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5. 챕터60. 토해내다 (1)
다만 오늘 같이 좋은 날에, 태종의 심기가 심상치 않아 보였으니... 한 자리에 모인 이들은 그의 눈치를 보며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눈치싸움을 하듯 신하들의 눈빛이 마구 교차했고, 끝내 어색한 침묵을 깨고 성억이 입을 열었다.
“상왕전하. 어디 불편한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불편한 게 있을 리가.”
“...”
태종은 아무렇지 않게 답을 했으나, 씁쓸한 표정은 그대로인 터라... 괜히 물어본 이들만 머쓱해지고 말았다.
“...”
이 어색한 침묵을 깨려는 걸까.
투둑. 태종은 고운 백자 자기병의 입구를 막은 기름종이를 직접 뜯어내고선, 작은 잔에 술을 따르고선 벌컥 한입 털어 넣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약조를 했지. 이 불효자가 반드시 아버님의 숙원을 풀어드리겠다고. 요동을 우리 땅으로 만들겠다고 말이야.”
“...”
드디어 속내를 보이려는 듯 태종이 혼잣말을 늘어놓자, 모두는 자세를 고쳐 앉고 경청했다.
“요동 땅에 미련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것도 한번 손에 잡아본 이라면 더욱 그렇겠지. 나도 그러했네. 비록 직접 밟아보진 않았지만 말이야.”
“...”
한풀이를 늘어놓듯 조용히 읊조리는 태종을 보며, 다들 차마 끼어들지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내 집안 사람들 중에서 붓을 잡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어릴 적엔 그게 나만의 길인 줄 알았으나, 후회가 없는 건 아니었지.”
“...”
술기운을 빌려 옛 시절 이야기를 털어놓았건만, 분위기는 더욱더 가라앉았다.
가볍게 푸는 이야기지만, 조선건국을 이룩하며 지금까지 쌓아올린 모든 역사가 담겨 있는 사연이니까.
태조는 고려의 장군이었고, 그 아들들 모두가 태조와 함께 싸운 장수들이었다.
유독 달랐던 사람이 있다면 바로 태종. 그는 문으로 성공하여 고려의 과거시험에 합격했던 인물이니까.
그게 훗날의 왕이 되기 위한 노림수였는지, 아니면 무에 재능이 있는 형들을 제치기 위한 수작이었는지 모르지만... 어찌됐건 태조는 자기 집안에 과거합격자가 나왔다는 것에, 하늘을 날 듯 좋아했던 건 사실이었다.
그 후로 뭐... 왕자의 난이 벌어지고, 조선건국과 관련해 숙청이 벌어지고, 끝내 왕이 되어 지금에 이르렀지만... 태종의 속마음 한쪽에는 옛 시절의 미련이 남아 있었다.
붓을 잡은 탓에, 칼을 잡은 형제들과 다른 길을 걸었다는 것 말이다.
“어쩌면 나만의 아집이었을지 모르나, 그 때는 그러했지. 나는 비록 왕이 되었지만, 우리 가문 대대로 이어 내려온 장군은 되지 못했으니까.”
“...”
“그래서 집안 그 누구도 세우지 못한 업적을 바랐던 걸 수도 있고, 아버님도 해내지 못한 요동정벌을 하길 바랐을지도 모르지. 그 옛날. 명이 있던 시절에 하지 못한 그 요동정벌을, 드디어 내 손으로 이룩했다고 말이야.”
“...”
옛 이야기, 오늘 이야기가 뒤섞인 태종의 말에, 다들 숙연해지고 말았다.
이들 모두 태종 세대로 태종과 함께 모든 걸 지켜본 사이 아닌가. 정몽주. 정도전 등. 조선건국을 하면서 피로 얼룩진 역사의 결과가 여기까지 흘러왔으니까.
“그러니 이제 요동을 얻으면 마음 속 한이 풀려, 천하를 다 가진 것 마냥 기쁠 줄 알았는데... 나 스스로 기괴하게 느껴질 정도로 덤덤하더군.”
