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8. 챕터59. 일으키다 (3)
“그럴 거야. 요양파는 더 말할 필요도 없고, 심양파도 다 거기서 거기인 놈들이니까.”
연오랑이 호족의 습성을 꿰뚫고 혀를 차자... 과거에 자신이 양반 집안이었던 걸 잊어먹기라도 한 것 마냥, 둘 모두 그를 따라서 혀를 찼다.
“그러니 저걸 뜯어내려고 했으면, 저놈들도 가만있지 않았을 걸? 어떻게든 질질 끌었을 텐데... 그럼 계획이 꼬이면서 피곤해졌겠지.”
“저들이 쉽게 항복한 건, 우리가 알면서도 놔줄 걸 알았기 때문이겠군요. 땅을 잃어버리더라도, 자금과 사람은 가져갈 수 있으니까요.”
“어. 그럴 가능성이 크지. 더군다나 아무리 몽골과 맞닿아 있다고 해도, 하남은 요동보다 훨씬 풍요로운 곳. 자금과 사람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문을 재건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거다.”
“예.”
“...”
둘은 한푼의 의구심조차 없이, 연오랑의 말에 동의했다.
끝으로 이 모든 수고로움을 덮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계획대로 저들이 하남과 산동으로 들어가게 되면, 지금껏 이어온 대계에 도움이 될 거다. 과연 얼마나 오래갈 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말이야.”
“대계라 함은...?”
“분열된 중국의 정세가 유지되는 것 말이다.”
“...!”
“음.”
연오랑이 먼 미래를 보듯 시리게 눈을 뜨자, 둘 모두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닫고 눈빛이 깊어졌다.
명이 망한지 30년이 넘었다.
개혁 세대가 조금씩 조정에 입조하고 있지만, 대세는 이른바 운석핵꿀밤 세대.
운석핵꿀밤으로 개판이 된 시대를 거치며 자주화에 눈을 떠서, 중화와 사대사상을 버리고 조선의 정체성 확립에 열을 올리고.
남방소국까지 이어지는 무역을 통해서, 막연히 알던 중국의 저력과 진면목을 음으로 양으로 제대로 깨닫게 된 조정관료들.
이들이 주도하는 조선조정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단연코 하나로 통일된 중국왕조다.
이 불안감과 두려움이 얼마나 컸으면, 지금까지도 연호를 쓰지 않고 조선력이라는 근본 없는 연호를 써왔겠는가.
나아가 전례 없던 조차지 건설에 찬동하고, 남의 땅에 가서 칭왕자를 대신 제거하고, 한편으론 그저 호족무리에 지나지 않는 집단조차 연맹이란 이름으로 나라 취급을 해줬다.
원래 역사에서의 조선을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일이 거듭 된 건, 명나라가 망하고 중국이 쪼개진 말도 안되는 상황을 유지시키고 견고히 만들기 위해서였지.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번 일로 인해 섬서몽골과 오이라트의 공격을 더 쉽게 막아낼 수 있을 거야.”
“어찌 보면 얼마 안 되는 기병전력이지만, 지금까진 이것조차 없었을 테니까 말이지요?”
“어.”
한중에서 하남으로, 섬서에서 서안(장안)을 넘어 하남으로 진출하기 위해선 첩첩산중을 지나와야 하는 건 물론, 삼국지 시절부터 지금까지 개보수된 호로관과 같은 산악요새를 뚫고 와야 한다.
하남은 이런 산악지형 곳곳에 요새와 관문을 건설해서 몽골기병을 막고 있었는데, 여기에 기병전력이 추가되면 전황이 바뀔 수 있다.
무조건 수성만 하는 걸 넘어서, 기병을 활용해 치명적인 역습을 감행할 수 있으니까.
“저들이 힘을 키워, 하남이 방어를 넘어 공세로 넘어가는 건...”
“힘들겠지.”
“예. 힘들 겁니다.”
둘 모두 그 걱정은 안 되는 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막는 데 여념이 없는 하남연맹이 뭔 힘이 있어서 거꾸로 밀고 올라가겠나. 지역방위에 적합한 연맹 연합군은 지키는 건 잘해도, 타지로 나가서 싸우는 건 원래 못하고 안하는 법이다.
