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6. 챕터60. 토해내다 (12)
시간을 한참 거꾸로 돌려보자.
과거 태종은 연오랑에게 “요동정벌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물었고, 녀석은 밑도 끝도 없이 “북평부를 친다.”라고 답을 던졌다.
당장 요동정벌을 두고서도 노신들은 “지금이야 말로 적기다. 치자!”라고 외쳐댔고, 젊은 신료들은 “굳이 꼭 지금? 기다리면 제풀에 쓰러질 텐데?”라고 의구심을 표했었지.
국론이 이렇게 갈린 와중에, 한술 더 떠서 북평부를 치자고? 이건 가도 너무 갔다. 판을 벌려도 너무 벌렸다.
신료들은 연오랑의 정신 나간 발언에, 오랜만에 그가 참신한 미친놈인 걸 다시금 깨달았고. 세종과 태종 또한 마찬가지였지.
하지만 세종과 태종은 연오랑이 생각없는 놈이 아닌 걸 익히 알고 있었고, 당장 그를 궁으로 불러들였다.
대체 뭔 생각으로 그런 발언을 했는지 듣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한바탕 폭풍을 선사한 연오랑. 남들이야 놀라 자빠지든 말든, 그는 내관과 함께 한가롭게 궁성을 거닐며 걸음을 옮겼다.
해는 진작 저물었지만 궁궐 곳곳에는 등롱과 화롯불이 피어오르고 있었고, 달빛과 불빛이 어울러져 묘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흐흥.”
불빛과 그림자가 처마 밑을 휘감고 지나가는 꼴을 구경하고 있자니, 자기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말았다.
“저건 못 보던 건물인데?”
“이번에 새로 지은 궁입니다. 대감.”
“전하께서?”
“예.”
궁의 주인은 당연히 세종이니 세종이 지었겠지만,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아직도야?’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라서, 그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개혁 이후 조정과 왕실이 분리되면서, 궁의 살림을 담당하는 궁내원과 왕실의 사업을 담당하는 내수사가 만들어졌다.
궁을 짓는 건 조정의 일이 아니라, 왕실의 일이니 여기에 세금이 쓰일 일도 없어졌다. 그러니 세종이 궁을 더 짓든 말든 알아서 할 일이지만... 이건 많이도 너무 많은 것 아닌가.
“지금까지 몇 채를 지은거지?”
“기존 경복궁과 창덕궁의 전각을 보수,확장한 걸 제외하고, 완전히 새로 지으신 건 10채입니다.”
“하...”
연오랑은 대단하다 싶어서,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이거야 원 1년에 한 채씩 지은 꼴 아닌가. 그것도 그냥 전각도 아니고 궁궐의 전각을 말이다.
“조정에서 뭐라 하진 않지?”
이상한 소문이 돈 적이 없어서 그렇진 않겠지만, 혹시나 싶어서 되물어 보자.
“예. 딱히...”
내관 또한 심드렁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역시나 자기 돈을 자기가 쓰겠다는데, 조정대신들도 뭐라고 하겠나.
“그냥 궁궐도 아니고, 전부 전하께서 설계 감독하셨고, 새로운 양식으로 만든 궁궐 아니겠습니까. 이 또한 나름 연구라면 연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그래 보인다.”
연오랑은 내관의 대답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당장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건, 저 먼 서방에나 가야 보일 법한 석조 건물이었으니까. 무슨 신전도 아니고... 큼지막한 기둥이 쓸데없이 전면에 박혀 있는데, 대리석으로 만들었는지 등롱의 빛이 반사될 때마다 번쩍번쩍 반사광이 흐르고 있었다.
“로마국?”
“예.”
앞뒤 다 자르고 물어보건만, 내관은 곧잘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보나마나다. 이런 질문을 어디 한두번 들어봤겠나. 궁궐에 드나드는 관료들마다 기겁해서 캐물었을 테니, 내관은 본의 아니게 건축전문가가 다 됐을 거다.
경복궁과 창덕궁이 합쳐지고, 그 사이의 빈 구역 또한 궁에 포함되었으니 오죽 넓을까.
걸어도 걸어도 끝이 안보이고, 빈 땅에 새로 지은 건물만 계속 눈에 들어온다.
오랜만에 온 김에, 못 보던 건물을 하나둘씩 물어보는데. 후궁의 궁궐도 있는 게 아닌가. 누군지 대충 캐물어보니... 미래에는 신빈 김씨라 불릴 후궁이었다.
‘아. 이건 안 바꿨나보네?’
연오랑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역사가 제대로 비틀린 걸 다시금 느꼈다.
그가 알기로 세종이 또 후궁을 들였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으니, 원래 역사 속 후궁들도 없어지게 된 것 같다.
‘하긴 여러모로 그럴 만도 하지.’
궁내원이 생기면서 왕실과 조정은 정치적으로 엮일 일이 없어졌고, 신분제 폐지. 특히나 공노비 폐지가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은 당연히 궁궐이었다.
왕이 모범을 보였으니, 밑에 사람들은 알아서 따라야 하는 법이니까.
