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4. 챕터60. 토해내다 (10)
“북방에 신도시를 하나 더 건설한다라... 흥령군이나 복여위 출신의 반응은?”
“결코 나쁘지 않습니다. 사실 나쁠 리가 있겠습니까? 자신들이 기존에 살던 터전보다 더 좋은 땅으로 이주했는데 말이지요.”
“...”
이건 태종도 보고를 받은 내용인터라,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복여위의 현 수장인 야치부르는 조선에 귀부하면서 흥령군이라는 작호를 받았다.
지금껏 수많은 귀화무리가 있었지만, 복여위 만큼 큰 세력이 있었던가. 무려 3만에 가까운 이들을 싸움한번 없이 꿀꺽 삼켰으니, 작호를 주는 건 전혀 아쉬울 게 없다.
더욱이 과거와 달리 지금은 작호의 영향력이 현저히 낮아졌다.
개혁 초창기. 조정은 공신전 및 궁방전을 회수하면서, 그 대신 염전기업과 같은 굵직한 사업허가를 내줬다.
이게 큰 반대 없이 쉽게 넘어갈 수 있었던 건... 눈치싸움을 하면서 면세지를 유지하는 것보다, 차라리 세금을 내고 기업을 키우는 게 훨씬 돈을 많이 벌 수 있었기 때문이었지.
이런 당근을 제시했는데 정치쟁점화 시키거나 명분론을 걸고넘어지자니, 착호군을 이끌고 있던 태종의 칼날이 너무 무서웠고 말이다.
아무튼. 이 당시에 단순히 땅만 뜯어냈을까.
양반신분제마저 박살내려 하고 있었으니, 양반 중에서도 양반인 공신과 왕족의 권한 또한 당연히 깎아내렸다.
땅에 묶여 있던 노비, 양민들은 전부 해방됐고, 작호는 당대에만 인정받아 세습이 불가능해졌고, 낙하산으로 임용될 수 있는 음서제도도 폐지됐고, 개인이 아닌 집안사람에게까지 은연중에 폭넓게 적용되던 면책특권도 없어졌다.
또한 육조체제가 부서제로 바뀌면서 작호가 있다고 해서 관료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거의 명예직에 가까울 정도로 변해버린 게 지금 현실이었지.
이러한 제도는 그 어디에도 없는 조선만의 것이었으니, 야치부르가 속이 쓰리고 아쉬워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말.
해서 조정은 다른 방편으로 그를 달랬는데, 바로 돈지랄이었다.
영지도 빼앗겼고, 밑에 다스리던 부족민도 없어졌지만, 그걸 모두 대체할 정도의 엄청난 돈을 손아귀에 쥐어준 거지. 낭비하지만 않으면 수대를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거금을 말이다.
“흥령군은 그렇다쳐도, 복여위 출신 또한 유독 말을 잘 듣는단 말이지...”
“아국에 편입되지 않았다면, 결국 요왕부나 제왕부, 멀게는 아다이에게 흡수될 게 뻔하지 않습니까? 어차피 누군가에게 복속될 거라면, 아국이 최선인 걸 부족민 모두가 알고 있는 듯 했습니다.”
“그간의 공작이 효과를 발휘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분열을 위해 창주에서 자유무역을 허가했으니 말이지요.”
반신반의하는 태종의 우려를 날려 보내려는 듯, 황희와 허조가 얼른 말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유목민은 본래 느슨한 체제로 유지되는 사회다. 복여위라고 해도 다를 게 없고, 야치부르가 대족장이자 수장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다.
복여위는 수 개의 부족이 하나로 합쳐진 형태고, 그 부족 내에서도 한마음한뜻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수십개의 가족집안으로 나뉘어져 있다.
옛 시절에는 최소단위라 할 수 있는 이 가족집안끼리도, 치고 패고 싸우며 은원을 이어나갔지.
결국. 복여위라고 퉁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바람이 불면 날아갈 콩가루 집합체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거다.
