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0. 챕터60. 토해내다 (6)
허나 허조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닌 게, 이 시대의 지식은 편차가 너무 컸다.
미래의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초등교육이라고 해도, 그건 수백년간 인류가 쌓아올린 지식의 집합체다. 당연히 이제 막 학문화를 이룩한 조선은 감히 넘볼 수도 없는 위치에 있었다.
쌓아 올린 학문을 오히려 깎아서, 눈높이를 낮춰 초등교육 수준으로 만든 것 자체가 이미 역사니까.
더군다나 지금까지의 교육은 어디까지나 유학.
유학이 비록 통치 학문이라지만 어쩌면 이건 철학에 더 가까운 학문이고, 나머지 잡학은 굳이 따지고 보면 문과가 아닌 이과나 예체능에 더 가까웠다.
이렇다보니 기초교육이라 하여 가볍게 가자니... 교육과정이 깊어 질려야 깊어질 수 없을 정도로, 가르칠 게 얼마 없었고.
반대로 제대로 배우자니... 기초학문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어, 제대로 각을 잡고 파고 들어가야 했다.
지금처럼 향교에서 가르치는 수준으로는 턱도 없는 거지.
“가장 먼저 따져볼 건... 자본유학이 비록 대세라곤 허나, 그 또한 유학. 그간 얼마나 많은 논란이 있었는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관원들이 가장 먼저 배우고 익히는 학문이 유학. 아무리 유학의 위치가 내려갔어도, 이걸 빼놓고 갈 수 없다. 어찌 보면 관원의 필수과목과 같은 거니까.
“끄응.”
허나 허조가 말을 꺼내기 무섭게, 태종은 그만하라는 듯 앓는 소리를 냈다.
운석핵꿀밤의 여파를 직격으로 맞은 게 태종이 다스리던 시대고, 그 시절엔 조정의 업무를 못할 정도로 사상계가 분열해서 관료들끼리 시도 때도 없이 말싸움을 해댔었다.
‘후...’
그 시절이 떠오르자, 태종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먼저 흘러나왔다.
그때 이후로 시간이 근 삼십년 가까이 흐른 지금.
분열된 성리학 계파는 자본유학이라는 큰 틀로 묶였으나, 그 안에는 각 계파가 주장하는 핵심이론을 중심으로 사분오열됐다.
한마디로 옛날에는 그냥 기존의 경서만 공부하면 그만이었다면, 이젠 비슷하면서도 추구하는 바가 조금씩 다른 수많은 신 유학경서를 공부해야한다는 거지.
다른 잡학이나 신학문들? 이 또한 더 말할 필요가 있나.
지금껏 잠자고 있던 백성들의 지식을 긁어모았고, 조선의 세계관이 넓어짐에 따라 중국을 넘어 남방, 일본, 서방초원, 서방국가의 학문까지 조선으로 들어오고 있다.
하나만 파도 한 세월인데, 이걸 다 파려면 항교에서 애들을 가르치는 수준으로는 꿈도 못 꾼다.
“그래서 요즘은 향교를 다른 방향으로 바꾸고, 시험단계에 들어갔습니다.”
“어떻게?”
“향교 중 일부를 대학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기초교육이라고 해봐야, 사실상 각 집안에서 배울 수 있는 수준의 교육을 교생이 대신 가르쳐 주는 거지 않습니까? 이건 경험으로 습득할 수 있는 거니, 오래 교육할 필요가 없고... 대신 모든 백성들을 다 가르치기 보다는, 배우려는 의지가 있는 이들을 제대로 가르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꿔보려 합니다.”
“그래도 기존의 향교보단 크겠군?”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예전 향교와 지금 향교에서 배우는 원생의 숫자 자체가 열배, 스무배 이상 차이가 나니까요.”
예전의 향교는 미래 관리를 위한 엘리트 교육기관이었고, 관원의 수가 적은 만큼 예비생들의 숫자 또한 적었다.
