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0. 챕터59. 일으키다 (5)
광녕성이 항복하자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후속정리는 빠르게 진행됐다.
광녕성은 단순한 요새가 아니라 산해관에 비견되는 관문도시.
이곳에서 복무하는 병사만 만명에 가깝고, 그와 비견되는 숫자의 민간 백성이 살고 있었다.
이 민간 백성들을 밖으로 꺼내 연산항으로 이주시키고, 광녕성 병사들을 분리하고 있을 때.
심양에서 훈련받던 항복한 요동군 장군과 병사들이, 조선군과 함께 광녕성에 도착했다.
“장군...”
“으음...!”
이젠 갑옷도 벗어 홀가분한 복장을 한 광녕성주 장림.
그는 자신의 앞에 우르르 몰려 온 이들을 보며 침음을 흘렸다.
다 같은 요동군 장군들인데 어찌 이들을 모를까. 한유와 백경 등, 변경요새의 수비장들이 자신의 눈앞에 와 있었다.
“...”
“...”
살짝 어색한... 뭔가 부끄럽고 씁쓸한 미소를 숨기지 못하고, 서로의 눈빛이 교차했다.
“그리 됐군...”
“...”
뜻 모를 말이지만... 모두는 맥락을 읽고 쓴웃음을 흘렸다.
지난날의 수모 아닌 수모는 다 같이 당해왔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조선군에 냉큼 항복한 게, 충분히 이해가 됐다.
“병사들은 많이 상했나?”
“경미합니다.”
“쯧.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다행이라면 다행이군.”
“예...”
자꾸 분위기가 가라앉자, 장림은 박수를 가볍게 치며 모두를 앉히고 차를 내왔다.
‘큭...’
병사가 내온 차가 조선에서 만들어진 차라서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건 조선이 요동에 진출하기 전부터 먹던 차 아닌가.
장림은 쓸데없는 상념을 치우고, 자신만 보고 있는 이들에게 입을 열었다.
“양장군과 고장군. 그리고 다른 장군들의 집안이 전부 이주한 게 맞나?”
“그렇습니다. 배를 타고 내려가는 걸 봤고, 요양에서 갈아탄다고 하더군요. 아마도 이주를 시켜준다는 항복조건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일부러 보여주려고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음... 요양은 아직 항복하지 않았고?”
“예. 다만...”
장군 중 누군가 말을 흐렸지만, 장림은 속내를 읽어내고선 피식 웃고 말았다.
이제 광녕성이 항복했다는 소식도 요양으로 들어갔을 터... 요양이 함락되는 것도 얼마 남지 않을 거다.
동시에 이들이 왜 여기 왔는지, 그리고 왜 곧장 자신을 찾아왔는지도 깨달았다.
“내가 어찌할지 궁금했나 보군?”
“...”
제장들은 차마 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변경요새의 천호장이 이 자리에 모여 있다는 건, 이주하지 않고 조선군에 합류했다는 뜻.
중립파라고 해야할지, 소장파少壯派라 해야할지... 아무튼 심양파와 요양파 모두에게 소외받던 이들의 대표였던, 장림의 거취가 궁금했을 거다.
“나야 하남이나 산동으로 가봐야 좋을 게 있겠나? 내 집안은 뿌리는 요동이고, 가산이라고 해봐야 고작해야 목마장 하나 밖에 없으니, 본토로 간들 나아질 게 있겠나?”
“그러십니까!”
“역시...!”
모두는 반기는 기색을 애써 숨기며, 눈빛을 반짝였다.
이주한 이들은 하남연맹에 속할 걸로 알고 있는데... 지금까지 부딪쳐왔던 심양파 호족들과 함께 있어봐야 좋을 게 없고, 그렇다고 하남호족들이 세가 작은 장림집안을 우대해 줄 것도 아니지 않나.
광녕성 또한 조선군에게 같은 항복조건을 제시받았고, 그간 포위를 당하면서 계속 고민해왔던 사안.