“그럼 하남과 서안을 향한 쓸데없는 공세는 줄어들 거고, 섬서몽골과 오이라트도 기조를 바꾸겠지. 이미 바뀌고 있겠지만.”
“어떻게 말입니까?”
“옛 원나라 시절에 몽골이 어떻게 번영했고, 망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지 않겠어? 그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노력은 하겠지만, 결국 따라갈 수밖에 없을 거야.”
“아! 저희와 사정이 비슷할 수도 있겠군요.”
“초지와 농지... 지금처럼 강력한 군세를 유지하는 건 점점 더 힘들어지겠군요.”
이순몽과 유은지도 이리저리 구르면서 확실히 시야가 넓어졌는지, 군사를 넘어 경제의 문제를 읽어내고 있었다.
농지와 초지는 공존할 수 없고, 더 나은 생산량과 수입을 얻기 위해선 농지가 느는 게 좋다.
이 말은 유목민족에서 농경민족의 체제로 전환된다는 거고, 이래서 옛 원나라는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하다가 중국식으로 물들어버렸지.
섬서몽골과 오이라트라고 뭐 다를까.
성장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농지를 선택해야하는 거고, 이럴수록 그들의 군사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는 거지.
몽골이 섬서와 한중으로 진출한지 10년이 훌쩍 넘었다.
조선의 운석핵꿀밤 세대나 개혁 세대처럼, 몽골 또한 중국 세대가 탄생하기 마련.
척박한 몽골초원이 아닌 그나마 나은 한중과 섬서에서 태어난 몽골인들은 그들의 선조와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결국 언제가 됐건 몽골세력은 국가체제를 정비할 거고, 지속적인 부와 성장을 위해선 대치상황을 타계하고 중국내륙과 거래를 시작하게 될 텐데... 그렇게 돈이 엮이기 시작하면, 싸움도 힘들어지지.”
건드리면 모두가 피를 보는 데, 누가 쉽게 칼을 뽑아들까.
특히나 어딘가를 희생할 수 있는 중앙왕조가 아닌, 어느 누구도 손해 보기 싫어하는 연맹이라면 더욱더 힘들 거다.
“...”
“그 상태가 지속되어 중국 서쪽 지방이 분리되면, 옛 명나라 시절에 비하면 못해도 4분의 1은 떨어져 나갈 거야.”
“...!”
사천, 대리, 섬서의 땅 크기를 생각하면 거의 3분의 1이지만, 토지의 비옥도와 인구수를 생각하면 4분의 1정도.
“이대로 대치를 유지하면서 한 5,60년만 흘러봐. 과연 서쪽 땅을 한족들이 자기들 땅이라고 생각이나 할까? 설령 자기 땅이라 생각한다고 해도, 서쪽에 사는 사람들 생각은 전혀 다르겠지.”
“강남이나 강북에 통일왕조가 들어선다고 해도 그렇지요?”
“어.”
“그리고... 그 대계는 지금과도 이어져 있고 말이지요.”
이순몽은 묘하게 음흉한 눈을 하고서 말을 끝맺었고, 연오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인데... 정리는 잘 되고 있냐?”
연오랑이 화제를 돌려 은근히 묻자, 둘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답을 늘어놨다.
“저희가 따로 손 쓸 것 없이 한성에서 올라온 관원들이 알아서 잘 하더군요. 해군들은 포구 건설과 함께 치수공사를 하고 있고...”
“저희는 보급마차를 관리하면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보급대와 화기대가 어디까지 갔다고 했지?”
“파림좌기를 넘어 열하에 도착했다고 알려왔으니... 지금쯤이면 몽골남부연맹의 영역에 도착했을 겁니다.”
‘이제 진짜 다가왔군.’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그 전의가 느껴져서 일까? 이순몽과 유은지 또한 히죽 송곳니가 보일 정도로 입술을 들어올렸다.
“심양의 정리가 마무리 되면, 우린 곧장 움직이는 거 알고 있지?”
“흐흐.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한바탕 시원하게 달릴 일만 남았지요.”
“그래. 한바탕 시원하게 달려보자고.”
연오랑은 둘의 미소가 전염된 듯, 저 먼 서쪽을 보며 히죽 웃었다.
심양이 항복했다는 소식은 가장 가까운 요양으로 먼저 날아갔다.
