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8. 챕터61. 넘어가다 (2)
태종은 비록 칼 들고 전쟁터를 전전하지 않았지만, 태조의 자식으로 이것저것 들은 게 많다.
왕위에 오른 후 운석핵꿀밤의 여파로 조선이 흔들릴 땐, 수도없이 반란군을 때려잡으면서 자신의 능력을 실전에 투사했지.
세종은 군제를 펼칠 일이 없었지만, 연오랑 덕택에 대전략과 뒷수습 만큼은 달인이 됐다.
미친 듯이 마차를 몰고 앞으로 달리는 사람이 연오랑이라면... 세종은 마차 뒤에 앉아 마차를 더 크고 튼튼하게 만들고, 떨어지는 전리품을 마차에 주워 담고, 그 부스러기들이 다시 떨어지지 않게 꽁꽁 묶는 역할을 해왔다.
한마디로 전쟁을 돈과 보급관리, 군수행정으로 배웠다는 거지.
그런 태종과 세종의 눈에 연오랑이 말한 국경선과 강역은 넓어도 너무 넓었다. 한줌도 안 되는 조선군을 뿌려봐야, 바닷물에 소금 한주먹을 푼 정도로 말이다.
이걸 알면서도 요동정벌을 주장한 건, 조금 힘들긴 하겠지만 어찌됐건 요동을 차지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 그리고 요동을 차지하고 나서, 야금야금 치워버리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하지만 연오랑은 요동을 넘어 요서와 북방을 한꺼번에 논하고 있으니, 두 왕 또한 보는 관점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녀석은 어차피 언젠가 처리해야 될 걸, 지금 한 번에 처리하자고 말하고 있는 건데...’
세종은 그런 생각을 하며, 지도를 뚫어지듯 노려봤다.
“가능하겠나?”
“필요성은 인정하시겠지요?”
“...”
연오랑은 대답 대신 질문을 되돌렸고, 두 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야 당연히 인정할 수밖에.
“네 말대로 요동만 차지해선 엉망일 테니까.”
“지금이 아닌 수십, 수백년 후의 미래를 생각하면, 국경선은 어떻게든 단순하게 만들어 정리를 해야겠지. 우리가 막기 편하고 관리하기 편하게 말이야.”
세종은 그리 말을 하고선, 지도에 손가락을 톡톡 두들기더니... 이내 곧 길게 내리 그었다.
“이곳. 흥안령이 경계가 될 수밖에 없겠군.”
“그렇습니다.”
연오랑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댔다.
조선의 동쪽 국경선은 의미가 없다. 두만강 너머 동북방은 아직 개척을 못해서 그렇지 전부 조선땅이다. 거긴 조선을 막을 이들이 없으니까.
북쪽도 마찬가지다. 지금 당장은 꿈도 못 꾸지만, 흑룡강 너머의 동토의 대지. 동시베리아 또한 전부 조선땅이다.
그 땅의 영유권을 주장할 세력도 없거니와, 애초에 사람이 살기나 할지 의문인 곳이니까.
남은 건 서쪽. 국경선을 긋기 위해선 결국 자연지형인 산맥과 강을 경계하는 게 최선인 바. 그 기준에 맞는 건 몽골초원과 만주를 구분 짓는 거대한 흥안령 산맥이 될 수밖에 없다.
“뭐... 흥안령에도 샛길이 무수히 많고 무역로도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요서와 요서북부의 지평선이 보이는 평야를 국경선으로 삼는 것 보단 낫지 않겠습니까?”
맞긴 맞는 말. 흥안령 산맥은 분명 거대하지만, 반대로 그런 만큼 대병이 움직일 수 있는 경로는 정해져 있는 바.
방어를 걱정한다면 산맥과 평아로 나오는 길목이자 요충지에서 막는 게, 허허벌판에서 막는 것보단 훨씬 수월하다.
“...”
“적어도 몽골남부연맹과 아다이의 세력권과 맞붙는 곳까지는 확보해야, 관리를 하든 방어를 하든 편하지 않겠습니까?”
