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2. 챕터61. 넘어가다 (6)
조선 내부 사정이야 어쨌든, 밖에서 보기엔 근 십여년간 수차례 전쟁을 벌여 영토를 확장한 호전적인 나라가 조선이다.
그런 나라가 북직례를 차지한다? 이젠 변경이 아닌 중국 본토에 발을 내딛은 거니, 불안감과 경계심은 더욱 높아질 수밖에.
“산동과 하남연맹 입장에선 특히나 그럴 것입니다. 아무리 아국의 해군이 강맹하다고 해도 바다를 통하면 한계가 있지만, 육로로 아국과 이어지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요서회랑을 확보하려는 것과 같은 이치겠군.”
“그렇습니다.”
중국과 동북방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인 요서회랑.
여긴 문화적으로도 지리적으로도. 중국과 변경을 가르는 경계선인데, 여길 넘어온다는 것 자체가 한족들 입장에선 소름끼칠 정도로 두려울 거다.
지난날 요,금,원나라가 다 이런 식으로 중국본토를 유린하지 않았나.
헌데 유목민족과 정주민족, 해양민족의 특성이 합쳐진 흉악한 나라인 조선이 북직례에 발을 내딛는 건, 저들 입장에선 쉽게 넘어갈 사안이 아닌 거지.
조선이 “아니! 너희 안 쳐들어간다니까!”라고 아무리 외쳐봐야, 아무도 안 믿을 거다.
산해관을 뚫고 들어와 북직례를 집어삼킨 선례가 만들어질 테니까.
“이는 백년,천년을 이어갈 아국의 대계와 완전히 상충되는 사안입니다. 아국의 진정한 적은 중국통일왕조고, 그걸 막기 위해선 중국을 이대로 쪼개서 호족연맹을 평화롭게 유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손으로 우리가 바라는 평화를 깰 수 있다는 거군.”
“예. 원치 않지만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조선은 동아시아의 깡패경찰이 되어서 “내가 왕이 될 거다!”라고 튀어나오는 놈들만 때려잡아야지, “앞으로 내가 제국이다! 다들 내 밑에 꿇어.”라는 움직임을 보이는 순간.
모두가 우호적인 시선을 팽개치고, 조선을 적대시 할 거다. 그럼 당연히 분란이 일어나 중국통일왕조라는 변수가 발생하는 거지.
산업혁명과 함께 화약병기가 발달하지 않은 한, 조선은 체급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다.
홀로 미친 듯이 강해진다고 해서 천하를 다스릴 순 없고, 반대로 조선의 움직임에 맞춰 조선을 적대하는 세력 또한 미친 듯이 강해지는 게 세상의 이치다.
허면 어째서 그런 개고생을 자처하며 온 세상을 적으로 돌릴까.
꾸준히 노력해 조선의 우세를 고수하면서, 미래의 적들이 뭉치지 않게 갈기갈기 찢어서 전체적인 힘을 빼놓는 게 훨씬 효율적이지 않나.
“그래서 우리 대신 요왕부를 북직례에게 넘긴다라... 호족연맹의 반응이 다를 거라고 보나보군?”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어찌됐건 모두는 북평부가 없어지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럼 북평부가 사라진 북직례를 누가 차지하느냐의 문제가 남겠지요.”
“...”
“아국이 차지하는 건 타초경사의 우를 범하는 거니, 아국은 제외. 북직례의 호족을 남겨두면 제2의 북평부가 탄생할 테니, 북직례의 호족은 남겨둬선 안될 것입니다.”
“그야 당연한 말.”
“호족이 지배하지 않는 북직례를 북직례 백성들에게 넘겨주면, 그거야 말로 제대로 된 칭왕자가 탄생할 가능성이 있으니 이 또한 불가.”
조선이 싹 정리해서 깔끔한 빈집을 누군가에게 넘겨주는 꼴인데, 이건 군벌호족이 뭉친 북평부보다 더욱 응집된 세력이 탄생하는 꼴이다.
“허면 남은 건 산동과 하남이 북직례를 갈라 갖는 건데, 다른 중국호족연맹이 이걸 가만 두고 보겠습니까.”
“흐음...”
