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1. 챕터61. 넘어가다 (5)
연오랑은 가볍게 말을 던졌지만, 그 무거움에 세종과 태종은 침몰해 입을 꾹 다물었다.
운석핵꿀밤 이후. 조선은 중국으로부터 벗어나 자주화를 꿈꾸고, 조선의 대적을 중국통일왕조로 두고서 견제하고 있다.
이 말인 즉. 군사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더 이상 중국을 상국이 아닌 경쟁자로 삼아서, 겉으로 표방하진 않지만 패권전쟁에 돌입했다는 뜻.
허면 어떻게 해야 저 거대한 중국과 경쟁할 수 있을까.
중국이 지금껏 천하를 호령했던 것도 사실이고, 그들의 방식이 선진적인 것도 사실이니, 그들의 방법을 따라하는 건 결코 나쁘지 않은 방법일 지도 모른다.
원래 역사의 조선이 그러했고, 운석핵꿀밤 이전의 조선이 그러했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그들을 좋게 답습하고, 그들의 폐단과 실수를 수정해서 받아들인다고 한들... 궁극적으론 그들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게 문제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조선과 중국의 체급차는 극복할 수 없으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하나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간 내려온 중국의 방식이나 제도와 전혀 관계없는, 아예 새로운 형태의 개혁과 쇄신, 혁신을 이뤄야만 한다.
이게 실패할지 성공할지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칼은 뽑혔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개혁은 실패가 아닌 대성공으로 가고 있으니... 세종과 태종으로서는 결국 지금의 기조를 고수하며 나아갈 수밖에 없는 거지.
“...”
잠시 침묵이 머물기 무섭게, 연오랑은 눈치를 살살 살피며 마지막으로 한마디, 묵직하면서도 비수처럼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무리하면서 북직례를 차지하는 게, 지금까지 추구해 온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
“...”
연오랑은 세종과 태종의 역린을 건드렸고, 아니나 다를까 번쩍! 대답 대신 눈빛이 칼날로 변해 쏟아졌다.
사람을 산채로 난도질 할 것처럼 매서운 눈빛인데...
다만 역정을 내지 않은 건, 방금 말한 과거로의 회귀를 말하면 당연히 이런 반문이 나올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
세종과 태종도 바보가 아니니, 같은 생각을 했지만 차마 말로 내뱉지 않았을 뿐이었다.
‘역시. 이런저런 이유는 다 필요 없이, 이거 한방이면 끝나는구만.’
연오랑은 송구하다는 듯 살포시 고개를 숙였지만, 속으론 딴 생각을 하며 승리의 미소를 삼켰다.
태종은 훌륭한 유학자였지만, 운석핵꿀밤의 여파를 정통으로 맞고 수습하면서 제대로 반동했다.
조선사상계는 갈기갈기 찢어져 조정은 돌아가지도 않는데, 지방에선 시도 때도 없이 칭왕을 외치며 반란이 터졌다. 정나미가 다 떨어져서 진절머리가 났고, “이대로는 안 된다.”라는 마음만 매일매일 강해졌다.
세종도 원래 역사와 완전히 달라졌다.
그 어떤 유학자도 씹어 먹을 진짜배기 유학자로 성장해야 했지만, 세종은 이른바 운석핵꿀밤 세대다.
그는 어린 시절에 명나라가 망하고 조선이 개판난 걸 지켜보며 성장했고, 조선 건국의 뼈대가 된 근본성리학에 대해 본질적인 의문을 품고 자신만의 학풍이자 논리를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두 왕이 내린 결론은, 근본성리학에서 말하는 왕권의 개념, 나라의 개념을 완전히 탈피해 새로운 나라를 만든다는 것이었지.
이미 천벌을 받아 명이 망했는데, 그들의 체제와 사상을 따를 이유가 없잖나.
신권과 왕권의 조화. 유학사상으로 무장한 철인이 통치하는 이상향. 성리학으로 무장한 지식인들이 위로는 왕을 모시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계몽하며 다스리는 세상. 농본주의에 입각한 고립된 향촌사회.