“우린 그 이상 서쪽으로 나아갈 생각이 없으니까?”
“예. 물론이죠. 설마 몽골까지 접수할 생각이십니까?”
연오랑이 ‘그게 말이나 되냐?’라는 눈빛을 숨기지 않고 눈을 흘기자, 두 왕 모두 쓴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미쳤다고 흥안령 너머까지 강역을 넓히겠나.
연오랑의 말대로 당장 요동과 요서만 차지해도, 이거 관리하느라 정신이 없을 거다.
“...”
“...”
톡톡. 세종과 태종은 다시금 손가락과 젓가락으로 탁자를 두들기며 생각에 잠겼다.
일이 너무 커졌다.
단순히 요동정벌을 논하는 걸 넘어서, 앞으로 수백년을 이어갈 조선의 서쪽 국경을 확정하는 자리가 되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여기서 흥안령과 산해관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건, 앞으로 육지로의 확장은 없을 거라는 뜻이고.
“앞으로 천년만년 이어갈 서쪽 국경이라...”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설마.”
“으음.”
세종과 태종은 쉽게 답하지 못하고, 침묵에 잠겼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이 이상을 욕심내는 건 무리겠지.’
연오랑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당장은 물론이고, 21세기까지도 걱정할 게 없다.
지금 인구가 고작해야 650만명 정도인데, 미래에는 이 땅에 1억명이 넘는 인구가 살 수 있다. 사람이 아무리 늘어나도 앞으로 수백년간 땅이 부족해서 걱정할 일은 없고, 오히려 이 똥땅을 어떻게 일궈야 할지가 문제지.
“내 말대로 하자면, 결국 서쪽을 다 치워야 된다는 말이구나.”
태종은 연오랑의 주장에 납득했는지, 섬뜩한 눈빛을 뿌리며 입을 열었다.
녀석의 말대로 하자면, 흥안령 일대에 살고 있는 세력을 다 밀어버려야 한다는 뜻이니까. 그렇다면 요동이 문제가 아니라 요왕부, 복여위, 제왕부와도 한바탕 해야한다는 뜻.
이 또한 일이 너무 커졌고, 이게 대체 북평부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먼저 복여위의 경우에는 쉽게 해결 될 겁니다. 사면으로 압박받고 있는 중이니 그들이 택할 건 싸워서 굴복하거나, 싸우지 않고 복속되는 건데... 택할 세력은 아국이 최선이지 않겠습니까?”
“...”
“안추는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노인이니, 야치부르만 신경 쓰면 될 터... 작호와 돈 쯤 쥐어주고, 휘하 부족들을 북방으로 데려와 정착시키면 별말 없을 겁니다.”
“작호가 그렇게 가볍더냐.”
“무거울 것도 없지 않습니까. 작호를 가지고 있는 집안이 이제 몇이나 된다고...”
연오랑은 눈을 씰룩거리며 답을 했고, 세종과 태종은 어처구니가 없어 너털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말이야 맞는 말이고, 작호의 특권을 깎아버린 장본인이 두 왕 아닌가. 할 말이 없어서 웃음밖에 안 나왔다.
“제왕부는 그냥 내버려둬도 될 겁니다. 거길 차지해봐야 관리도 못하고, 어차피 아국물산에 의존하고 있는 이상. 때가 되면 어련히 고개를 숙이고 들어올 겁니다. 복여위가 아국에 복속되면 더욱더 조급해지겠지요. 그러니 야치부르 일당을 후하게 대접해야 할 필요도 있고요.”
“음...”
“흠.”
세종은 자기도 모르게 지도에서 제왕부가 위치한 지역을 손가락으로 짚었다가, 얼른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그가 생각해도 여긴 멀어도 너무 멀다는 생각이 드는 모양이다.
“뭐. 복속하지 않으면 또 어떻습니까. 아국은 요동과 요서를 개발하고 다스리면서 기다리면 되고, 지금처럼 꾸준히 무역만 진행한다면 제왕부도 잠자코 있을 겁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더 아국에게 흡수될 가능성만 커지겠지요.”
