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476화 (476/538)

476. 챕터59. 일으키다 (1)

“그래서 우릴 지원하고 또 우리 가문들을 하남연맹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이 일이 우리 입장에서도 얼마나 중대한 일인지 짐작되겠지요? 우리도 우리의 가산을 떼어줬다는 걸 잊지 말아줬으면 합니다.”

“음...”

“크흠.”

어르고 달래는 강충의 언변에 다들 표정이 미묘해졌고, 그 와중에도 양곤은 빈틈을 찾아 파고들어갔다.

‘분명 이득이 있으니, 이들이 이런 조건을 낼 수 있을 터... 단순히 몽골을 막기 위해서 손해를 불사할 리가 없어.’

양곤 또한 호족인터라, 호족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하남호족은 대부분 상인으로 활동을 한다지만... 그럼에도 호족의 근간은 대토지다. 그 땅에서 나오는 물산과 그 땅을 다스림으로서 따라오는 노비와 가솔. 가병으로부터 진정한 힘이 나온다.

그런데 아무런 대가 없이 땅을 내어준다? 이건 절대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안 그런가?”

“...”

“땅을 내어준 가문은 분명 그에 상응하는 뭔가를 얻을 텐데, 아무리 돈이 많아도 땅을 대체할 순 없어. 특히나 연맹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호족가문이 행정조직이 되었다면 말이야.”

“...”

“그러니 말해보게. 우리에게 내어준 땅을 대신해서, 그대들이 얻을 수 있는 땅은 어디지? 설마 서안이나 몽골이 차지하고 있는 땅은 아닐 텐데 말이야.”

양곤의 물음에 요동장군들의 시선이 일제히 강충에게 쏠렸고, 강충은 옆에 있던 친우들과 가볍게 눈을 마주치더니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숨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얻을 땅은 대명부와 광평부입니다.”

“거긴...!”

“북직례를 차지하겠다고!?”

“허...”

강충의 발언은 폭풍이 되어 장내를 휩쓸고, 모두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대명부와 광평부는 북직례 남쪽. 태행산맥을 따라 하남과 산동사이로 불쑥 삐져나온 지역이었다.

옛 명나라 시절에야 관할구역이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었지만, 명이 망하고 연맹으로 쪼개진 지금.

대명부와 광평부는 하남에게 거슬리는 첨병과도 같은 지역이었지. 반대로 삐죽 돌출된 탓에, 하남이 가장 공략하기 쉬운 지역이기도 했고.

‘그리고...’

지도를 떠올려 지형을 읽자마자 양곤이 든 생각은.

“하남만의 문제가 아니군. 산동도 끼어 들 생각이야.”

대명부와 광평부를 하남이 먹으면 산동과 경계를 맞닿는데, 이 일을 조용히 무마할 수 있겠나.

당연히 물밑에서 이미 결착이 지어졌을 거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을 하남까지 이주시키려면 산동반도를 거쳐야 하는데, 산동호족이 괜히 도와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강충은 “그야 당연한 건데, 뭘 이제 와서 깨달은 척 하시나.”라고 표정으로 말하며, 히죽 미소를 지어보였다.

“조선. 산동. 하남이 모두 손을 잡았단 말인가!”

“정녕 북평부를 공략할 생각이란 말이지?”

“북평부라...”

다들 이미 짐작은 했으면서도 쉽사리 믿기지가 않아, 여기저기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요양파가 북평부를 점령한다고 난리를 피웠지만, 그게 가능할 거라고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북평부는 요동을 먹겠다고 지금껏 아등바등 군력을 투사하지 않았나.

북평부를 싫어하는 건 요양파나 심양파나 마찬가지였으니... 자신의 원한을 조선군이 대신 갚아준다는 말에, 요상한 마음이 들 수밖에.

“아...”

“으음.”

그리고 양곤을 비롯해 몇몇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는 이들은, 강충의 대답을 듣고 숨겨진 협박을 깨달았다.

“심양을 함락시키는 게 힘들어서 가만 놔두고 있는 게 아니었군...”

