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479화 (479/538)

479. 챕터59. 일으키다 (4)

“함길도 조산?”

“예. 그렇습니다.”

“우리말을 할 줄 아나? 자네 이름이 뭐지?”

“한수라고 합니다.”

관원은 어눌하긴 하지만 조선말로 대답하는 한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말과 우리글은 쓸 줄 알겠지?”

“물론입니다.”

한수가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관원은 불쑥 빈 손책자와 연필을 내밀었다.

“자네 인적사항을 먼저 적은 후에, 내가 불러주는 대로 써보게.”

“예.”

시험 아닌 시험이 펼쳐졌지만, 한수는 열심히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 사락사락 연필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고, 관원은 한수가 적어낸 글씨를 보며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교육을 꽤 잘 받았군? 몇 년차지?”

“올해로 2년 입니다.”

“오호...?”

관원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한수를 바라봤고, 대신 답을 한 청년이 히죽 미소를 지었다.

“빠르군. 뭐 비결이라도 있나?”

“다른 건 없고... 그냥 다들 다른 말을 쓰다 보니, 절로 조선말과 글을 익히더군요.”

“음...”

청년이 대신 대답을 하자, 관원은 잠시 생각에 잠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한 대답을 보고서에서 봤기 때문이었다.

조선에 출신이 다른 이주민과 귀화인이 더 많이 섞일수록, 이상하게도 이들의 학습속도는 오히려 올라갔다.

관원들도 의아해서 까닭을 살펴보니... 답은 간단했다. 조선말을 빨리 익혀야 서로가 편했으니까.

외국어가 둘만 통용되는 지역이라면, 2개의 언어만 얼추 알면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허나 외국어가 3개, 4개로 늘어나면 이걸 다 배울 수도 없고, 서로의 언어를 익혀본들 대화하기가 힘들지 않나.

그렇다보니 다들 어설프게 배운 조선말과 조선글을 사용하는 게 차라리 편해서, 흡사 공용어처럼 쓰이게 된 거지.

더군다나 이 시대의 조선말은 한어처럼 성조나 강세 비슷한 게 있지만, 어찌됐건 훈민정음으로 편하게 옮겨 쓸 수 있다.

이 훈민정음은 외국인도 매우 익히기 쉬운 표기법.

그렇다보니 조선말에 익숙하지 않은 귀화인들끼리, 어려운 한문 대신 훈민정음으로 필담을 나누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지.

상념을 마친 관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를 살폈다.

“자네들도 사업을 하러 왔나보군?”

“예.”

“보아하니... 공작기업?”

“어찌 아셨습니까?”

청년이 금붕어마냥 눈을 끔뻑거리자, 관원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가 가져온 자재를 보면 뻔하지 않나. 풀무에 모루에... 저기 있는 건 선반 아닌가.”

“아!”

과거 연오랑이 만들었던 초기형 공작기계인 선반은 지금도 무지막지하게 팔려나가고 있는데, 이젠 다른 공작기업에서도 만들어서 팔만큼 흔해진 물건.

물론 값이 싸진 않지만 그렇다고 비싸서 못 살 정도는 아닌, 공작기업에게 필수품이 된 물건이었다.

“이치는 목수? 철장?”

“철장입니다.”

“서방에서도 철을 만졌나보지?”

“그렇습니다.”

관원은 더 물어볼 것도 없다는 듯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의 기업은 절대다수가 집안사업이다. 과거엔 지주로서 땅을 경작해 농산물을 생산했다면, 지금은 각종 수공업제품 등을 생산하고 있지.

이렇듯 집안의 이름을 걸고 사업을 하는데, 어지간히 실력이 좋지 않으면 이제 막 귀화한 색목인을 뽑을 리가 있나.

실력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거다.

“빨리 자리를 잡아야 할 걸세. 자네집안 말고도 두어개쯤 미리 왔거든.”

“벌써 말입니까?”

청년은 화들짝 놀라 되묻고 말았다.

함길도 조산은 압록강 끝자락에 위치한 항구로, 과거엔 여진족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곳이지만 지금은 두만강을 통해 북방으로 가는 필수 관문이 된 곳.

