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472화 (472/538)

472. 챕터58. 함락하다 (7)

‘물론 태종을 비롯해서 조정대신들의 생각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

힘이 있고, 때가 좋고, 기회가 왔으면 요동을 먹으면 그만.

요왕부가 반항한다면 요왕부와도 싸우면 그만이라는 게 조정의 복심이다.

조정대신들도 남방을 개척하고 남방무역에 집중하면 세수 및 재원이 늘어날 걸 알고 있지만, 그걸 감안해도 지금 요동을 접수하는 게 낫다고 판단하는 거지.

반대로 연오랑은 무조건 내정부터 굴려서, 강역을 확장하는 것보단 조선내부의 개혁과 사회구조를 바꾸고 안착시키는 게 최우선이었으니...

‘생각해보면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겠네.’

그는 다시금 속으로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건 미래인의 기억을 가진 연오랑이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는 문제였으니까.

개혁 이후 조선의 체제와 시대상은 걷잡을 수 없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운석핵꿀밤 이전, 개혁 이전의 조선과 지금의 조선은 아예 다른 나라라고 봐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변화를 모두 겪은 조정대신들이나, 바뀐 시대에서 태어난 관원들 모두 “이 정도면 예전에 비해 훨씬 나아진 거 아닌가? 이대로만 가면 되지 않나?”라고 판단하고, 잠시 숨을 고르면서 숙원을 먼저 달성하는 쪽으로 마음을 먹은 거지.

반대로 연오랑은 아직도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중국을 뛰어넘으려면 한참 멀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조선의 성장세를 꺾을 생각은 전혀 없었으니, 요동정벌을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던 거고.

결국 결론은 비슷할지 몰라도, 우선순위가 다른 거니 뭐라 할 수도 없고... 결정적으로 그는 조정에 정치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가 없지 않나.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는 거지.

“마지막으로 생각해야할 건, 원정을 위한 보급선을 구축하는 일이다.”

“음...”

“그건 그렇지요.”

연오랑이 지휘관들을 쓱 훑어보자, 다들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말하는 보급선은 요동정벌을 위한 보급선이 아니다. 북평부 원정을 위한 보급선을 말하는 것.

“요동군에게서 몰수한 전마가 몇이나 되지?”

“다 합치면...”

“예비마까지 해서...”

“대략 만필 정도 됩니다. 대감.”

연오랑의 질문에 이순몽과 유은지, 하경복이 서로 눈빛으로 대화를 나누곤 답을 던졌다.

요동군. 특히나 심양파가 주류가 된 북부는 과거부터 몽골, 여진을 방비하기 위해 기병이 많았고, 1군이 함락시킨 변경요새에도 기병대가 존재했다.

물론 지원이 부족해서 그 수준이 점점 떨어진 건 맞지만, 어찌됐건 요양파에 비해 많은 건 사실.

그 기병대는 조선군의 기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항복했고, 지금은 변경요새에 흩뿌려져 있던 전마와 예비마를 심양과 사주로 전부 이동 시켜 놨다.

요동군 지휘관들을 끌고 온 것처럼, 혹시나 발생할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전마 자체를 없애버린 거지.

그 일을 담당하고 있는 게 1군이라서, 이들 장군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어찌 보면 공짜로 전마가 왕창 생긴 셈이니 분명 이득은 맞는데, 마냥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 전마에게 먹이기 위한 말먹이가 얼마나 많이 드는지 알고 있지?”

“예.”

“끄응...”

연오랑이 쓴웃음을 지으며 묻자, 다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내며 끙끙 알았다.

기병장군으로 성장한 이들답게, 전마가 많으면 많을수록 환장했지만... 막상 전마가 손에 쥐어지자, 보급 때문에 피똥을 싸고 있었으니까.

사람에 비해 말은 엄청나게 많이 먹고, 아무리 낱알을 먹이지 않는다고 해도 말린 건초나 생초가 무지막지하게 필요한 건 당연한 말.

