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4. 챕터59. 일으키다 (9)
“해군은 어찌하기로 했지?”
“저희의 움직임에 맞춰 포격을 이어갈 겁니다. 연산항을 보급기지로 만들고 보급품을 쌓아놨으니, 전보다 더 강력하게 산해관을 공략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진 의주에서 출발한 함대가 산해관을 공략해 왔는데, 거리와 보급의 문제로 사나흘에 한번씩 포격을 가해왔다.
헌데 코앞의 연산항을 차지해 개보수 했으니, 이젠 하루에 한번씩 포격을 가할 수 있게 된 것.
“함대 하나지?”
“예.”
이백현은 해군 출신답게 해군의 작전을 꿰고 있었기에, 김종서의 물음에 물 흐르듯 대답을 늘어놨다.
“함대 하나라...”
김종서가 살짝 아쉬움을 표하자, 이백현이 얼른 말을 이었다.
“함대 하나면 무려 열 척입니다. 장군. 산해관과 닿아 있는 해안가는 거의 초토화 됐는데, 전함을 더 동원하더라도 달라질 게 없을 겁니다.”
“음.”
산해관과 닿아 있는 해안가도 수심이 깊은 게 아니고, 성벽이 해안을 따라 줄줄이 이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더 많은 전함을 동원한다고 해도, 지금보다 딱히 타격을 더 줄 수도 없었다.
“게다가 천진공략을 준비해야 되고, 본토에서의 보급도 신경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함대 하나면 충분합니다.”
“맞는 말이야.”
김종서는 황보인에게 익히 들었던 이야기인 터라, 잠깐 아쉬움을 토로하는 걸로 마무리 지었다.
“그럼 우리만 잘하면 된다는 거군.”
“예.”
“최소 3개월이라... 긴 공성전이 될 거야.”
김종서는 시선을 돌려, 철벽처럼 시야를 가로 막고 있는 산해관 성벽을 바라봤다.
저길 박살내고 뛰어넘으려면 얼마나 많은 병력을 소모해야 할까. 화포가 없었다면 감히 엄두조차 못 냈을 거다.
3개월이 뭔가. 저곳은 후방으로 보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성벽이 무너질 때까지 버틸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김종서는 앞으로 진행될 작전을 머릿속에 그리며, 자기도 모르게 입술이 치켜 올라갔다.
북평군은 원활한 보급과 튼튼한 성벽을 믿고 있을 텐데, 그게 모두 수포로 돌아가면 과연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해졌기 때문.
“천진과 산해관.”
“...?”
“아군이 동쪽에서 두들기기 시작하면 북평군은 전력을 끌어모아 막으려 할 터... 앞으로의 일이 기대 되는군.”
김종서는 뜻 모를 혼잣말을 중얼거렸지만, 둘은 작전계획을 알고 있는 터라 저절로 미소가 번지고 말았다.
김종서가 이끄는 조선군이 참호를 파며 야금야금 산해관 성벽에 가까워지는 동안. 결국 요양도 손을 들고 항복하고 말았다.
사실 예정된 수순 아니던가.
광녕성의 병사들은 조선군과 합류해 산해관을 공격하러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심양호족이 배를 타고 이주하는 걸 직접 목격했다.
남은 건 요양 하나 뿐인데, 거꾸로 요양을 옥죄어 오는 조선군은 점점 늘어나는 상황.
그들 또한 답이 없는 걸 직감하고서, 조선의 인내심이 메마르기 전에 항복하는 걸 택했지.
그렇게 요양호족 또한 배를 타고 복주와 금주로 떠났고,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산동상인의 배로 옮겨 타서 이주를 시작했다.
끝내 요동이 조선에게 항복했다는 소문이 상인의 입을 타고 온 천하로 퍼져나가기 시작할 때.
의주에 웅크리고 있던 한 무리의 이들이 천천히 요양으로 북상했다.