해서 장림을 비롯해 광녕성의 장군들은 자신의 거취를 이미 결정한 상태였다.
허나... 이들의 눈빛이 뭘 원하는지 읽었음에도, 장림은 쓴웃음을 지으며 찬물을 끼얹었다.
“산해관이 무너지는 건 봐도, 조선군문에 들어갈 생각은 없다.”
“어찌...?”
“장군님 정도라면...”
역시나 이들도 나름 생각하는 게 있었는지, 차마 아쉬운 마음을 참지 못해 털어놓고 말았다.
이들은 조선군에 남아 성공하고 싶은 이들.
그러니 명성과 경력이 긴 장림이 남아 구심점이 되어, 자신들을 이끌어 주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나 보다.
“조선군 사령관인 김종서 장군과 이야기를 나눴다.”
“...”
“미안한 이야기지만, 요동군 출신이라고 해서 따로 챙겨줄 생각이 없다고 하더군.”
“어째서...?”
누군가 불퉁한 목소리로 말을 했지만, 장림이 매섭게 노려보자 얼른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쯧... 됐다.”
장림 또한 나름 그런 생각이 없던 건 아닌 터라, 더 이상 뭐라 하지 않고 그냥 손을 내저었다.
그리곤 타이르듯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조선군이 우리와 다른 군제를 가지고 있는 건 알고 있을 거다. 저들 기병 한명한명이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전부 훈련만 하는 건 알고 있겠지? 너희가 지휘관으로서 아무리 군문에 오래 있었어도, 절대치만 따지면 조선 병사들이 너희 못지않을 것이야.”
“어찌...”
누군가 그건 아니라고 반문하려 했지만, 장림은 또 다시 손을 휙휙 내저으며 입을 막았다.
“...”
“더불어 저들의 군제와 훈련, 작전, 장비들 모두 우리가 모르는 것이 태반 아니냐. 요동군의 경력을 조선군이 인정해 주지 않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말. 특히나 호족집안을 인정해주지 않는 조선이라면 더욱 그렇겠지.”
“...”
따끔하게 꼬집는 말에, 다들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능력이 아닌 혈연과 배경 때문에, 심양파와 요양파에 눌려서 기를 펴지 못한 게 너희들 아니냐? 그런데 그 놈들과 똑같이 행동하려 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장군.”
장림이 눈을 부릅뜨며 목청을 높이자, 더욱더 머리가 기어들어갔다.
“김장군이 말하길, 지휘관들은 그간 쌓아온 실력이 있으니, 평범한 훈련병들보다 더 빨리 적응하고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 실력이야 있으니 조선말을 빨리 배우는 게 먼저라고 말이야.”
“...”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느냐?”
그의 말에, 제장들 중 몇몇이 눈을 번뜩였다.
“저희가 더 빨리 성장할 수 있는 판이 열렸으니, 자신이 있으면 거기서 경쟁을 뚫고 올라오라는 말이군요.”
“옳다.”
탕! 장림은 한유의 말에 탁자를 가볍게 때렸다.
“그간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게 그것 아니냐? 그러니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시간에, 조선군을 따라잡을 수 있게 노력하는 게 우선 아니겠느냐? 너희가 정녕 조선군문에 들어갈 생각이라면 말이다.”
한마디로 능력을 보이라는 말.
지금껏 요동군에 있으면서 심양파, 요양파를 보고 “배경만 믿고 승진한 무능력한 놈들!”이라며 욕을 해왔으니, 이젠 그게 진심인지 그저 핑계였는지 증명할 기회라는 거지.
“그러니 내가 있든 없든, 너희가 성공하는 건 너희에게 달렸다.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다들 마음에 각오를 세웠는지, 남에게 기대려 했던 부끄러움을 지우듯 목청을 높였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고, 화제를 돌리려는 듯 장림은 다른 걸 물었다.
“그보다... 너희가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 있는 걸 보면, 산해관 공략에 함께하러 온 거겠지?”