“그렇겠지.”
세종과 태종은 연오랑의 말에 미래를 그려보며, 자기도 모르게 쯧쯧. 혀를 차고 말았다.
지금 중국의 정세는 꽉 맞춘 톱니바퀴처럼 얽혀 있다.
운이 좋아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명나라가 망한 이후 자기들끼리 치고 패고 싸우면서 모두가 암묵적으로 납득한 결과. 이렇게 정착된 구도가 만들어졌다.
헌데 산동과 하남이 북직례를 집어삼켜 덩치를 불려서, 이 균형을 깨는 걸 과연 누가 반길까. 심지어 북직례를 넘겨주려하는 조선조차도 반기지 않는다.
“결국 내부의 세력이 아닌 외부의 세력을 데려와, 북평부를 대체하는 게 최선인데... 작금 천하의 정세에서 북평부를 대체할 세력은 요왕부 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렇겠지. 외부에서 끌어올 세력이라곤 아다이와 남부몽골연맹인데, 그들이 북직례를 차지하면 몽골초원의 균형이 또 무너질 터... 아국이 비단길 연합에서 주도권을 갖기 힘들어지겠지.”
“산서호족을 끌어들이는 것도 불가입니다. 산서는 지금까지도 북평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그들을 끌어들이면 산서와 북직례가 합쳐진 더 강력한 북평부가 탄생하게 되겠지요.”
태종과 세종은 만담을 하듯, 후보자를 하나씩 지워갔고 결국 남은 건 하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요왕부라...”
“예. 아국이 요동과 요서로 나가기로 마음을 먹은 이상, 어떤 식으로든 서쪽 국경을 확정하기 위해선 요왕부를 치워야 합니다. 그러니 저희도 좋고, 요왕부도 좋고, 중국호족연맹도 좋아할 선택지 아니겠습니까?”
“큭. 중화라는 불길을 한번 더 꺼버리기 위해선, 문명국임을 인정하는 아국보단 차라리 몽골이 나을 수도 있고 말이지?”
“예. 따지고 보면 요,금,원과 같은 이민족이 북직례를 다스린 세월이, 명나라가 다스린 세월보다 훨씬 길지 않습니까. 위정자가 아닌 한족 백성들의 중화라는 자부심을 한번 더 깨버리기 위해선, 차라리 아국보다 몽골이 지배하는 게 훨씬 효과적일 겁니다.”
“오랑캐라 깔보던 이들에게 한번 더 깔린다. 이 말이지...”
“...”
연오랑은 대답 대신 히죽 미소를 지었고, 두 왕 또한 끄덕끄덕 고개를 흔들었다.
최선은 아닐 지라도 차선쯤은 되는 선택. 이 정도면 조선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결정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북직례의 북평은 원의 대도였던 곳. 그리고 그런 원을 밀어낸 명나라가 연왕부를 세워 이민족을 견제 했던 곳이다. 그 땅을 다시금 몽골이 차지한다는 건, 한족들 입장에선 꽤나 속이 쓰린 일이 될 거다.
“다만... 아국을 두려워하는 만큼은 아니겠지만, 몽골 출신인 요왕부가 북직례를 지배하는 걸, 산동과 하남이 쉽게 받아들일지 모르겠군. 네가 말했듯, 북직례는 원의 대도가 있던 곳 아니냐. 북평부 대신 요왕부가 영토 확장을 바랄 수도 있지 않느냐.”
“그럴 가능성도 없진 않지만... 20만명도 안 되는 요왕부가 300만명이 넘는 북직례를 다스리는 건, 말처럼 쉽게 되지 않을 겁니다. 보나마나 안정되기 까지 시간이 꽤 걸리지 않겠습니까? 시선을 밖으로 돌리려면 한참 걸릴 겁니다.”
“흐음.”
“그러니, 이번 북평부 정벌을 함에 있어서, 하남과 산동도 끼워 넣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에게도 이득을 물려줘야, 아국의 뜻을 따를 겁니다.”
“이득이라 함은 당연히 땅이 되겠군.”
“예. 요왕부가 북직례를 다스리는 건 혼란의 연속일 테니, 땅을 빼앗긴다고 해서 아까워하지도 않을 겁니다. 애초에 자신들의 땅도 아니지 않습니까.”
