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4. 챕터58. 함락하다 (9)
부두가 좁아 바로 입항하지 못하고 기다리는 건 그렇다쳐도...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요동에서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광경이 아니었다.
고개를 돌려가며 둘러봐도 요동배보다는 덩치가 훨씬 큰 조선배가 더 많이 보였고, 심지어 어선조차도 나룻배가 아닌 특이하게 생긴 조선어선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해안가에 사는 중국호족들은 저 어선조차도 탐내던 이들이 부지기수라서, 귀가 닳도록 그 이야기를 들었던 이들은 척하면 척 바로 알아보고야 말았다.
“내리시지요.”
“예.”
“그럼...”
이윽고 배가 정박하자, 일행들은 배사다리를 타고 줄줄이 내려갔고, 내려가기 무섭게 다시금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그들이 밟은 부두는 큼지막한 바윗돌들이 하나로 이어 붙어서, 짙은 회색빛을 뿌리고 있었으니까.
돌 부두를 옆에서 보면 그 이음새가 훤히 보이는 터라, 이게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금세 알아차리고 말았다.
“호... 이걸 벌써 깔았군. 내가 생각하는 거 맞지?”
“맞네. 이건 조선본토의 무역항에서나 볼 수 있었던 건데...”
“허면!?”
일행은 서로 눈을 마주치기 무섭게, 말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벌써부터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건, 요양과 심양이 어찌됐건 이미 요동반도와 해안도시는 조선땅이 되었다는 뜻이니까.
일행이 밟고 있던 석회부두를 빠져나오기 무섭게,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요동인부들과 동산처럼 수북하게 쌓여 있는 돌산이 눈에 들어왔다.
시야를 더 넓혀 부두를 넘어 포구로 향해보지만, 그곳 또한 파괴된 흔적은 크지 않았고... 오히려 밀어버린 공터에는 이제 막 가져온 나무와 벽돌, 바윗돌 등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이건 전쟁 중이 아니라, 흡사 전쟁 후 재건을 하는 모습과 더 흡사해 보였다.
“확실히 싸움이 크지 않았나보군.”
“그럴 거야. 시간이 오래된 걸 떠나서, 피를 많이 봤으면 저렇게 인부들이 자발적으로 일을 하고 있진 않겠지.”
“...”
조선관원의 뒤를 따라가던 일행은 슬그머니 고개가 돌아갔고, 저기 요동인부들이 조선관복을 입은 관원들의 지시에 따라 부두를 새로 건설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 옆에선 뭔가를 나눠주고 있었는데, 뭔가 싶어 살피자 궁금증을 알아차렸는지 앞서가던 조선관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국 화폐로 나눠주는 날삯입니다.”
“아...!”
“...”
저 단순한 대답에 얼마나 많은 게 숨겨져 있는지, 많이 알아차린 사람일수록 입이 더욱 굳게 다물어졌다.
‘고작해야 개전한지 스무날이 조금 넘은 걸로 알고 있는데... 벌써 이렇게까지 진행됐단 말인가.’
무역항을 드나들면서 비록 가져가진 못했지만 조선화폐를 본 적이 있었다. 예술품과 다를 게 없는 물건이 저렇게 버젓이 풀렸다는 건, 이 땅을 완전히 조선의 행정구역에 넣어 요동화폐를 조선화폐로 교체했다는 것.
그 일이 보통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그걸 해냈다는 건 엄청난 행정인력을 투입했다는 뜻이다.
더불어 저렇게 대놓고 돈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건, 전쟁통에 당연히 따라오는 혼란조차 모두 제압해서 치안을 유지하고 있다는 뜻.
“대체... 조선이 동원한 병력이 몇이기에?”
“저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못해도 15만명은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
“15만!”
‘봤냐? 까불지 마라.’라고 말하듯 피식 웃는 조선관원의 대답에, 일행들 모두 기겁을 금치 못했다.
십오만명이 어디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이들이 있는 것 없는 것 박박 긁어모아도, 그 정도 병력은 못 뽑아낸다.
더욱이 조선은 이들과 달리 전문군인만 굴리지 않나.