그런 탓에 온갖 기업이 난립해 경쟁이 치열했고, 청년은 이 기회에 터전을 옮겨 요동에서 한몫 잡기 위해 미리미리 준비를 해왔었다.

헌데 자신보다 더 빨리 왔다는 사람이 있다는 말에, 자기도 모르게 위기감을 느낀 거지.

“뭐 그렇게 놀라나. 자네는 조산에서 와서 오래 걸린 거고, 평안도에서 온 이들은 빨리 온 거지.”

“아!”

“그리고 고작해야 셋 밖에 안 왔는데, 걱정될 게 있나?”

“음... 그건 그렇습니다.”

광녕위의 가호를 생각하면 턱없이 부족한 숫자. 결코 늦은 게 아니다.

조선군의 요동정벌이 이미 시작할 때부터 조정의 공표가 있었고, 조선본토의 기업집안은 북으로 눈을 돌렸다.

청년의 집안도 마찬가지. 본래 지주향리집안이었으나 양전사업으로 인해 가세가 축소됐고, 해답은 기업인 걸 깨닫고 공작기업으로 변모했다.

조산은 항구도시이자 조선소가 있었으니, 거기에 필요한 자재를 납품하는 걸 목표로 삼은 거지.

계획은 성공해서 가세를 보존하긴 했는데... 집안을 일으킬 기회를 두 번이나 놓치고 말았다.

첫째는 여진을 흡수해 북방신도시를 건설할 때 가지 않은 것.

북방은 땅이 넘쳐나니, 조정에선 토지제한법이 허용하는 최대치의 땅을 마구 뿌려댔고 심지어 세금도 덜 받았다.

다만 이 시절엔 청년의 집안이, 이제 막 성장하던 때라서 가문을 옮기지 못했지.

둘째는 남주도 개척. 남주도 또한 땅은 넘쳐나니 최대치로 불하했지만... 이미 다 잡아놓은 터를 버리고, 바다 건너로 이주하는 건 거부감이 컸다.

허나 미지로의 도전에 성공한 집안의 소식이, 쉴 틈 없이 들려와 배가 아팠던 게 사실이니... 이번 3차 이주 공표를 놓칠 수가 있나.

그것도 북방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 요동인데 말이다.

“맞나?”

“예...”

관원의 설명에 속내가 훤히 읽힌 것 같아, 청년들은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그게 잘못된 것도 아닌데, 뭘 그러고 있나. 조정에서 지원을 해줄 걸세. 세금도 감면해주고 말이야.”

“...”

“연산산맥의 제재소와 철광산이 개발되면 자네 사업은 순풍을 단 것처럼 날아갈 걸세.”

“그 전에는 본토에서 철괴를 옮겨주겠지요?”

“물론. 저기 보이나?”

관원은 고개를 돌려 포구 안쪽을 가리켰고, 모두의 시선이 닿은 곳엔 요동군이 광녕성 지원창고로 쓰던 창고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이제 곧 겨울이 오지? 농사를 짓는 백성들 말고도, 일거리를 찾는 백성들이 많을 걸세. 사원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예!”

관원의 낙관적인 말에, 다들 저절로 목청이 높아졌다.

요동백성들을 빠르게 안정화 하고 조선화시키는 방법은, 과거에 비해 현재가 더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면 된다.

요동인의 생활행태는 물론, 하다못해 움막이나 초가집조차도 다 부셔서 조선식 북방가옥으로 바꿔야지.

양전사업과 똑같은 전후재건사업을 진행하는 거다.

이 작업은 결국 조정의 돈과 인력으로 해결해야 하는데... 조정에서 본토의 장인, 백성들을 끌어오나, 기업집안이 자발적으로 이주하나 마찬가지.

돈과 식량 또한 이주하는 기업에 지불하나, 요동백성에게 직접 뿌리나 차이가 없으니... 조정에선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도, 기업 집안의 이주를 허가했고.

더 넓은 땅을 찾아, 새로운 시장을 찾아, 본토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기업집안이 우르르 올라오고 있었다.

“게다가 공작기업은 전망이 좋아. 저기 보이지?”

관원은 이번에 포구 저편을 가리켰다.

