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473화 (473/538)

473. 챕터58. 함락하다 (8)

‘용연군 대감과 전하께서 하신 말씀이 맞았군. 역시 호족들을 박살내는 게, 요동민심을 잡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건가.’

관원은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눈을 번뜩이는 요동농부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더불어 문뜩 떠오른 생각은...

‘여기도 본토와 마찬가지 아니겠나.’

관원은 살포시 쓴웃음을 흘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본래 그는 향리집안 출신으로, 예전이라면 이렇게 정식관원이 될 수 없는 신분이었다.

허나 개혁이 시작되면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됐다.

관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것인가. 아니면 전처럼 지주로서의 삶을 유지하면서 기싸움을 할 것인가.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 그의 아버지는 큰 욕심이 없어 시류를 거스를 생각이 없었고, 결과적으론 현명한 선택이 됐다.

조정의 시책과 시류는 착호군의 힘을 빌려 현실로 다가왔고, 조정의 뜻을 따르지 않는 집안은 가산을 보존하지 못하고 강제로 찢어졌으니까.

그리하여 초창기 착호군에 들어와 행정관료로 지내다가, 정식관료가 되어 무탈하게 여기까지 오게 된 관원.

그는 가볍게 과거를 더듬으며, 다시금 피식 웃고 말았다.

‘요동호족을 박살내는 일에 진심인 건... 굳이 조정의 정책 때문은 아닐 거야. 나부터 그렇지 않나.’

이런 생각이 절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오래전. 연오랑은 자본유학을 이용해 조선의 신분제를 깨부수려 했고, 기업양반을 키워 지주양반과 싸움을 붙여 지주양반을 무너뜨려 했다.

결과는 대성공으로, 그의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양반관료제는 몰락하고 지주양반은 무너져갔다.

그저 연오랑, 태종, 세종의 계획이 엄청나서 아니라, 이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돈의 힘이 막강했기 때문.

조선이 강역을 넓혀 무역대상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작은 눈덩이는 언덕길을 구르며 점점 커져만 갔고.

각종 제제와 눈총을 받는 지주로 사는 것보다, 기업을 일궈 생산활동에 뛰어드는 게 출세와 가산보존 및 증식에 훨씬 이득이 되었으니까.

그리하여 눈치를 보던 지주양반들은 앞다투어 기업양반 변모했고, 관원이 증가하고 노비제가 폐지되면서 양반신분 또한 점점 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요동을 집어삼키고 있으면, 관원들이 어떻게 행동할까? 조정대신부터 말단관원들까지, 모두가 한마음으로 요동호족을 박살내는 데 진심이 될 수밖에 없지.

기업출신이라는 기득권 아닌 기득권을 형성했는데... 요동의 지주호족을 가만 놔두면 과거로 돌아가는 꼴이자, 또 다시 지주세력과 기업세력이 싸우는 꼴이 되지 않겠나.

이미 한번 겪어서 승리를 거둔 기업세력 입장에선, 괜히 불씨를 남겨서 분란을 일으킬 생각이 없었으니... 요동호족을 때려잡는 건, 단순히 요동백성들의 민심만 사려는 계획은 아니었던 거지.

어쩌면 이 또한 밥그릇 싸움일지도 모르겠다.

관원이 과거를 뒤로하고, 다시 설명을 이어가던 찰나.

“허허헉.” 웬 농부 한명이 귀신을 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정신없이 달려왔다.

“무슨 일이냐?”

“강... 강에...”

그는 숨을 못 가누는 건지, 말문이 막힌 건지... 제대로 말을 못하고 저 옆에 있는 강가만 그저 가리켰고.

“아! 드디어 왔군. 다들 일어서게. 함께 가서 보지.”

관원들은 뭔지 알았다는 듯, 활짝 웃으며 농부를 이끌고 강가로 향했다.

그들뿐만 아니라 인근 마을에 있던 요동농부들이 다 구경을 나왔는지, 가는 길부터 북적북적했고... 이내 강가에 이르자.