눈앞에 돈과 창칼이 핑핑 돌아가는 것 같아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러면 이해가 되는 군. 조선군 수만명이 떼로 몰려왔을 텐데, 어찌 대항할 수 있었을까.’
‘제대로 된 싸움이 없었던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되는 군.’
일행은 절로 그런 생각이 떠올랐고, 동시에 새롭게 단장되는 부두의 번잡함도 이해가 됐다.
조선무역항에서나 보던 거중기가 부두를 따라 올라가고 있고, 대선보다도 큰 신형조운선에서 석탄과 석회, 잘 말린 통나무들이 줄줄이 내려오고 있다.
감도 안 잡히게 많은 조선군의 보급을 위해서라도, 이 포구는 확장공사가 진행되어야만 하는 거지.
“여기만 공사가 진행되는 건 아니겠지요?”
“물론입니다. 아마 요동의 모든 포구에서 함께 진행되고 있을 겁니다. 요동인부들도 나름 좋은 일거리를 찾은 거죠. 가호조사가 끝나기 전엔 어차피 뱃일을 나가지도 못하니까요.”
“예.”
“그렇군요...”
조선관원은 숨길 게 없다는 듯이 늘어놨고, 다들 한번 더 기가 죽어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북방무역을 완전히 조선이 장악하게 됐단 말이지...”
“이거... 생각보다 파장이 크겠군. 예상보다 훨씬 빠르지 않나.”
“그렇다고 해도 이미 예측하지 않았나. 딱히 달라질 건 없을 걸세.”
“음... 우리도 그렇지만, 산동이 특히나 조선의 눈치를 많이 보게 될 걸세.”
“그렇지.”
일행은 소곤소곤 귓속말을 이어갔다.
조선이 북방을 장악하면서 북방무역의 주도권은 완전히 조선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특히나 비단길이 열리고 나서부턴 더욱 더 그러했지. 그럼에도 요동 또한 분명히 북방무역을 하고 있었고, 그 수혜자는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산동이었다.
허나 지금 돌아가는 꼴을 봐선 조선은 큰 문제없이 요동을 바로 집어삼킬 걸로 보이는데... 그럼 북방무역은 약간의 흔들림도 없이 전과 다를 게 없다는 뜻.
산동 입장에선 완전히 조선의 손에 끌려다는 것과, 요동이 남아 있어 조금이라도 비벼볼 틈이 있는 건 천지차이인데... 그 뒷수습조차 쉽지 않을 걸로 보여 졌다.
“단순히 북평부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닌데...”
“그렇겠지. 허나 산동이 그걸 모르고 손을 잡았겠나. 잡지 않는다고 해서 일이 달라질 게 없으니, 최대한 얻을 수 있는 걸 얻으려고 끼어 든 거겠지.”
“맞는 말이야.”
산동이 끼어들지 않는다고 해서 조선이 요동을 가만 놔둘 것도 아니지 않나. 이기는 쪽에 붙어서 뭐라도 받는 게 이득. 산동은 아마 울며 겨자 먹기로 조선과 손을 잡았을 거다.
“일이 이렇게 흘러갈 걸로 예상했으니 산동은 나름 대비를 해놨을 거고...”
“어쩌면 강남상인들이 더 문제가 될지도 모르겠군.”
“그렇지 않겠나? 아무래도 우리나 산동보다는 강남상인이 조선과 부딪치는 품목이 많을 테니 말일세.”
“그럴 거야.”
다들 과거를 굽어보며 미래를 점쳐봤다.
조선과의 무역을 끊는 건 이제와선 말도 안 되는 일. 허나 설령 무역이 끊어진다고 해도 엄청나게 문제될 일은 없었다.
조선보단 중국시장이 훨씬 거대하고 내수만으로도 돌아갈 수 있다.
조선이 중국에서 수입하는 물건이나, 중국이 조선에서 수입하는 물건이나, 따지고 보면 사치품이 대부분 아닌가. 인삼, 녹용, 피혁제품, 전마 등등. 없으면 불편하긴 하지만 대체품이 없는 건 아니지.
