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3. 챕터59. 일으키다 (8)
아무리 정예한 병사들이라고 해도, 하늘을 이불 삼아 땅을 요 삼아 잘 수는 없지 않나.
조선군이 저렇게 많은 게르를 가지고 왔다는 건, 이번 공성전이 결코 보여주기 식 싸움이 아니라는 뜻.
산해관 앞에 본격적인 숙영지를 건설해 놓고, 산해관이 무너질 때까지 주구장창 죽치고 앉아서 공성할 거라는 걸 의미했지.
“그렇군.”
“그러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나. 난 무서울 지경이네.”
보급에 관해서 관심이 많던 한유는 이 모든 걸 보고서,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렇게 많은 보급품을 제때, 제 자리에 옮겨놓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과 얼마나 정교한 체제가 필요한지 상상만 해왔으니까.
이건 그 대단했던 옛 명나라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니... 조선의 저력을 몸으로 느꼈고, 그에 대항한 요동이 얼마나 보잘 것 없었는지도 느끼고 말았지.
“음... 그렇군.”
“그렇네. 그래서 조선군이 진심이라는 거네. 이렇게 많은 전비를 썼으면, 조선은 반드시 산해관을 무너뜨려 뭐든 챙길게 분명하지.”
한유와 악하건은 그렇게 대화를 끝마쳤고, 이내 곧 침묵한 둘을 깨우는 굉음이 귀를 찌르기 시작했다.
“와아아!”
“오오오!”
조선군 요동군 할 것 없이 선두에서부터 우렁찬 함성소리가 들려오기 무섭게, 저 남쪽 해안가에서 아른거리던 그림자가 성큼 다가와 본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콰콰쾅! 육군이 온 걸 반기기라도 하는 걸까?
무려 열척의 신형전함이 꼬리를 물고 크게 타원형을 그리며 돌고 있었고, 옆구리가 산해관 끝자락에 닿을 때마다 포탄을 쏘아내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제 시작이군.”
“그래.”
한유와 악하건은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떨었다.
지금껏 평온했던 행군이 끝나고, 전운이 온 몸의 피를 뜨겁게 달궈 일으키는 게 느껴졌다.
산해관. 천하제일관이라 불리는 중원의 보루.
허나 지금의 산해관은 미래의 산해관과 달랐다.
수천년전부터 산해관은 이름을 바꿔가며 요충지의 거성으로 존재했고, 명이 요동으로 진출할 때. 명의 명장 서달이 산과 바다를 완전히 가로막는 형태로 관문을 개축했다.
백여년 후에 원앙진으로 유명한 척계광이 다시 개보수하면서, 바다 쪽으로도 성벽을 쌓아 그 유명한 노룡두老龍頭를 증축했지.
허나 지금 역사에선 옛 명나라 시절보다 규모는 커졌는데, 성곽과 성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까닭인 즉. 북평부와 요동의 대결에서, 항상 북평부가 우위에 있었지 않나.
요동군이 산해관을 직접 공략할 수가 없으니 성벽증축을 할 리가 없고, 대신 요동을 치기 위한 최전선 보급기지로서 관문이 아닌 도시로 발전하게 된 거지.
그래서일까? 조선육군이 보고 있는 산해관은, 천하제일관이라는 위용이 퇴색된 지 오래였다.
조선해군의 맹포격으로 인해서, 바다로 삐죽 튀어나왔던 성곽과 포대는 산사태가 난 것처럼 무너져 있었다.
그냥 가만히 놔둬도 벽돌조각과 다진 흙이, 산사태가 난 것 마냥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돌무덤으로 변해버린 바다 쪽 성벽 옆으로 이어져, 산과 바다를 가로지르는 성벽 또한 엉망진창이었다.
함포의 사정거리에 닿는 성벽과 목조구조물은 전부 박살나 성벽 밖으로 쓰레기더미처럼 떨어져 있었고, 성벽 위에 있어야할 화포 또한 보이질 않았다.
