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497화 (497/538)

497. 챕터61. 넘어가다 (1)

‘주적이라.’

세종은 젓가락을 쥔 손가락을 가볍게 흔들며, 연오랑의 말을 곱씹었다.

과연 지금 조선에게 주적이 있을까?

요동? 자문해보지만 요동은 주적이 아니다.

사실 세종은 지금 당장의 요동정벌을 그다지 원하지 않지만, 태종과 노신들의 숙원을 매몰차게 모른 척 할 정도는 아니었다. 조선의 성장세가 살짝 늦춰지긴 하겠지만, 지금 해도 무작정 손해는 아니니까.

‘남방? 몽골? 일본?’

딱히 주적이라 볼 수 없다. 이미 조선의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고, 계획이 완성되면 조선을 둘러싼 모든 나라가 조선과 얽히게 될 테니까.

‘허면 결론은 중국인데...’

중국은 숙적이 맞긴 한데, 지금 당장의 주적은 또 아니다.

조선해군이 계속 성장하고 견제하는 이상, 호족연맹은 바다 밖으로 못 나오니까.

그렇다고 앞으로는 달라질까? 이건 솔직히 의문이고, 뭔가 엄청난 계기가 있어야 가능할 거라고 판단됐다.

호족이 연맹으로 묶인 이상, 해안도시의 호족과 내지의 호족들 사이에선 정권장악 및 이권장악의 벽이 생긴 셈이니까. 모두를 위한 이익이 발생하지 않는 한, 저들은 결코 모험을 하지 않을 거다.

‘만약 우리와 적대해서 전쟁이 발발하면, 해안도시가 초토화 되는 건 무조건이다. 이건 절대 부인할 수 없는 진실. 내지의 호족들이 그걸 바라더라도, 해안도시의 호족들이 그걸 감수할까?’

굳이 전함이 포탄을 쏴대지 않아도 된다. 항구를 봉쇄하고 찾아오는 무역선을 다른 연맹의 항구로 보내기만 해도, 알아서 돈 줄이 말라서 두손두발 들고 항복할 거다.

세종이 그간 봐온 조선의 양반 및 지주들, 그리고 여러 번 겪어본 중국호족들의 성향을 보건데... 그놈들은 차라리 뭘 안 얻고 현상 유지를 하면 했지,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걸 포기할 놈들이 아니다.

‘그래서 북평부라는 건가?’

그럼 마지막으로 남은 건 딱 하나. 북평부.

이 놈들은 요서회랑을 통해 육로로 연결되어 있고, 조선이 요동을 차지하면 이제 북평부와 국경을 맞대게 될 테니까.

‘하지만...’

허나 세종은 여기서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주적을 물어봤으면 누구라든가, 어디라든가라고 물어봐야지, 무엇이냐? 라고 물어봤을 리가 없지.’

세종은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자신을 보며, 슬그머니 미소를 짓고 있는 연오랑을 힐끔 살폈다. 녀석의 표정을 보아하니, 해답을 찾아낼 수 있을지 기대하는 모양새다.

‘실수일리는 없을 테고...’

곰처럼 생겼지만 여우보다 교활한 녀석이 연오랑이다.

아무리 친하다지만 선을 넘은 적이 없는 녀석이, 세종과 태종을 앞에 두고 단어 선택을 잘못할 리가 없다.

그럼 대상이나 현상을 말하는 건데...

‘유학?’

세종은 문뜩 떠오른 생각을 얼른 지우며, 살포시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아니겠지.’

연오랑은 자본유학 시뻘건 사상을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유학이 주적이 될 순 없다.

이미 유학. 정확히 말하면 성리학은 이미 반신불수인 상태니까.

나아가 자본유학이 왜 유학이라 불리는 가. 자본유학은 학문이 아니라 지침, 강령. 기조. 목표와 같은 결과값이다.

그 안의 내용물은 이미 사장되거나 혹은 새롭게 등장한 유학으로. 주류, 비주류를 막론하고 다 섞여 있고, 기존의 유학경서에 담겨 있는 내용을 제멋대로 짜깁기해서 만든 거다.