“보나마나 요왕부와도 밀약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양곤과 고준이 더듬거리며 말을 내뱉었고, 강충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면서 봤습니다. 해안과 닿아 있는 금주위, 복주위, 해주위, 광녕위 전부 조선군기가 휘날리더군요. 특히나 저희가 도착한 해주의 항구는 이미 조선관원들과 장인들이 몰려와 포구를 확장하고 개보수하고 있더군요.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

“...”

다들 차마 말은 하지 못하고 이를 갈았고, 모두를 대표해 양곤이 입을 열었다.

“심양과 요양 말고는 전부 조선에게 함락됐다는 뜻이고, 지금껏 공성전을 본격적으로 진행하지 않은 건 북평부 공략을 위한 준비를 하기 위함이군.”

“예. 그리고 그 작업이 끝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강충은 고저 없이 시큰둥한 말투로 물었지만, 다들 가슴에 비수가 꽂힌 듯 숨을 헐떡거리며 얼굴이 구겨졌다.

북평부 공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후방을 안전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전력을 다해 심양과 요양 공성전에 임할 게 분명.

그때가 되면 이들 군부와 호족은 다 죽은 목숨이다.

모두의 속내를 읽은 것 마냥, 강충은 은근한 말투로 한마디 더 던졌다.

“바다에서 돌아다니던 조선의 싸움배가 이 내륙 한복판에 등장했는데...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남직례의 남통성이 어떻게 됐는지 익히 들어보셨을 텐데요.”

“...!”

“끄응.”

다들 머릿속에 미래가 그려지는지, 차마 반론도 펼치지 못하고 똥 마려운 것 마냥 끙끙 앓았다.

조선전함이 혼하를 타고 북쪽에서 내려왔건, 요하를 타고 남쪽에서 올라왔건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요동반도의 항구가 전부 점령당했다면, 얼마든지 조선전함이 강을 거슬러 올라올 수 있다는 점.

“요양에도 조선의 싸움배가 도착했나 보군.”

“오면서 살펴본 바. 이곳엔 고작 3척이지만, 그곳엔 8척이 있더군요. 시간이 흐르면 얼마나 더 늘어날지는 아무도 모르지 않습니까?”

강충은 그리 말을 하고 입을 다물었지만, 눈으로는 “남통수군조차 조선해군을 막지 못하고 함포포격을 맞았는데, 수군도 없는 너희가 버틸 수 있냐?”라고 묻고 있었다.

“...”

“...”

다들 벙어리마냥 입은 꾹 다물고, 소리가 날 정도로 요란하게 눈만 굴리며 서로 눈빛을 마주치느라 바빴다. 분명 수지타산을 생각하며, 어떻게 해야 최선일지 예상하는 모양이다.

그때. 누군가 발악하듯 한마디 내뱉었다.

“광녕성! 비록 다른 지역은 함락됐어도, 그 곳은 멀쩡할 터. 지원군이 오면 공성이 더 길어질 수 있다!”

“음. 광녕성이라.”

어찌 보면 일리가 있는 말에, 눈빛이 요란하게 굴렀다.

광녕성은 쇠락하는 요동군 중에서도 그나마 전력을 유지하고 있는 곳.

그곳을 함락시키는 건 어쩌면 심양보다 더 어렵고, 그곳에 있는 병력 또한 만만치 않다.

허나 강충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걸까? 비릿하게 느껴지는 웃음을 지으며 그저 한 마디를 던졌다.

“광녕성주를 믿으십니까? 몇이나 되는지 추산하기도 힘든 조선군을 뚫고, 심양과 요양을 구원하기 위해서 올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큽!”

“크흠.”

모두는 사래가 걸린 것 마냥 헛기침을 하더니, 슬그머니 눈을 내리 깔고 말았다.

광녕성주 자리가 가시방석이자 계륵인 건 모두가 알고 있고, 요양파도, 심양파도 아닌 인물을 꽂아넣기 위해 해마다 골머리를 싸맸지 않나.

