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477화 (477/538)

477. 챕터59. 일으키다 (2)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니, 먹이를 옮기는 병정개미마냥 강가는 온통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다시금 기가 꺾이고 말았지.

북방신도시에서 미리 준비해둔 모래, 자갈, 석회, 바윗돌을 실은 신형조운선 수십척이 제 집 안방마냥 심양성을 지나쳐 혼하를 가로질러갔고, 그 자재가 내려질 때마다 전에 없던 항구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끝으로 하룻밤이 더 지나자, 그들이 예상했던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

항상 북쪽에서부터 흘러와 서쪽으로 향하던 신형조운선이 아니라, 남쪽에서 올라와 동쪽으로 오는 신형조운선이 등장한 것.

이건 혼하와 요하 일대가 완전히 장악 당했다는 뜻이고, 북평부 원정을 위한 수로보급선이 완성을 코앞에 두고 있다는 뜻 아닌가.

결국 모두는 항복문서에 서명을 남기는 수밖에 없었다.

심양성이 조선군의 수중에 들어왔지만, 어찌 된 게 딱히 달라진 건 없었다. 오히려 더 부산스럽고 활기차졌다는 뜻이 맞으리라.

요동군부가 소장하고 있던 행정문서는 그대로 조선군의 손에 들어왔고, 한성에서 파견 온 각 부서의 관원들은 빠르게 요동 백성들의 인적사항을 파악하고 분류해 나갔다.

조선 입장에선 지금 당장 밭을 개간해 씨를 뿌리지 않으면, 내년에도 요동 백성들을 먹여 살려야 할 판국이니까.

새롭게 단장한 부두도 정신 사납긴 마찬가지.

이쪽은 신형조운선에 짐을 한보따리씩 짊어진 사람들이 우르르 올라타고 있었다.

각양각색의 갑옷을 입고 팔뚝에는 비갑을 차고, 심지어 박도와 대도를 차고 있는 이들이 대다수인데... 무장이 건실한 걸로 보아, 딱 봐도 호족가문의 가병들로 보였다.

그들의 호위를 받으며 줄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있었는데.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비단옷을 차려 입었음에도, 다들 큼지막한 보자기를 쥐고 있었다.

이주를 결심한 요동호족들이 배에 올라타고 있었던 것.

그리고 귀퉁이가 허물어진 성벽 위에 올라서, 그들을 바라보는 이들이 있었다.

“질질 끌더니, 갈 때는 꽁지 빠져라 빨리 가는 군요.”

“맞습니다. 대감. 저럴 거면 진작 항복할 것이지.”

“쯧쯧.”

연오랑은 뭔가 심통이 나 있는 것 같은 이순몽과 유은지를 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천생 돌격장수로 태어나서 그런지, 나이를 먹어 원숙해졌음에도 시원하게 한바탕 하지 못해서 아쉬운 모양이다.

“여기서 하남까지 가는 데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데, 겨울이 오기 전에 빨리 가야지.”

“그야 그렇지만...”

“항복한 놈들을 대접해 주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저들이 우리 배를 타고 가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썰어버린 지방호족들처럼, 저 놈들도 끝장을 냈어야 하는 데 말입니다.”

“아서라. 엎치나 메치나 호족들을 치우기만 하면 그만이야. 빨리 끝내는 게 낫지. 그리고 어차피 내려갈 배인데, 뭔 상관이냐. 용선료도 뜯어냈는데.”

조선이 바라는 건 요동에서 호족세력을 없애버리는 것.

이 과정에서 최대한 피가 안 흘리는 게, 외과수술을 하듯 호족만 싹 도려내는 게 최선이다.

그러니 돈을 조금 써서 빠르고 시원하게 싹 치워버리는 게, 나중을 생각하면 훨씬 이득이지.

“게다가 돈을 줘봐야 얼마나 줬다고 그러냐?”

“그런가...”

“그런가가 아니라 그게 맞아. 인마. 기껏해야 땅값이 전부인데, 뭐 얼마나 줬다고... 가산도 알아서 가져가게 했으니, 계산이 지저분해질 것도 없었고 말이야.”

“예에...”

“큼큼.”

한마디도 이기지 못하자, 둘은 괜히 먼 산만 바라봤다.

