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5. 챕터58. 함락하다 (10)
그래도 초기에는 어떻게든 백성들을 부릴 수 있었다. 사는 게 지옥 같더라도, 요동의 권역을 벗어나 도적떼, 마적떼와 다를 게 없는 몽골, 여진부락과 함께 사는 것보단 나니까.
헌데 조선이 여진을 정벌해 북방으로 진출하자, 이젠 노역에 지친 백성들에게 서광이 비췄다. 전에는 바로 옆에 지옥이 있었다면, 이젠 조선이라는 천국이 있으니까.
비단길무역을 통해 요동백성들의 탈주가 가속화 된 게 사실이지만, 그 이전에도 노역과 공역을 버티지 못한 요동백성들이 조선으로 도망쳤고...
전처럼 백성들을 마구 부릴 수가 없으니, 성벽보수나 건설은 꿈도 못 꾸게 됐다.
화포의 개발? 화약조차 제대로 만들기 힘들어, 산동의 초석지원이 없으면 화포를 유지도 못하는데... 대체 뭔 수로 화포를 개량할까.
결국 십여년전의 조선군도 대응할 방법을 찾지 못했으니, 온갖 전쟁을 겪으며 성장한 지금의 조선군을 막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허나... 이 말을 어찌 수십년간 충성을 바쳐온 주군에게 할 수 있을까. 고준은 그저 입을 다물 따름이었다.
“피해는...”
“...”
“아니. 됐다.”
양곤은 질문을 던졌다가 손을 내저으며 주워 담았다.
들어서 뭐할까. 어느 집이 부서지고, 재수 없는 백성 중 누군가 죽었다는 이야기 뿐 이겠지.
‘후...’
사실... 조선군이 아무리 화포를 쏴본들, 가옥이 얼마나 부서지고 사람이 얼마나 죽었겠는가.
하지만 하늘에서 떨어지는 통나무와 포탄은 눈 먼 화살처럼 아무 곳에나 떨어졌고, 그럴수록 성내는 점점 얼어붙었다.
나아가 조선군이 매일 같이 뿌리는 전단으로 인해, 이 두려움과 공포심이 방향을 돌려 요동군부로 향하려 하고 있었다.
민심이 이렇게 흔들리면 당연히 군심도 흔들리기 마련.
사기는 더욱더 떨어지고 백성들뿐만 아니라 병사들조차 슬슬 불만이 생기고 있는 거지.
‘제대로 당하고 있어.’
수성군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높은 성벽이나 화력 좋은 화포가 아니라, 목숨을 걸고 사수하겠다는 항전의지다.
그리고 이 항전의지를 꺾어버리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들을 구원해 줄 지원군이 없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것.
‘아주 지독하게 파고들어 말려 죽이는 구나.’
양곤은 다시금 속으로 한탄을 내뱉었다.
그가 직접 성벽 위로 올라가 눈으로 봤지 않나. 심양을 감싸고 있던 모든 변경요새가 함락당해, 요동군기가 한자리에 모여 있는 걸 똑똑히 봤다.
“요양을 비롯해서 다른 성보에서 연락이 온 게 있나?”
“... 없습니다.”
“그렇겠지.”
조선군이 완전히 포위를 한 걸 알면서도 되물어보건만, 역시나 기운 빠지는 대답만 돌아왔다.
“허면... 가병들은 어떤가? 동요하고 있나?”
“...”
이 또한 더 말해서 뭐할까. 고준은 차마 답을 하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찌 보면 이게 더 큰 문제다.
요동은 군부가 장악하고 있고, 군부라고 한들 호족집안출신이 대부분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요동군호에 속한 징집병 외에도, 가문이 부리는 가병과 사병이 따로 있는 거지.
전에도 말했듯 중앙호족은 지방호족이 중앙정계로 진출한 경우가 대부분.
그러니 중앙호족들은 심양에 머물면서, 대리인이나 식솔을 보내 성 밖이나 지방에 소유하고 있는 전답, 농장, 목마장을 관리해 왔었다.
헌데 이젠 그 돈줄이 전부 조선군 손아귀에 들어갔다.