그러니 더 말할 필요도 없고... 어쩌면 인질 겸으로 심양에 붙들려 있는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닥치고 빨리 항복해라!”라고, 먼저 백기를 들지도 모르는 일이지.

‘광녕성주가 그렇게 줏대가 없는 인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리나 요양파에 절대 충성을 바치는 인물도 아니지 않나.’

양곤은 광녕성주를 떠올리며, 쓴물을 삼키고 말았다.

그치도 요동호족 태생으로, 정쟁에 끼어들지 않고 요동의 안전만 바라는 인물이니... 결코 자신들이 바라는 대로 움직이지 않을 거다.

“...”

“...”

장내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가.

“궁금한 게 있군.”

다른 이들의 체념한 눈빛을 읽은 양곤이, 씁쓸한 미소를 숨기지 않고 입을 열었다.

“말씀하시지요.”

“요양파 놈들에게도 우리와 똑같은 제안이 갔나?”

“예. 다만 저희보단 산동연맹이 주가 됐습니다.”

“요양파 놈들을 산동으로 이주 시킨다...?”

“뭐... 하남으로도 오긴 올 겁니다.”

강충은 자기도 확신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고, 잠깐 성토의 장이 되어 요양파를 욕하는 목소리가 장내를 종횡무진 질주했다.

“허면 아까 했던 질문을 또 해야겠군. 산동은 어딜 얻을 생각이지?”

“저희와 함께 대명부와 광평부를 나눠 가질 겁니다.”

“산동입장에선 하간부를 얻는 게 더 나을 텐데?”

하간부는 북직례 남쪽. 그리고 산동 북쪽과 맞닿아 있는 지역으로, 과거 산동의 칭왕자 공청을 제거하는 동안 조선군 별동대가 시원하게 약탈하고 간 지역이었다.

조선은 그 당시 호족 및 지주집안, 행정문서가 있는 관아만 중점적으로 털고 다녔고, 그 여파로 인해 하간부의 통제력이 약해져 북평부 내에서 하간부의 이권을 차지하기 위한 정쟁이 벌어졌었지.

그렇게 약해진 만큼, 산동이 노리기에 딱 좋은 지역인데...

“글쎄요. 그건 저도 모르겠군요.”

더 말해줄 생각이 없는지, 강충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오리발을 내밀었고, 그걸 알면서도 더 캐묻지 못해 입을 다물고 말았다.

‘뭔가 조선과 또 밀약을 맺은 게 있군.’

그게 아니고서야 땅 욕심이 그득그득한 호족들이 손가락만 빨고 있겠나. 뭔가 있겠지만... 추궁해봐야 대답은 듣지 못하고 처지만 궁색해 질 거다.

“그 놈들하고 이제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한단 말이지?”

“빌어먹을...”

누군가 성토하듯 욕을 내뱉고 말았다.

지금껏 물밑에서 치열하게 싸워왔던 적이, 위부의 위압으로 인해 동료가 될 거라고 하니... 기분이 좋을 리가 있나.

강충은 약 올리듯, 혹은 위로하듯 말을 덧붙였다.

“추측컨대 요양파는 생각만큼 이주를 많이 하진 않을 겁니다. 몇몇을 제외하곤 사실상 군벌에 더 가깝고, 요동반도의 상인집안과 연합한 세력 아닙니까? 지금 당장은 수가 많아도, 막상 까보면 얼마 없을 거고... 그나마 있다고 한들 하남으로 가는 것보다 북직례로 가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자기들 고향으로 말이지?”

“시건방진 놈들...”

강충의 속뜻을 알아차리고서, 몇몇이 다시금 이를 갈며 열분을 토해냈다.

요양파는 과거 연왕부의 패잔병들이고, 그런 만큼 심양파처럼 역사가 깊은 호족이 드물었다.

지휘관급이 아닌 이상 대부분 일반 백성들인데, 그들이 요동에 와서 터잡은지 벌써 30년이 훌쩍 넘었다.