연오랑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북평부의 어딜 넘겨줄 지는 쉬운 문제 아닌가. 그간 북평부와 산동,하남이 계속 충돌했던 지역. 산동과 하남에게 가장 골칫거리였던 지역을 넘기면 만족하지 않을까.
“이렇게 4국이 힘을 합쳐 북평부를 무너뜨렸으니, 이 기회를 통해서 평화협정이나 강화조약을 맺는 건 어떻습니까? 아예 공식적으로 동맹이 되는 조약을 맺어도 좋습니다.”
“평화협정?”
“강화조약?”
세종과 태종은 처음 듣는 단어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대충 어림잡아 짐작하고선 그 의미를 스스로 도출해냈다. 이미 비슷한 일을 해봤으니까.
지난날 동아시아의 역사에선, 나라간의 관계는 수평적이지 않고 항상 상하관계가 나뉘었다. 내부적으론 어쩔지 몰라도, 외부적으론 중국통일왕조가 윗사람이 되는 게 일반적이었지.
헌데 명이 망하고 나서, 그 자리를 이어받은 맏형인 조선이 봉건질서에 입각한 기존의 관계를 포기했다.
조선은 미래의 중국통일왕조를 우려하고, 다른 나라에게서 경계의 눈초리를 받지 않기 위해서, 모든 나라를 평등한 객체로서 대해 조약을 맺었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조선 또한 이러한 수평관계가 낯선 터라, 제대로 된 조약은 아예 거부하고 그냥 무역조약만 맺어왔었지.
헌데 이게 의외로 쏠쏠했던 게, 상하관계에 입각한 조공무역이라면 큰 형으로서 아우에게 더 퍼줘야 하는 게 당연했지 않나.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 조선보다 산업기반이 미약한 일본, 몽골 등지의 나라에게 조선 물산을 제값 받고 펑펑 팔아 재낄 수 있었던 것.
무역의 꿀맛을 본 외교부에선 온 나라와 평등한 무역조약을 맺길 원했고, 그들이 바라는 대로 됐다.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들 또한 상하관계가 없는 조약이 낯선 건 마찬가지인데, 큰 형이 먼저 굽히고 들어와서 아우의 체면을 살려주는데 이걸 싫어할 나라가 어디 있을까.
조선은 체면 대신 실리를 두둑하게 챙길 수 있었지.
이러한 무역조약의 최고봉은 나라도 아니고, 군벌도 아니고, 호족 집단에 불과했던 중국호족들을 연맹으로 묶어 나라로 취급한 것이었다.
멀쩡한 나라이자, 나름 큰형이라고 인정받는 조선이 수평적 관계를 표방하며 정식으로 수교를 맺어준다? 이건 완전히 공식적인 국가까진 아니어도, 얼추 국가에 가까운 세력이라고 인정해준다는 뜻 아닌가.
수면 아래에서 군림하던 그림자 권력자들을, 수면 위로 끌어 올려 진짜 권력자로 만들어 준 꼴이 됐지.
이건 조선이 바라는 것만큼이나 중국호족이 바라던 것이었기에, 연맹이라는 체제는 날개달린 말처럼 퍼져나가서 중국을 뒤덮었다.
“이번에 산동, 하남연맹과 무역조약을 뛰어넘는 진짜 나라간의 조약을 맺으면, 그들로서도 크게 반길 겁니다.”
호족연맹은 솔직히 말하면 근본도 없는 정치세력. 내부에서 자신들의 통치정당성을 세우는 게 어렵다면, 외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법.
호족연맹 또한 수평관계의 조약이 낯선 건 맞고, 항상 누려왔던 상국이라는 타이틀을 잃어버려서 아니꼽지만... 현실은 현실.
조선이 힘으로 찍어 누르지 않고 동등한 대접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이들은 체면과 실리를 모두 챙길 수 있게 되는 거지.
“나아가 저들은 요왕부를 우려하는 것만큼이나 아국의 침공을 걱정하고 있고, 요왕부 또한 북직례가 혼란한 틈을 타서 산동과 하남이 움직일까 우려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모두의 불안을 잠재우고자, 아국과 산동,하남,요왕부가 함께 서로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강화조약을 맺자는 거군.”