요동군 전마를 사주와 심양일대로 끌고 온 것 또한 그 일대에 만들어 놓은 초지를 통해 말먹이를 수급하고, 황주(장춘), 송주(길림)에서 비축해 놓은 말먹이를 수로로 운송하기 편해서였다.

“갑자기 불어난 전마 때문에, 이제 막 추수한 곡식의 생줄기까지 먹이고 있는 판국 아니냐?”

“예...”

이건 누구 잘못도 아니건만, 다들 고개를 들지 못했다.

“신도시에서 가까운 이곳으로 옮기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데, 원정에 필요한 보급품을 옮기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인력이 들까. 연대병이야 부피를 줄인 전투식량을 먹으면 된다지만, 전마에게 그걸 먹일 수는 없잖아?”

연오랑이 피식 웃으며 내뱉는 농담에, 다들 얼굴에 해쓱해졌다.

전마를 비롯한 가축들이 쌀알, 보리알, 밀알 같은 걸, 못 먹어서 안 먹이겠나. 비싸서 못 먹이니, 사람이 안 먹는 줄기나 풀을 먹이는 거지.

헌데 부피가 큰 말먹이를 운송하는 것보다, 부피는 작지만 영양분이 훨씬 많은 낱알을 옮기는 게 이득이라고 판단되면... 연대병과 전마가 똑같은 걸 먹어야하는 상황이 펼쳐질 지도 모른다.

“결국 요왕부와 함께 움직이고 있을 선발대가 보급기지를 건설하고, 보급품을 옮겨놓을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지. 육로만 그럴까? 해로도 마찬가지 아니냐.”

“예...”

“아마 그럴 겁니다.”

마차를 통해 옮기는 것도 한세월이지만, 배를 통해 옮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조선함선은 중국함선에 비해 덩치가 커서 지금의 부두를 사용하는데 애로사항이 있고, 요동의 항구는 조선항구에 비하면 여러모로 불편한 게 많다.

단단하고 넓은 석회부두도 없고, 짐을 빠르게 옮길 수 있게 도와주는 기계식 거중기도 없고, 컨베이어벨트 비슷한 짐 사다리도 없다.

조선군이 장악한 요동항구와 연산항에선 연신 공사가 펼쳐지고 있을 텐데... 이 작업이 끝나야 천진을 통한 북평부 원정이 쉬워지지 않겠나.

의주에서 천진까지 다이렉트로 보급품을 운송하는 건, 변수도 많고 시일도 오래 걸리니까.

“그러니... 심양을 빨리 함락시킨다고 해서, 원정이 더 빨라질 수도 없어. 보급선이 구축이 안됐는데, 전투부대만 빨리 움직인다고 할 게 있나. 괜히 멀리 가서 손가락만 빨고 있으면 보급만 더 힘들어지니, 당장은 이곳에서 전쟁분위기를 유지하면서 지방호족들을 때려잡고, 요동백성들의 민심을 사로잡는 게 이득이지.”

“아...!”

“음...”

자세한 속사정을 알았던 이들은 알았던 대로, 몰랐던 이들은 몰랐던 대로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그러니까...”

연오랑은 히죽 웃으며 마지막 말을 던졌다.

“이제 곧 있으면 심양군을 위한 깜짝 선물이 도착할 테니, 그때까진 지금처럼 포위를 유지한다. 알겠나?”

“옛!”

“충성!”

다들 의구심과 미련이 싹 사라졌는지, 기운차게 목청 높여 대답했다.

지루하면서도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이 위태위태한 포위공성전은 계속 이어졌다.

조선군이야 느긋하게 압박하며 이따금씩 포격만 날려댔지만, 심양군 입장에선 그게 아니다.

언제 어디서 성문을 뚫고 진입할지 모르지 않나.

조선군의 여유조차 함정이라고 생각하고, 가병까지 동원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대기했다.

이거로도 병력이 부족하니 심양백성들을 징집하고 있었는데, 그럴수록 백성들의 불만만 하늘로 치솟았다.

조선군이 매일같이 뿌리는 전단으로 인해, 항복하면 목숨과 재산을 보존할 수 있는 걸 모두가 알지 않나.