“...”
돌고 돌아 드디어 속내를 털어놓자, 모두는 슬쩍 눈을 빛내며 태종을 살폈다.
“까닭이 뭘까 압록강을 건너 오면서 장고한 결과... 어리석게도 나는 과거에 머물러 있더군. 세상이 이렇게나 바뀌었는데, 아직도 옛 시절에 파묻혀 있었던 거야. 요동을 얻으면 천하를 가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
“도와 용연군이 어째서 요동정벌을 반대했는지, 이제야 알겠더군. 녀석들은 이미 오래전에 중국의 천하관. 중화를 벗어나 있었던 거지.”
“...”
태종은 다시금 술잔을 가득 채워 털어 넣고서, 타는 갈증을 밀어냈다.
그렇게라도 하면, 자기도 몰랐던 어리석음이 씻겨 내려갈 것 같았다. 자기도 모르게 세대의 격차가 한참 벌어진 게, 이런 방식으로 나타날 줄은 몰랐으니까.
“자네들은 어떤가?”
졸졸졸. 태종이 각자의 술잔을 채워주자, 다들 한입에 들이키고선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저희도 그러했습니다.”
“예... 지금 와서 돌이켜 보건데, 아국은 이미 새로운 천하를 열고 나아가고 있더군요.”
“그렇습니다.”
어째 다들 비슷한 심정이었는지, 드디어 무거운 분위기를 떨쳐내고 피식 웃음을 짓고 말았다.
여말선초의 혼란기. 조선건국 당시의 내부투쟁. 운석핵꿀밤으로 인한 천하의 해체와 분열. 그리고 전례 없는 개혁까지.
태종과 이들 노신들은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주위를 돌아보지 않고 그저 앞만 보며 달려왔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숨을 고를 겸 뒤를 돌아보니... 이미 생각했던 목적지는 한참을 지나쳤고,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멀리 와버렸다.
화들짝 놀라 “어찌해야 하나.”하고 주변을 돌아보는데, 어째 자신과 같은 노인네들만 고민이 많고 젊은이들은 아무렇지도 않아 하고 있다.
이미 천하가 바뀐 지 오래인데, 이들은 과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한발 걸쳐 있었던 거지.
“남주도(대만섬)와 해주도(해남도)를 정복했을 때, 이미 깨달았어야 했는데...”
“아니. 그보다 북방과 설주를 넘어, 동쪽 동토로 나아갈 때 알아차려야 했을 겁니다.”
“요동이 세상의 끝이요. 천하로 나아가는 길목이라 생각했건만... 돌이켜 보건데 아국은 이미 중국의 천하에서 벗어났더군요.”
다들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소회를 풀어냈다.
남주도, 해주도, 끝으로 비단길 개척까지.
중국의 천하에 담겨 있지 않던 온 세상이 이미 조선의 것이 되었는데, 이제 와서 요동이 뭐가 그리 중요할까.
고려에서 조선까지 오면서 세상이 바뀐 것보다, 운석핵꿀밤 이후 개혁을 거치면서 바뀐 게 훨씬 많지 않나.
운석핵꿀밤 세대, 개혁 세대는 이미 중국의 천하관과 사대, 중화 따위는 깨끗이 지워버리고 조선만의 천하관을 구축해 나아가고 있었는데... 이들 노신들만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
자기들이 해놓고도,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냈는지... 이제 와서 제대로 깨닫게 됐다.
“쯧... 그래서 그랬던 거네. 시류를 이렇게 읽지 못해서야 원... 확실히 이제 물러날 때가 됐어.”
“...”
태종은 한잔 술로 쓴웃음과 무거운 분위기를 날려 보냈고, 다들 따라 마시면서 동참했다.
분위기를 확실히 풀 생각인지, 그는 술병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처음 맛보는 술인데... 술맛이 좋군.”