뒤이어 의주에서 보급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태종에게, 한성에 앉아 조선 전체를 조율하는 세종에게. 광녕성을 포위하고 있는 조선군에게.
끝으로 산동상인의 입을 통해서, 중국을 비롯한 모든 세력과 나라로 퍼져나갔다.
그와 함께 요동반도의 포구와 항구가 재단장을 속속 끝마쳐가자, 조선은 기지개를 켜듯 한껏 몸을 일으켰다.
거대한 해일이 되어 요동을 집어삼킬 기세로, 민관 모두가 요동을 향해 달려 나갔다.
“이쪽으로 옮겨!”
“조심조심! 천천히 내려!”
“이 멍청아! 거기가 아니라 여기라고!”
광녕성의 보급기지 역할을 하던 연산항은 언제 조선군이 쳐들어왔냐는 양, 번잡함과 활기참의 끝을 보여주고 있었다.
온 사방에 검은두정갑을 입은 해군병들이 가득하건만, 연산백성들은 그들이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정신없이 활보하며 포구를 누비고 있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조선관원들은 이젠 관원의 필수품이 된 손책자와 연필을 쥐고 손짓발짓을 하며 연산백성들을 부리고 있었고, 연산백성들은 눈치껏 알아듣고서 낯선 장비들을 열심히 움직였다.
석회부두와 포구에 잔뜩 깔린 나무레일이 어색하지만, 그 위에 궤도수레를 올려 끌고 다니는 게 어렵거나 힘든 건 아니지 않나.
광녕위 사방에서 긁어온 전마는 짐마가 되어 수레를 끌고 다녔고, 그 전마가 싸지르는 똥마저도 꾀죄죄한 어린 아이들이 쓰레받기와 나무빗자루를 들고 바삐 치우고 있었다.
이것도 다 돈. 싹싹 긁어다가 물밀 듯이 밀려오는 조선인들에게 팔면 번쩍이는 조선동화를 얻을 수 있는데, 어리다고 그저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지.
해군병들이 가득하지 않았다면, 이 똥자루를 놓고 싸움이 벌어졌을 거다.
“여기가 연산...! 전혀 전쟁터처럼 보이지 않는데?”
“공성전은 광녕성에서 벌어지고 있을 테니까. 그것도 뭐 곧 끝나겠지.”
“음.”
포구는 의주에서 몰려온 신형조운선과 옛 맹선을 개조한 무역선이 가득했다. 많아도 너무 많아서 포구에 다 가지도 못하고, 근처 바다에 둥둥 떠서 순번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대화를 나눈 두 청년 또한, 그렇게 기다리는 무역선 중 하나에 올라타 있었는데... 보면 볼수록 믿기지가 않아 그저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이게 어딜 봐서 전쟁터인가. 그들이 과거에 봤던, 양전사업이 펼쳐지던 고향과 똑같은 모습이다.
“오...!”
그리고 그 옆에 조심스럽게 서서 포구를 지켜보던 이가 있었는데, 청년들과 달리 머리칼이 유난히 붉은 루스인이었다.
“한수! 이리 오게.”
“예예.”
한수라 불린 이는 루스인. 본래 이름은 한스였지만 조선말로 음차해서 이름으로 대충 때려 박아 한수가 된 인물.
뜬금없이 이름이 바뀌어 갑자기 한이라는 성이 생겼지만 그게 뭔 상관일까.
고향에선 감히 성을 쓸 수도 없었고 있지도 않았으니, 오히려 조선식 이름을 갖게 된 게 더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과거. 개혁이 시작되기 전 조선에선, 노비는 물론 양민들 중에서도 성이 없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족보라는 건 유학이 민간에 뿌리내려 권위주의적인 가부장제의 확립과 이른바 종갓집을 중심으로 항렬이 구축되면서 생겨난 물건.
이 시대엔 왕족, 공신집안, 고려 때부터 유명한 명문가를 제외하면 양반집안조차 족보가 있는 집안이 드물었다.
족보가 이러한데, 성이 없는 백성이 많은 건 당연지사.
허나 개혁이 시작되면서 이 또한 깔끔하게 바뀌어갔다.