이주하는 이들이 보따리를 싸매고 있는 까닭이 뭔가. 조선은 자기 손으로 들고 갈 수 있는 가산은 가져가게 허락했기에, 다들 값나가는 물건이나 가문에게 소중한 물건을 가져가고 있었던 거지.

가병들의 무장을 해제하지 않고 그대로 보내는 것도 같은 이치.

저들은 앞으로 하남으로 가서 새롭게 터전을 일궈야 하는데, 몽골과 싸울 이들을 맨손으로 보낼 순 없지 않나.

‘무장을 했다고 한들... 이제 와서 문제가 생길 일은 없겠지.’

이미 항복까지 다 하고 떠나는 마당에, 조선군에게 칼을 휘두를 수 있을까. 일을 벌여도 도망칠 곳도 없으니, 감히 그런 짓은 꿈도 꾸지 못하리라.

“그런데... 생각보다 이주하려는 이들이 많군요. 못해도 만명 가까이 되지 않습니까?”

“심양성이 썰렁해질 정도로 많이 빠져나갔는데... 이래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양민으로 해방되면, 이곳에 많이 남을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이순몽과 유은지는 떠나는 이주선단을 보며 중얼거렸다.

둘의 말이 틀린 게 아닌 게, 만 명이면 심양백성의 5분지 1이 이주를 하는 셈.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조선의 지배를 반기는 이들은 크게 두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가진 게 쥐뿔도 없어서 감히 떠날 생각도 못하니, 차라리 확 뒤집혀서 나한테도 콩고물이 떨어지고 기회가 생기길 바라는 빈곤한 이들.

절대다수의 요동백성이 여기에 속했지.

둘째는 가진 게 많아서 조선에게 뜯기더라도, 오히려 미래를 생각하면 귀화하는 게 이득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로...

개원상인. 요동반도의 상인집안. 호족들에게 짓눌려서 살면서 위로 올라갈 기회를 얻지 못한, 호족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자잘한 집안들이지.

이 외의 최상위에 군림했던 이들과, 그 부스러기를 먹던 이들은 귀화보다는 이주를 택했다.

“요동백성들은 쥐어짰어도, 자기 부하들은 잘 챙겨줬나 보지.”

‘보나마나 뻔하지 않겠어.’

연오랑은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을 이어갔다.

시대와 나라를 불문하고 중앙이 흔들려 지방호족이 힘을 키우기 시작하면, 당연히 어떤 식으로든 땅과 인력을 늘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수단은. 각종 세금이나 부역을 일반백성들에게 부과하고, 반대로 호족들에게는 특혜를 베푸는 것.

이러면 자유로운 양민에서 소작농이나 종으로 전락하더라도, 적어도 먹고 살 걱정은 덜해도 되지 않겠나.

“이래나 저래나 속 편하게 사는 게 낫지!”라고 외치며, 자발적으로 사노비가 되어 호족 밑으로 들어오게 되는 거지.

옛 고려나 중국왕조, 심지어 일본에서조차 똑같이 벌어졌던 일이고, 명이 망한 지금 중국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요동도 그 흐름을 벗어날 수 없었고, 호족가문의 가병, 식솔, 노비, 소작농 중에선 그들을 따라가는 게 낫다고 판단한 이들이 많았던 거지.

“후환이 두려운 것도 있겠지요?”

“그런 것도 있겠지. 저들도 우리가 소작농과 노비들을 해방시킨 걸 알고 있으니까.”

“예.”

이순몽은 미래가 그려지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주인보다 마름이 더 무섭다고 하지 않던가.

해방되어 지주의 땅을 불하 받은 소작농과 노비들 입장에선, 지난날 자신들을 착취하는 데 앞장섰던 호족 노비들을 곱게 볼 리가 없다.

자신을 보호해 주던 뒷배가 없어졌고, 조선이 요동을 넘겨 받아 어수선한 지금. 밤에 몰래 쳐들어와서, 해코지를 하거나 칼침을 놓을지 누가 알겠나.

자기 보신을 위해서라도 이주를 택한 사람도 있을 거다.

“가병들도 그렇겠지요?”

“어쩌면.”