“예. 누군가 딴 마음을 품으면, 남은 셋이 힘을 합쳐 징치하는 거죠.”
연오랑은 시원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세종과 태종은 낯선 평화협정과 강화조약이라는 단어를 입 안에서 굴려댔다.
전례 없던 조약이니 이리쿵저리쿵 시행착오를 겪긴 하겠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결코 나쁘지 않다.
‘퍽 재밌는 생각을 했구나.’라는 눈빛이 세종에게서 흘러나왔고, 연오랑은 히죽 웃으며 눈길을 받았다.
“흐음...”
동시에 태종은 뭔가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는지, 눈썹을 찌푸리며 신음을 흘렸다. 그리곤 짝! 갑자기 박수를 치더니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방금 말한 강화조약 말이다.”
“예.”
“꼭 산동, 하남연맹만 해야 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
“...?”
연오랑과 세종이 눈동자에 물음표를 그리자, 태종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정치력 만렙답게, 연오랑이 말한 강화조약에서 뭔가 중국을 옭아맬 실마리를 찾아낸 모양이다.
“중국호족연맹은 아국이 대륙본토를 노릴까 두려워한다. 호족연맹은 다른 연맹이 무력으로 자신을 도모할까 서로를 견제한다. 그러니 아국을 버팀목 삼아 평화를 구축하길 바라지 않겠느냐? 그것도 가장 위험한 아국이 먼저 나서서, 확장정책을 포기한다면 말이다.”
태종은 숨겨진 맥락을 찾아내라는 듯, 잠시 생각할 시간을 줬고...
“... 아!”
“호오?”
세종과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거 봐라? 제대로 꼼수를 부렸네?’
연오랑은 그런 생각을 하며, 의기양양하게 웃는 태종을 바라봤다.
“각 연맹을 대상으로 아국이 강화조약을 맺자는 뜻이지요?”
“옳지!”
태종은 해답을 찾아낸 게 기특하다는 듯, 가볍게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그렇게 연맹별로 각각 1대1로 아국이 조약을 맺으면 어찌되겠느냐. 아국의 힘을 두려워하는 이상, 연맹은 타 연맹을 무력으로 병합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할 것이야.”
“예.”
“그럴 겁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면, 아국이 참전할 명분을 주게 될 테니까요.”
“그렇게 아국이 구심점이 되어 평화를 유지한다면, 그 어떤 연맹도 자신의 강역 밖으로 힘을 표출하기 힘들어질 터, 허면 자연히 지금의 연맹체제가 굳어지지 않겠느냐?”
“스스로 쪼개진단 말이겠지요?”
“그렇지! 아국이 바라던 게 바로 그것 아니더냐. 저들은 아국의 침공을 겁내어 모두가 강화조약을 맺을 텐데, 그게 올가미가 되어 연맹간의 통합을 막게 되겠지. 만약 저들이 무력이 아닌 온건한 방법으로 통합을 바란다고 해도, 아국이 그걸 인정하지 않고 반대하면 그 또한 분열의 단초가 되지 않겠느냐.”
“음...”
“흐응.”
‘확실히 가능성은 있어 보이는 데?’
조선 입장에선 돈 한푼 안 들이고, 조약이라는 이름으로 옭아매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
조선이 손해 볼 게 있나.
지금도 무역은 자유롭게 하고 있고, 저들을 다시금 나라로 인정한다고 해서 상하관계를 나눠서 의례와 예법을 고칠 일도 없고, 또 조공책봉이니 뭐니 하면서 저들의 내부사정에 개입할 생각도 없지 않나.
모든 호족연맹이 수평적 위치에서 각각의 국가로 발전하게 된다면... 당연히 호족들은 자신들의 이권을 빼앗기기 싫어서라도, 지금의 형세가 굳어지길 원할 터.
이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연맹 안에서 외교,군사,정치 모든 게 각자 따로 돌아가면서 개성과 독립성이 살아날 거다. 같은 한족임에도, 다른 연맹 사람들을 다른 나라사람으로 취급하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