이딴 건, 이미 명나라가 운석핵꿀밤을 쳐맞으면서 실패한 체제라는 걸 증명했다. 아니다. 둘이 연관이 없다고 해도, 연관이 있다고 우기고 믿었다.
그리하여 원래 역사에서도 시도되었던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이, 그야말로 혁명에 가까울 정도로 급진적으로 변해 진행되었다.
현실이 아닌 학문으로서의 유학만 파고든 중간지배층이 왜 필요한가. 왕이 어째서 현실논리가 아닌 유학논리로 국정을 이어가고, 신하들과 유학에 근거한 논쟁을 하며 눈치를 봐야하나.
왕이 어째서 유학으로 무장한 철인이 되도록 교육을 받아야 하는가. 어째서 왕이 직접 백성을 다스리지 못하고, 양반사대부라는 중간관리자를 통해야만 하는가.
이런 모든 의문과 “어떻게 하면 체급이 월등한 중국을 뛰어넘을 수 있는가?”라는 고민이 합쳐진 결과.
“시건방진 놈들. 니들 다 꺼져. 앞으론 오롯이 왕과 양민만 있을 뿐이다.”라는, 봉건질서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선 나올 수 없는 급진적인 사상이 탄생했다.
‘이건 오히려 중국왕조가 아니라 미래 유럽의 절대왕정과 비슷해 보이는데... 거긴 또 어찌됐건 성직자, 부르조아, 젠트리, 융커와 같은 귀족과 중간계층이 있었잖아? 지금은 그런 걸 아예 없애버렸으니까...’
위로는 절대불변하는 왕을 두고, 밑에선 꼭 시민혁명을 일으킨 것 마냥 신분과 인종, 종교의 차별 없이 누구나 고위관료로 올라갈 수 있는 나라.
이런 나라는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나올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니... 하여간 지금 조선은 오묘한 나라로 재탄생하고 있는 중이다.
“...”
“...”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묘한 표정을 짓고서, 의자에 파묻혀 있는 두 왕을 보며...
‘그런 생각을 품고 있던 세종과 태종에게, 새로운 방법론으로 등장한 게 자본유학이었고 말이야.’
연오랑은 계속 눈치를 살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렇듯 새 나라를 만들려는 태종의 눈에 걸려든 게, 저 먼 땅끝 하동에서 이상한 짓을 하고 있는 연오랑이었다.
녀석은 자본유학이라는 요상한 학문을 창시해, 하동을 자신의 영지마냥 자본유학의 실험체로 삼아 기업이라는 걸 키웠으니까.
태종은 과연 저 실험이, 기존의 사상과 체제를 대체할 수 있는지 가능성을 살피기 위해 가만히 내버려뒀던 거지.
그리곤 하동이 완전히 탈바꿈하며 발전하는 걸 보고 그 가능성을 확신했고... 대마도 정벌을 통해 연오랑이 세상에 출사표를 던지자, 냉큼 물어와 세종과 함께 개혁을 시작했다.
‘나야 뭐 생각이 달랐지만, 궁극적으론 같은 결과를 바라고 있었으니까.’
사실 연오랑이 조선개혁에 뛰어든 이유는.
건국된 지 얼마 안 되서 걸음마도 시작하지 않은 조선을 초장부터 바꿔서, 원래 역사처럼 근본성리학에 매몰되어, 수구적이고 폐쇄적인 나라로 나아가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나라의 강역을 넓히고 그러는 건, 훗날의 위험 제거와 함께 어찌 보면 개혁을 이루기 위한 부수적인 작업이었지.
자본유학이라는 뜬금없는 사상을 꺼내든 것도 마찬가지다.
근본성리학을 무너뜨려 파묻어버리려면, 조선의 기조이자 근간이 될 새로운 사상과 패러다임이 필요했기 때문.
세종과 태종은 여기까지 내다보진 못했어도... 자신들이 추구하는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에 도움이 되는 걸 알고 가져다가, 마음대로 버물려 사용했다.