양반이나 향리만 성을 가지고 특별취급을 받는 건, 신분제를 박살내려는 연오랑이나 세종이나 용납할 수 없는 문제.
모든 백성들에게 성을 줘서 특권을 없애버려야 하지 않겠나.
나아가 양전사업을 하면서 호적 및 인적정리도 함께 진행했으니, 행정의 편리함을 위해서라도 모두에게 성을 부여하는 게 편했다.
한 마을에도 같은 이름을 가진 이들이 수두룩했으니까.
더불어 조선이 이민족을 귀화시키는 작업에, 성과 이름을 주는 건 필수적이고 효과적이었다.
조선의 정체성을 주입하고 조선인으로 만들기 위해선, 기존에 각자 쓰던 이름을 지우고 조선식으로 바꾸는 게 당연한 일.
몽골, 여진, 일본, 중국, 남방, 심지어 북방을 떠도는 소수의 거란인이나 제대로 된 이름도 없는 야인여진까지 조선에 흡수되는데, 이름과 호적을 정리하지 않고서야 행정처리가 되기나 하겠나.
나아가 생김새와 문화가 다른 이민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사는데, 같은 방식의 조선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방인이 아닌 같은 조선인이라는 동질성을 심어주기에 효과적이었지.
이 모든 이유가 결합되어 모두에게 성이 부여됐고, 성의 가치를 아는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이 바뀌어 조선인이 되는 걸 결코 거부하지 않았다.
이러한 조치는 비단길을 통해 들어오는 루스인 및 서방인도 다르지 않았으니... 웃기게 들리겠지만 심각하게도 한스는 한수가 될 수 있었다.
“보이나?”
“...?”
“저게 다 돈이다. 이걸세. 어때? 힘이 불끈 불끈 솟지 않나? 자네도 이제 땅이 생기고, 부자가 될 수 있단 말이지.”
“예에...”
청년이 잔뜩 흥분해서 빨리 말을 하는 탓에 온전히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한수는 대충 분위기로 어감을 읽어냈다.
이윽고 자신들 차례가 돌아왔고, 청년과 한수는 선원들과 함께 배에 실린 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부두에 내리기 무섭게 사탕을 기다리는 아이마냥 연산인부들이 달려왔고, 일행 중에서 한어를 할 줄 아는 이가 더듬거리며 손짓발짓으로 인부를 부렸다.
배에서 내린 짐은 하나같이 무겁고 덩치가 큰 자재들이었는데, 이런 일이 익숙한지 인부들은 알아서 움직였다.
작은 바퀴와 함께 옆구리가 트여 있는 궤도수레를 가져와서,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선 말고삐를 잡고 수레를 이끌었다.
“저...”
“...?”
짐을 끌고서, 손책자를 들고 서류를 적고 있는 관원에게 다가가자... 관원은 한수를 확인하고선 눈썹을 꿈틀거렸다.
연산항에 기회와 돈을 찾아 수많은 기업집안이 몰려왔지만, 색목인을 데려온 이는 또 처음 봤으니까.
“호패 좀 줘보게.”
“예.”
청년이 먼저 호패를 내밀며 옆구리를 쿡쿡 찌르자, 한수 또한 조심스럽게 철패를 내밀었다.
과거 태종이 실시했던 호패제도는 세금과 노역의 증거가 되니 백성들이 기피하고, 조정에선 관리비용과 유지비용 때문에 결국 폐지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양전사업으로 인해 호패가 있어야 땅을 불하받고, 취업하고, 재산을 축적할 수 있으니 백성들이 오히려 반겼고.
조정 또한 거꾸로 호패가 없으면 정리가 안 될 정도로, 행정이 고도화 되었기에 호패는 필수.
특히나 조선인이 아닌 이민족의 경우에는 성과 이름까지 새로 줬는데, 호패가 없으면 똥을 싸다만 꼴 아닌가.
호패를 거추장스러운 물건이 아니라, 보물처럼 애지중지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지.
요동에서야 급하니까 나무호패를 발급한 거고, 본토에선 이렇게 멋들어진 양각철패를 만들어 보급했다.
비싼 건 둘째치고 주조를 해야 하는 터라, 위조가 쉽지 않았으니까. 반대로 이런 데까지 철을 쓸 만큼, 조선의 철 생산량이 늘었다는 증거이기도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