“그렇습니다.”
다들 눈에 불을 켜고 고개를 끄덕였다. 공을 세울 기회를 찾아야 하니, 당연히 산해관 공략에 참여해야지.
“장군님께도 알려왔습니까?”
“맞다. 산해관 공략에 함께할 거라면, 조선군에 합류하라고 하더구나. 일반 병사들까지도 말이야.”
“음...”
이건 제장들이 받은 제안과 같은 터라, 다들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면 심양공성전을 봤겠군?”
“그렇습니다.”
“어떠했나?”
“음...”
각자는 가볍게 눈을 마주치고선, 자신이 봤던 심양의 모습을 하나씩 읊어봤다.
혼하를 타고 내려오는 조선군들, 그에 못지않게 많이 합류한 보조군. 조선의 행정관료들. 끝으로 신형전함들까지.
장림은 이들이 말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추임새를 넣어가며 정보를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공성전이 그리 진행됐단 말이지...”
“예. 아마 심양이 항복하길 기다린 터라,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은 것 같은데... 전력으로 달려들었다면.”
“포격이 끝도 없이 쏟아졌을 거라는 거군.”
“그럴 것입니다.”
“적어도 우릴 화살받이로 밀어 넣으려고 모집하는 건 아니군.”
“예. 차라리 땅을 파면 팠지, 그건 확실히 아닙니다.”
다들 화색이 돌면서 이런저런 말을 쏟아냈다.
장림의 우려가 마냥 헛짓이 아닌 게, 항복한 병사를 앞세우는 건 전사戰史에서 흔하지 않나.
하지만 조선군의 공성방식은 사람이 아닌 화력을 중시했고, 그 새로운 공성방식을 심양에서 똑똑히 지켜봤다.
“설령 직접 성벽을 오른다고 해도, 성문과 성벽 위의 수비군을 전부 정리하고서 공략할 것입니다.”
“화포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없으니, 그건 어쩔 수 없겠지.”
이건 이들도 각오했는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이런저런 말을 모두 끝내자...
“북평부를 공략하는 것. 그건 지금껏 광녕성을 거쳐 갔던 너희가 숙원으로 삼았던 일 아니더냐?”
“맞습니다!”
“더불어 너희의 성공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일 아니더냐?”
“옛!”
“그러니 너 자신과 너희 가문을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라. 조선군이 너흴 보고 있을 테니까.”
장림은 조용하면서도 단호하게 끝을 맺었다.
“생각보다 견고하군.”
“산해관을 그대로 본떠서 만들었는데, 오죽하겠나?”
성벽 위에 올라 있던 두 사람.
광녕성 밖으로 이사하고 있는 백성들을 보고 있던 김종서와 황보인. 둘은 작게 휘파람을 부르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산해관 공성전에 광녕성 병사들을 모집한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오천이 넘는다면서?”
“맞아. 그냥 버리기엔 아깝지 않나?”
황보인은 히죽 웃으며 답을 했다. 광녕성 병사들은 요동 병사들과 살짝 다르니까.
다른 병사들은 군적에 올라 2,3개월만 훈련 및 복무하면 되지만, 광녕성에선 근 6개월을 복무해야 했다. 그것도 요동 전역에서 긁어모으기 보다 광녕위에서만 긁어모아서, 군대에 익숙한 병사가 더 많았지.
“괜히 광녕성 병사들이 요동군의 정예병 취급을 받는 게 아니지.”
“그렇다고 해도, 아군 연대병과 비교할 수준은 아니지 않나. 차라리 무관들이라면 모를까.”
허나 김종서는 못마땅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한소리 하고 말았다.
직접 지휘해야 하는 총지휘관으로선, 실력 차가 나는 조선군과 요동군을 한자리에 모아서 지휘하는 것 자체가 피곤한 일이니까.
“자네가 이해하게. 해군 장군들의 우려가 마냥 불만은 아니니까.”
“음...”