언제 전투가 있었냐는 양, 요양성 일대는 조선군과 요양백성들에 의해 깔끔하게 정리되어 새 주인을 맞이할 준비를 끝마쳤다.
어려울 것도 없는 게, 요양성도 치열하게 싸우기 보단 대놓고 겁박과 회유를 해오지 않았나. 성벽은 구멍이 송송 뚫리긴 했지만 무너진 곳이 없었기에, 정리는 힘들지도 오래 걸리지도 않았지.
그렇게 말끔하게 정리된 요양성 밖으로, 검은 장막이 드리워졌다.
길게 도열한 조선기병들은 석상처럼 멈춰 섰고, 크고 작은 군기가 바람에 나부끼자 푸드득! 날짐승이 날갯짓을 하는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군기가 얼마나 많은지 보기만 해도 눈이 핑핑 돌고, 깃발이 바람에 맞아 내지르는 비명소리에 귀가 아릴 정도.
그 소음을 뚫고 경쾌하면서도 날카로운 박자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삐리릭! 둥둥둥! 화려한 비단 예복을 입은 취타대가 선두에 서서 대취타를 연주했고, 그 뒤로 화려한 예복을 입은 기병들이 줄줄이 꼬리를 물었다.
운석핵꿀밤의 여파로 국조오례의가 박살나면서, 모든 궁중예식이 제멋대로 변해버린 게 지금 역사다.
자주화에 눈을 뜨면서 유학식 예법을 온전히 따를 수 없으니, 뭘 어디서부터 어떻게 바꿔나가야 하는지 갈피를 못 잡았지만... 어떻게든 해결을 해야만 했다.
과거. 몽골원정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조선은 전례 없던 개선식이라는 걸 해야 했으니까.
처음에는 당연히 개판이었지만... 지금껏 큰 전쟁을 4번이나 했고, 그때마다 개선식을 보완, 개선해 오지 않았나.
고려와 조선. 조선이 강역을 넓혀가며 빨아들인 각종 이민족의 음악과 문화가 결합해, 옛 명나라와는 확연히 다른 예법이 탄생하고야 말았지.
그런 개선식 아닌 개선식이 요양성 앞에서 펼쳐지고 있었고, 그 신기한 행진을 요양백성들이 고개를 쭉 빼고 구경하기 바빴다.
요동백성들도 과거 조선백성들마냥 극강의 슬로우 라이프를 살고 있으니, 인생에 몇 번 없을 진기한 구경을 마다할 리가 있나.
특히나 조선을 거부하는 이들은 다 죽거나 떠났으니, 반항 대신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를 굴려댔지.
백마를 탄 이들이 등장하면서 부터, 구경거리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곤룡포를 입은 인물이 등장하자, 요동백성들은 하나같이 넙죽 엎드려 목청껏 함성을 내질렀다.
요동백성들이 살아생전 한번 볼까 말까한, 조선의 상왕 태종이 직접 요양성으로 왔으니까.
원래 역사에선 나라의 존망이 걸려 있지 않는 한, 왕이 도성을 떠난 적이 없지만... 건국된 지 얼마 안 된 지금 역사에선 아니었다.
태조는 본래 고려의 장군으로, 천하가 좁다하며 온 사방을 싸돌아다니지 않았나. 태종 또한 착호군을 이끌고 양전사업을 진행하면서, 전국에 행궁을 지으며 돌아다녔다.
그리곤 세자인 문종 또한 어린나이에 일찌감치 궁을 벗어나 행궁을 돌아다녔지.
그렇다보니 왕이 한성에만 머물러야 한다는 개념이 제대로 정착하지 못했기에, 조정신료들의 큰 반대 없이 이렇게 태종이 직접 요동까지 올 수 있었다.
“만세!”
“만세!”
자신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인물이 등장해서 일까?
정말로 조선이 오는 걸 반기는 건지, 아니면 혹여나 해코지 할까봐 두려워서 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만세소리가 요동백성들의 입에서 절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런 요동백성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인물.
