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2. 챕터59. 일으키다 (7)
괜히 생돈을 날려가며 조선해군이 중국연맹의 상선을 보호해주고, 해적들을 때려잡는 게 아니다.
조선의 해군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중국연맹이 해군력을 키울 이유와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지.
이 또한 지금 당장은 손해지만, 먼 미래를 생각하면 절대 손해가 아닌 장사였다.
“그러니 광녕성을 피해 없이 차지한 건 큰 공일세. 전하께서도 만족하시고 계실 걸세.”
“됐네. 이 사람아.”
이런 대계가 숨어 있었기에. 광녕성이 심양,요양 못지않은 중요한 목표가 되었고, 광녕성에 포탄 한발 쏘지 않고 고스란히 남겨뒀던 거지.
조선이 이걸 그대로 써먹어야 하고, 광녕성 요동군이 반항하지 않게 부려먹어야 했으니 말이다.
“헌데... 요서회랑을 차지하는 건 좋은데, 이것도 문제가 있어.”
“요왕부 말인가?”
“...”
이 또한 반대파가 꺼냈던 주장.
김종서는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요서회랑을 차지하는 건 좋은데, 여긴 후방이 너무 위태롭다. 당장 광녕위가 바로 위에 위치한 요왕부에게 압박을 받았던 전례가 있지 않나.
요서회랑 동쪽 광녕위 일대부터 요택 서쪽의 요서 지역은, 끝없는 지평선이 이어지는 평원지역.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중국왕조가 미쳐서, 몽골초원을 뚫고 흥안령 산맥을 넘어 요서를 공격할 수도 있다.
이 평원을 남하해서 요서회랑의 뒤통수를 치는 건 너무도 쉬운 일이니, 결국 요서회랑을 지키기 위해서는 요서의 평원지역까지 모두 차지해야한다는 선결조건이 남는 거지.
그리고 지금 그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게 바로 요왕부.
어째 뜬금없게도. 조선으로선 요동정벌을 완성하기 위해선, 결국 요왕부를 치워버려야 한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헌데 용연군 대감께서 기가 막힌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나?”
“음...”
김종서는 떫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미 다 결정된 사안이지만, 자기가 생각해도 “과연 이게 맞는 건가?”라는 고민이 완전히 해소된 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계획대로 움직이게.”
“그야 당연한 말. 그걸 걱정하는 겐가.”
“그건 아니고... 그냥 그렇다는 거지.”
김종서가 슬쩍 눈을 흘기자, 황보인은 히죽 웃으며 딴소리를 해댔다.
잔소리처럼 들리지만, 자칫 오해하면 김종서의 권한을 침범하는 말이었으니까.
“아무튼. 산해관은 반드시 박살내게. 우리의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말일세. 성형요새 건설을 지원하는 건, 나한테 맡겨두고. 안 그래도 남방에 있던 택리부 관원들까지 전부 데려왔으니까.”
“걱정 말게.”
김종서는 황보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면서, 속으로 다시금 각오를 세웠다.
‘우리의 후손이라... 맞는 말이지. 요서회랑을 차지하면, 중국왕조는 영원토록 아국을 넘볼 수 없을 것이야.’
광녕성 백성들이 다 빠져나가지 않았는데도, 요양에서 항복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는데도.
광녕성을 점령한 육군과 해군은, 보급과 정비를 끝마치자마자 곧장 서쪽을 향해 나아갔다.
금주에서 나와 합류한 병력까지 합쳐서 육군 1만, 해군 오천, 요동군 7천을 거느린 군세가 느긋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길잡이 역할을 하기 위해 특전대와 함께 움직이는 광녕성 요동군 기병이 사방을 뛰어다녔고... 꼬리를 물고 길게 늘어선 제대의 선두.
“음... 들었던 것보다 더하군.”
망원경으로 지리를 살피던 김종서가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자.
“예. 생각보다 훨씬 더 좋은 땅이 아니군요.”
옆에 있던 연대장 보광이 한마디 곁들였다.