나아가 행사장으로 활용되는 운동장이 왜 필요했겠나. 옛 향교는 기껏해야 전각 몇 개 있는 게 고작인 수준이었지.
지금의 향교와 과거의 향교는 규모면에선 아예 다른 수준이다.
“음...”
태종은 허조가 말하는 결론을 듣자마자, 뭔가가 떠올랐다.
“그건 직업교육당과 귀화교육당에서 가르치는 것하고,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이는군?”
“예.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저희가 첫 단추를 그만큼 잘 끼운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필요에 의해 급하게 만들었지만, 효과는 확실히 입증이 되었으니까요.”
다들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여댔다.
어째 태연하게 자기 자랑을 하고 있건만, 태종 또한 부인하지 못하고 동조하고 말았다.
‘허허... 생각해보면, 당연한 말이기도 하군.’
귀화교육당에선 귀화한 외국인에게 조선말, 조선글, 조선문화, 조선법, 충효를 비롯한 이른바 도덕을 가르쳐 왔다.
헌데 조선에 대해 무지한 귀화인이나, 멋모르는 꼬꼬마 애들이나, 따지고 보면 둘 다 백지상태인 건 마찬가지 아닌가.
이런 교육을 통해서 조선인의 정체성을 덮어씌웠는데, 이건 궁극적으로 향교의 기초교육이 지향하는 목표와 동일했다.
“직업교육당도 마찬가지겠어.”
직업교육당은 야생의 삶을 살던 여진인들을 문명인으로 만들고. 조선사회에 흡수시키기 위해, 각종 직업교육을 시켜왔는데...
이 또한 향교에 오는 꼬마애들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실용 잡학을 가르치려는 의도 자체가 백성들이 전문 직업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줘서, 조선의 생산력을 끌어올리려는 것이니까.
“그래서 정말 아주 기초적인 수준의 실용학문. 훈민정음이나, 구구단, 기초산학, 기타 잡학만 항교에서 가볍게 가르치고, 나머지는 대학으로 옮기겠다는 거군.”
“예. 저희가 판단하기로 1년 정도면 기초학문 교육은 끝낼 수 있으니, 나이를 가리지 않고 향교의 기본과정을 끝낼 수 있을 거라 보고 있습니다. 그간의 경과로 봐선 틀림없습니다.”
“음...”
향교는 비틀비틀하긴 했지만 어쨌든 운용이 됐고, 심지어 전례 없던 무사부까지 교생으로 합류해 지금껏 교육을 진행해왔었다.
전국에 퍼진 교생들이 올려 보낸 업무보고는 수년간 조정에서 취합됐고, 그 결과에 따르면 기초교육은 1년이면 끝낼 수 있다는 것.
“다만...”
“...?”
“무술과 무기술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라 오래 배워야 하지만... 이걸 기초교육으로 보긴 힘들지 않습니까? 하여 무사부 대신 오히려 개인 무관을 설립하는 쪽으로, 방향을 트는 게 낫다고 보고 있습니다.”
“무관武館... 무술도장이란 말이지.”
“예. 백성들에게 무술을 가르치는 건 나쁘지 않지만... 모두가 무술에 뜻이 있는 건 아닌데, 조정에서 비용을 들여 유지하는 건 비효율적이라는 의견이 다수입니다.”
“흐음...”
허조를 비롯한 네 사람은 슬그머니 태종의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줄였고, 태종은 신음을 숨기지 않고 흘려댔다.
사병을 누구보다도 극도로 경계하는 인물이 태종 아닌가.
무관은 자칫 잘못하면 사병 양성소로 전락할 수 있으니,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조심하려는 모습이었다.
‘허나 이 부분에 대해선 녀석과 이미 이야기를 나눴고... 위험보다 이점이 더 많다고 결론이 나지 않았나.’
태종은 오래전 연오랑이 말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의심을 접었다.
연오랑이 말했던 건 규모의 차이. 설령 부작용으로 사병이 깨작깨작 생기더라도,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이 왕실의 편에 설 거라고 했다.