백마에 올라타 느긋하게 나아가던 태종은, 요양성벽이 보이기 시작하자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고야 말았다.
“여기가 요동...”
그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자.
“...!”
“흐흡...”
뒤따르던 노신들 중 몇몇은 격동을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려댔다.
하나같이 흰머리가 가득해, 말을 제대로 탈 수 있는 게 놀라울 정도로 나이를 먹은 노인들이었는데... 이들 모두는 태조, 태종 시절을 함께 했던 이들이었다.
고난과 역경의 세월을 겪은 이들이, 꿈에서나 그리던 요동에 발을 디뎠으니... 그 감동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개중에선 자기도 모르게 눈가가 시큰해져서, 눈물을 흘리는 이들조차 있을 정도였다.
“...”
‘허나... 이상하군.’
하지만 가장 기뻐하고 들떠 있어야할 태종은 오묘한 눈동자를 하고서, 그저 계속 앞으로 나아갈 따름이었다.
요동정벌을 천명한 후. 태종은 함경도에서 머물며 작전을 직접 관장했다.
군사를 움직이는 건 군부의 장군들이 알아서 할 거지만, 후방에서 보급을 지원하는 작업을 손수 도맡은 거지.
오매불망 압록강을 건널 날만 기다리며 떨리는 마음을 다스렸는데... 전쟁이 승리로 끝나 압록강을 건너자, 어째 격동이 가라앉았다.
숙원을 완수했다는 흥분은 거품처럼 서서히 주저앉았고, 이렇게 요양성을 마주보고 있는 지금.
떨리기 보다는 명경지수가 따로 없을 정도로 잔잔해져서, 스스로가 생각해도 의아할 정도였지.
그토록 바라던 요동을 정복했는데, ‘대체 왜 이렇게 허탈한 마음이 드는 걸까?’라고 스스로 반추한 결과.
어렵지 않게 해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미 겪었고, 해봤던 일 아닌가.’
태종은 자기도 모르게 이런 결론이 떠올라, 피식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조선은 이미 여진을 정벌해 북방을 차지하고, 남방이족을 정벌해 남주도를 정복하지 않았나.
요동을 유독 특별히 생각하며 가슴 속에 묻어뒀었는데, 막상 까서 보고 있으니... 지난날의 대업에 비해서 딱히 특별할 게 없었던 거지.
갈대처럼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에 스스로 놀라, ‘그땐 대체 왜 그렇게 요동정벌을 거창하게 생각했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만세!”
“조선 만세!”
“...”
요동백성들의 함성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난 태종은, 괜히 민망해서 뒤를 돌아봤다.
‘자신과 같은 심정인가?’하고 살펴봤는데, 다른 노신들은 그와 다르게 잔뜩 흥분해서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았다.
허나 그와 비슷한 눈동자를 한 인물이 눈에 들어왔고, 가볍게 손짓해 말머리를 나란히 했다.
태종은 금군 사령관. 과거 착호군 시절엔 훈련대장을 역임했던 서정보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대는 기쁘지 않은가?”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다만...”
“...?”
서정보가 말을 흐리자 태종은 눈동자에 물음표를 그렸고, 그는 무언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왠지 모르게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숙원을 달성하면 천하를 얻은 기분이 든 줄 알았는데... 아니더군요. 어쩌면 심양과 요양이 싱겁게 항복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가...”
서정보가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해서 그럴까? 태종은 다시금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고 왜 이런 생각을 공유하는 지도 깨달았다.
‘녀석 때문이군.’
서정보는 연오랑을 따라다니며 사서에 남을 대역사를 함께 했고, 태종 또한 뒤에서 고스라니 보지 않았나.
허나 뒤따르는 노신들은 육조체제가 개편되면서, 관직에서 물러나 함께하지 못했으니... 느끼는 바가 다를 수밖에 없었던 거지.