보수를 받고 가문에 종속된 가병들은 당장 칼을 거꾸로 쥐진 않겠지만, 슬슬 흔들릴 수밖에 없는 거지.
“다른 가문도 마찬가지의 상황이겠지?”
“예... 분란이나 소요가 벌어지진 않았지만, 속으론 불만을 삼키고 있을 겁니다.”
“여차하면 내 목을 따버릴 모의를 하고 있을 지도 모르고?”
“어찌 그런 말씀을!”
“됐다.”
고준이 눈을 번뜩이며 무릎을 꿇었으나, 양곤은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양곤은 요동의 왕이 아니다. 그의 아버지 양문이 요동도사로 있어서 그 지위를 이어받은 거지만, 명조정의 권위가 없는 이상 요동도사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
그가 심양파의 수장이 된 건, 야금야금 이권을 차지하는 요양파에 대항하기 위해 심양호족 및 장군들이 심양파의 이름으로 뭉친 것 뿐.
그러니 목숨을 걸고 그에게 절대 충성을 받칠 가문은 많지 않았지. 농담처럼 한 말이 마냥 농담은 아니었던 거다.
“공성이 더 길어지면... 민심을 등에 업고 칼을 거꾸로 쥘 가문이 나오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나?”
“그렇습니다.”
“풉...”
양곤은 다시금 피식 웃으며 고준의 어깨를 두들겼다.
아버지 때부터 따랐던 고준이야 그렇겠지만... 모두가 그럴 리가 없지 않나. 한 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헌데...”
양곤은 자리에서 일어서 성내를 굽어보다가, 익숙하게 들려와야할 폭음이 들리지 않는 걸 보며 자기도 모르게 말을 흐렸다.
언제나처럼 조선군의 포격이 이어져야 하는데, 어째 뚝 끊겨서 성내는 묘지터 마냥 침묵에 잠겨 있었으니까.
“장군!”
아니나 다를까. 의아한 눈으로 잠시 지켜보기 무섭게 전령이 달려왔고, 고준은 전령의 말을 듣고선 자기도 모르게 눈이 번쩍 떠졌다.
“무슨 일이냐? 보나마나 항복하라는 사신이 또 온 것 같은데...?”
“하... 하남호족이 왔다고 합니다.”
생각지도 못하게 한방 맞은 것 마냥, 산전수전 다 겪은 고준마저도 놀라서 말을 떨고 말았다.
“하남!?”
양곤도 마찬가지.
대체 하남호족이 이 먼 곳까지 왜 왔는지 이해가 안 되서 눈에 물음표를 그리고 말았다.
“많이 부서지진 않은 것 같은데...”
“그래도 을씨년스럽군.”
“음...”
하남호족들은 요동군병의 뒤를 졸졸 따라가면서, 심양성내를 보며 요상한 감상을 토해냈다.
공성전이 펼쳐진 것치고는 혼란이 크지 않은 것 같은데, 반대로 개미새끼 한마리 보이지 않을 정도로 도시엔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포격을 피하기 위해서일까?”
“그럴 걸세. 오면서 봤지 않나.”
“...”
조선군 포대는 화살이 날아와도 맞아 죽을 만큼 성벽에 바짝 다가왔고, 성벽 코앞에 붙어서 포탄을 성벽 너머로 쏘아 올리고 있었다.
말 그대로 날벼락이나 다름없어서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으니... 그저 집안에 숨어서 “제발 우리 집에 떨어지지 않기를!”라고 비는 수밖에 없나 보다.
“이런 분위기라면...”
“우리의 제안이 잘 먹히지 않겠나?”
“그럴 거야. 선택지는 우리냐 조선이냐. 이 둘 밖에 없지 않나? 아마 우리 쪽이 더 구미에 맞겠지.”
하남호족들을 숨기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여가며 대화를 나눴다.
앞서가는 병사들의 무장을 보아하니 징집병도 아닌 가병으로 보이는데... 분명 자신들을 데려다 주고서 가문으로 돌아가 열심히 입을 놀리지 않겠나.
수작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얕은 수작을 부리며, 일행은 곧장 심양관아로 향했다.