이래서 가족집안이 야치부르나 부족장의 허락도 없이 요왕부나 제왕부로 넘어갔던 거고, 조선 창주와의 무역 또한 복여위의 이름을 내거는 게 아닌 가족집안이 직접 와서 거래하는 경우가 흔했지.
“해서 복여위 출신들을 쪼개서 북방신도시로 이주시키는 건, 전날의 여진부족을 이주시키는 것보다 훨씬 쉽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몽골과 여진이 그렇게나 달랐었나...?”
“그보단 여진부족은 덩치가 워낙 작아서 오히려 더 잘 뭉쳤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적어도 복여위 출신들은 복여위라는 이름값이라도 있었지만, 여진부족들은 그런 것도 없이 올망졸망한 모두와 싸워야 했을 테니까요.”
“음...”
이해가 안 되는 듯 하면서도 이해가 되어, 태종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해서 어떻게 되고 있지?”
“대략 이만명 정도를 가족단위로 쪼개서 모든 북방신도시로 옮기고 있습니다. 북방신도시엔 몽골출신이 적잖게 있을뿐더러, 아직도 개발되지 못한 땅이 많아 땅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 합니다.”
“더불어 이미 아국에 의존하고 있던 복여위 아닙니까. 그치들은 관세가 없어져 싼값에 물산을 구입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만족하는 듯 했습니다.”
“...”
조선의 의도대로. 복여위는 조선과 무역을 하는 순간 경제적으로 종속될 수박에 없는 구조로 변해갔다.
그들이 입는 옷감. 육류를 제외한 모든 곡물, 말린 채소, 약재, 소금, 심지어 차까지. 모든 게 조선으로부터 나오니, 그간 관세 때문에 비싸게 주고 샀던 걸 싸게 사는 것만으로도 이미 좋은 거지.
“그리고 생각보다 복여위 출신들이 키우고 있던 가축이 많지 않더군요.”
“그야 아국이 계획한 대로 이뤄진 것 아닌가?”
“그도 그렇지만, 그보단 데리고 있던 가축 자체가 적었던 모양입니다.”
“...”
태종이 설명을 더 해보라는 듯 손짓하자, 황희는 보고 받았던 내용을 가볍게 읊었다.
조선과의 무역에 있어서 복여위가 내다 팔 수 있는 물건은 가축. 딱 이 한가지 밖에 없다.
뭐... 양모나 피혁제품, 모피 등이 있을 수도 있지만, 조선의 무두질 기술이 월등히 앞서서 제값을 받기 힘들었지. 복여위가 비단길 무역과 색목인 노비에 괜히 목숨을 걸었던 게 아니다.
결국 무역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복여위가 키우는 가축이 조선으로 유출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고... 이게 곧 복여위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조선조정의 암계였지.
또한 초지의 크기가 곧 가축의 사육두수와 비례하니, 나날이 영역이 쪼그라지는 복여위는 무작정 가축을 늘릴 수도 없었다.
미래에는 몽골초원에 사람이 안 사니까 일가족이 수백마리씩 키울 수 있는 거지, 이 시대엔 수십마리 쯤 키우면 많이 키우는 셈이었지.
“그래서 오히려 이주가 더 빨라지고 있습니다. 목마장을 일구고자 하는 가족도 있지만, 소유하고 있는 가축이 몇두 안 되서 다른 직업을 찾고자 하는 이들도 부지기수였습니다.”
“...”
“이렇게 목마장이 아닌 다른 직업을 가지고자 하는 나머지 일만명을 동원해서, 신도시 건설에 투입할 생각입니다.”
“신도시라...”
“당장은 건설도시로 만들었다가, 무역도시로 점차 바꿀 예정입니다.”
“훗.”
‘건설도시라니.’
태종은 자기도 모르게, 또 다시 피식 웃고 말았다.
건설도시는 정체가 뭔지 알기 힘들 정도로 뜬구름 잡는 개념이었고, 이건 관료들 사이에서나 통용되는 은어와 비슷한 개념이었으니까.
‘허나. 효과는 확실했지.’
태종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지난날을 되돌아봤다.
과거. 조세제도가 정리되지 않고, 화폐가 유통되지 않던 시절.