그러니 유학 자체를 주적으로 삼고 없애려 들면, 자본유학도 망가지는 꼴.

지금도 사멸하고 있고, 어차피 사멸할 게 뻔하니... 그냥 내버려두면 되지, 뭐하러 건드리겠나.

‘허면...’

그렇게 이것저것 머릿속으로 소거를 하면서 남은 건...

“중화.”

세종은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거렸다.

태종이 그를 대신해서, 짐승이 으르렁거리듯 단어를 토해냈으니까.

“아...!”

그리고 세종은 태종의 옥음을 듣기 무섭게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생각해 보건데, 지금 조선에게 있어서 가장 박살내고 싶어 하는 건... 조선에 뿌리 내린 중국 그 자체이자 잔재 아닌가. 자주화의 걸림돌 말이다.

그리고 세종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중국을 훨씬 싫어하는 사람이 바로 태종이니, 그 보다 빠르게 답을 찾아낸 거고.

“예. 그 중화와 모화慕華죠.”

연오랑을 살포시 어깨를 으쓱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해서 예전 중국왕조가 잘나갔던 것도 맞고, 그들의 문명이 전조를 비롯한 삼한왕조보다 앞선 것도 맞고, 중국왕조의 문화와 문물이 아국을 발전시킨 것도 맞죠.”

이건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이래서 모화와 사대가 생겨났다. “우리보다 뛰어나니까 그들을 본받고 따라하자.” 헌데 학문과 기술을 받아들이는 걸 넘어, 맹목적으로 그들을 숭상하고 떠받들며 우러러 보기 시작한 것.

“...”

“그런데 그렇다고 한족이 우리 조선인들보다 잘났다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요즘에는 잘 안 쓰지만 오랑캐라는 말이 딱 알맞겠네요. 우리보고 동이東夷라고 하고 그랬지 않습니까.”

이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진실.

자고로 중화란 인종, 종교, 문화와 관계없이 중국의 세계관과 천명을 따르는 문명인과 그걸 거부하는 비문명인을 나누는 구분이었지만... 정작 그걸 만들어낸 한족은 다르게 써먹었다.

“...”

연오랑이 약 올리듯 실실 웃으며 말을 하자... 태종을 부드득 이를 갈고, 세종은 “또 시작했구나.”라며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

세종이야 명이 망하고 나서 머리가 큰 운석핵꿀밤 세대지만, 태종은 명나라를 기억했다.

사신으로 갔다 오기도 했고, 연왕을 만나보기도 했고, 여말선초 시절에 명나라와 북방을 놓고 으르렁거리기도 했으니까. 그 오만함과 시건방짐이 아직도 꿈에서 나올 정도로,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지.

“그래서?”

“헌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아국이 남으로 북으로 강역을 넓혀갔고, 이젠 중화를 모르는 저 먼 서방까지 손을 뻗었습니다. 아국의 천하가 중국의 천하에 못지않은데, 아직도 현실을 깨닫지 못하는 천치 같은 자들이 있단 말이죠. 애초에 이제 와서 중국의 천하라는 게 있기나 싶기도 하지만요.”

“...”

“물론 뭐... 중국물산과 아국물산이 경쟁하곤 있다지만, 현실적으론 아직 갈 길이 한참 남았다 쳐도... 그렇다고 그들의 사상과 이념이 아국보다 잘난 게 없고, 한족이 우리 조선인보다 뛰어난 것도 없지 않습니까? 오히려 더럽게 안 씻어서 지저분하기만 하고.”

뒷말에는 쓸데없는 사심이 잔뜩 섞인 것 같았지만, 세종과 태종 모두 흘러 넘겼다. 이제 목욕이 일상화된 조선인이 보기엔, 한족은 정말 안 씻는 놈들이었으니까.

“...”

“물론 아국 내에는 중화와 모화 같은 구체제 신봉자가 거의 씨가 말랐지만, 중국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놈들의 머릿속을 한번 더 깨줘서 현실을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말이죠.”