반대로 무관이 융성했을 때의 장점은, 어릴 때부터 숙련된 칼잡이가 양성되어 군 병력의 수급이 원활하다는 점과 전역한 병사들이 엉뚱한 곳으로 빠지지 않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점.
‘포도청과 함께 치안유지에도 도움이 되고 말이지.’
“맞나?”
“예. 나아가 무관이 많이 생기면 생길수록 무술대회도 다양하고 풍성해지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부득이하게 현역 연대병들이 격구대회와 무술대회에 참여하고 있는데... 이게 바람직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군문의 일은 군문의 일이니, 민간으로 넘기는 게 옳다고 보고 있습니다.”
“...”
태종은 납득했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연오랑은 원래 역사처럼. 조선이 너무 문文에 치우치는 기조에서 벗어나게 만들기 위해서, 어떻게든 무武를 키우려고 이런 수를 쓴 건데...
일이 이렇게 흘러가자, 조정에선 어떻게든 뭐라도 뽑아먹으려고 노력했나 보다.
태종의 심기가 풀어진 걸 모두가 알아차렸고, 그의 표정이 밝아지기 무섭게 허조가 얼른 말을 이어 붙였다.
“해서 향교의 기본교육은 그렇게 끝내기로 결정했고, 심화교육은 향교를 대학으로 바꿔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새로 만든 향교의 부지는 생도가 숙식해도 충분히 남을 정도고, 교생들 또한 쉽게 구할 수 있으니까요.”
“음. 기존의 대학과는 조금 달라지겠군?”
“아무래도... 지금의 대학은 다시 연구소로 돌아가고, 새로 만든 대학은 확실한 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할 계획입니다.”
“...”
지금의 대학은, 착호군이 양전사업을 진행할 때 조선 각지에 세운 연구소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조정은 기업의 활성화를 위해 숙련된 장인이 대거 필요했고, 이런 장인들을 집체교육 시켰던 기관이 바로 연구소였지.
이후 대학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연구소는 민간에 뿌리를 두고, 기업에 기술을 팔거나 기업사원을 교육시켜주는 걸로 유지비를 충당했다.
지금 말하는 향교, 대학과는 거리가 있었기에,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려보낼 계획이었다.
“학비는?”
“아예 안 받을 순 없는 노릇이지만, 그렇다고 부담될 정도로 많이 받지도 않을 생각입니다. 어찌됐건 미래의 관원과 장인을 키우는 교육기관이니까요. 예전과 주머니 사정이 달라졌지 않습니까.”
허조는 미소를 숨기지 않고, 히죽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향교에 들어가는 재원이 없다고 울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조선이 거지에서 벗어난 지 한참 돼서, 이 정도 지출은 아무렇지 않게 됐으니까.
건물을 세우고 운동장 부지를 만드는 데 돈이 많이 든거지, 이미 완성된 향교를 유지하는 건 끄떡없었다.
“허면 연수원도 대학으로 바꿀 생각인가?”
“분리할 예정입니다. 아무래도 연수원을 상위 교육기관이자 실무교육기관으로 바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연구소 하면 따라오는 게 연수원인터라, 이번엔 말을 많이 한 허조를 대신해 맹사성이 대답했다.
연수원은 과거. 조정에서 관원을 마구 충원했을 때.
유학적 소양이 얕지만 실무에만 강한 향리출신들을 재교육시키고, 잡학이 과거의 정식과목으로 되면서 그들을 정식관원으로 재교육시키기 위해 만든 임시 기관이었다.
허나 생각보다 효과가 커서, 임시 딱지를 떼고 정식 기관이 되었지.
결국 대학과 비슷하게 변했는데, 다른 점이라면 관원을 키우기 위한 기관답게 가르치는 학문이 차이났다는 점.
대학이 미래의 이과에 가까운 학문을 가르쳤다면, 연수원은 문과나 예체능에 가까운 학문을 가르쳤다.
“맞나?”