미리 사람이 가서 알렸는지 심양군부이자 호족대표들이 전부 한자리에 모여 있었고, 일행은 요동인들의 싸늘한 눈빛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 넘겼다.
기회를 주러 온 이들에게 저런 눈빛을 하면 쓰나.
다들 가볍게 미소를 머금고 얄궂은 눈빛을 흘려보내곤, 조선군의 항복서한과 자신들의 제안서를 내밀었다.
“허...!?”
“이게 무슨!”
“음...!”
조선군의 항복서한이야 전문을 통해서, 또 사신을 통해서 지겹도록 봤으니 특별할 게 없지만... 하남호족의 제안서는 또 달랐다.
한명 씩 번갈아가며 둘러보기 무섭게 다들 기함을 토해냈고, 이게 정녕 진실인지 궁금해 하남호족들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한바퀴 빙 돌아 다시 제안서를 쥔 양곤도 마찬가지.
“이게... 정녕 진심인가?”
“그렇습니다. 장군. 하남연맹의 인장이 보이지 않습니까? 이건 우리 모두의 뜻입니다.”
“하!”
“연맹이라...”
“흐음.”
연맹에 대해선 요동인들도 익히 들은 터라, 각양각색의 반응이 나왔다.
‘연맹은 무슨 놈의 연맹!’이라며 핀잔을 하듯 눈을 부릅뜨는 이도 있고, ‘연맹이라... 나쁘지 않은 체제지.’라고 말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도 있다.
‘긍정을 표하는 이들이 더 많군.’
허나 장사꾼인 하남호족들은 그 와중에도 빠르게 분위기를 살폈고, 분기를 토해내는 이들보다 반기는 이들이 훨씬 많은 걸 알아차렸다.
‘요동인이니 심양파니 뭐니 해봤자. 결국은 호족 아니겠나. 특히나 근본도 없는 요양파에 비하면 심양파는 더욱 그렇겠지.’
하남호족들도 요동의 사정에 대해서는 얼추 알고 있었다.
심양파 호족 태반이 무려 원나라, 동방3왕가 시절부터 몽골인들 밑에서, 그들의 손발이 되어주며 가문을 건사해 왔던 집안 아닌가.
명이 들어서고 나선 그대로 명에 투항해, 몽골인들의 이권을 빼앗고 흡수해 호족으로 성장했다.
그러니 중국호족과 다를 게 뭐가 있겠나. 이들에게도 목숨보다 중요한 건 역시나 가문의 존속과 번영이다.
잠시 장내가 소란해지자, 양곤은 검집으로 바닥을 쾅쾅 때리며 모두를 진정시켰다.
“이게... 가능할거라 보나?”
“예. 모두 진실입니다. 조선은 요동호족가문을 그대로 하남으로 옮기는 걸 도와줄 것이고, 가산을 처분하는 대가 또한 지불할 겁니다.”
“...!”
“허...”
이미 전문으로 봤던 사안이지만, 조선인들이 아닌 하남호족의 입에서 나오니 무게감이 달라졌다. 조선이 약속을 안 지키면, 이제 하남도 엮여 들어갈 수밖에 없으니까.
“보시지요.”
기세를 몰아가려는 듯, 하남호족 낙양 강가의 강충이 웬 나무상자를 열어 건네줬다.
상자 뚜껑이 열리기 무섭게 햇빛을 받아 안이 환하게 반짝였고, 모두는 자기도 모르게 눈이 번쩍 뜨였다.
“호!?”
“뭔가 다르군. 조선에서 만든 건가?”
“과연. 과연! 크흠...”
누군가 조선의 기술력에 대해 감탄과 칭송을 내뱉자 다른 이들의 시선이 사나워졌고, 그는 헛기침을 하며 애써 모른 척 넘어갔다.
허나 이런 반응이 나올 법도 한 게, 강충이 내민 건 조선이 만든 은원보와 금원보였으니까.
“다른 어느 연맹에서 만든 것보다도 순도와 품위가 높은 원보입니다. 이거면 믿으시겠지요? 조선은 원보를 사용하지 않는데, 이번 일을 위해서 특별히 만든 겁니다.”