보광은 개혁 초창기. 조선이 두만강을 넘어 평주(훈춘)을 개척하던 시절. 그보다 더 동쪽에 살던 대족장인 보을호대의 아들이었다.
설주(블라디보스토크)를 개척하기 위해 조선군이 계속 동진하자, 보을호대를 비롯한 여진족장들은 넙죽 항복하고 인질 겸 유학 겸 해서 아들들을 조선에 보냈지.
그 후 보광을 비롯한 동북방 여진족장 자제들은 착호군에 들어와 착실히 경력을 쌓았고, 보광은 먼터무의 아들. 이고 다음으로 연대장이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만큼 그 실력은 의심할 게 없었던 터라, 김종서도 그의 의견을 귀담아 들었다.
“농사도 안 된다고 하지?”
“예. 땅에 소금기가 많아 농사가 힘들다고 하더군요. 더불어 해변가는 수해로 인해 해안선이 수시로 변하다고 했습니다.”
“음...”
김종서는 저편에 훤히 수평선을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 시대의 요서회랑은 미래의 요서회랑처럼 해안선이 정돈된 게 아니었다.
조수간만의 차가 극심해서 갯벌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고, 연산산맥 곳곳에서 흘러내려온 크고 작은 물줄기와 개울이 정신없이 발해만으로 이어져 흙을 토해냈다.
곳곳엔 습지와 늪지가 흩뿌려져 있었고, 오가는 곳곳마다 갈대밭이 무성하게 조성되어 있었지.
“요택보단 못하지만...”
“평야라고 부르기도 뭐하군요.”
“허면 어떻게 하는 게 좋겠나?”
“아무래도... 성형요새를 쌓을 생각이라면, 연산산맥 쪽에 붙여서 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재를 구하는 걸 떠나서, 굳이 평지성이나 해안가에 붙일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다만?”
보광이 슬쩍 말을 흘리자, 김종서는 계속 하라는 듯 말꼬리를 잡았다.
“땅이 이렇게 엉망인데, 굳이 앞에 나와 요새를 쌓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만약 적이 요서회랑을 따라 진출한다면, 보급이 보통 힘든 게 아닐 텐데요.”
“음...”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
지금 조선군조차도 빨리 가지 못하고, 거북이처럼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다. 미래의 적이 요서회랑을 이용한다면, 똑같은 어려움을 겪지 않을까.
“물론 그렇겠지만, 그래도 요새는 있는 게 낫다. 적이 얼마나 많이 올지 모르는 일 아니냐. 십수만명을 동원해 보급로를 정비한다면, 요새가 앞에 있든 뒤에 있든 의미가 없을 것이야. 요서회랑이 길다고는 해도, 중국본토에서는 가까울 테니까.”
“... 그렇기도 하겠습니다.”
보광도 김종서가 뭘 우려하고 있는지 아는 터라, 결국 동의를 표하고 말았다.
조선이 걱정하는 건 당장의 북평부나 연맹 정도의 작은 나라가 아니라, 통일된 중국왕조다.
옛 시절처럼 백만명씩 뽑아내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수십만명이 몰려오면 사정이 달라지기 마련.
과거처럼 요동이 아닌 요서회랑에서 막는다 치면, 요서회랑의 입구에서 막는 거나 출구에서 막는 거나... 중국입장에서 뭐 얼마나 큰 차이가 있겠나.
최악의 사태를 놓고 미리 대비할 생각인터라... 요새는 많으면 많을수록 오히려 좋을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산맥에 붙여 산성과 성형요새를 건설하는 건 큰 어려움이 없을 거라는 점과 식수를 구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다는 점이겠지요.”
“음.”
“만약 산맥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를 막아서 보나 저수지를 만들 수 있다면, 해안가에 대충 있는 관도 또한 제대로 건설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절로 늪지와 습지가 없어질 테니까?”
“예.”
보광은 평주(훈춘)을 비롯한 북방에서 머물면서. 과거 여진족이 살던 야생 그 자체인 미개척지를 개척, 개간하며, 도시를 건설하고 사냥을 해오지 않았나.