“...”
잠시 어색한 침묵이 머무르자, 태종은 다른 걸 물었다.
“요양호족들은 다 떠났나?”
“예.”
“귀찮은 일을 덜었군.”
“...”
자기가 의견을 낼 주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서정보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심양호족과 요양호족이 항복을 했으니, 태종이나 세종에게 예법에 따라 항복절차를 밟을 수도 있지만... 그런 건 깡그리 생략해버리고 빨리 떠나라고 등 떠밀었다.
이건 조선이 요동을 어떻게 보는지 상징하는 극명한 예로, 앞으로 요동에 남은 호족집안을 어떻게 대할 건지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항복이라는 것도 격이 맞아야 하는 거다.
떠나는 호족을 보지 않은 것과 남아 있는 호족들을 불러 모으지 않은 건, “너희가 호족이든 말든, 우린 특별 취급을 안 해줄 거다.”라는 속뜻이 담겨 있던 거지.
“민심은 어떤가?”
“듣기로 나쁘지 않다 들었고, 요양도 마찬가지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반란이 일어날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그런가...?”
“예.”
“우리가 식량을 줘서 그런 건 아니고?”
태종은 연대병들 너머로 보이는 요동백성들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조선이 요양을 차지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당연히 요양호족들의 재산을 파악하고 요양백성들에게 식량을 푸는 일이었다.
추수를 제대로 못하고 대략 3주 넘게 포위당했을 터, 식량이 그렇게 빨리 떨어지진 않았겠지만... 그렇다고 식량을 공출당한 백성들이 풍족하게 지낸 건 절대 아니었을 테니까.
그러니 쌀가머니를 받은 백성들이, 뭐라도 더 얻어 볼까 싶어서 저렇게 목청을 높이는 게 아닐까.
“...”
서정보는 답하지 않고 침묵을 고수했고, 태종 또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걸음을 옮겨갔다.
무려 태종 일행이 요양에 도착했으니, 당연히 성대한 연회가 펼쳐졌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요동정벌을 끝낸 장군들은 북평부 공략을 위해 전부 전선으로 떠났지만... 어쨌든 요동은 차지했지 않나.
관직에서 물러났음에도, 요동을 직접 밟기 위해 노구를 이끌고 온 노신들이 한가득.
지난날의 회한을 떨쳐 보내고, 그들을 위무하고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서라도 한바탕 술판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지.
연회장은 요양파의 수장이었던 유호방의 장원이었는데... 누가 중국호족 아니랄까봐, 요양성내에 수십채가 넘는 가옥을 가진 장원을 만들어 놨다.
작은 동산과 정원, 연못까지 만들어진 후원에는 유호방의 가솔들이 남기고간 집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고, 조선군은 그걸 고스라니 사용해서 후원을 환하게 빛냈다.
연못을 마주보고 있는 정자에도 주안상이 마련되어 있었고, 사방에 피워둔 등잔불빛을 따라 그림자가 연못에 흔들렸다.
자기들끼리 태조와의 추억을 곱씹는 노신들을 뒤로하고, 따로 한자리에 모인 이들.
과거엔 삼정승이었으나 지금은 농업부장이 된 황희, 의약부장이 된 맹사성, 조폐부장이 된 허조, 세종과 태종의 연락책인 인수부윤 성억. 끝으로 태종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던 것.
옛 시절엔 이렇게 왕과 신하들이 따로 모이는 게 눈치가 보였지만, 육조체제가 깨지고 부서체제로 전환된 후엔 달라지지 않았나.
심지어 왕과 독대를 하더라도 뒷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바뀌었다. 이젠 더 이상 정치관료가 아니라 행정관료가 되었으니까.
그만큼 독립성이 보장되어, 각 부서장이 다른 부서의 일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게 됐기 때문이지.
그러니 현직 관료인 이들만 따로 모여 태종과 술잔을 나누는 건, 지금에 와선 딱히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