연오랑 또한 자신의 생각대로 방향키를 틀어 나아갈 수 있다면, 세종과 태종이 전례 없는 새 나라를 만들든 말든 뭔 상관일까.
같은 방향으로만 가면 그만인데.
이래서 연오랑이 세종, 태종과 찰떡같이 붙어먹고, 개혁동지, 혁명동지가 된 것이었지.
‘개혁의 시발점이 이러했으니... 과연 영토확장과 왕권강화, 중앙집권이 상충할 때, 세종과 태종이 뭘 선택하겠어?’
보나마다 후자 아닌가.
막말로 지금까지 숫한 전쟁을 하고 영토를 넓혀왔지만, 그게 땅욕심이 많아서일까? 아니다. 조선을 개혁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어쩌다보니 영토가 넓어진 거다.
세종, 태종이 남방으로 진출할 생각으로, 연오랑이 새로운 함선을 만드는 걸 전폭적으로 밀어줬을까? 아니다.
조선을 개혁하기 위해선 토지개혁이 먼저 일어나야 했고, 이를 위해선 식량난을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해야 하는 바.
이 때 등장한 게 신형어선을 통한 무지막지한 해산물의 투입이었고, 그에 감명 받아 조선소를 만들고 새로운 배를 찍어낸 거지.
이 불길을 타고 더 큰 배, 더 빠른 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결과 탄생한 게, 대양을 횡단할 수 있는 범선이었다.
그리고 이 범선의 활용처를 찾고자, 무역 수익의 꿀맛을 보고 더 많은 무역수익을 얻기 위해 온 사방을 쑤시고 다녔고, 그래서 남주도(대만섬)을 조선땅으로 집어 삼키는 결과가 나온 거지.
물론 연오랑이야 처음부터 남주도를 집어삼킬 속내가 있었다지만, 두 왕을 비롯한 조정신료들은 거기까지 생각한 사람이 없었고 말이다.
북방으로 영토를 확장한 것 또한 비슷한 논리였다.
‘그러니 세종과 태종이, 지금까지 해온 작업을 포기할 정도로 땅 욕심이 많을까?’
연오랑은 이 질문에 대해선, 단호하게 반대에 한표를 던졌다.
“...”
“대외적인 문제에 대해서 말해 보거라.”
아니나 다를까. 이미 세종과 태종도 반대의견으로 마음이 굳혀졌는지, 역정은커녕 무심한 말투로 질문을 던졌다.
연오랑의 의견을 더 들어보려는 걸로 보아, 확실히 포기하는 쪽으로 마음이 쏠리는 모양이다.
“크음. 아국이 북직례를 차지하는 걸, 중국호족연맹과 몽골이 어떻게 바라볼지 우려됩니다. 특히나 중국호족연맹이 그렇지요.”
“신뢰가 깨진다. 이 말이지?”
“예.”
연오랑이 대외적 문제라는 말을 꺼냈을 때, 이미 세종도 문제점을 간파했는지 냉큼 말을 이어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조선과 중국호족연맹과의 관계는 사상누각이나 다름없었다.
명나라 시절 해금령도 아니고... 그 어떤 시절보다 무역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이 시대에, 중국을 둘러싼 바다를 무작정 조선에게 내주는 게 말이나 되나.
물론 해안도시 호족과 내륙도시 호족의 알력도 있긴 하지만, 궁극적으론 살얼음판과 같은 정세가 유지되고 있는 거다.
이러한 아슬아슬한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건, 조선이 신의와 신뢰를 보이고 있기 때문.
지난날 강남원정 때도 보여줬다시피, 조선은 칭왕자 세력만 쓱싹 하고 곧장 물러나면서 "조선은 중국본토를 욕심내지 않는다."라는 무언의 신뢰를 보여줬다.
조차지? 중국호족들 입장에선, 써먹지도 않던 개똥땅의 작은 땅덩어리를 조금 떼어준 것에 불과하다.
