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9. 챕터61. 넘어가다 (3)
조선이 흡수한 민족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여진을 보자.
이들이 보는 세상은 가족이라는 테두리에 갇혀 있었다. 가족의 생존과 번영만이 중요하지, 자주나 정체성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에 넙죽 흡수된 것 아닌가.
전처럼 제 가족이 살기 위해 목숨 걸고 다른 가족과 피 튀기며 투쟁하는 대신, 조선에선 안전하게 가족을 번영시킬 수 있다.
그것도 커지면 커질수록 목숨을 걸 위험은 줄어들고, 오히려 힘이 강해진다.
이러니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부족이 뭐고 민족이 뭐고 나라가 뭐든, 심지어 그게 말도 문화도 다른 조선이든 무슨 상관일까.
애초에 이들은 글조차 몰랐으니까.
한족 출신인 요동인, 남방인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들 또한 굶어 죽느냐, 창칼에 맞아 죽느냐의 선택지에 놓여 있었고, 이 문제를 해결할 수만 있다면, 조선이든 뭐든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조차지를 통해 조선에 귀화하는 수많은 한족, 일본인 등의 외국인들? 이치들은 기존의 삶을 버릴 각오를 이미 하고서, 조선으로 넘어 온 이들이다.
루스인 노예들? 이들은 애초에 언급할 필요도 없다.
중앙아시아를 건너 수많은 이민족과 만나면서, 동쪽 끝까지 끌려오는 동안. 이들의 기존 세계관과 가치관은 산산조각 나서, 민족이니 정체성이니 하는 건 따질 여유조차 없다.
헌데 고향 땅에선 농노나 노예로 살던 이들이, 조선에선 재산을 축적하고 신분제약 없이 위로 오를 수 있는 양민이 되었는데... 조선인이 되는 걸 거부할 리가 있나.
“하지만 북직례의 한족들이 지금껏 아국에 귀화하고 흡수당한 민족과 같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특히나 아국이 거용관을 비롯해 북평부를 곤란하게 만든 게 한두번이 아닌데 말입니다.”
“북평부가 북직례 백성들을 호도하고 선동했다는 거군?”
“그야 당연할 겁니다.”
북평부 입장에선 조선이 거용관, 천진 등을 박살낼 때마다 어떻게든 수습해야 했을 거다.
헌데 조선에게 직접적으로 딱히 뭐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남은 건 정신승리밖에 없을 터... 보나마나 북평부 관리들은 조선을 천하의 개쌍놈으로 만들어 백성들을 세뇌시켰을 거다.
“우리가 아무리 잘 대해줘도, 반란이 일어날 거란 말이군.”
“예. 아마 상상도 못할 만큼 많이 일어날 겁니다. 방금 전에 말했듯, 북직례 백성들은 지금껏 아국이 흡수해 온 귀화인들과는 사정이 전혀 다르지요. 비록 북평부 군부에게 수탈당하고 있겠지만, 어찌됐건 자기들끼리 아웅다웅하면서 멀쩡히 잘 살고 있는 상황 아닙니까?”
“...”
“저들 입장에선 아국은 엄연히 침략자인데, 아국이 아무리 잘 대해줘 본들 그걸 고마워할 리가 있겠습니까? 나아가 북평부 백성들이 과연 아국에 대해서 아는 게 있기나 하겠습니까? 저들을 호족연맹의 한족 백성들이라고 생각하면 안 될 것입니다.”
지금 조선은 은자의 나라, 고요한 아침의 나라 따위가 아니다.
조선은 엄청난 양의 북방물산과 특산물을 중국을 비롯한 온 천하에 팔아 넘겼고, 이젠 상인, 관리나 권력자들이 아닌 일반 백성들조차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안다.
그냥 막연히 바다 건너 동쪽에 있는 나라라는 걸 넘어서, 그 나라에서 뭐가 나오고 뭐가 팔리는 지까지 실체적으로 아는 거지.