“땅을 받아도 어떻게 써먹을지 몰라서 두렵다라... 거참.”

유은지는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차고 말았다.

가병들이 죄다 따라간 것도 비슷한 이치였다. 가병은 녹봉을 받으며 가문에 종사하는 칼잡이지만, 그 세월이 오래되면 없던 정도 쌓이기 마련이다.

나아가 호위를 맡든, 호송을 담당하든, 잡일을 하든, 칼잡이 생활을 오래 해왔으니... 한순간에 농부나 다른 직종으로 바꾸는 게 어디 쉬울까.

조선군은 사병을 인정하지 않으니, 칼잡이 생활을 하려면 조선군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이 또한 녹녹치 않은 거지.

이 모든 걸 따져봤을 때. 그냥 말이 통하고 문화도 비슷한 하남으로 가는 게 낫다고 판단한 이들이 많았을 거다.

“가솔과 노비들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들도 불투명한 미래가 두려웠을 테니 말입니다.”

“음. 아마 그렇지 않을까?”

연오랑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을 흐리고 말았다.

‘이렇게 많이 따라갈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다른 이들이야 그렇다쳐도, 가문의 잡일을 도맡아하던 시종들이나 노비들까지 줄줄이 따라나설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야. 조선도 공노비와 사노비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사전 작업을 얼마나 오래 했는데.’

그는 예전에 해왔던 작업을 떠올리며,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노비를 해방시키는 게 좋다고 무작정 해방시키면, 그 노비들이 어떻게 먹고 살 건가.

먹고 살 기반을 마련해줘야, 쫄쫄 굶은 이들이 다시 양반이나 향리집안으로 회귀하는 걸 막을 수 있었다.

그래서 지독할 정도로 양전사업에 몰두해 땅을 늘리고 생산성을 높였고, 기업집안을 밀어줘서 일자리를 만들어냈지.

이러한 조선의 사정에 대해서 정확히 모르는 호족 노비들에게, 말도 안 통하고 문화도 다른 조선의 지배하에 사는 건... 맨몸뚱이로 황야에 떨어진 것과 같은 심정일 터.

차라리 그들 주인을 믿고, 예전처럼 사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거다.

“뭐... 예상보다 많긴 하지만, 오히려 잘 됐다고 봐야겠지.”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마냥 부정적인 건 아니다.

“...?”

“깊게 생각할 것 있나. 이 땅에 남은 이들은 결국 우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사람만 남은 거 아냐? 조선화 작업이 더 빨리 진행되겠지. 우리 말을 잘 들어서 뭐라도 하나 더 얻어내려고 할 거고 말이야. 원정 동안은 물론, 앞으로도 요동이 위태로워질 가능성은 한층 줄어들겠지.”

“흠... 그렇겠군요.”

“애초에 요동 땅에서 본토나 남방만큼 소출이 나올 거라곤 기대도 안했으니 말이죠?”

“그렇지. 적어도 우린 요동군부만큼 과한 세금을 걷지 않을 건데, 반대로 신 작물을 키우기 시작하면 전보다 더 다양하고 많은 수확물을 얻게 될 터... 자신들이 가져가는 것도 많아질 텐데, 우리의 통치에 반기를 드는 이들은 없겠지.”

“예.”

“그럴 겁니다.”

이순몽과 유은지는 의구심도 없이 고개를 끄덕여댔다.

이미 북방에서 겪어봤던 일 아닌가. 그 거칠었던 여진인들조차, 조선의 신문물에 감복해 말썽은커녕, 적극적으로 조선인이 되어 위로 올라가길 갈망했다.

“항산恒産과 항심恒心이란 말이지요?”

“그걸 여기에 갖다 붙여야 할지 모르지만, 틀린 말은 아니지.”

연오랑은 맹자를 읊는 이순몽을 보며,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우리 입장에선 많다고 해도, 저들이 하남과 산동으로 이주한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겠습니까?”

“없진 않을 거야. 하남과 산동이 가호가 많다고는 한들, 아국과 엇비슷하지 않나. 영향이 없는 건 아니겠지.”

“흐음...”

둘은 곰곰이 주워들은 정보를 규합하며 머리를 굴려봤다.