어쩌면 김종서 자신보다도 더 토목건설에 능할지도 모르는 터라, 깊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보다 택리부 관원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보광은 히죽 웃으며 저편을 가리켰고,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개량된 기리고차를 끌고 다니는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작금에 이르러, 거리를 측정하기 위해 택리부 관원이 끌고 다니는 기리고차는 조선군과 항상 함께 다니는 게 일상이 되지 않았나.
저치들은 요서의 지도를 제대로 완성하는 건 물론, 지금도 요서회랑의 지도를 완성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고 있었다.
조선군과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걷고 있는 요동군들.
비록 말을 다 빼앗긴 터라 두발로 터덜터덜 걷고 있었지만, 불평을 가진 이는 딱히 없었다.
애초에 광녕성 수비군의 태반이 보병인 것도 있지만, 힘겹게 보급품과 군량을 짊어지고 가는 게 아니라 갑옷을 입고 무기만 들고 걷고 있었으니까.
줄 맞춰서 행군하는 요동군병의 옆에는, 말을 몰고 바삐 돌아다니면서 통솔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바로 항복한 변경요새의 천호장, 백호장들이었다.
“쯧쯧. 후...”
“좋은 날에 왜 한숨인가?”
요서의 변경요새 천호장 악하건. 그는 환하게 웃으며,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천호장 한유에게 다가가 말머리를 나란히 했다.
둘은 요동군문에 들어와서 심양파와 요양파에 찍혀 밑바닥을 전전하던 시절에, 함께 술을 마시며 성토하던 사이였다.
지금은 그 망할 놈들이 다 없어졌고, 꿈에서나 그리던 산해관을 박살내러 가는데... 저렇게 죽을상을 하고 있을 이유가 있나.
“그냥 비교가 돼서 말일세.”
“으음...”
한유가 힘없이 내뱉는 말이지만... 이건 천호장들의 모임에서도 나왔던 이야기인터라, 악하건은 절로 미간이 찌푸려지고 말았다.
이들 또한 잠깐이나마 적으로 조선군을 만나서 경험해봐서 느끼긴 했지만, 이렇게 나란히 놓고 보니 조선군이 얼마나 정예한지 못 느낄 수가 없었다.
그냥 줄맞춰서 행군하는 것부터 차이가 나지 않나.
조선군이 전부 기병이라서 속도가 차이나는 건 둘째치고. 제대간의 간격, 제대간의 의사소통, 잠시 휴식할 때의 행동방식, 이젠 귀에 익어서 자기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된 군가까지.
모든 게 달랐고, 그 우열은 그들 눈에도 보였다.
“뭐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잘하면 되지 않겠나? 저들 중에서도 조선기병이 되고 싶은 이들은 알아서 하겠지. 이젠 우리가 신경 쓸 일이 아니지 않나.”
“그야 그렇지만, 그냥... 지금껏 우리가 뭘 했나 싶어서 말일세.”
“심양파와 요양파 놈들만 없었으면...”
악하건은 그리 핑계를 대려다가... 속 좁은 소리를 하는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과연 조선군만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니까.
그리고 그런 악하건의 마음을 읽었는지, 한유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며 피식 웃었다.
“돈이 충분했으면, 우리도 저리 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지. 산해관을 치러 가는데, 요동병사들에게 돈을 줄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나.”
“...”
악하건 또한 놀란 건 마찬가지였던 터라, 쓴웃음이 번지고 말았다.
조선군은 요동군호를 전부 해체해서 병사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냈고, 광녕위 일대에서만 따로 모집했다. 여기까지야 예상범위였으나, 그렇게 모집한 병사들에게 수당을 줄 거라곤 상상 못했다.
돈의 힘은 막강해서 예상보다 더 많은 요동군병이 지원했고, 벌써 조선군이 된 것 마냥 그들의 지시를 군말 없이 따르며 움직이고 있었지.
“사실...”
“...?”
“병사들도 병사들이지만, 조선이 얼마나 진심으로 산해관 공략에 나선건지 알겠더군. 무서울 정도야.”
“...?”