“헉!”

“저게 뭐시라!”

“대체...!”

요동 농부들은 강을 따라 천천히 이동하는 산을 보며, 하나같이 기겁해 말문을 잇지 못했다.

조선군이 심양군을 위한 깜짝선물이 드디어 도착한 것.

신형전함 3척이 신형조운선에 끌려 심양성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동쪽에서 흘러오는 혼하는 심양을 가로질렀고, 이 혼하와 서쪽에서 온 요하가 만나 남쪽으로 흘러 요양을 지나 발해만으로 빠져나갔다.

이 수로를 통해 요동반도에서 내린 중국물산이 심양까지 올라오고, 반대로 북방물산이 심양을 거쳐 요동반도를 거쳐 중국본토로 넘어가지.

조선은 심양 바로 옆, 혼하를 끼고 있는 본주를 이미 차지해 신도시를 건설해 놨으니... 이 혼하를 활용해 심양을 공략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물론 이런 공격을 처음 당해보는 요동입장에선 당연한 게 아니었지만.

다만 그럼에도 전함이 이렇게 늦게 도착한 건, 본주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 대규모 조선소가 건설된 송주(길림)에서 만들어진 물건이기 때문.

귀부하기 위해 북방신도시를 살피며 내려오던, 복여위의 야치부르 일행을 깜짝 놀래줬던 함선들. 그게 드디어 심양에 도착한 것이었다.

“격하게 반기는 군.”

“그야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하하. 저치들은 이런 배를 처음 봤을 겁니다.”

“그럴 거야.”

함장은 부함장의 말을 들으며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저기. 강가에 늘어선 인파를 보라.

검은 깃발을 우렁차게 휘날리면서 정렬해 있는 연대기병들 뒤로, 조선의복과 비슷하면서도 살짝 다른 옷을 입은 요동백성들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빼곡하게 나와서 구경하고 있다.

개중에는 그들이 온 걸 어째 좋아하기라도 하듯 손을 흔드는 이들이 보였고, 또 몇몇은 그저 놀라서 입만 벌리고 허공에 손짓을 하는 이들도 있었지.

저런 모습은 전함을 이끌고 갈 때마다 남방에서도, 일본조차지에서도 숱하게 겪었지만... 그래도 볼 때 마다, 매번 새롭고 절로 신이 났다.

“와아!!”

“우리가 왔다!”

함장만 그런 감상에 젖은 게 아니라, 해군선원들도 마찬가지인 걸까? 선창 밑에 있어야할 화포병들까지 전부 갑판 위로 올라와서, 자신을 반기는 이들에게 고함을 내지르고 있었다.

“자제시킬까요?”

“됐다. 심양수군은 없는 거나 다름없는 데 뭘. 이제부터 고생해야하니 지금은 즐기게 놔둬.”

“예.”

혹시나 싶어서 물어봤건만 함장도 부함장과 같은 생각이었는지,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나저나 너무 늦게 온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지금 꼴을 보면 흡사 전쟁이 다 끝난 것처럼 보이지 않나.

육군이 개미굴처럼 파고든 참호와 포진지는 심양성에 바짝 붙어 있었고, 심양성도 조선육군도 포격을 멈추고 대치하고 있었다.

반대로 그 얇은 전장 외에서는, 요동백성들이 전과 똑같이 일상을 영유하고 있고 말이다.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오다가 좌초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안전하게 오는 게 낫지요.”

“음.”

함장이 살짝 아쉬운 소리를 내뱉자, 부함장이 얼른 말을 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무려 심양이다.

고려 때부터 차지하고 싶어 했던 고토. 그 고토를 되찾는 숙원이 현실이 되었는데, 사서에 남을 역사에 한발짝 걸치고 싶은 건 당연한 이치.