성벽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지만, 성벽 안쪽 또한 포격으로 쑥대밭이 되어 있을 게 분명했다.
천만다행이라면, 함포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난 산해관의 동문인 진동문鎭東門이 그나마 멀쩡하다는 점이었는데... 그런 안심도 이제 끝이 났다.
해군이 아닌 조선육군이, 진동문을 마주보고서 산해관 공성전을 준비하기 시작했으니까.
김종서가 이끄는 1군은 겁도 없이 산해관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성벽에서 고작 2키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숙영지를 건설했다.
겁을 먹을 이유가 있나. 1군에 속한 기병이 산해관의 기병보다 훨씬 많은데, 북평군이 진동문을 열고 나올 수나 있을까. 그렇다고 포격을 하자니 사거리 밖에서 머물고 있는 상황.
그저 반만 남은 성벽 위에서, 손가락만 빨면서 구경하는 수밖에 없었지.
그런 구경꾼들을 뒤로하고... 짐을 풀기 무섭게 말에서 내린 연대병들은 도끼와 삽을 들고, 개미떼처럼 우르르 북쪽에 위치한 연산산맥을 기어올랐다.
조선육군은 지금껏 유지비를 벌충하기 위해서, 연대병을 알뜰살뜰하게 써먹어왔다.
훈련을 하지 않을 때엔 맹수를 사냥했고, 나무를 벌목해서 목재로 만들었고, 온갖 임산물을 캤고, 더 이상 뽑아먹을 게 없으면 나무뿌리까지 뽑아 밭으로 개간해 백성들에게 팔아넘겼다.
한마디로 연대병은 화전민보다 더욱 억척스런 만능개척자였던 거지.
그런 연대병들의 손길에, 산은 순식간에 민둥산으로 변해갔다.
해군과 요동군도 놀고만 있진 않았다. 숙영지와 부두 건설은 육군보다 해군이 더 잘하지 않나.
요동군병은 칼날처럼 각을 맞춘 조선군 숙영지를 당연히 만들 줄 몰랐지만, 해군병들의 욕설과 엉덩이를 후려 차는 발길질에 못 이겨 어떻게든 손을 돕고 있었다.
그렇게 산해관 앞이 한바탕 공사판으로 변해가는 동안, 임시로 만든 지휘망루에 올라 산해관을 살피는 이들이 있었다.
“숙영지 건설은?”
“이골이 났는데 더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알아서들 잘 하고 있습니다.”
“음.”
김종서 옆에 있던 연대장 고영조는 히죽 웃으며 자신감을 표했다.
고영조는 요동에 살던 옛 고려인 출신으로, 과거 몽골원정 때에 요동에서 고려인을 송환할 때 원정군에 통역 겸 합류했던 인물이었다.
요동에 있을 적에도 요동군에 속해 여진, 몽골과 티격태격하던 무관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그는 원정군이 돌아온 후에도 착호군에 남아 군문에 들어왔지.
연대장이 되었으니 나름 입지전적인 인물이긴 한데... 따지고 보면 엄청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착호군에 속해있던 고려인이 수천에 가까운데, 그 중에서 인물이 없었겠는가. 고려인이라고 해서 조선인과 딱히 다를 것도 없는데 말이다.
해서 한어를 능숙하게 하는 고영조는 요동군과 긴밀히 소통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요동군이 말을 잘 듣던가?”
“예. 생각보다 잘 따르더군요. 북평군에 적개심이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고, 요동군부가 주지 않던 급료도 주지 않습니까?”
“게다가 요동 무관들은 군부에 입조할 생각이니까, 더욱 그럴 테고?”
“맞습니다. 다만 아직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잡일을 시키고 있습니다.”
고영조는 저기 뒤편을 가리켰다.
두정갑이 아닌 각양각색의 갑옷을 입은 요동군이 한곳에 모여 있었는데, 그의 의견처럼 대다수가 벌목한 나무를 옮기거나 바윗돌, 흙수레를 해안가로 옮기고 있었다.
김종서는 고개를 돌려 다른 이에게 물었다.