“허나 북평부가 아무리 하남, 산동연맹과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해도, 북직례는 어디까지나 중국본토이며 한족의 땅입니다. 거길 차지하게 되면, 호족연맹들의 불안감은 커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만약 일을 그르쳐 싸우게 된다면, 아국이 지진 않겠지만...”
세종은 말을 잇지 못해 흐렸고.
“아국이 이길 수도 없겠지요.”
연오랑은 냉큼 받아 마무리했다.
지난날 강남원정이 막대한 이득을 보며 끝났다고 해서, 그게 오롯이 조선의 힘만으로 됐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호족연맹은 자신들의 힘을 빼기 싫어서, 가문이 힘이 줄어들어 타가문에게 공격을 받거나 주도권을 뺏기기 싫어서, 한마디로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걸 서로 미뤘기에 칭왕자가 설칠 수 있었던 거다.
즉. 칭왕자를 제외한 모든 호족세력이 조선의 원정을 도와줬던 거지.
헌데 조선과 호족연맹이 직접적으로 싸우기 시작하면, 저들은 자기가 살기 위해서라도 똘똘 뭉쳐 대항하지 않겠나.
전쟁이 질질 끌리는 건 물론, 내륙으로 진출하기 위해 얼마나 개고생을 해야할지 감도 안 잡힌다.
“나아가 당장 무역이 끊기는 것 자체가 문제 아니겠습니까? 아국이 아무리 서방, 일본, 몽골, 남방소국과 무역을 한다고 한들... 전체적인 비율로 봤을 때, 다른 나라를 모두 합쳐도 강남호족연맹 하나만 못합니다. 저들도 손해를 입겠지만, 우리는 더 큰 손해를 입겠지요.”
“해안도시가 모두 침묵해도, 저들은 중국본토의 내수시장만으로도 돌아갈 수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막말로 해안도시호족이 아국의 손에 무너지면, 저들은 더욱더 똘똘 뭉칠 겁니다. 만약 일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격화되면, 어쩌면 우리 손으로 칭왕자를 탄생시키게 될 지도 모르지요.”
“음...”
“하긴. 외부의 위협에 맞서서, 원수이던 이들도 내부단결을 이루는 경우가 있으니까.”
“예.”
칭왕자를 없애기 위해서 북평부를 무너뜨리네 마네 하고 있는데, 북직례를 집어삼키면 더 큰 칭왕자를 불러올 수 있다니...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더불어 아까 말했듯, 북직례를 차지하면 저들 한족을 조선인의 발 아래로 놓고 군림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각 성마다 개성과 문화가 달라 서로를 경원시 한다지만, 어찌됐건 다 같은 한족입니다. 한족이 한족을 다스리는 건 자신들 내부의 일이지만, 조선인이 한족을 다스리는 건 다른 문제 아니겠습니까?”
“그 시건방진 중화사상 때문에 말이지?”
“뭐... 굳이 중화까지 가지 않더라도, 같은 한족을 발아래 두는 걸 호족연맹이 좋아할 리가 없지요. 자신들도 언제 그렇게 될지 모르니까요.”
패도 내가 패야지, 남이 패면 싫어하는 건 고금의 진리 아닌가.
“반대로 오히려 중화사상이 꺾이는 게 아니라, 더 크게 번져 아국을 적대하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날 지도 모르겠군. 아니. 저들 중에서 야망이 있는 자가 있다면, 우릴 핑계로 한족백성들의 악감정을 자극할지도...”
“예. 아국과의 무역을 통해 모든 호족이 이득을 보는 건 아니니, 자신들의 권력다툼에 아국을 끌어들여 불길을 번지게 할 가능성도 있겠지요.”
“흐음.”
“...”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터라, 두 왕은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나아가 아국은 내부의 개혁, 무역로 개척, 특산물 확보, 변경의 안정을 위해서 움직였다지만... 다른 나라가 아국을 보는 시선이 우리와 같겠습니까?”
연오랑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고, 두 왕은 뭘 말하는지 깨닫고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