일찌감치 도착해서 심양공성전에 처음부터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

허나 부함장의 말처럼, 송주에서부터 심양까지 전함을 끌고 오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송화강과 혼하가 나름 큰 강이고, 지금껏 신형조운선이 돌아다니곤 했다지만... 전함을 띄우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물론 최신형인 전함 3호기라고 해도, 미래의 전투함에 비하면 새발의 피도 못되니 큰 문제는 없지만... 그래도 또 모르는 일 아닌가.

덩치가 작아 수면 아래로 침수되는 흘수가 그리 깊지 않지만, 그래도 첨저선인 전함과 평저선인 신형조운선은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밀물 썰물을 타고 뻘밭에도 올려놓을 수 있는 신형조운선이니, 지금껏 송주와 본주를 오가면서 송화강과 혼하의 수심 및 암초, 모래톱등을 크게 신경이나 썼을까.

하지만 노도 없고 흘수가 깊은 신형전함이, 재수가 없어서 미처 몰랐던 강바닥에 끼어 좌초되면 답도 없었다.

강이니 바다처럼 밀물 썰물을 이용할 수도 없고, 결국 물살을 버티며 잠수해서 강바닥 모래를 파야 하는데... 오로지 인력만으로 해결해야 하는 이 시대에, 이게 쉬울 리가 있나.

더 중요한 건 심양성을 공격하기 위해 가고 있는 상황.

무작정 빨리 가다가 좌초되는 위험보다, 차라리 느긋하게 가는 게 더 이득이었지.

게다가 전함은 노가 없는 탓에 바람만으로 움직여야 하는데, 자칫 바람을 잘못타면 강가에 꼴아 박고 좌초되기 십상.

해서 지금처럼 신형조운선 3척당 돛을 전부 접은 전함 한척을 책임지고, 밧줄로 칭칭 묶어 직접 끌고서 느긋하게 올 수밖에 없었다.

사실... 조선이 개전시기를 추수 전으로 잡은 건, 요동군의 비축곡식을 줄이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수로의 활용과도 관련이 있었다.

북방 땅도 조선처럼 여름에 강수량이 집중되는데, 이러면 물살이 너무 강해지고 치수공사가 되지 않은 곳에선 범람이 벌어진다.

그렇다고 추수 후로 잡으면 강이 슬슬 얼어붙기 시작하니, 수로를 이용할 수 없었던 거지.

“함장님! 명령입니다!”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구경을 하는 동안, 경시병은 강가의 연대병이 보낸 깃발신호를 알아차리고서 냉큼 달려왔다.

“뭐지?”

“자리를 잡고 바로 포격을 하라는 명입니다. 여기.”

견시병은 해독한 명령서를 내밀었고, 함장은 몇 줄 되지도 않는 명령서를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아무 곳이나 쏘라고 하는 군.”

“역시... 심양성을 직접 함락시키는 것보단, 계획대로 겁을 줘서 항복시키려나 봅니다.”

“그럼 어디가 좋을까...”

함장이 턱수염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기자, 근처에 모여 있던 갑판장과 화포장 모두 생각에 잠겼다가 빠르게 답을 내렸다.

“중요한 건 심양파 호족들의 의중이니, 그들을 공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심양성도 작은 게 아니어서 얼마나 닿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중심부를 노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음... 그리하지.”

함장 또한 같은 생각이었는지, 결정을 내리고선 명령을 전달했다.

부웅! 둥둥둥! 나팔소리와 함께 북소리가 터져 나오고, 중앙돛대에 올라간 견시병은 바쁘게 오색빛깔의 신호깃발을 번갈아가며 올려댔다.

그 모습을 앞에서 끌고 가던 신형조운선에서도 알아듣고, 맞장구를 치듯 신호깃발이 올라왔다.

명령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선단을 이끌던 최선두에도 흘러갔다.

전함 앞에는 옛 중맹선 크기의 조운선 십여척이 앞서가고 있었는데, 이들은 흡사 갈퀴마냥 긴 장대 수십개를 꽁무니에 매달고 있었다.

강바닥 토사를 훑으며 살피고서, 암초나 장애물이 있는지 확인하고 있었던 것.