“양녕대군께서 승전을 축하한다며 올린 술입니다. 이번에 새로 만든 술이라고 하더군요. 숙성이 되면 더 맛이 좋을거라 했습니다.”
“그래?”
자식을 칭찬하는데 싫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것도 아픈 손가락이던 양녕이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걸 보면, 더욱더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다.
“오...”
태종은 술병을 이리저리 돌려봤고, 주둥이가 얄팍한 호리병의 두툼한 배에 박힌 글씨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감탄성을 흘렸다.
백자에 회청을 이용해 시문을 적어놨는데, 그 빛깔도 그렇고 글씨도 그렇고... 딱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인다.
“회청인가?”
“예. 이젠 강남을 거치지 않아도 회청을 싸게 구할 수 있는 터라, 새로운 양식의 자기가 많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온 천하로 팔려나가고 있으니까요.”
성억은 히죽 웃으며 자랑을 털어놨다.
헌데 마냥 허세는 아니었다. 관이 주도하던 자기소는 전부 민간으로 이양된 지 오래. 자기기업이 난립하면서 경쟁이 붙었고, 당연히 비싸고 많이 팔기 위해 더 좋은 자기를 연구하지 않겠나.
더욱이 남방과 일본을 넘어 서방까지 수출이 되고 있는 탓에, 비단길 개척 전과 후의 자기기업의 성장세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급상승 하고 있었다.
“양녕이 자기기업도 하던가?”
“예. 오래됐습니다. 술병도 대군께서 만드신 거라고 하더군요.”
태종은 다시금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술병을 살폈다.
“흐음... 양녕의 글 솜씨는 여전하군.”
“요즘은 실력이 더 느신 듯 합니다. 대군의 글을 받아가려는 사람이 원체 많아서, 일본상인의 주문을 받은 상인들이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하더군요.”
“음.”
기분 좋은 이야기를 들어서 인지, 태종은 다시금 시원하게 술잔을 털어 넣었다.
“양녕은 잘 지내는 모양이군.”
“예. 사람이 달라졌다는 소문은 전부터 들려왔고, 요즘은 집안도 시끄럽지 않다고 하더군요.”
“다행이야.”
“...”
태종의 표정이 미묘해지자, 다들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왕족에 대한 일은 세종과 내수사가 관장하는 일.
당연히 태종에게 직접 보고가 올라오지 않아 자세히 모르고 있었다. 그가 이래라 저래라 하면 세종이 권위가 떨어지지 않겠나.
해서 풍문으로만 들었지, 이렇게 직접 이야기를 듣는 건 오랜만이었다.
실제로도 양녕은 정신을 차린 지 오래.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주색잡기의 재능을 다른 쪽으로 풀며 승승장구하는 중이었다.
양녕이 세자인 시절엔 주변에서 체통을 지키라고 닦달을 해댔지만, 지금은 누구하나 뭐라 하는 사람이 없지 않나.
나이도 먹었겠다. 자연히 폭급한 성정 또한 줄어들어서, 사고치는 일은 없었지.
“그 정도라...”
“음... 여색을 즐기긴 하는데, 집안에 문제가 생기는 일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성억은 태종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첩을 들이기도 힘들어졌고, 굳이 들일 필요도 없으니까?”
“예...”
이건 태종도 얼핏 들어본 이야기인 터라, 성억의 대답에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양녕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서, 조선사회 전반을 바꾸고 있는 사안이었으니까.
세종은 전부터 처첩제를 깨트려 오고 있었다.
신분제의 타파로 노비의 자식인 얼자 자체가 없어졌고, 반대로 양반신분도 무너뜨려 양반의 적자도 없앴다. 서자라는 개념조차 인정하지 않아, 법으론 차별받는 것도 없이 그냥 적자로 인정했지.
이렇듯 첩의 대우를 처와 동등하게 올려놓고, 여기에 상속문제를 건드리면... 집안 꼴이 평화롭겠나.
이걸 통해 집안의 힘을 깎아내려, 고려 때의 귀족마냥 대가문을 형성하지 못하게 막으려는 거지.