황보인은 여전히 군수사령관 직책을 맡고 있었고, 의주에서 연산으로 와서 연산을 최전선 보급기지로 건설하는 중이었다.
요동에서 북직례와 가장 가까운 항구가 연산항이었으니까.
그리고 1군 사령관인 김종서에게 해군 사령관들이 직접 의견을 하는 것보단, 중간에 낀 황보인을 거치는 게 나름 부드러운 의사전달이었지.
“요동을 빠르게 점거하기 위해서 해군을 너무 많이 동원했어. 요동에 직접 발을 디딘 건 한달도 안 됐지만, 해군이 보급품을 옮기기 위해서 지난 몇 달간 쉬지 못한 걸 알지 않나.”
“...”
“해군 장군들이 마냥 우는 소리를 하는 게 아니야.”
그 좋은 미래의 함선에서 근무하는 선원들도, 바다와 육지를 번갈아가며 생활해야 건강을 챙길 수 있다.
미래에 비하면 극악에 가까운 이 시대의 함선생활을 몇 개월 동안 지속하는 건, 아무리 조선군의 기강이 강해도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지.
“이제 본토로 돌려보내야해. 더불어 무역 또한 언제까지고 안 하고 있을 순 없어. 지금은 필수적인 무역만 하고 있지만, 무역선을 보내야 전비를 충당할 것 아닌가.”
“음...”
돈 이야기엔 김종서도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고 말았다.
지금껏 얼마나 많은 전비가 소모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고, 이걸 어떻게든 보충하기 위해서 요양, 심양, 광녕성이 함락되기도 전에 기업집안들을 불러왔으니까.
앞으로 북직례를 공략하기 시작하면 더욱더 불어날 테니, 해군들을 무역선으로 돌리는 게 잘못된 선택은 아니다.
“그래서 산해관 공략에 요동군을 동원하겠다는 거군.”
“그렇네. 산해관 공성이 하루 이틀 사이에 끝날 리가 없고, 솔직히 말해서 참호와 포진지, 보급을 위한 임시부두를 만드는 건... 우리 군략을 모르는 요동군도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
“여기에 남으나, 바로 코앞에 있는 산해관으로 데려가나... 어차피 들어갈 식량과 보급이라면, 땅이라도 파게 시키는 게 낫지. 아군의 피로도를 생각하면 말이야.”
황보인은 능글거리며 말을 했고, 김종서가 듣기에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닌지라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어차피 잡일해야 하는 이들이 필요하니, 요동군을 거기에 쓰라는 거니까.
“우리야 그렇게 움직이면 될 거 같고... 북직례를 공략할 해군은 준비됐나?”
“개조가 거의 끝나가고 있네. 엄청나게 많은 전함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
“전함을 활용하면 좋을 텐데...”
“북직례의 지리와 수로는 우리가 아예 모르지 않나. 요동과는 사정이 다르지.”
황보인은 아쉽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고, 김종서 또한 북직례의 지리와 조선군의 작전계획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산해관만 공략하면 끝일까.
어찌됐건 북직례에 발을 디뎌야 작전계획이 완성된다.
그 말은 산해관 공성과 별도로 북직례에 진입할 방법이 필요했는데, 그건 자연히 천진으로 상륙하는 게 최선이었다.
“문제는 상륙이 아니지. 상륙한 후에 천진항을 벗어나 내륙의 천진도시로 진입하려면 배가 필요하고, 산해관을 노리기 위해서라도 배가 필요하지 않나.”
“...”
김종서는 북직례 공략계획을 떠올리며, 황보인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아무리 무적이라고 해도, 가보지 않은 수로를 무작정 가는 건 무리. 수심이 낮은 곳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신형조운선을 개조하는 게 최선이야.”
강바닥의 모래톱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혼하의 강줄기를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오는 데 오래 걸리는 걸로 증명됐다.
허니 북직례의 수로를 거슬러 오르기 위해선, 신형전함이 아닌 신형조운선에 화포를 장착해 끌고 가는 게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