이렇듯 둘이 생산하는 품목은 대부분 겹치고... 체급이 작은 조선은 중국산 물품이 무제한으로 들어와 시장을 잠식하는 게 두려워서, 무역항을 통해 일상품의 수입을 제한하고 있는 상황.
그러니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조선이 북방무역을 장악한다고 해서 이들이나 산동이 엄청난 타격을 입는 건 아니었지.
허나 강남상인은 다르다.
“남방소국과 일본을 놓고 조선상계와 강남상계가 경쟁하고 있으니, 북방무역을 완전히 손에 쥔 조선이 강남상계를 흔들 수도 있다는 거군.”
“그렇지 않겠나? 조선이야 강남상인을 통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손을 통해 사면되지만, 강남상인은 어쨌든 조선에게 손을 벌려야 하니 말일세.”
“흐음...”
단적으로 일본과 남방소국은 흔한 면포조차 제대로 생산을 못하고 있고, 똑같은 면포를 가지고 조선과 강남이 서로 더 팔려고 경쟁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북방물산을 지렛대 삼아 강남상인을 흔들면, 이들 또한 울며 겨자 먹기로 따라올 수밖에 없는 것.
“물론 그렇다고 해도 조선도 우리와 거래하는 게 많으니, 무작정 억지를 부릴 순 없겠지.”
“그럴 걸세. 당장 강남의 미곡을 가장 많이 사들이는 게 조선인데, 강남이 손을 놔버리면 둘 다 만만치 않게 손해를 보게 되겠지.”
“그래도 강남상인들이 가만히 넋을 놓고 있진 않을 테고?”
“조선에 끌려 다니지 않기 위해선, 결국 북방물산을 얻을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텐데...”
돌림노래를 하듯 말을 이어받다가, 모두는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조선 말고 북방무역과 비단길무역품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밖에 없지 않나.
“섬서몽골과 거래한다...?”
“되겠나?”
“그야 모르지.”
“우리 입장에선 어쩌면 그게 나을 지도.”
일행 모두는 묘한 눈빛을 띄며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다름 아닌 하남호족 대표단이었으니까.
섬서몽골 및 오이라트와 국경을 접하고 최전방에서 대치하고 있는 이들답게, 싸우지 않고 평화가 찾아오면 그보다 좋은 게 있겠나.
“하지만 우리를 통하지 않고서 몽골인들과 접할 수 없지 않나. 아마 우리를 찔러보기 시작할 걸세.”
“흠. 사천과 대리는 어떤가?”
“으음...”
몽골과 맞닿아 있는 다른 세력을 화제로 삼자, 모두의 눈빛이 살짝 흐려졌다.
“그치들이 몽골과 거래한다고 해서, 조선보다 나을 거라는 보장은 없을 걸세.”
“맞는 말. 물론 거래 상대가 하나 더 늘어나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게 꼭 이득이라고는 볼 수 없겠지.”
“특히나 사천과 대리가 마냥 커지는 게, 꼭 좋은 건 아니지 않나.”
“...”
하나둘씩 의견을 토해내자, 다들 확실히 눈빛이 굳건해졌다. 아무래도 긍정보다는 부정 쪽으로 쏠리는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천과 대리는 예전부터 중국본토와 살짝 거리가 있던 지역이고, 심지어 대리의 경우에는 한족이 아닌 백족이 다스리는 나라다.
이들 호족연맹에게 가장 두려운 건 칭왕자가 일어나 왕조가 건설되는 것. 헌데 사방이 꽉막힌 사천이야 그렇다쳐도, 대리가 커지는 건 매우 부담됐다.
바다 건너에 위치한 조선과 달리 대리는 바로 옆에 붙어 있고, 그들은 오래전부터 중국본토로 진출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던 나라니까.
조선과의 무역에 있어서 손해를 조금 보는 것과, 몽골과 거래하기 위해 대리의 힘을 키우는 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지.
“그러니 섬서몽골을 이용할 바에는 다른 길을 찾는 게 낫고.”
“그래서 북직례를 지우기로 우리 모두가 합의한 거지.”
“맞네. 더불어 미래를 걱정하기 보단, 지금 당장의 위협을 해소하는 게 더 중요하지 않겠나? 난 섬서몽골 놈들을 믿을 수가 없어.”