저쪽에 새로 만든 부두에선 신형조운선이 우르르 모여 개조 아닌 개조를 당하고 있었다.

“설마 이곳에도 선소를 지을 계획입니까?”

“아마 그럴 가능성이 크지. 요동반도에서 목재를 구할 수 있는 곳은 꽤 있지만, 이곳 연산항은 연산산맥의 목재를 강을 타고 바로 옮길 수 있으니까.”

“오...!”

“역시.”

“제대로 찾아왔어!”

관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청년을 비롯해 뒤에 있던 짐꾼들마저 환호성을 지르고 말았다.

조선소가 생기면 자연히 거기에 들어갈 자재와 부품을 제작해야 하니, 공작기업은 연산항이 망할 때까지 수익을 거둘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이렇게 선박부품을 만들다보면...’

‘배를 띄울 수 있겠지!’

환호 속에서 두 청년은 눈빛으로 대화하며 장밋빛 미래를 그렸다.

조선에 외국무역상단이 아직도 등장하지 않은 건... 이 시대의 배론 백이면 백 안전하게 중국으로 갈수가 없고, 설령 간다고 한들 조정이 운용하는 신형무역선의 수송량과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기 때문.

허나 그건 조선본토에서 중국본토로 직접 갈 때의 이야기고, 요동반도에서 산동반도의 청도로 가는 건 누워서 떡먹기 아닌가.

이젠 진짜로 조정관원이 아닌 민간상단이, 대외무역을 할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린 것이다.

연산항이 개발의 열기로 끌어 오르고 있을 때. 살짝 서남쪽에 위치한 광녕성에선 싸늘한 냉기만 흐르고 있었다.

광녕성은 육군과 해군이 동시에 밀어닥쳐 포위를 완성했고, 그 옆 해안가론 심심치 않게 신형전함이 광녕성을 지나쳐 서쪽으로 나아갔다.

특이한 건. 그렇게 꼬리를 물며 줄줄이 남하하는 함대가, 화포한발 쏘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는 점.

서로 포탄 한 발 쏘지 않는 기묘한 포위공성전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이 어색한 동거도 북쪽에서 내려온 서찰 한 장으로 깨지고 말았다.

이미 기세가 확 꺾였지만 그래도 군기를 뽐내려는 걸까?

광녕성벽 위엔 창을 꼬나든 병사들이 줄줄이 올라서 있었다. 그에 질세라 반대편엔 참호도 파지 않고, 그저 길게 늘어선 검은 기병들이 서 있었다.

이 기묘한 대치의 정중앙. 흰 깃발이 사정없이 나풀거리는 천막 아래에, 일단의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어찌 보시오?”

“음...!”

“허허.”

“정녕 이리 되었단 말인가!”

비갑을 껴 입은 요동군 장군들은 서신을 돌려가며 신음을 흘려댔고, 맞은편에 앉은 조선군 장군들은 승기를 잡은 눈빛을 빛내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게 사실이오?”

“우리보다 그대가 더 잘 알지 않소.”

사주에서 출발한 1군을 이끌고 광녕위를 함락하고 광녕성을 포위한 김종서.

그는 턱수염을 바짝 자른 매끈한 턱을 매만지며 히죽 미소를 보였다.

침음을 흘리고 있는 광녕성주의 손에 들린 서찰은, 심양성주 양곤의 인장뿐만 아니라 심양호족들의 인장이 전부 찍혀 있었으니까.

이걸 광녕성주가 못 알아볼 리가 있나. 알면서도 쉽사리 믿기지가 않아 되묻고 말았다.

“여기 또 있소이다. 살펴보시오.”

그뿐일까. 김종서가 새로이 내민 서찰을 읽기 무섭게, 광녕성주는 자기도 모르게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렇게 빨리 끝날 줄은 몰랐을 테니.. 놀랐겠지.’

그가 보고 있는 서찰은 다른 집안도 아닌, 광녕성주의 자식이 보낸 서찰이었으니까.

“헉!”

“정말... 다 살아 있단 말이오?”

“이럴수가...”