기업은 국방세라 하여 세금과 별개로 자발적으로 고향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한편, 기업사원들이 만든 물품을 공물로 바쳤다.
이 공물은 기업의 업종만큼이나 다양해서, 말 그대로 온갖 것이 전부 현물로 납부되어 조정으로 넘어왔지.
이 때문에 광흥창을 비롯한 전국의 관창은 만물창고로 변해버렸고... 조정은 가만 놔두면 자리만 차지할뿐더러, 저절로 썩어 없어질 물건들을 민간에 팔아넘기기 시작했다.
허나 이렇게 현물을 팔아도, 어차피 쌀, 면포와 같은 현물로 다시 받아야 하지 않나. 돌려 막기나 마찬가지니, 이래선 판 의미가 없다.
해서 조정에선 노동력의 대가로 잉여 공물을 팔아넘겼다.
이 때 가장 수혜를 입은 곳은 다름 아닌 건설기업.
조정에선 양전사업과 함께 온갖 토목공사를 진행하고 있었고, 어차피 건설기업에게 대금을 지불할 걸 그냥 광흥창에 넘쳐나는 잉여공물로 대신했던 거지.
헌데 건설기업이 이렇게 온갖 공물을 받는다고 해서, 이게 곧 돈이 되는 건 아니지 않나.
기업은 재산을 쌓고 보관하기 위해선 대용화폐인 쌀, 면포가 필요했고, 공물을 월급으로 받은 사원 또한 자기가 필요한 물건이 따로 있었다.
결국 자연스럽게, 건설노동자들이 몰려 있는 장소에 시장이 형성될 수밖에 없었지.
건설기업 및 건설노동자들이 잔뜩 몰려 있던 지역은 당연히 수로로 연결되는 강 근처. 조정은 한강 이외에도 전국의 큰 강마다 치수공사를 진행하고 있었으니까.
허나 수십만명을 동원할 여건이 안 되니, 각 지역마다 건설노동자는 많아봐야 일만명을 넘지 못했고... 결국 치수공사는 몇해 동안 꾸준히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건설기업이 만든 시장과 근거지는 점점 마을이자 도시로 변해갔으니... 이게 바로 황희가 말한 건설도시였다.
“그걸 요서 북부에 적용한단 말이지?”
“여기... 흥주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대화가 이렇게 흘러갈 걸 예상이라도 한 걸까. 황희는 미리 준비해 놓은 지도를 펼쳐, 요서 북쪽지역 중 한 곳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흠...”
“음.”
“허허... 멀긴 멀군.”
태종이 가장 먼저 신음을 흘리자, 모두가 한마음으로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황희가 짚은 곳은 창주나 미래의 하얼빈보다도 더 위쪽. 미래에는 치치하얼이라 불리는 지역이었으니까.
여긴 눈강을 따라 국경을 구분지은 조선의 영토이기도 하지만, 실상 복여위의 영역에 더 가까웠던 지역이다.
“저기까지 가봤나?”
“예. 비단길 무역로가 이어지는 곳이라서, 연대병이 주둔하진 않았지만 꾸준히 순찰을 돌던 지역이었습니다.”
“하긴...”
이렇게 정교한 지도가 완성된 걸 보면, 당연히 연대병이 저기까지 갔다 왔을 거다.
“과거 요나라 시절 상경임황부와 동경요왕부의 접경 지역이었는데, 제대로 관리가 안 되서 옛 도시의 터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음.”
“...”
다들 잘은 모르지만 들어본 적이 있었기에,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착호군의 금석학당은 꾸준히 덩치를 불려 교육부 산하의 역사처로 승급했고, 이들은 택리부 관원들과 함께 꾸준히 북방을 돌며 옛 유물과 유적을 발굴했다.
조선은 자주화와 함께 정체성을 만들어나가고 있고, 중화에서 벗어나 만주땅의 종주권을 빼앗아 오기 위해선 북방의 역사를 조선의 것으로 만들어야 했으니까.