악하건이 눈에 물음표를 그리자, 한유는 요동병사들 중간중간에 껴서 이동하고 있는 짐마차를 가리켰다.
“저게 다 연산항에서 만들어진 걸 알지 않나. 그들은 광녕성 공략이 아니라 진작부터 산해관 공략을 준비하고 있었던 거지. 그게 아니고서야, 저렇게 특이하고 많은 자재가 필요했을까.”
“음...”
이건 악하건 뿐만 아니라, 요동군병들 모두가 눈을 똘망똘망 뜨고 살펴봤던 터라... 충분히 이해가 됐다.
연산항에는 조선에서 출발한 보급선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고, 자재를 우르르 토해내기 무섭게 다시 돌아가 짐을 싣고 왔다.
별의 별 물건이 다 들어왔고, 심지어 그 중에선 마차부품 및 자재도 있었던 것.
연산항의 조선군들은 분해된 마차를 뚝딱뚝딱 조립해 짐마차 수백개를 만들었고, 그 위에 또 별의별 짐을 다 실었다.
“조선의 마차가 우리나 본토의 것보다 훨씬 낫다는 소문을 얼추 듣긴 했네. 허나 저렇게까지 좋을 줄은 몰랐지. 하물며 그게 다 똑같은 크기와 모양을 가지고 있을 줄도 몰랐고.”
“...”
지금껏 그들이 사용하던 물건은 전부 장인이 알아서 만든 물건 아니었나. 장인의 손길이 닿았으니 제각각인 건 당연한데, 그 당연한 이치가 조선에겐 통하지 않았다.
똑같은 부품을 똑같이 조립해서 마차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기상천외한 일이었지.
“하긴 나도 조선군이 쓰던 못을 보고 놀랐으니까.”
“못 뿐이겠나? 난 그렇게 튼튼하고 탱탱한 밧줄은 처음 봤네.”
“부교를 놓는 것도 그렇고.”
“맞아.”
한유와 악하건은 지금껏 지나온 길을 떠올리며, 말을 주고받았다.
얕은 개울은 그냥 건너갈 수 있지만, 폭이 아무리 좁다고 해도 허리춤까지 차오른 개울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법.
헌데 조선군은 마차에 싣고 온 통나무와 널빤지를 턱턱 내려놓더니, 순식간에 못과 밧줄로 부교를 만들어 개울을 건너갔다.
그렇게 튼튼하고 정교한 못은 난생 처음 봤고, 조선군병이 탕탕! 망치질을 할 때 마다 요동군병들은 “오오!” 탄성을 숨기지 못했다. 자기들이 써왔던 못보다 훨씬 단단하고 매끈했으니까.
밧줄 또한 마찬가지.
밧줄이야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지만, 저 먼 남방에서 가져 왔다고 하는 밧줄. 미래에 마닐라삼이라 불리는 파초는, 전함에서 쓰이는 물건답게 요동에서 쓰던 밧줄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리고... 내가 진심으로 놀란 건 저걸세.”
“응?”
끝으로 한유는 말을 박차고 앞으로 나아가, 조선기병 뒤를 따르는 마차들을 가리켰다.
둘의 눈에 보이는 건, 공성포와 화약마차. 가죽으로 감싸진 짐마차였다.
무려 여섯필의 말이 공성포를 끌고 가고 있었는데, 공성포의 포신과 포신에 달린 바퀴, 말과 마차를 이어주는 장치까지.
저건 눈으로 보고, 따라 만들라고 해도 못 만들 정도로 정교하고 거대했다.
그 뒤를 따르는 건 화약마차로, 술통처럼 생긴 작은 나무통 수십개가 마차에 단단히 고정되어 뒤를 따르고 있었다.
저런 화약마차가 수십개가 넘어가니... 그냥 근처에 가기만 해도 화약냄새가 진동하는 환후幻嗅가 느껴지는 듯 했다.
마지막 마차는 한유도 요왕부와 투닥거리면서 몇 번 봤던 게르 부품들. 그 또한 수십개가 넘어가니, 조선군의 진심을 깨달을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