이젠 요동을 고향이라고 생각해도 틀리지 않고, 설령 간다고 한들 무슨 차이가 있겠나. 어쩌면 사서 고생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북직례 출신 호족들은 다르겠지.’

그들 입장에선 권토중래가 따로 없을 거다.

북직례에도 역사 깊은 호족은 존재했다. 이들은 원나라 치하에서 중앙정계에 진출하진 못해도, 몽골인, 색목인 아래에 위치해 마름 비슷한 중간관리인 역할을 하며 가문을 유지했지.

이후 명이 들어서면서 몽골의 이권을 흡수해 옛 성세를 되찾았고, 북직례에 연왕부가 들어서자 그대로 연왕부와 손을 잡았다.

헌데 원나라 시절에도 끊어지지 않았던 명맥을 끊어버린 건, 운석핵꿀밤 후 벌어진 연왕부 내전이었던 것.

완전히 씨를 말리려드는 북평부의 눈을 피해, 요양파 호족들은 산동상인의 힘을 빌려 식솔과 가솔들을 요양으로 데려왔을 정도였지.

그러니 조선과 산동의 제안은 대명부와 광평부를 고향을 둔 호족들에겐, 절호의 기회이자 운명처럼 다가왔을 거다.

“안 그런가?”

“예. 그럴 겁니다. 수구초심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고, 그랬기에 지금껏 객기를 부리듯 북평부 정벌을 주장하던 요양파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

“개원의 상인들이 조선에 항복한 건 알고 계시겠지요? 요동반도에 기반을 둔 상인집안이라고 해서 다를 것 같습니까? 그들은 이주 대신 조선에 귀화할 겁니다.”

“끄응...”

“썩을.”

“망할 놈들.”

모두는 개원상인들을 욕하며 한마디씩 하고 말았다.

개원이 함락된 건 이미 아는 사실이고, 그 경유 또한 알고 있었다. 무려 조선이 직접 알려줬으니까.

그러니 요동반도의 상인집안이 어떻게 움직일 지는 눈에 훤히 보였다.

상인집안 중에선 역사가 깊은 집안이 없고, 요양파도 지금까지 그들을 뜯어먹느라 여념이 없었으니... 불만이 없는 집안이 있었겠나.

요동반도의 크고 작은 상인집안이 요양파와 손을 잡은 건, 그저 요동반도를 장악한 이들이 요양파라서 그런 거지... 다른 이유가 전혀 없었다.

“지금 당장은 요양파가 심양파에 비해 덩치가 크다지만, 막상 본토로 이주할 집안은 비슷할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우려는 기우라고 생각되는 군요.”

“...”

“더 궁금한 건 없으십니까? 결정을 내리시면, 세세한 건 따로 정리를 하면 될 것 같습니다만...”

강충은 손에 들린 항복서한 사본을 가볍게 흔들었다.

항복문서야 가볍기 그지없지만... 이런 식의 항복은 또 처음 있는 터라 재산을 얼마나 가져갈 수 있는지, 이주는 또 어떤 방식으로 할지, 가산의 처분은 어떻게 할지 등등을 논의해야 하지 않나.

“물론 추가적인 논의가 오래 끌리면, 조선이 싫어할 거라는 건 아실 거라고 믿고...”

“더 말하지 않아도 되네. 이만 나가보게.”

“예.”

강충은 양곤의 축객령에 군말 없이 허리를 굽히고, 회의장을 빠져나왔다.

혹여나 누군가 변심을 할지도 모르니, 심양에 거주하는 모든 가주들이 모여 밤낮을 잊고 토의에 들어갔다.

허나 그런 공허한 논의에 쐐기를 박은 건, 조선군의 과감한 움직임이었다.

심양성 서문과 동문에 바로 붙어 있는 포구를, 화포를 앞세워 방비한 조선군이 본격적으로 확장공사에 들어갔기 때문.

대체 얼마나 많은 병력을 동원한 건지 몰라도, 흡사 치수공사를 하듯 강가 양쪽에는 조선군이 가득가득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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