“부두를 건설할 곳은 찾았나?”
“예. 번듯한 포구를 만들기는 힘들겠지만, 임시부두는 가능합니다.”
고영조의 옆에 있던 인물. 해군병을 이끌고 온 선임부함장 이백현 또한 김종서의 물음에 히죽 웃으며 자신감을 표했다.
요서회랑의 해안가가 비록 조수간만의 차가 큰 뻘밭이 대부분이라지만, 그래도 부두를 만들 곳이 없겠는가.
오면서 계속 살펴본 바, 운 좋게도 숙영지와 멀지 않은 곳에서 바위해변을 찾을 수 있었다.
발이 푹푹 빠지는 뻘밭 보단, 흙을 채워 넣을 수 있는 바위해변이 그나마 부두를 만들기 편했으니까.
“숙영지에 필요한 목재를 수급하면서, 흙도 챙기고 있으니... 보급을 위한 임시부두를 만드는 건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이런 부두가 필요한 건 당연히 보급 때문.
아무리 광녕성과 산해관이 가깝다고 해도... 수레나 마차를 활용해서 옮기는 것보다, 배를 통해 옮기는 게 훨씬 편하고 효과적이었다. 공성전에 쓸모도 없는 전마를, 굳이 많이 묶여둘 필요도 없고 말이다.
“음...”
“게다가 토굴을 파기 시작하면, 더욱 빨리 만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백현은 나이에 맞지 않게, 꾀를 부리는 아이처럼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겠지.”
김종서는 지금껏 해군이 무슨 짓을 해왔는지 알았기에, 이백현의 웃음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해군은 산해관에 포격을 가하면서, 동시에 그 소음에 숨어 산해관 성벽 밑을 따라 토굴을 파왔다.
다만 산해관이 너무 길어서 해안 쪽만 팔 수 있었는데, 이젠 육군에게 차례가 넘어온 것.
반대편에서 파기 시작해서 해군이 파놓은 토굴에 닿는다면, 산해관 성벽 전체를 보이지도 않는 땅속에서 감싸게 되는 거지.
“적이 알아 볼 수 있겠나?”
“힘들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산해관 성벽이 높아 훤히 내려다보인다고 해도, 산 뒤편까지 보진 못할 겁니다.”
둘은 망원경으로 산해관 성벽을 한번, 그리고 그 옆에 병풍처럼 산해관에 붙어 있는 산능선을 가리켰다.
움푹 파인 숙영지 인근 산능선에서부터 파고 들어가면, 산해관에선 조선군이 토굴을 파는지도 모를 거다.
“흙을 가져와 부두를 만드는 걸 본다고 해도, 토굴을 파는 건 모르지 않겠습니까? 지금도 훤히 보이는 산어귀에서 흙을 파내고 있으니까요.”
“...”
충분히 일리가 있어서, 김종서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안 그래도 숙영지 뒤쪽에 위치한 개울을 막아, 작은 보를 만들어서 식수원을 조성하고 있는 중이다. 나아가 숙영지를 따라 만든 배수로에서 나오는 흙도 만만치 않지.
“더불어 참호를 파기 시작하면 흙이 더 많이 나올 테니, 저희가 토굴을 팔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를 겁니다.”
“설령 토굴을 예상한다고 해도... 산해관 안쪽으로 팔 거라고 예상하지, 성벽을 따라 팔 거라고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고영조가 양념을 치자, 김종서는 더욱더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럼 토굴은 그렇게 하면 되고... 그 다음으로 걸리는 건, 저기군.”
김종서는 열심히 산을 파고 있는 연대병을 지나쳐, 망원경으로 산해관 성벽이 닿아 있는 북쪽 산. 각산을 가리켰다.
산해관은 산과 바다 사이를 막은 관문이고, 각산은 그 산해관 북쪽과 바로 맞닿아 있는 산이다. 우회로라 할 수 있는 이곳도 당연히 지켜야 하니 각산장성을 쌓았고, 명-청 교체기 시절엔 이곳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었지.