“나도 같은 생각일세.”
상주 위가의 가주 위공조. 금주 육가의 가주 육헌.
두 청년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들 정도로 힘차게 쥐고서 살벌하게 눈을 번뜩였고, 모두는 그 기세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상주는 서안(장안)바로 아래 위치하여 섬서에서 하남으로 진출하는 길목에 위치한 지역이고, 금주는 한중에서 하남으로 진출하는 길목에 위치해 있었다.
당연히 지난 세월 동안 몽골에 맞서 싸워왔고, 심지어 몽골인들과의 싸움 때문에 아버지를 잃고 가주가 된 이들이다.
하남을 지키는 방패와도 같은 역할을 했던 집안 앞에서,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를 해봐야 얼마나 먹히겠는가.
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이윽고 포구와 항구를 빠져나온 하남호족 일행은, 조선군 호위와 함께 빠르게 말을 몰아 심양으로 달려갔다.
달려가면 갈수록 현실로 와 닿았는데, 머무는 마을마다 조선군기가 휘날리고 심지어 조선군뿐만 아니라 행정관료가 마을마다 파견되어 다스리고 있었다.
그렇게 감탄과 놀람을 연거푸 내뱉으며, 열심히 달려간 심양.
콰콰쾅! 그들이 도착한 걸 환영이라도 하듯 축포가 터졌고.
“오...!”
“어찌 저런!”
“이럴 수가!”
일행은 심양성을 향해 포격을 토해내고 있는 우람한 산. 전함을 보며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기함을 내뱉었다.
하남출신이 요동 한복판에 위치한 심양에 올 일이 언제 있었겠나. 막연히 광활한 벌판 위에 세워진 고성이자 내륙이라고 생각했던 심양이, 바다에서나 볼법한 전함의 포격을 받고 있는 걸 보며 기절초풍하고 말았다.
하남호족 일행은 그렇게 심양에 도착해 소문만 무성한 백호장군 연오랑을 만났고, 하룻밤 푹 쉬며 여독을 날려 보내고선 날이 밝기 무섭게 백기를 휘날리며 심양성을 향해 나아갔다.
오늘도 아침을 깨우는 포격소리에 잠에서 깨어, 하릴없이 관아의 꼭대기에 올라 심양성내를 바라보고 있던 인물.
심양의 유서 깊은 호족가문의 가주이자, 심양파의 수장인 양문. 그는 콰콰쾅! 굉음과 함께 날아와, 애꿎은 저택 하나를 박살내며 피어오른 먼지구름을 보며 침음을 삼켰다.
‘대체 어찌해야 했을까.’
곰곰이 과거를 더듬어 보이지만 해답은 없다.
하루이틀 고민한 것도 아니고, 지난해 조선군이 북상하면서부터 꾸준히 해왔던 고민 아닌가.
답이 없음을 알고서 지금까지 흐르는 데로 흘러온 게, 할 수 있는 게 전부였다.
“성곽을 더욱 보수하고, 화포를 더 많이 만들었으면 조선군을 막을 수 있었을까?”
“장군...”
양문이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자, 옆에 시립해 있던 노장군이 침음을 흘려댔다.
“말해보게. 자네는 조선군을 경험했지 않나. 대비하면 막을 수 있었겠나?”
“...”
노장군. 과거 조선의 몽골정벌 때 합류해서 거용관을 때려 부수는 걸 함께 한 인물. 고준은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고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 시절. 고준이 본 조선군은 상식과 한계를 뛰어넘은 군대였다. 다른 것도 모두 놀라운 게 사실이지만 가장 두려웠던 건 역시나 화포.
천하제일웅관인 거욕관이 파헤쳐진 무덤처럼 변해버릴 줄은 감히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 후. 고준은 조선에 대항할 방법을 꾸준히 찾으려 했지만... 날이 갈수록 쇠락해지는 심양파의 세력처럼 방법 또한 오리무중이었다.
성벽을 더욱 견고히 쌓는다? 조선백성들이 성벽을 쌓는 일에 치를 떨었던 것처럼, 요동백성들도 노역에 치를 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