 더 거둬야 할 상황이 예측됐지.
지금까지의 전쟁과 달리, 이번 전쟁을 오롯이 조선의 힘으로만 해결해야 했으니까.
“허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어차피 요동을 점령하는 건 여반장이니, 보급문제를 걱정했다면 차라리 적은 병력을 동원하는 게 나을 거라고 말이야.”
“...”
“하지만 그것도 문제가 있지.”
줏대 없이 왔다갔다하는 연오랑의 발언이지만, 이미 익히 논의했던 이야기였기에 다들 고개를 끄덕여댔다.
그럼에도 연오랑이 굳이 이렇게 말을 하는 건... 병사들의 의구심에 물들어 혹시나 흔들릴지 모르는, 이들 지휘관들의 마음을 단단히 다지기 위해서였으니까.
“왜 인지 아나?”
“전쟁이 길어지면 통치가 힘들어지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맞아.”
연오랑은 조비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병력을 적게 동원하면 보급문제는 덜 수 있을 거다. 대신 지금처럼 전방위적인 공격을 못하고 산발적인 전투를 이어가게 된다.
승리야 당연히 하겠지만, 전쟁 자체가 길어지면 소모되는 군비가 늘어나는 건 당연하지.
“더 큰 문제는 요동의 민심이 흔들릴 수도 있다는 거다.”
감히 저항도 하지 못할 압도적인 전력으로 한 번에 휙 쓸어버려야... 요동백성들이 “어? 어?” 이렇게 눈만 멀뚱멀뚱 굴리면서,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보기하게 당황하는 동안 천지를 바꿔놓을 수 있다.
하지만 싸움이 길어지면 당연히 피를 많이 보게 되고, 조선군에 대한 적개심과 악감정만 늘어나게 될 거다.
이유야 어찌됐건 자기 옆집 이웃이 조선군의 칼날에 죽게 되면, 없던 적개심도 생겨나기 마련이니까.
“그렇지 않나?”
“예.”
“맞습니다.”
“그랬기에 심양이 항복하길 기다리는 거다. 심양에는 수만가호의 백성이 살고 있고, 성내에서 싸움이 시작되면 결국 애꿎은 백성들이 상하게 될 테니까. 전쟁을 빨리 끝내려다가, 오히려 통치가 더 힘들 게 되는 거지.”
다들 이해를 했는지, 냉큼 고개를 끄덕여댔다.
“하지만 또 생각해야할 점이 있다. 지금 당장 심양을 함락시키는 것보단 며칠이라도 더 끄는 게 나아.”
“...?”
뭔가 모순되는 발언에, 하급 지휘관들이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심양과 요양이 함락되면 전쟁은 끝이다. 군정이 끝나고 민정으로 돌아가야 되고, 나아가 우린 또 다른 전쟁을 하러 떠나야 하지.”
“아... 지방호족을 걱정하시는 겁니까?”
뭔가를 깨달았는지 이징옥은 가볍게 박수를 치며 말을 토해냈고, 모든 이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그는 괜히 머쓱해서 얼른 고개를 숙였다.
“맞아. 정답이다.”
연오랑은 분위기를 풀려는 듯, 히죽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고작 며칠이라지만... 며칠이면 지금도 요동을 휩쓸고 있는 연대가 지방호족 수십가문을 박살내고도 남는 시간이다.
전쟁이라는 상황이 유지되어야 이런 압박과 협박, 이걸 거부하는 요동호족에 대한 징벌과 처단이 용납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심양파와 요양파가 다 죽어서 전쟁이 끝났는데, 조선군이 다시금 칼을 들고 지방호족들을 때려잡으면 불만이 튀어나올 가능성이 컸지.
“그렇다고 처단하지 못할 건 아니지만...”
“북평부 원정에 집중해야할 아군으로선 굳이 후방의 불안을 남겨두고 갈 필요가 없다는 거군요.”
“맞아. 그래서 이렇게 항복하길 기다리면서, 또 한편으론 전운을 깨트리지 않으려고 하는 거지. 뭔가 모순적이지만 뭐 어쩌겠냐.”
연오랑은 이징옥의 대답에 어깨를 으쓱거리며 피식거렸다.
“아직 준비가 덜 된 상황에서, 요동을 정벌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발생할 문제였지.”
“준비가 부족하다곤 하지만... 사실 대감께서 워낙 철두철미하게 고려해서 그런 측면도 있지 않습니까? 아군은 그렇게 약하지 않습니다. 대감.”
연오랑이 그리 말을 하자, 사단장들을 흠칫 놀라 표정을 굳히고선 얼른 말을 돌렸다.
이건 흡사 태종의 뜻이 잘못 됐다고 말하는 걸로 오해할 수 있지 않나.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연오랑을 음해할 사람이 없지만, 안 보이는 곳에서도 입조심을 해야 하는 법이다.
“뭐. 그 말도 틀린 건 아니지. 어쩌면 조금 힘이 들더라도, 지금이 적기일지도 모르니까.”
“요왕부와 복여위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
그가 말을 돌리자, 한시름 놓은 조비형이 얼른 대꾸를 던졌다.
‘이래서 조선의 덩치가 더 커진 후에, 요동을 먹으려고 했던 건데 말이야.’
연오랑은 차마 속마음을 내뱉지 못하고, 홀로 중얼거렸다.
요동을 조선이 먹는 것? 이건 지금 역사의 조선으로선 숙원이자 필연으로 자리 잡은 목표다. 하지만 요동을 먹은 다음이 문제다.
지금도 조선이 북상해서 각을 보자, 요동과 요왕부, 복여위가 털을 세우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자기 살을 깎아 먹는 걸 알면서도, 수비병력을 끌어올 정도로 경계했지.
그런데 조선이 진짜로 요동을 먹었다. 이러면 어찌되겠는가.
그나마 덩치가 작은 복여위는 조선의 계획과 제안대로, 통째로 귀부하기로 결정을 내리고 때를 기다리고 있지만... 요왕부는? 요왕부 입장에선 다음 차례는 자신인 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지 않을까.
아자이, 몽골남부연맹, 제왕부. 조선로 인해 사방이 꽉 막힌 요왕부로서는 결국 전쟁밖엔 선택지가 없고, 어디와 싸우든 조선에겐 문제이자 손해였다.
요동보다 작다지만 요왕부도 나름 덩치가 있는 편이니, 승리를 한다고 해도 비단길무역이 한동안 깨질 게 분명하니까.
재수가 없으면, 요왕부의 잔당세력이 본래 특기를 살려서 초원을 싸돌아다니며 늑대떼처럼 약탈질을 할지도 모르는데... 이놈들을 다 때려잡는데, 몇 년이 걸릴지는 예측조차 불가하다.
‘헌데 최악은 따로 있지.’
만약 위기감을 느낀 요왕부가 바로 아래 붙어 있는 북평부와 전격적으로 손을 잡는다면? 이땐 일이 더 커져서, 불길이 동북방이 아니라 중국본토로 옮겨 붙을 수도 있다.
북평부의 식량 및 생필품과 요왕부의 군사력이 합쳐지면, 비단길무역은 진짜로 위험해질 테니까.
그래서 연오랑의 계획은 남방무역 및 남방진출로 힘을 더 키운 후에, 요동과 요왕부를 한 번에 쓸어버리는 것이었는데... 일이 꼬이고 만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