심양성을 목숨 걸고 사수해야할 명분이 약해질 수밖에 없으니, 분위기는 악화일로로 흘러갈 수밖에.

이건 저 멀리 남쪽에 위치한 요양성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심양성과 요양성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선... 예년보다 훨씬 번잡하고 어수선한, 하지만 희망차고 놀라운 분위기가 퍼져가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앞으로 자네 가족이 일궈야할 땅이네.”

“이... 이렇게 많이 말입니까?”

“왜 안 믿기나?”

“그게...”

농부는 조선관원과 통역을 맡은 이를 번갈아보며, 눈만 끔뻑 거렸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 없어서, 자기도 모르게 뺨을 꼬집어 볼 정도다.

허나 그럼에도 쉬이 믿지 못하고 걱정의 눈초리를 숨길 수 없는 건...

“후환이 걱정되나보지?”

“...”

차마 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였고, 농부의 그 모습을 보며 조선관원은 안쓰러운 표정과 웃음을 참는 표정을 섞어 보였다.

“걱정할 게 있나. 호가家와 이가는 지워졌지 않나? 그간 너흴 착취하던 집안이었다지? 아국은 요동의 호족과 달라.”

“예에...”

조선관원은 누가 봐도 티가 나는 관복을 손가락으로 집어 흔들었다. 꼭 “감히 요동과 조선을 비교하는 거냐?”라고 말하는 듯한 모습에, 농부는 냉큼 눈을 내리 깔았다.

호가는 이 일대를 주름잡는 지주 중 하나였고, 이 농부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이 소작농이 되어 호가의 그늘아래 머물러 있었다.

헌데 조선군은 사정없이 들이쳐서 가병들을 쓸어내고, 항거불능 상태가 된 호씨, 이씨 집안사람들을 어디론가 데려갔다.

다만... 소작농들을 다스리던 이들이 바람처럼 사라졌다고 해서, 고작 이틀사이에 지난날의 기억이 전부 지워질 리가 없지 않나.

조선관원은 그 마음이 한편으론 이해가 되는 터라, 농부를 계속 다독였다.

“그런 쓸데없는 걱정보다, 앞으로 이 땅을 일굴 걱정을 하는 게 더 먼저지.”

“예예.”

농부는 휘적휘적 걸음을 옮기는 관원을 종종걸음으로 따라가며,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이렇게 됐는데 믿지 못해 의심만 하면... 결국 자기 손해 아닌가. 이미 물은 엎질러졌으니, 그 안에서 자신의 이득을 챙기는 게 우선이다.

‘확실히... 반신반의하면서도 좋아하는군. 요동한족이라고 해서 농사꾼의 기질이 어디 가는 건 아니네.’

조선관원은 눈에 보이게 호의적으로 변한 농부를 보며, 속으로 히죽 웃었다.

조선은 노비를 없애고, 소작농을 없애지 않았나. 이곳 요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간 수년간 요동의 정보를 수집하며 살생부를 만들어놨고, 지주 및 호족 중에서 조선에 호의적이지 않고 질이 안 좋은 집안은 사정없이 지워나갔다.

그렇게 호족이 소유하고 있던 땅을 소작농들에게 불하해 자영농으로 만들어줬는데, 이걸 싫어하는 농부가 있을 리가.

이 땅을 다스리는 게 조선인이든 한족이든 신경도 안 쓸 거고... 실제로도 그런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자기 밭을 확인하고 나서 관원과 함께 도착한 곳은, 밭 귀퉁이에 대충 세워놓은 창고였는데... 농부 말고도 호가의 소작농으로 살던 이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다들 아는 사이인 터라 눈인사가 바삐 오갔고, 그 눈빛 속에 희망의 불씨가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다들 모였나?”

“예.”

“앞으로 자네들이 심어야 할 종자씨네.”

관원 중 한명이 유창한 한어로 말을 내뱉자.

“...?”

“오...”

“이건...?”