이건 남방의 남주도 및 해주도 등지에서도 시행됐던 작업인 만큼, 북방을 차지한지 오래된 지금.
꽤나 많은 고구려, 발해, 요, 금의 유물과 유적, 역사서등을 조선으로 편입시키고 있었지.
“흔적이 남지 않았는데도, 여기를 택한 이유는?”
“전부터 사용하던 수로가 연결될뿐더러, 호수와 강이 많아 물이 풍부하고, 의외로 요동땅보다 더 옥토지대였습니다.”
“여기가?”
“저 먼 북녘땅이 말이오?”
“그럴 리가...”
“예.”
다들 믿기지가 않아 한마디씩 던졌지만, 황희는 히죽 웃으며 반문을 던졌다.
“길주(연길), 평주(훈춘)의 예를 잊으셨습니까.”
“아...”
“흐음.”
다들 할 말이 없어, 멋쩍은 표정을 짓고 말았다.
과거 조선인들은 안 그래도 추운 함길도를 넘어가면, 농사는커녕 다들 얼어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허나 이게 웬 일. 두만강을 넘어 조금만 지나가니 오히려 따뜻해지면서 평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훈춘이 튀어나왔고, 백두산을 넘어 북쪽산맥을 파고 들어가니 분지지형인 탓에 따뜻한 연길이 튀어나왔다.
그제야 “북쪽은 무조건 춥고 척박할 것이다.”라는 막연한 편견이 깨어지면서, 여진인들을 복속시켜 북방신도시를 건설할 수 있었지.
그러니 저 먼 북쪽의 동토가 사실은 동토가 아닌 옥토라는 것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다만...”
“추위가 문제군.”
“예. 쌀농사는 당연히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여름에 맞추면 농사가 가능한 지역으로 보여 집니다. 설령 농사가 힘들어도 어업이나 상품작물, 초지로는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
“더욱이 아무리 춥다고 한들, 본래 복여위 출신들이 살던 지역보다는 남쪽이니... 크게 무리는 없을 걸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줄줄이 이어지는 황희의 말에, 태종은 톡톡 손가락을 두들기며 생각에 잠겼다.
‘대비만 할 수 있다면, 크게 문제는 안 되겠군.’
까놓고 말해서 추위를 걱정하기에는, 북방 땅에서 안 추운 곳이 없다. 조금 덜 춥고, 더 추운 정도의 차이지, 어차피 본토보다 추운 건 매한가지.
그럼에도 북방 땅은 꾸준히 발전해왔고, 목마장뿐만 아니라 경작지조차도 늘어가고 있지 않나.
만약 황희의 말대로 저 땅이 옥토라면, 품종만 잘 선택해서 키운다면 오히려 생산력이 더 높을지도 모른다.
다들 긍정의 눈빛을 숨기지 못하자, 황희는 얼른 말을 이어붙였다.
“하여 복여위 출신 일만, 저들을 관리하고 교육할 착호군, 요동에서 이주시킬 요동인, 북방신도시에서 이주시킬 백성들, 끝으로 개원과 금주,복주 상인들까지 동원할 계획인데... 다 합치면 이만명이 넘을 듯 싶습니다.”
“개원과 금주, 복주 상인들?”
“예.”
태종이 의아한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되묻기 무섭게...
“요동상인들이 관심을 갖는다라... 아. 그렇겠군.”
그는 혼잣말을 하며 스스로 답을 찾아내고선, 히죽 입술을 들어올렸다.
“비단길 무역에 발을 담궈볼 생각인 거군.”
“예. 그들이 원하던 게 바로 그것이었으니까요. 전부터 사주를 통해 무역을 해왔으니, 이번에는 처음부터 직접 발을 담궈 조정의 환심을 사려는 생각인 듯 합니다.”
“나쁘지 않아.”
태종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요동상인들이 사재를 털어 신도시 건설에 끼어들면, 그만큼 조정의 부담이 줄어 들테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조정이 거래의 우선권을 줄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지만, 저들 입장에선 창주만큼이나 거래가 활발해질 무역도시에 거점을 마련하는 것 자체가 이득이라고 판단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