해서 원래 역사의 인물들이 한번 싹 물갈이가 된 거나 다름없었고, 원래 역사에서 세종과 이어졌던 궁녀도, 이어질 궁녀도 없어지게 된 거지.
또한 기존의 노비 출신등의 궁녀가 전부 양민이 되었고, 궁내원은 궁궐관리업체 쯤으로 변해 사원에 준하는 취급을 받았다. 원래 역사에서의 궁녀와는 전혀 다른 위치와 직책에 오르게 된 거지.
궁녀라고 해서 궁에만 사는 건 아니었고, 성은을 못 받았다고 늙어 죽을 때까지 궁에서만 사는 것도 아니게 되었으니까.
일이 이렇게 이상하게 흘러간 건, 세종과 태종이 원래 역사보다 훨씬 강력한 일부일처제를 주장했기 때문.
신분제를 박살내고 양반을 끌어내리는 데 가장 핵심이 이거였는데, 왕실이 먼저 모범을 보여야 명분이 앞서지 않겠나.
물론 왕실의 법도와 법률에 따라 처는 몇 명, 첩은 몇 명 이렇게 정해져 있다지만... 이것도 중국의 예를 따온 거니, 자주화를 외치는 조선이 따라야할 이유도 없지 않나.
해서 이미 자식도 꽤 낳은 세종은 더 이상 후궁을 들일 생각도 없어보였고, 역사는 이미 제멋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계속 궁궐 전각을 지나쳐 목적지에 다다르자, 저 편에서 환하게 불빛을 밝히고 있는 정자가 눈에 들어왔다.
판유리로 만든 작은 온실이 불빛을 반사하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고, 작은 꽃나무들이 그 주변에 몰려 있었다.
전에도 유리온실이 있는 걸 봤는데, 재미가 들렸는지 궁 이곳저곳에 마구 지어놓은 모양이다.
이곳은 화원으로 만든 정원처럼 보였는데, 꽃밭 속에 홀로 우뚝 선 정자만이 유독 두드러졌다.
꽃나무 사이로 난 길을 걸어 도착하자, 그가 온 걸 알아차렸는지 반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느냐.”
“예.”
연오랑은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고, 내관은 언제 함께 왔냐는 듯 조용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호오?’
세종은 한성에서 일하느라 바빴고, 태종은 평안도에서 양전사업을 진행하느라 바빴지 않나.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둘이서만 가볍게 한잔하는 모양이다.
“...”
성큼성큼 걸어가며, 연오랑은 빠르게 세종과 태종을 살폈다.
세종이 운동을 시작한지 벌써 몇 년인가. 여전히 꾸준히 운동을 하는지 곤룡포를 뚫고 나오는 근육질 세종의 모습은 달라지지 않았다.
의자에 바른 자세로 앉아 있는 것도 그렇고, 매일 같이 책만 보고 사는 것도 아니라서 눈이 침침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태종이야 뭐 며칠 전에도 봤으니 여전히 정정한 모습이었고.
슬쩍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정자는 마룻바닥이 깔려 있긴 했지만, 둘은 처음 보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 시대는 입식과 좌식 생활이 섞여 있는 시대였기에, 의자가 특별할 건 없다만... 저렇게 생긴 의자는 또 처음 봤다.
물론 왕실에서 사용하는 물건인 만큼, 의자 다리 하나마다 양각으로 장식되어 있어서 화려하긴 했는데... 전체적인 형상만큼은 조선에선 보기 힘든 유려한 곡선미를 갖추고 있었다.
‘서방에서 들여왔나 보군.’
서방상인들은 별의 별 걸 다 가져왔으니, 의자나 탁자 하나쯤 가져오는 게 뭐 대수일까. 조선 또한 나전칠기나 작은 판유리 거울, 유기그릇까지 팔아넘기고 있으니까.
의자를 지나쳐 탁자 위에 눈이 닿자, 자기도 모르게 입술이 벌어졌다.
‘포도주? 게다가 누가 고기 덕후 아니랄까봐.’
연오랑은 세종이 유기젓가락으로 오물오물 집어 먹고 있는 염장고기. 그 옆에 놓인 포도주. 유리잔을 보며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염장고기가 서방에서 들여 온 걸, 누구보다 좋아했던 게 세종 아닌가.
안 그래도 남방,북방,중국,일본 가릴 것 없이 온갖 식자재, 특히나 고기와 요리법을 가져와 미식을 즐기는 세종이니, 염장고기를 싫어할 리가 없다.
게다가 포도주라? 서방의 포도품종은 조선에 들어온 지 얼마 안됐고, 아직 포도나무도 다 안 자랐다. 그걸 숙성시켜 만든 포도주는 더욱 무리지.
허면 저건 서방에서 직접 들여온 포도주라는 뜻인데... 역시나 조선의 술만큼이나 서방의 술도 조선으로 들어오고 있는 모양이다.
‘게다가 유리잔도 꽤나 괜찮은데?’
더불어 피처럼 붉은 포도주가 담긴 유리잔도 시선을 잡아 끈다.