“심양성이 그대로 항복하고, 심양호족들은 하남과 산동으로 이주하고 있소. 요하를 따라 내려오고 있거나, 벌써 산동으로 가고 있는 이들도 있겠지.”

“...”

도무지 믿기지가 않지만, 이렇게 완벽한 증거를 보여주니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러니 항복하게. 더 싸울 필요가 있겠나?”

“...”

“...”

김종서의 최후통첩 아닌 통첩에, 광녕성주를 비롯해 모두가 빠르게 눈을 마주쳤다.

조선군이 광녕성을 포위한 후, 공성조차 하지 않고 항복사신과 서찰만 주구장창 보내지 않았나.

논의할 시간은 충분히 있었으니, 이젠 최종 결정만 남았다.

“연산항의 보급을 받지 못하는 광녕성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겨울이 찾아오는 데 보급품은 충분한가? 나아가 이제 곧 요양도 항복할 걸세. 대체 무얼 위해 싸우려는 건가?”

“...”

정곡을 찌르는 말에 요동군 장군들은 입을 꾹 닫고, 눈만 열심히 굴려댔다.

이들은 광녕위에 집안을 둔 이들도 있지만, 심양과 요양에 거주하는 이들도 부지기수. 집안사람들이 인질 아닌 인질이 된 셈이니, 더 버티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했다.

“산해관과 마주하고 있으니, 지금껏 아군이 산해관을 공격하고 있는 걸 알고 있을 걸세. 그러니 우리끼리 시간만 낭비하지 말고, 진짜 적과 싸워야 하지 않겠나?”

김종서가 묵직한 말투로 말을 이어가자, 장군들의 눈빛이 번뜩였다.

흘러 넘길 수 없는 단어가 곳곳에 박혀 있었으니까.

“진짜 적이라.”

“정녕 북평부를 공략할 생각인 것이오?”

“지금껏 산해관을 포격한 게, 요동을 차지하기 위한 미끼가 아니고?”

“그대들 같으면 천금 같은 화약을 써가며, 몇 달간 위장작전을 할 수 있겠나? 아국은 진정으로 산해관을 무너뜨릴 것이야. 지난날 거용관을 무너뜨린 것처럼!”

김종서가 자신만만하게 눈을 번뜩이자, 조선군 장군들은 그 기세에 물들어 발을 쿵쿵 내딛었다.

“이제 그만합세. 그대들의 속사정은 우리도 알고, 그대도 알고 있지 않나. 우리끼리 싸우는 게 의미가 있나? 북평부를 칩시다. 그대들의 숙원을 해소해야하지 않나?”

“...”

“...!”

김종서가 계속 역린을 붙잡고 흔들자, 요동군 장군들의 눈빛이 심유해졌다.

광녕성은 북평군을 막는 보루였고, 지난 수십년간 지독하게 싸워왔다. 중국을 지켜온 저 거대한 산해관은, 요동군 입장에선 그야말로 지옥구덩이와 다름 없었지.

좌천 아닌 좌천을 당한 광녕성 장군들에겐... 솔직히 요양, 심양. 심지어 조선보다도 찢어죽이고 싶은 게 바로 북평군과 산해관이었다.

그걸 함께 깨부수자고 말하고 있으니, 가슴이 뛰지 않을 수가 있나.

“정녕... 저 지긋지긋한 산해관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오?”

제장 모두와 눈을 마주친 광녕성주는 말을 더듬거리며 물었고.

“그렇소이다. 조선은 산해관을 넘어 북평부를 무너뜨릴 것이오.”

김종서는 주먹을 불끈 쥐며 맹세하듯 외쳤다.

드디어 지독하게 이어온 구애를 받아들일 생각인 걸까? 광녕성주는 미리 준비해왔는지... 허리춤을 풀어 광녕성주의 인장을 두 손으로 받쳐 김종서에게 내밀었다.

“항복하겠소이다.”

“받아들이겠네.”

김종서는 예를 갖춰 조심스럽게 인장을 받아들였다.

동시에 천막위에 흰깃발이 아닌 조선군기가 꽂히자, “와아아!!” 조선기병 전체가 날개를 털 듯 부르르 떨며 승리의 함성을 외쳐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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