“그래서 중화를 깨부수기 위해, 북평부를 쳐야 한다?”

“호족이 중심이 된 연맹을 만들지 않고, 여전히 옛 명나라를 외치며, 홀로 잘났다고 중원을 차지해야 한다고 말하는 놈들 아닙니까.”

“음.”

“흐음.”

연오랑이 줄줄이 말을 토해내자, 두 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대체 중화와 중원을 부수는 것과 북평부가 뭔 관계나 하겠지만, 이게 일리가 있었다.

수천년전. 한족이 강남으로 진출하지 못할 시절. 세계라는 걸 알지 못하고 화북지방에만 옹기종기 모여 있던 시절. 문명을 일군 한족은 그들을 땅을 일컬어 중원이라 불렀다.

실질적으로 그 중원이라는 곳은 작게 보면 하남성, 크게 보면 화북이었지. 허나 그 지명의 인식이 곧 정체성으로 변해, 중화라는 이름으로 지배를 위한 이데올로기, 선민사상을 이끌어냈다.

뭐. 그 후로 세월이 흘러 이민족에게 밟히고 어쩌고 하면서, 중국의 중심은 점점 강남으로 내려갔고 끝내 남경이 중국의 중심이 됐다.

그리고 이 남경이 운석핵꿀밤을 맞고, 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명이 망한 건 둘째치고, 이로서 중국을 지탱해 오던 천명이 깨지고 중화가 금이 간 거다.

그런데 아직도 이 중화를 찾고, 중원을 되찾고, 하나된 중국을 외치지는 자들이 있다.

“그들이 북평부란 말이지?”

“예. 그게 아니고서야 북평부가 왜 난리를 피웠겠습니까. 요동이야 반란군놈들이 자리 잡았으니 그렇다쳐도... 하남과 산동을 집어먹으려고 발악을 하던 건, 단순히 강역을 넓히는 걸 넘어 중원과 중화를 부활시키려는 생각이겠죠.”

“물론 그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겠지만.”

“우기면 그만이지 않습니까? 남경이 사라지면서 모든 게 폭삭 무너진 상황에서, 그보다 더 한족을 일으킬 좋은 명분 또한 없을 거고요.”

“한족은 무슨. 자신들의 영달과 사익만 챙길 생각이겠지. 널리고 널린 중국호족처럼.”

세종과 연오랑은 만담을 나누듯, 빈정거리며 말을 주고받았다.

물론 이러한 중화를 외치는 자들이 중국에는 널려 있고, 한족들 또한 내심 속으론 “에이 오랑캐 놈들.”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다만 그걸 겉으로 표현하지 않을 뿐이지.

“게다가 분명 호족연맹 내에서도 중화와 중원을 잊지 못하는 놈들이 있을 겁니다. 그놈들은 뭐 한족 아닙니까?”

“지난날 칭왕자 제거작전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보는 게냐?”

“예. 혹시 압니까? 지금의 호족연맹을 누군가 장악해 칭왕을 하려는 작자가 있을 지도 모르지요. 그들에게도 경고를 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 하나를 차지한 호족연맹일지라도, 아국이 능히 정벌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말이지.”

“예.”

연오랑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태종과 세종 또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중화문제와 닿아 있는 건 결국 중국통일왕조이니, 이걸 막으려고 본 떼를 보여주는 건... 싫더라도 한번쯤은 해야할 일이니까.

물론 일이 더 커져서 오히려 조선을 경계하면 문제가 되겠지만, 그건 그때그때 맞춰 가야하는 게 또 어쩔 수 없는 현실이고.

“그러니 만약 요동정벌을 하겠다면, 지금이 북평부를 칠 적기입니다. 어차피 들어 가야할 군비는 거기서 거기 아니겠습니까?”

“후...”

연오랑은 남일 보듯 쉽게 말을 했지만, 세종은 자기도 모르게 이마를 감싸 쥐고 말았다.

지난날 연오랑이야 신나게 육군, 해군을 이끌고 온 천하를 휘젓고 다녔겠지만, 그 보급을 누가 했겠나.