“제왕부가 성장할 경우는...?”
“그게 되겠습니까.”
태종이 반문을 꺼내기 무섭게, 연오랑은 피식 웃으며 반대를 표했다.
조선조차도 저 먼 북쪽에선 농사도 못 짓는 마당에, 제왕부가 뭔 수로 조선에 위협이 될 만큼 성장하겠나.
가만 놔둬도 제왕부가 성장하는 것보다 조선이 더 빨리, 더 크게 성장할 게 분명하고. 지리적 한계 때문에 제왕부의 성장 또한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허면 남은 건 요왕부인데...”
“요왕부와의 싸움은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지 않겠느냐?”
“맞습니다.”
연오랑이 냉큼 고개를 끄덕이자, 두 왕은 가볍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서쪽을 차지하자고 주장하면서, 가장 강대한 적을 놓치고 있으니까.
“요왕부의 인구는 대략 20만명쯤 되고, 강역 또한 흥안령과 흥안령 동쪽, 요서 북부 일대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들과 싸우는 건 요동을 정벌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겁니다.”
“그야 당연한 말.”
“끄응...”
요동이야 심양과 요양을 기점으로 뭉쳐 있고, 이들은 정주민들이다.
뭐가 됐건 요양과 심양을 함락시켜 요동호족을 쓸어버리면 조선이 차지할 수 있지만, 요왕부는? 물론 싸운다면 이기긴 이길 거다.
허나 이 넓고 넓은 평원을 자기집처럼 활보하는 유목민을 다 때려잡는 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고 전비가 얼마나 소모될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걸 알면서도 이 땅을 차지하겠다는 것이냐?”
“예. 생각을 해보니까 말이죠. 우리가 요왕부와 굳이 싸울 필요가 있나 싶어서 말입니다.”
“...?”
연오랑의 뜬금없는 말에, 두 왕 모두 눈이 가늘어졌다. 또 어떤 미친소리를 하는지 들어나 보자는 생각인가 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말이죠. 북평부를 꼭 우리만 공격하고, 우리가 차지해야할 필요가 있나 싶어서 말입니다.”
“...? 헉!”
“...? 허허!”
비릿하게 웃는 연오랑을 보며, 두 왕은 영문을 몰라 눈동자에 물음표를 그렸다가... 탄성을 숨기지 못하고 기겁을 토해냈다.
“지금... 북평부를 무너뜨리고 나서, 거길 포기하겠다는 뜻이냐?”
“북직례를 요왕부에게 넘겨주자고?”
“예. 요왕부 입장에선 하늘로 뛰어오를 만큼 좋은 제안 아니겠습니까? 자신들이 사는 척박한 대지 대신 북직례를 갖게 되는데, 이걸 거부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연오랑은 그리 말을 하고선, 두 왕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듯 의자에 기대고 앉았다.
연오랑의 계획은 요왕부 전체를 이주시켜 북직례에 쑤셔 넣고, 빈 땅이 된 요왕부의 영역을 조선이 차지하겠다는 뜻이니까.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지자, 연오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태녕위는 요왕부의 부활을 외치며 타안위를 복속시켰고, 복여위까지 복속시키기 위해 수를 쓰고 있습니다. 이미 다 죽었던 요왕부를 되살린 작자들인데, 저들이 아국에 쉽게 복속하고 귀화하겠습니까?”
“...”
“애초에 저들의 힘을 빼놓기 위해서 비단길 무역에서 제외시켰는데, 만약 요동과 복여위마저 아국이 흡수해 버린다면 저들은 살기 위해서라도 아국과 싸우려 들 겁니다.”
“그런 그들에게 살 길을 열어둔다?”
“예. 아까 북평부 공략이 가능할지 물으셨지요? 만약 아국과 요왕부가 힘을 합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북직례를 넘기면 요왕부로서는 국운을 걸고 임하게 될 겁니다. 애어른 할 것 없이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를 수 있는 남정이라면 전부 동원하지 않겠습니까.”