판유리도 만드는 판국에 유리잔과 같은 유리공예품을 만드는 게 뭐 어려울까. 지난날 중국의 유리기술자와 남방의 유리기술자도 데려왔으니, 몇 해 되지도 않았는데도 조선엔 유리기업이 곳곳에 생겨난 지 오래다.
다만 이 유리제품의 품질은 미래와는 감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조악해서 기포자국도 많고, 주름도 많고, 불투명한 게 일반적인데... 그래도 왕실에서 쓰는 물건답게 그나마 매끄러운 표면을 자랑하고 있었다.
“편히 앉아라.”
“예.”
빠르게 구경을 끝마치고, 연오랑은 태종이 가리킨 의자에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붙였다.
“...”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고... 태종이 먼저 입을 열었다.
“북평부를 논했다지?”
“...”
“무슨 뜻이냐?”
세종도 궁금했는지 젓가락을 내려놓고 물끄러미 연오랑을 바라봤고, 태종 또한 비단솜을 덮어 놓은 의자에 나른하게 누워 그를 바라봤다.
“음...”
연오랑이 잠시 머뭇거리자, 세종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냥 말해라. 네가 언제부터 눈치를 봤다고.”
“...”
‘여전히 시원시원 하고만.’
연오랑은 세종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히죽 입꼬리가 들리고 말았다.
역사가 뒤집어진지 오래인 만큼, 세종 또한 막연한 현군의 이미지보단 패도적인 기운이 절로 뿜어나오고 있었다.
원래도 말싸움 하나는 끝내줬던 양반이, 칼질까지 몸에 익혔으니 오죽할까. 나이를 먹었어도, 그 기질은 어디 가지 않나보다.
“그래. 편히 말해라. 그간 며칠간 고민한 답이 북평부를 친다고? 이유나 한번 들어보자.”
태종 또한 세종을 거들며 입을 열었다.
“그럼...”
연오랑은 슬쩍 도발적인 눈빛을 뿌리며 입을 열었고, 세종은 동생을 보듯 장난스런 눈빛을 숨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호사가들 사이에선 세종, 태종, 연오랑의 관계를 놓고, 이러쿵 저러쿵 입방아를 찧어댔었다.
따지고 보면 당연하지 않나.
백호장군 연오랑. 그의 이름은 조선을 넘어 몽골, 중국, 일본까지 뻗어나갔다.
조선을 비롯해 한반도 왕조를 통틀어 이렇게 까지 명성이 뻗어나간 위인이 몇이나 될까. 연개소문? 이성계? 감히 이들과 연오랑이 비견될 바가 아니지만, 그만큼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지.
이렇게 위명 높은 신하가 아래에 있다면 왕 입장에선 거슬리는 게 당연.
신료들과 세인들은 왕의 눈치를 살피기 위해 연오랑이 조정에 출사하지도 않고 흡사 야인처럼 산다고 생각했고... 세종과 태종 또한 연오랑의 능력이 아까우니까,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는 전가보도처럼만 다룬다고 생각했다.
태종과 세종의 관계도 사실 말이 많다면 많다.
권력은 나눌 수 없는 법이고, 지난날 역사에서 상왕과 왕. 왕과 세자가 옥좌를 놓고 피를 보는 경우가 어디 한 둘이었나.
그런 만큼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을 세종이 견제하는 게 당연했고, 반대로 태종이 착호군을 이끌고 전국을 순회하는 건 아직 권력을 놓지 않았다고 오해하기 십상이었다.
그러니 이들 사이가 언제 파탄이 날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없는 건 아니었는데... 현실은 완전히 반대다.
세종, 태종, 연오랑의 관계는 단순한 군신관계가 아니라, 어쩌면 피를 섞어도 모자랄 혁명동지, 개혁동지였으니까.
지금껏 개혁을 이뤄오면서 얼마나 많은 고난과 역경이 있었을까. 특히나 두 사람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중앙집권과 왕권강화다.
모든 세력, 체제, 신분, 관습을 다 때려 부숴야 개혁을 이룰 수 있으니... 따지고 보면 한 점 서운함 없이, 이 둘과 한 몸이 될 수 있는 건 권력에 미련 없는 연오랑 밖에 없던 거지.
나아가 연오랑이 미래인인 걸 모르는 이상,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무장한 천재로 보였고 말이다.
그랬기에 둘은 연오랑에게 한 점 의심조차 갖지 않았고, 서로에게도 의심을 갖지 않았다.
막말로 연오랑과 태종이 온 사방을 들쑤시며 조선을 뒤집어 놓으면, 체제와 법제를 정비하며 관원들을 닦달해 그 뒷수습을 해온 게 세종이니까.
둘은 연오랑이 어떤 시건방진 말을 해도, 충분히 귀여워하며 봐줄 아량이 있었던 거지.
그런 마음을 듬뿍 담은 눈빛으로, 둘은 얼른 속내를 까보라고 묵언의 시위를 하고 있었다.
“허면 여쭙겠습니다.”
“해라.”
“우리의 주적은 무엇입니까?”
“...”
“...”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세종과 태종은 가볍게 눈을 감으며 생각에 잠겼다. 연오랑이 헛소리를 할 리는 없고, 중요하니까 이런 시건방진 질문을 던진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