부둣가에서 날품팔이를 하는 한족 백성조차 조선산 물건이 어떤 건지를 알고 있고, 저 먼 내지의 백성들조차 조선에서 흘러나온 물건과 조선을 거쳐 흘러온 서방물품에 대해서 군침을 뚝뚝 흘리고 있으니까.
이러한 조선의 이름값이 통하지 않는 곳은 오로지 한 곳. 바로 북직례.
외부로의 문을 꽉 틀어막고 오로지 산서와의 거래만 허용하고 있는 북직례에선, 일반 백성들이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알기는커녕 북평부 관리들의 왜곡된 세뇌작업으로 근거 없는 악감정만 잔뜩 심어져 있을 거다.
실제로 조선이 지금껏 북직례에 한 짓을 생각해보면, 그게 또 마냥 거짓은 아니니... 북직례 백성들에게 조선은, 몽골보다도 더 흉악한 동방오랑캐로 여겨질 가능성이 농후하지.
“흐음...”
“음.”
태종과 세종은 연오랑이 말한 앞날을 그려보며,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흘려댔다.
막말로 반항하는 이들을 다 쳐죽이면 해결될 문제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피를 뿌렸다간 얼마나 많은 피를 봐야할지 상상도 못 하겠다.
“물론 북직례 백성들도 지주와 호족에게 착취를 당하고 있으니, 그들을 치워낸다면 어쩌면 좋아할 지도 모르지요. 허나 아까 말했던 조선화 교육을 생각해 보시지요. 지금 아국이 추진하고 있는 역사교육을 북직례의 한족들에게 할 수 있겠습니까?”
연오랑은 웅변을 하듯, 연거푸 말을 쏘아붙였고.
“흠.”
“...”
세종과 태종은 다시금 한숨을 깊게 내쉬며,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자신들이 직접 추진하고 세우고 있는 작업이, 북직례 정복의 발목을 잡는 상황이 되고 있으니까.
운석핵꿀밤 이후. 조선은 자주화와 민족성을 만들어가고 있었고, 개혁 이후에는 여기에 역사교육이라는 걸 통해 불길에 기름을 부었다.
조선이 여진, 몽골, 일본, 심지어 이젠 색목인까지 받아들이면서, 이제부턴 단순히 지금껏 한반도에 살았던 인종과 민족으로 조선인을 규정할 수 없게 됐다.
이들 잡탕민족을 하나로 묶을 구심점은 오롯이 왕실밖에 없었기에 자연히 왕권강화로 이어졌고, 이들을 하나로 묶는 접착제는 인종을 뛰어넘는 사상적, 관념적인 개념.
어쩌면 시대를 뛰어넘어, 근대에나 나올 법한 추상적인 민족성을 만들어 가고 있는 거지.
이 작업의 핵심은 바로.
“어째서 금석학당과 역사처를 만들어, 하등 쓸모도 없는 옛 왕조의 유물과 유적을 수집하고 있는지 떠올려 보시지요.”
“...”
연오랑의 단호한 발언에, 두 왕은 다시금 말문이 막혔다.
조선은 닥치는 대로 잡아먹고, 그 땅의 역사와 문화를 조선의 것으로 흡수시켜, 궁극적으론 “너희도 원래 조선인이었다.” 라고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미래로 치면 역사왜곡 일수도 있는데, 15세기인 이 시대엔 이게 참 애매했다.
애초에 백성들에게 역사인식이라는 게 제대로 있지도 않다는 게 가장 크고, 조선처럼 강제로 역사공부를 시키려는 나라도 없으니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
저 먼 한나라 시절부터 흉노를 빼면 어지간한 메이져 유목민족은 전부 만주땅에 기원을 두고 있고, 이 만주땅에 머물며 나라로서 역사에 깊이 족적을 남긴 건 고조선과 고구려다.
적어도 만주 땅에서 만큼은 고조선, 고구려의 역사가 곧 온갖 유목민족 역사의 뿌리요. 조금 과장해서 해석하면 요,금,원 등은 고구려 따까리 하던 놈들이 세운 나라라고 우길 수 있다.