“기생집이 늘어나는 것도 한몫했을 거고 말이야.”
“예. 일장일단이 있지만... 지금까진 놔둬도 될 수준으로 퍼지고 있습니다.”
돈과 관련된 이야기라서 그런지, 조폐부의 허조가 얼른 답을 이어받았다.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가계수입이 늘어나면, 당연히 백성들이 돈을 쉽게 쓰기 마련이다.
조선의 경제력이 급상승하면서 먹고사는 문제가 얼추 해소되자, 양민들은 그간 누리지 못했던 상위문화에 눈독을 들이기 마련.
그중에서 가장 쉽게 접하고 편히 대할 수 있는 건 당연히 술이었고, 술 하면 여자가 빠질 수가 없는 법. 그것도 옛 시절엔 양반들만 향유할 수 있던 기생이라면 더욱 그렇겠지.
해서 조선전국에 기생집이 우후죽순 늘어가고 있었고, 조정에선 이걸 알음알음 단속하면서도 묵인하고 있었다.
“북방이든 남방이든, 부인이 없는 남정들이 집안을 나와 사는 경우가 많아졌으니까 말이야.”
“예. 관비가 없어진 영향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특히나 무역항과 주둔지, 역참과 수참이 있는 교류지, 상설시장이 열리는 대도시에서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다들 얼핏 들은 게 있어서 한마디씩 덧붙였다.
조선의 상업이 성장하면서, 상인이 아니더라도 돌아다니는 유동인구가 많아졌다. 또 직업군인이나 선원과 같은 독신자가 많아지면서, 어쩔 수 없이 여자가 필요하게 된 것.
허나 과거와 달리 노비가 없어지고, 율법부가 생기면서 법의 집행이 강력해진 이상, 이런 성적욕구를 해소할 방법은 기생밖에 없게 된 거지.
헌데 이게 처첩제와 맞물리면서, 이젠 굳이 기생을 첩으로 들이지 않고 그냥 즐기기기만 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었다.
양녕의 집안이 평화로운 것도. 이젠 이상한 성적욕구를 문제되게 풀지 않고, 첩도 들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문제라면 사생아겠군.”
“예. 그와 관련해서 전하께서 법률을 정비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따로 살 수 있게 매달 돈을 내놓든지, 혼인을 하든지 둘 중 하나를 해야겠지요.”
태종은 가볍게 고개를 내젓고선, 복잡한 문제를 털어냈다.
세종이 어련히 알아서 할 문제니, 자신이 끼어 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효령은?”
양녕 이야기가 나와서일까? 태종은 다른 아들의 소식도 물었다.
특히나 효령은 원체 조용하게 지내는 터라, 뭘 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을 정도니까.
“대군께선 여전히 청석사에 머물면서, 서방사제들과 논담을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용연현에 세운 청석사는 조선불교청의 본산으로, 지금은 이곳에 정교회의 사제들을 데려와 승려들과 교리논쟁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정교회라는 것 말이군.”
“예.”
태종은 이미 조정의 일에서 손을 땐지 오래. 직접 현장에 머물며 양전사업을 진행해 왔었다.
물론 가는 곳마다 행궁을 지어 거주하면서 왕처럼 지냈지만, 조정의 일에 대해 손을 쓰는 건 아니었지. 요즘은 요동정벌의 보급을 지휘하느라 더욱더 신경 쓰지 못했고.
해서 청석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정확히는 몰랐다.
“정교회의 사제들이라... 몇이나 왔지?”
“해마다 숫자가 늘어서, 지금은 대략 백명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자발적으로 온 이들은 몇 안 되고, 끌려온 이들이 다수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음...”
태종은 술잔을 매만지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외국종교에 대해서는 세종이 어련히 알아서 잘 처신할 거니 걱정할 게 없다. 오히려 조선불교청처럼 “어떻게 하면 왕실과 조정에 이득 되게 써먹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