조선이 약속을 지키려는 의지가 얼마나 높은지 다시금 피력했고, 모두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습니다.”
“...”
“...”
강충이 그리 말을 하고 입을 다물자, 북풍한설이 불어 온 듯 장내는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조선이 이 정도까지 신경 쓰면서 손해 보는 제안을 던졌으면, 조선의 인내심도 서서히 말라가고 있다는 뜻 아닌가.
계속 어깃장을 부리면 훗날의 귀찮음과 번잡함은 감수하고, 제안을 없던 일로 해버릴 수 있다.
‘그리고 그건 우리 모두가 목이 잘린다는 뜻이겠지!’
요동 장군들의 눈빛이 다시금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잘 보이게 최전선에 박아 놓은 변경요새의 군기 옆에는 수백개의 수급이 창대에 박혀 전시되어 있었다.
친절하게도 알아보기 쉽게 명패까지 걸어놨는데... 그들은 요동 지방호족의 가솔들로, 요서의 광녕위부터 북쪽의 개원 근처의 호족들까지 전부 포함되어 있었다.
당연히 심양호족들과는 과거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였고 말이다.
“조선에 호족이 없는 걸 다들 알고 계실 거라 믿습니다. 기업집안이라고 해봐야, 우리에 비하면 한줌에도 못 미치는 걸 알지 않습니까?”
조선이 요동을 살핀 것처럼, 요동 또한 조선의 무역도시를 드나들며 사정을 살폈다.
그 결과. 조선은 옛 명나라보다도 더욱 철저하게 중앙집권화 되어, 호족이나 가문이 고향에서조차 암묵적인 권세를 누리지 못하는 걸 익히 들어왔었다.
“여러분이 조선에 항복한다고 해서, 지금처럼 부귀영화를 영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없겠지요?”
“...”
폐부를 헤집듯 이들의 고민을 그대로 관통하는 말에, 모두는 입을 다물고 강충의 말을 경청했다.
“민간의 백성들과 여러분은 처지가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최선일 겁니다.”
요동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 강충이 자신만만하게 말을 내뱉건만, 어느 누구도 반론하지 못하고 눈만 굴려댔다.
조선이 기존의 요동 기득권 세력을, 전혀 인정할 생각이 없는 건 주지의 사실. 결국 하남호족들의 제안에 마음이 쏠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들 가문과 가솔. 가병들을 전부 하남으로 이주시키게 도와준다는 말이군. 심지어 땅도 주고 말이야.”
“말이 좋아 땅이지. 결국 우리보고 달자놈들의 칼을 막으라는 것과 다를 게 없지 않소!”
“하지만... 조선 밑으로 들어가면, 우리 손에 쥘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걸세.”
하남호족들이 버젓이 듣고 있건만, 요동장군들은 목청을 높여가며 말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하남의 제안은 사실 간단했다.
“어차피 여기 있으면 확실히 다 죽잖아? 몽골과 접하는 변경지역에 땅을 내줄 테니, 차라리 여기 와서 사는 게 더 낫지 않아? 앞으로 몽골과 싸우느라 힘들겠지만, 지금 당장 죽는 것 보단 낫지. 안 그래?”라고 말이다.
‘지금 죽나, 나중에 죽나, 선택을 하라는 말이군.’
양곤은 시끌시끌해진 장내를 뒤로하고,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다른 요동호족들 또한 입으로만 저렇게 까불고, 분명 맹렬하게 머리를 굴리고 손익을 따져보고 있을 거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우리가 그만큼 당신들을 대우해 줄 거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지난 세월 동안 몽골과 싸워오지 않았습니까? 요동기병이 강건한 건, 오래전부터 소문났고요.”
강충은 은근히 요동장군들을 띄워주는 말을 던졌고, 모두는 자기 얼굴에 침을 뱉을 수는 없어서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고 말았다.
사실 조선에게 너무 속절없이 또 형편없이 두들겨 맞아서 그렇지. 요동군이 보유하고 있는 기병은 결코 만만한 게 아니다.
특히나 전마의 수급이 수십년간 끊겨서, 기병이 고사 직전인 중국본토 세력에게는 더욱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