세종과 조정관료들이 잠을 설쳐가며 뒤를 봐줬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인데, 요동정벌을 넘어 북평부까지 신경 쓰려면 준비할 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마냥 또 헛소리는 아니군.’

세종은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어, 헛웃음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요동을 치기 위해선 어찌됐건 병력과 군수품, 보급품을 북방으로 옮겨야 한다. 그리고 요동에서 북평부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

녀석의 말 그대로 요동정벌을 한번 하고 나중에 북평부 정벌을 하는 것보단, 차라리 지금 조금 더 힘을 써서 함께 하는 게 이득인 거지.

“음...”

“흠.”

잠시 침묵이 감돌며, 제각각 상념에 빠졌다.

연오랑의 말이 무조건 정답인 건 아니지만, 그래도 또 마냥 틀린 말은 아니다.

북평부는 절대 조선과 타협하지 않을 거고, 언제가 됐든 손을 봐줘야 할 세력이다.

이들은 사세가 기울든 말든, 연왕부를 이어받았다는 명분. 다른 성에서 근본도 없는 연맹이 만들어지는 동안 홀로 중화를 지킨다는 명분. 오랑캐 이민족으로부터 중국의 지붕을 지킨다는 명분을 고수하고 전파하고 있다.

중국통일왕조를 제일 걱정하는 조선으로선, 그렇게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세력이 바로 북평부지.

“틀린 말은 아니군.”

“예. 뭐... 마음에 들 진 않지만 어쩔 수 없겠지요. 두 번 일을 하느니, 차라리 한 번에 처리하는 게 낫습니다.”

결국 세종과 태종 모두 당위성은 인정하고서, 한마디씩 토해냈다.

하지만 이상을 넘어 현실로 들어오면 이야기가 또 달라진다.

“문제는 이게 단기간에 가능하냐는 점인데...”

“가능하긴 할 겁니다. 잠시 성장과 발전을 멈추더라도, 아국의 전군을 끌어 모은다면 말이지요. 다만 얼마나 피해가 날지는 감히 예상을 못하겠습니다.”

세종과 태종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승산을 점쳐봤다. 물론 조선군의 강맹함이야 누구보다 더 잘 알지만, 북평부가 만만한 건 또 아니니까.

승리하는 건 좋은데, 애써 키운 전력이 날아가면 전쟁을 안 하느니 못하다.

“...”

둘의 시선은 자연히 연오랑에게 닿았고, “말을 꺼냈으니, 대책이 있겠지?”라는 눈빛을 숨기지 않고 뿌려댔다.

“음... 일단 북평부를 꺼내기 전에, 이것부터 짚고 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눈빛을 받은 연오랑은 참모부에서 챙겨온 지도를 주섬주섬 펼쳐놓았다. 요동과 요서가 그려진 지도다.

“요동을 차지하는 건 좋습니다. 그럼 이 다음이 문제입니다. 국경선을 어떻게 정하실 생각이셨습니까?”

“...”

연오랑의 도발적인 물음에, 세종과 태종은 잠시 눈을 찌푸렸다.

참모부의 장군과 군관들이 열심히 작전을 짜놨지만, 지금 연오랑이 말하는 건 단순한 전략,전술이 아니라 북방의 미래를 묻는 거니까.

“단순히 요동을 차지하는 것만으로, 이 땅을 수십 수백년간 무탈하게 지킬 수 있다고 여기진 않으실 겁니다. 나아가 요동을 차지해 안정화 되면, 언제가 됐건 조선백성들이 창주 너머, 송주와 황주 너머 북쪽으로 진출해 신도시가 건설될 겁니다. 명목상으로 뜯어낸 아국의 강역이 진짜 강역이 되는 것이죠.”

“...”

“허면, 그때 가서 이 땅을 다 지킬 수 있겠습니까? 그냥 얼렁뚱땅 남겨두는 게 아니라, 한 점 위험도 없이 수월하게 말입니다.”

“으음...”

“흠.”

연오랑의 말에 세종과 태종은 지도를 노려보며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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