농부들은 눈치를 슬슬 보면서도 냉큼 다가와, 생경하게 생긴 종자씨를 매만지며 자기들끼리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아마 자네들이 처음 보는 종자씨지만, 키우는 건 크게 힘들지 않을 걸세. 이미 아국에서도 키우고 있는 작물이고, 이곳이나 그곳이나 기후가 크게 다르지도 않을 테니까.”

“예...”

“음.”

농부들은 반신반의하면서 의구심과 두려움, 거부감이 뒤섞인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여기도 마찬가지군.’

이미 다른 마을에서 이런 눈빛을 경험한 관원은, 속으로 피식 웃고 말았다.

농부들의 마음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한해 농사를 통해 한해를 먹어 살아야 하는 농부들에게는, 아무리 좋은 신농법과 신종자를 가져와도 쉽게 할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농사를 잘 못 지으면, 굶어죽을 수밖에 없으니까.

괜히 보수적으로 변해서, 자신이 몸으로 체득한 기술과 농사만 짓는 게 아니지.

허나 관원은 이런 분위기를 한방에 깨부술 방법을 알고 있었다.

“농사를 망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네. 우리가 농법을 알려줄뿐더러, 그대들이 겨울을 넘어 내년에도 먹을 식량을 지원해 줄 테니까.”

“헉!”

“그게... 참말이십니까? 나리?”

관원의 말을 쉽게 믿지 못한 농부들이 요란스럽게 입을 놀렸고, 관원은 쓱 손을 들어 입을 막아 세웠다.

“물론 공짜는 아니네.”

“...”

농부들은 “그럼 그렇지.”라는 눈빛을 뿌리다가, 이내 이어지는 말에 홀려서 반달눈으로 변해갔다.

“앞으로 이 땅도 제대로 다듬어야 할 터, 농사를 지으면서 자네들은 수로공사와 도로공사를 함께 하게 될 걸세. 물론 노역이 아니라 돈. 정확히 말하면 식량을 줄 걸세.”

“...”

“어차피 자네들도 아국의 농법에 대해서 들어봤을 거고, 이미 거름을 뿌리는 걸 봤겠지?”

“예.”

“그렇습니다. 나리.”

조선의 인분거름을 비롯한 거름은 요동농부들도 익히 들어본 물건. 그 신통방통한 효과에 대해선 소문이 자자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심양에 조선군이 당도한 후에. 곧장 뒤따라온 게 바로 거름을 실은 배로, 이들 농부들은 그 유명한 거름을 드디어 자신의 손으로 만져보고야 말았다.

“거름을 뿌리는 걸 봤으면, 밭을 조선식으로 개간하는 것도 봤을 터... 노역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자네들의 밭을 개간한다고 생각하게. 앞으로 저 땅은 자네들 땅이 될 거고, 수확한 곡식도 자네들 몫이 될 테니까.”

“...”

“...”

농부들은 여러번 들었지만 가슴을 울리는 말에, 다들 슬쩍 붉어진 눈시울을 숨기며 자기들끼리 눈을 맞췄다.

이렇게 까지 조선이 해주는데, 익숙하지 않은 신농법을 끝까지 거부할 필요는 없지 않나. 게다가 고작 며칠 전에 조선군이 피를 뿌리며 호족들을 때려잡는 걸 두 눈으로 봤다.

“...”

‘역시 여기도 잘 먹히는 군.’

관원은 농부들의 눈에 기대감과 두려움이 동시에 머무는 걸 보며,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하나 설명해 주지. 이건 서방에서 들여온 서방밀 중에 하나로, 우린 호밀이라 부르지.”

관원은 서방에서 흘러 들어와서 이미 북방에서 심고 있는 호밀, 귀리 등의 각종 곡물종자. 순무나 상추, 배추와 같은 야채류. 아마나 중국땅콩, 유채꽃등과 같은 상품작물들을 줄줄이 소개했다.

농부들답게 새로운 작물에 대해 이들의 관심은 지대했고, 농업부 관원은 북방에서 여진농부들을 가르쳤던 경험을 살려 친절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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