중국이 땅도 넓고 사람도 많다지만, 어떤 의미론 중국본토 전체를 따져봤을 때 그렇다는 거다.

연맹으로 쪼개진 지금. 산동의 인구수는 조선의 3분의 2정도 되고, 하남은 조선을 조금 뛰어 넘는다. 진짜 사람이 바글바글한 곳은 사천과 호광, 그 다음으로 강남연맹이지.

그런 면에서 보면 고작 만명, 아직 항복하지 않은 요양에서 비슷한 숫자가 이주한다고 해도 이만이 조금 넘을 텐데... 과연 이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다만 생각해 봐야할 건, 저들이 일반 백성이 아니라 가병들이 대부분이라는 거고, 그것도 하남에선 드문 기병이라는 점이겠지.”

“아... 하긴 그렇겠군요.”

“아아. 요새 연대병들하고만 함께 해서 그런지, 깜빡 잊었습니다.”

둘은 연오랑이 뭘 말하는지 깨닫고, 히죽 웃음을 지었다.

한 마디로 농부 이만명이 아니라, 대충 반으로 뚝 잘라 기병 만명이라고 생각하니... 체감이 확 된다.

산동조차 오천의 기병을 만들려고 조선에 손을 벌리며 피똥을 쌌는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기병대는 충분히 가치가 있을 거다.

“그래서 요동군의 전마를 함께 보내준 거군요?”

“뭐. 겸사겸사지.”

심양 근처에 모아뒀으나 써먹을 곳이 없어서, 농마를 대신해 밭을 갈던 요동군 전마들. 이 녀석들은 이미 말몰이꾼이 된 조선기병과 함께, 요동반도 끝 금주를 향해 질주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곳에서 산동상선에 태워서 산동으로 보낼 계획이지.

“조금 아깝긴 한데...”

사정을 알았지만, 이순몽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그 놈들이 퍼먹는 말먹이를 생각하면 빨리 치워버리는 게 나아. 더불어 심양호족들에게 내어줄 자금도 아낄 수 있었고.”

“그건 그렇지요.”

“흐음... 그게 그렇게 되나.”

이순몽은 머릿속에 주판을 올려놓고, 열심히 셈을 이어갔다.

조선은 심양호족들의 전답, 장원, 목장 등의 재산을 구입해 대가를 지불하기로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시세대로 그냥 줄 순 없지 않나.

대충 깎아낸 후에, 산동으로 이주하는데 드는 용선료를 비롯한 각종비용, 끝으로 전마의 값까지 퉁쳐서 계산했다.

“우리나 저들이나 사실 손해 본 건 없어. 저놈들은 분명 가지고 있던 재산을 팔아서 현물이나 패물로 바꿔놨을 걸? 그게 아니고서야, 집기도 아닌데 노비들까지 한보따리씩 짊어지고 갈 리가 없지. 쯧쯧.”

“...”

“...”

연오랑은 저 밑에서, 나뭇잎에 올라타는 개미처럼 움직이고 있는 호족 식솔들을 가리켰다.

등에 짊어지고 있는 보자기의 형태만 봐도, 저 내용물이 짐작된다. 저건 딱 봐도 비단필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모양새다.

조선군이 북상한 건 작년에 벌어진 일.

사태의 심각성을 안 요동호족들은 어떻게든 살 방도를 궁리했을 거다. 그리고 최악의 상황. 심양과 요양이 함락당해, 자신들이 조선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까지 생각했겠지.

허면 가문을 재건하든, 아니면 다른 곳으로 도망치든, 뭘 하든 꿍쳐놓은 자금이 있어야 미래를 꿈꿀 수 있지 않겠나.

어떻게든 소지하기 쉬운 원보나 패물을 긁어모아서, 숨겨놨을 거다.

“안 그러냐?”

“그럴 가능성이 크죠. 요동군부가 부패에 찌든 건 익히 들었으니까요. 덩치를 키우기도 벅찬 판국에, 자기 살점을 뜯어 먹은 건...”

“여차하면 요동을 버리고 다른 곳에서 새출발을 하겠다는 속셈 아니겠습니까? 비록 우리가 이렇게 빨리 움직여서, 요동을 집어삼킬 줄은 몰랐겠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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