고려, 조선? 어찌 보면 유목민족과 한뿌리에서 뻗어 나온 형제일지도 모르지.
애초에 조선이 왜 조선이 되었나. 적어도 고조선의 후예라고 믿거나 우겼으니까 조선이라고 한 거 아닌가. 고려가 고구려의 후예라고 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교육처에선 이렇게 만들어서 혹은 우기면서, 북방땅에 대한 확실한 명분을 착착 쌓고 있었고 말이다.
저 먼 남방의 역사야 뭐. 제대로 된 역사도 없었으니 그냥 없는 셈 쳐도 무방했고... 실제로도 뭐 있는 것도 없었지.
“하지만 북직례는 어떻습니까? 거긴 이미 수천년전 부터 중원과 붙어 있던 곳입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엄밀히 따져보면 중원에서 변방이기도 했고, 한족이 차지한 세월보다 이민족이 차지한 세월이 더 길긴 하지만... 어찌됐건 한족은 북직례를 중원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있다.
저 먼 송나라 시절부터 한족들이 장강 밑에 처박혀 있을 때조차도, 자신들의 땅이라고 말하던 곳.
그 땅의 역사는 죽어도 조선의 역사로 들어올 수 없고, 오히려 이걸 먹으면 조선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에 파묻혀 버릴 수도 있다. 어찌됐건 중국의 역사가 조선의 역사보다 깊은 건 사실이니까.
결국 이러한 역사교육을 못하게 되면, 조선화교육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뜻.
북직례 백성들 마음속 한구석에선, 계속 한족이라는 정체성이 남아 있게 되는 거지.
“음...”
“조선화교육이 비록 감도 잘 잡히지 않는 오래된 역사에 기인하고 있다지만... 한족의 사서가 버젓이 존재하는 마당에, 그들의 역사를 우리의 역사로 받아들이는 건 힘들지 않겠습니까?”
“...”
“나아가 저들의 역사를 우리의 역사로 만드는 게 과연 좋은 일이겠습니까? 천명을 거슬러 남경이 천벌을 받아 없어졌는데, 저들 한족의 역사를 우리의 역사로 편입하는 건 오히려 문제의 소지가 되지 않겠습니까?”
“흐음.”
“...”
세종과 태종은 끔찍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비록 운석핵꿀밤이 중국에 떨어졌다지만, 그건 다시 떠올리기도 싫을 만큼 끔찍한 일이다. 이것 때문에 동아시아 전체가 풍비박산 나지 않았나.
이 운석핵꿀밤은 곧 중화와 천명과 이어져 있고, 이 그릇된 한족의 역사가 문제라고 보고 있는 지금에 와서... 한족의 역사를 조선으로 편입하는 건 당연히 문제가 된다.
실제로 제2의 운석핵꿀밤이 떨어질 리는 없겠지만, 자주화를 통해 중화와 중국을 지워내고 있는 명분이 약해질 테니까.
적어도 명분에 있어서는 조선이 북직례를 직접 집어삼키는 건, 여러모로 무리수가 될 가능성이 컸다.
“...”
“...”
세종과 태종은 맹렬히 머리를 굴려가며, 연오랑이 말한 명분론의 허점을 찾아내려 입을 다물고 고심에 빠졌지만...
“그리고...”
연오랑은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는지, 다시금 입으로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현실적으로도 문제가 될 겁니다. 아까 말했듯, 아국은 인종과 민족을 가리지 않고 모든 피정복민을 조선 양민으로 삼고 대우하고 있습니다. 그 어떤 신분적 차별도 없이 말이지요.”
“음.”
“그렇지.”
이건 신분제를 없애버리려는 두 왕의 복심에서부터 시작된 일이기에, 둘은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러한 대우는 지금껏 아국으로 귀화한 백성들이, 흔쾌히 자신의 과거를 버리고 조선인으로 재탄생하기에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1세대도 지나지 않았으니, 완전한 조선인이 되진 못했을 겁니다.”