그들의 살펴놓은 길을 따라 전함이 따라오고 있었고, 이윽고 심양이 훤히 보이는 지점까지 전함이 쭉쭉 내려왔다.

“여기가 좋겠군.”

“예.”

함장과 부함장은 망원경으로 심양성내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혼하는 심양을 관통해서 흐르고 있었는데, 이 시대의 심양은 미래처럼 혼하 양쪽을 전부 포함하는 도시가 아니었다.

북쪽이 더 거대하고 남쪽지역이 작았는데, 중요한 건 강가에는 성벽을 그리 높이 쌓아놓지 않았다는 점.

애초에 강을 따라 성벽을 쌓는 건 쉬운 일이 아니고, 심양이 지금껏 상대해 왔던 적들 중에서 혼하를 끼고 상륙작전을 할 만한 세력이 있기나 했었나.

저들 입장에선 조선군 전함의 등장은 날벼락이 따로 없을 터... 작은 망원경의 시야에는 그 모습이 여실히 보이고 있었다.

저기 심양성내에서 이리저리 마구 뛰어다니는 병사들과 백성들. 강 쪽으로 우르르 달려오는 이들이 어지럽게 보였으니까.

성벽조차도 없는 거나 다름없는데, 산처럼 높은 전함의 갑판 위에서 내려다보니... 심양 성내가 다 보일 지경이다.

“포대의 위치는 찾았나?”

“딱히 없어 보이는 게... 미리 도착한 육군이 정리한 모양입니다. 오면서도 포격을 안 받지 않았습니까.”

“포격은 무슨. 구경하는 요동백성들만 봤지.”

“...”

피식 웃는 함장을 보며, 부함장도 따라서 웃고 말았다.

오면서 봤던 동쪽 성벽은 성벽 위에서 감시하고 있는 요동군도 없을 정도로 개판이 되어 있었는데...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보지 않아도 짐작이 됐다.

이윽고 최대한 강가에 바짝 붙어 전함 3척은 나란히 멈춰 섰고, 풍덩! 아예 닻을 내리고서 옆구리를 심양성을 향해 내밀었다.

“포격을 준비하도록.”

“옙!”

부웅!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함포장은 선창으로 내려갔고, 동시에 부함장 또한 갑판 중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걸 드디어 써먹는군. 문제는 없겠지?”

“흐흐. 이미 여러번 보시지 않았습니까. 시험을 수차례 해왔으니 문제없을 겁니다. 부함장님.”

이번 작전을 위해 파견된 앳된 얼굴의 화포장이 자신감 있는 얼굴로, 앞에 놓인 거대한 화포를 툭툭 때렸다.

이번 공성전을 위해 특별히 장착한 물건으로, 무려 공성포 3문이 갑판 위에 올려 있었던 것.

이 큰 화포를 전함의 갑판위에 올려놓고 쏴대면서 균형을 잡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지난해부터 지금까지 개고생을 지켜본 부함장이 더 잘 알았다.

“그렇지.”

‘그래야 할 거고 말이야.’

덩치가 워낙 커서 갑판 공간을 꽤나 잡아먹었지만, 그 불편함 쯤은 얼마든지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피잉! 이윽고 효시가 날아오르자, 옆에 있던 전함에서도 같은 효시가 날아올랐다.

“발포!”

“발포하라!”

쾅쾅쾅! 드디어 포격 명령이 떨어지고, 공성포 3문이 육중한 굉음과 함께 통나무만한 장군전을 날려 보내자... 전함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조선군의 첫 번째 선물이 한창 심양성을 두들기고 있을 때. 두 번째 선물도 요동반도에 도착하고 있었다.

“흠. 여기가 해주라...”

“싸움이 그리 치열하지 않았나 보군.”

“맞네. 저기 보게. 여기가 요동인지 조선인지 모르겠군.”

쾌선에서 내리기 위해 갑판 위에 올라있던 이들. 조선복식이 아닌 옛 명나라 복식을 한 이들은 눈앞에 펼쳐진 난장판에 자기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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