“적이 성을 나오는 건 쉽지 않을 테고... 설령 나온다고 해도 문제되지 않을 겁니다. 광녕성주가 도와주고 있으니까요.”
허나 김종서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고영조는 가슴을 쿵쿵 때리며 안심시켰다.
“광녕성주 장림이라...”
“훗. 예. 그 장림입니다.”
고영조는 옛 기억이 떠올랐는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답을 했다.
조선군이 괜히 광녕성주 및 광녕성 장군들을 끌고 온 게 아니다.
십여년전. 조선군이 몽골원정을 떠났던 시절에도 광녕성주는 장림이었는데, 지금도 장림이었다.
헌데... 심양파와 요양파는 광녕성주가 광녕성의 군권을 장악하는 걸 두려워한다고 하지 않았나. 뭔가 앞뒤가 안 맞는 상황 같은데, 진실은 웃기면서도 냉혹했다.
요동에서 명성 높은 장림은 한두해 정도 광녕성주로 있다가 잘려서 한직으로 갔다가... 하급지휘관들이 심양,요양파의 입맛에 따라 물갈이 되면, 다시 광녕성주로 부임하길 반복했던 거지.
이 어처구니없는 꼴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안 나올 수가 없다.
“광녕성주가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지만, 그와 별개로 북평군과 많이 부딪친 것도 사실이지 않습니까? 기병을 이끌고 이곳까지 온 적도 여러번 인터라, 이곳 지리는 훤히 알고 있습니다.”
“숙영지 건설을 방해받거나, 야습이나 기습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군?”
“예. 광녕성주의 의견에 따라 경계병을 배치했습니다. 각산장성을 넘어 우회한다고 해도 대병이 아닐 텐데, 소규모 접전이라면 아군에게 생채기나 내겠습니까.”
“...”
고영조는 허풍선이마냥 큰소리를 쳤지만, 김종서는 연대병들의 실력을 익히 아는 터라 부인하지 못했다.
“자신 있는 건 좋지만, 방심하진 말아야 할 것이야.”
다만 너무 들뜬 게 아닌가 싶어서, 따끔하게 잔소리를 내뱉었다.
“각산장성을 견제하고, 아직 멀쩡한 성벽 반쪽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선 고지대를 사수하는 게 필수다.”
“...”
“지금껏 용연군 대감을 따라다니면서 봐온바. 화포를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선 고지대를 선점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말이다. 허점을 보여선 안 돼.”
“예. 장군.”
“예.”
용연군 연오랑을 들먹이며 김종서가 진중한 말투를 이어가자, 둘 또한 웃음기를 버리고 얼굴을 굳혔다.
사실... 아무리 미래의 기억을 가진 연오랑이라고 해도 천재는 아니니, 전장에서 직접 병사들을 부리는 건 오히려 이 시대의 위인들이 더 잘했다.
무관이 없어지고 군부가 생기면서, 지휘관이 되기 위해선 병서를 달달 외우고 직접 연대병을 부려 훈련과 실전을 통해 입증해야 했으니까.
허나 그럼에도 경력도 적은 연오랑이 모든 장군들의 존경과 인정을 받는 건, 개인훈련법과 화포 때문이었지.
옛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병서는 화포가 없던 시절에 만들어진 병서이니, 화포를 중심으로 전법 및 전술을 짜는 개념은 연오랑이 최초이자 최고였으니까.
그런 연오랑이 가장 중시했던 게 바로 고지대를 사수하는 것.
안 그래도 고지대를 점하는 건 전술적인 측면에서 필수였는데, 화포가 등장하면서 그 중요성이 더욱 커졌으니까.
“그러니 각산장성이 보이는 바로 코앞까지 산길을 깎아 화포를 올리기만 하면, 산해관 성벽을 완전히 무력화 시키는 게 마냥 불가능한 건 아닐 것이야.”
“예.”
“물론 참호를 파서 성벽에 바짝 붙어, 진동문을 노리는 것도 함께 해야 하고 말이야.”
“...”
둘은 김종서의 말에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