“예. 다만 민간 대학에서 선호하지 않는 학문은 연수원을 대학으로 바꿔서 가르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과거시험의 평등과 관원들의 빠른 적응을 위해서는 다른 학문처럼 미리 가르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의약학이나 악학樂學, 화학畫學 같은 학문은 민간으로 넘기겠다?”
“그렇습니다.”
의학과 약학은 착호군 시절부터 꾸준히 발전시켜왔고, 민간의원들을 정식 관원이나 군의관으로 뽑으면서 의학연수원을 만들었다.
허나 민간 의원 및 약제기업, 약제사 등이 늘어나면서 민간 대학에서도 의약학을 가르쳤으니, 굳이 의약학 학문을 연수원에 남겨둘 필요가 없었다.
굳이 남는다면 대학보다 수준 높은 의약학을 연구하는 기관으로 남아야 할 거다. 궁에서 필요로 하는 의원은 수요가 있으니까.
악학의 경우에는, 과거엔 조정과 왕실의 행사에 악공들이 필요했기에 나라에서 관리를 해왔지만, 지금은 악공들이 먹고 살 길이 활짝 열렸다.
기생집이 늘어났고, 축제가 활성화되면서 공연단으로 탈바꿈한 재인패 또한 늘어났으니... 이젠 악공들이 바늘 구멍같은 과거시험에만 목을 맬 필요가 없어진 거지.
화학도 마찬가지다. 백성들의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그나마 접근하기 쉬운 고급문화, 그림에 대한 관심 또한 높아졌으니... 화공들 또한 꼭 관원의 길만 걸을 필요가 없어졌다.
“하지만 재정학이나 율학, 택리학과 같은 학문은 조정에서 직접 관리를 해야겠지.”
“그렇습니다. 기업에서 선호하지 않는 학문일뿐더러, 필요가 적은 학문이니까요.”
“음...”
톡톡. 태종은 가볍게 손가락을 두들겼다. 마음에 드는 건지 안드는 건지 모를 정도로 애매한 표정을 고수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 민간 대학에서 관원에게 필요한 학문을 가르칠 필요는 없을 테니까.’
백성들이 법률, 지리학 등을 전공으로 배울 필요가 있겠나.
과거 조선에선 수령이 사법권을 행사했지만... 그런 수령조차도 법령을 다 알지 못해서 사회상규에 따라 판결하거나, 필요할 때마다 법전을 뒤적였다.
하지만... 기업법이니 뭐니 하면서 전례 없는 온갖 법률이 제정되고, 아예 사법권을 집행하는 율법부가 생긴 이상.
전처럼 순환근무를 하는 방식이 아닌, 전문 법률관료가 탄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복잡해진 율학 과거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선, 미리미리 법률을 배울 수 있는 대학은 반드시 필요해지는 거지.
택리학. 지리학 또한 지도를 만드는 데 가장 많이 쓰이고 있으니, 대학에서 가르쳐야 할 거고 말이다.
미래로 치면 문과대학은 조정에서 직접 관리하는 대학으로, 이과와 예체능 계열은 민간대학으로 넘어가는 형태라고 볼 수 있었다.
“그 외에 서방에서 새로 들여오는 학문과 금석학과 같은 학문 또한 대학으로 만들어 남겨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설령 기업에서 쓸모가 적고, 조정에서도 자리가 적더라도 말입니다.”
“순수한 학문으로서 말이지.”
“예. 학문으로서 말이지요.”
태종이 피식 웃으며 말을 하자, 맹사성 또한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흡사 옛 시절을 꼬집는 것 같은 말이었으니까.
운석핵꿀밤 이전 시절이라면 지금 성장하고 있는 학문들을 학문 취급을 했겠는가.
허나 시대는 바뀌었고, 조선의 발전상을 보면서 모두가 이젠 성리학만이 답이 아닌 걸 인정하고 있다.
조정에 돈이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이러한 추세는 결코 되돌릴 수 없으니, 절대 건국 당시의 조선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러니... 그 시절을 자기 손으로 만들고, 뚜렷이 기억하는 이들은 헛웃음만 계속 나올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