조선의 제안대로 된다면, 요왕부로서는 모 아니면 도라는 선택 밖에 없다. 북평부를 무찌르면 북직례를 차지하는 거고, 지면 요왕부가 망하는 거지.
조선과 싸우다 망할 것이냐, 조선과 힘을 합쳐 북평부와 싸워 북직례를 차지할 것이냐.
이 둘을 놓고 보면, 당연히 후자에 힘을 실을 수밖에 없고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다. 조선이야 북평부와의 싸움에서 지더라도 손해만 입고 말겠지만, 요왕부는 망할 테니까.
“그리고...”
“...?”
연오랑은 눈치를 보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전쟁의 승패와 상관없이 말입니다. 아국이 북직례를 정복해서 다스릴 수 있을 거라 보십니까? 지금 조선이 말입니다.”
“...!”
“...”
두 왕의 눈빛은 점점 심유해져갔고, 연오랑이 말한 속뜻을 좇아 머릿속이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녀석이 말하고 있는 건. 단순히 전쟁과 정복을 넘어서, 지금 두 왕이 추진하고 있는 조선의 기조와 정책을 담보하고 있으니까.
“계속해봐라.”
결국 엉클어진 머릿속을 정리하지 못하고, 태종이 먼저 입을 열고 말았다.
“먼저... 요동을 차지한들 아국의 인구가 대략 650만명 쯤 되는데, 북직례의 인구는 못해도 300만명, 많으면 350만명 가까이 될 겁니다. 이거. 아국이 먹을 수 있겠습니까?”
“...”
지금 조선은 중국에 대해서 잘 안다.
이 시대의 상인은 곧 스파이인데, 조차지의 무역상인은 조정에서 파견한 관원 아닌가. 이들은 조정의 명을 직통으로 받아, 중국에 대한 온갖 정보를 수집해 올려 보냈지.
세세한 건 중국호족이 더 잘 알지 몰라도, 중국 전체에 대한 큰 틀은 오히려 조선이 더 잘 알고 있을 정도다.
그 결과 섬서, 사천, 운남을 잃어버렸음에도 중국은 5천만명이 넘는 인구를 보유하고 있고, 조선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북직례는 얼추 어림잡아 작게는 300만, 많게는 350만명이 살고 있을 거라고 추산됐다.
원래 역사라면 이보다 훨씬 많았어야 했지만... 정난의 변 당시 운석핵꿀밤으로 연왕부 병력이 다 날아갔다는 점.
연왕부 내전으로 북평부가 만들어지면서, 산동으로 패잔병이 몰려갔다는 점.
연왕이 황제가 되면서 수도를 북평으로 옮기면서 발전해야 하는데, 이게 불가능했다는 점. 북평부가 혼자 잘났다고 설치면서 다른 지역과 문을 걸어 잠갔다는 점.
위의 예를 따지면, 조선이 과거에 거용관, 남구, 보권성, 천진, 북직례 남부를 휩쓸고 갔던 건, 애들 애교나 다름없었다.
“남경이 없어지면서 천명과 중화가 깨졌다고 해도 말입니다. 북직례의 한족들 머릿속에 박힌 중화를 완전히 지울 수 있겠습니까? 애초에 이걸 한번 더 깨부수기 위해 북직례 공략을 논하지 않았습니까.”
“...”
“허면 그냥 중화를 깨부수는 걸 넘어서, 지금껏 아국이 추진해 온 자주화와 조선화 교육을 북직례에서 진행할 수 있겠습니까?”
“음.”
“흐음...”
세종과 태종은 연오랑이 말하는 바가 뭔지 깨닫고,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흘려댔다.
조선화 교육과정은 말이 좋아서 교육이지, 나쁘게 말하면 민족 말살정책. 정체성 말살 정책이다.
이게 통했던 이유는 전에도 말했듯, 이 시대는 민족이란 정체성이 약하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