“그랬겠지.”
이미 알고 있는 사안인 터라, 세종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라와 시대를 불문하고 과거와 미래의 역사에서 식민지, 정복지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킨 건, 정복민이 피정복민을 노예, 하등계급, 2등시민 등등으로 구분 지었기 때문이다.
허나 조선은 정복민이나 피정복민이나 똑같이 취급한다. 그 어떤 출신의 제약, 신분의 제약도 없다는 거지.
물론 지금 당장은 조선말과 글, 학식이 부족해 이민족이 관원이나 기업가가 되는 게 쉽지 않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문제고 1세대만 지나면 자연히 해소될 문제다.
그들 자식들은 생긴 것만 이민족이지, 속은 조선인이 되어 있을 테니까.
“그럼에도 문제가 되지 않은 건, 저들 귀화인의 수가 적고 조선인들 사이에 파묻혀 조선인이 되지 않으면 성공할 길이 없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허나 북직례를 점령해, 지금과 같은 기조를 유지한다고 보면... 아국의 전체 인구 중에서 3분의 1에 가까운 인구가 한족으로 채워지게 될 겁니다. 과연 저들을 차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음.”
“흠.”
이것까지 그려보진 않았는지, 세종과 태종은 자세를 바로하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장 답을 찾아냈는지, 눈빛이 날카로워져 갔다. 자신들이 생각해도, 문제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판단하는 모양이다.
북직례를 조선이 차지한 다음. 북직례 한족이 “조선화 교육을 잘 받을 수 있을까?”는 둘째 치고, 만약 받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그들도 똑같은 조선백성이니 차별을 두면 안 되는데, 한족은 수가 많아도 너무 많다.
이러면 이게 과연 조선일까 아니면 지난날 숫하게 있었던 중국 왕조일까. 나아가 조선조정으로 파고든 한족출신이 과연 조선 전체를 위한 정책을 펼칠까 아니면 한족을 위한 정책을 펼칠까.
자주화란 이름으로 마구마구 지워버린 중국문화와 제도를, 자신들이 조선인이니 그 또한 조선의 문화라 말하며 부활시키려고 하지 않을까.
가능성이 희박할 수도 있지만, 완전히 없다고는 말할 수 없는 일.
그렇다고 한족에게 차별을 가하자니, 그럼 지금까지 개고생을 하며 진행해온 신분제 철폐와 자주화, 조선화교육이 모두 무너진다.
“그럴 일은 쉽게 벌어지지 않겠지만...”
“골치 아프게 되겠군.”
“예. 보나마나입니다. 나아가 북직례의 한족들이 그런 움직임을 보인다면, 요동이나 남방. 기타 개별적으로 귀화한 한족들 또한 그들과 함께 뭉칠 가능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조선이 제도적으로 신분과 인종의 구별을 없앤다지만, 민간에서 서로 뭉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고 막을 수도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걸 막는다면...?”
“아국이 중국에 대항하기 위해, 인구를 불리려는 계획이 흔들리겠지요.”
쓴웃음을 지으며 태종의 묻건만, 세종이 냉큼 말을 가로채며 고개를 내저었다.
인구와 영토가 곧 국력인 건 이 시대 조선인들도 알고, 그래서 부족한 인구를 채우기 위해서 가리지 않고 귀화인을 마구 받았다. 심지어 색목인까지 받아들였지 않나.
잠깐 곁가지 이야기를 하자면, 요샌 일본 무역항을 통해 일본인 유민, 난민, 노비 등을 수도 없이 받고 있었다.
조선이 의도한 대로 다이묘들을 진짜 귀족상인과 비슷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 영지가 발전함에 따라 생겨나는 잉여인력을 도시로 긁어와 도시를 발전시키는 대신, 조선에 팔아넘겨 다이묘들의 사치와 풍요를 조선이 제공해 주고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