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3. 챕터61. 넘어가다 (7)
호족들은 자신의 권력을 더욱 굳히기 위해서 “이 땅은 우리땅. 이 땅의 지배자는 우리다. 우리 위로 누구도 올라 설 수 없어!”라며, 백성들을 선동해 분리주의 운동 비슷한 걸 펼치려 할 테니까.
이로 인해 연맹간의 사이는 자연스럽게 멀어질 거고, 칭왕자가 튀어나와 통합을 하려할 때엔 무수한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을 거다.
한족의 정체성이 “우리는 다 같은 한족!”이 아니라, “너흰 산동인, 우린 하남인!”으로 바뀌게 될 테니까.
“나아가 이번 기회에 확실히 저들의 체제를 바꿔 놓는 게, 훗날을 위해서 좋지 않겠느냐? 지금처럼 어중간하게 있는 것 보다야, 호족들 또한 우리와의 조약을 빌미로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를 원할 테니까.”
“호족들의 권력을 명시해서 확고히 한다... 옛 당나라 시절 관롱집단과 비슷하게 만들겠다는 것이지요?”
세종은 옛 이야기를 꺼내며 말을 덧붙였다.
관롱집단은 과거 당나라 이전시절에 생겨난 문벌귀족 집단을 의미했다. 대대로 관직을 세습해 노려오면서, 가문끼리 권력을 독점한 세력이지.
“그렇지. 관롱집단이라... 좋구나. 호족들의 처지와 관롱집단이 엇비슷하지 않느냐? 물론 누군가 왕이 되길 바라진 않겠지만 말이다.”
태종은 그리 말을 하고서 피식 웃고 말았다.
천명이 깨어져 천하가 다시 태어나는데. 그 해결책으로 조선은 아예 없던 나라를 만들어나 새로운 길로 나아갔다면, 중국은 조선과 반대로 과거로의 퇴행을 하고 있는 꼴이니까.
‘하긴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 아니야. 호족들은 진짜 귀족이 되기를 바라고 있으니, 과거로의 퇴행이 아니라 과거를 끌어와 발전하는 건가?’
연오랑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해하면 안되는 게, 중국호족이 정권을 잡았다고 해서 일본 다이묘마냥 땅을 쪼개서 영지를 나눠 갖은 건 아니다.
운석핵꿀밤을 맞고 명나라는 망했지만, 명나라의 지방행정조직까지 싹 날아간 건 아니니까.
물론 황제군이 쓸어가고, 황제군과 연왕부가 양쪽에서 잡아당기며 줄다리기를 해서 넝마가 된 건 맞지만... 어쨌든 그 틀이 없어진 건 아니었지.
하지만 이 틈을 노려 호족집단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올렸다.
호족들은 혼인, 금품 등으로 회유하거나, 말도 안 되는 핑계와 음모로 자진파직 시키거나, 이것도 힘들면 칼을 들고 협박해 관직을 빼앗았다.
관료들이 저항했을 법도 하지만, 중앙이 날아갔는데 중앙에서 파견한 관료가 무슨 힘과 명분이 있을까.
이런 난장판 시절이 삼십년쯤 흐르자, 지방관직은 전부 호족출신이 차지한 상태가 됐다.
여기서 조선이 등장해 한바탕 풍운을 이끌고 오니... 이른바 조차지와의 무역조약을 맺으면서, 행정조직 뒤에 숨어서 밀실정치를 하던 호족집단을 연맹이라는 양지로 끌어낸 거지.
“그리고 이번 강화조약을 활용해 호족집단을 인정하는 걸 넘어서, 저들을 대대손손 이어갈 진짜 통치세력이자 권력집단으로 만든다라...”
“그렇지.”
연오랑의 혼잣말 겸 물음에, 태종은 맞장구를 쳤고.
“기존의 행정조직 위에, 가문위원회? 호족연맹회? 상원회? 뭐 이런 걸 진짜로 만들면 되겠는데요? 이미 일인자의 관직이라 할 수 있는 포정사나, 제형안찰사, 도지휘사는 임명하지도 않고 그 밑에서만 놀고 있으니까... 권한이야 우리가 신경 안 써도, 자기들이 먼저 나서서 싹 챙겨 놓을 것 같은데요.”
연오랑이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자.
“상원회上院會라... 호족들이 좋아할 법한 말이군. 뭔가 있어 보이지 않느냐? 넌지시 일러주거나 조건을 걸면, 저들은 좋다고 받아들일 거다.”
태종은 피식 웃으며 그 중 하나를 골랐다.
그는 확실히 생각이 통통 튀는 연오랑답다고 느끼면서, ‘이상한 명칭을 잘도 만들어내는 구나.’라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확실히 나쁘지 않아. 많이 달라지겠는데?’
연오랑 또한 태종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호족연맹이 만들어지고 호족이 권력을 장악한 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호족의 권한이 법으로 명시되거나 상설조직으로 존재하는 건 아니었다.
헌데 조선이 밥상을 차려서 밀어 넣는 거니, 호족 입장에선 “아니! 저희는 명분이 없어서 이걸 못 하고 있었는데! 감사합니다!”하고 떠먹지 않을까.
행정조직 위에 가문간의 협의체가 명시적으로 존재한다면, 지금처럼 어중간한 상태가 아닌 관료와 행정조직 전체를 합법적으로 호족이 장악하게 되겠지.
강화조약보다 오히려 이걸 더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어찌 보면 집단지도체제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는데... 공산당이냐.’
연오랑은 미래 중국을 떠올리며 피식 웃다가도.
‘아니지. 오히려 의원제와 비슷해 보이는데... 쟤들은 선출직이 아니라 아예 세습직이 되길 바라는 거잖아? 저게 만들어지면 진짜 문벌귀족으로 재탄생하게 될 지도?’
생각의 흐름은 이쪽으로 흘러갔다.
물론 의원제와는 백만년쯤 거리가 먼, 그것도 왕이 없는 귀족협의체긴 하지만 어찌됐건 굴러가는 건 비슷하지 않겠나.
“뭐가 됐건, 역사에 없던 체제가 등장하면...”
“통일중국왕조가 튀어나오는 건 더욱 힘들어지지 않겠나?”
“예.”
세종은 역시나 똑똑한 머리를 굴려, 앞으로의 미래를 읽고 히죽 미소를 지었다.
중국은 땅덩어리가 커도 너무 커서, 강력한 중앙정부가 없으면 지방을 통제할 수가 없다. 당장 그 명나라라는 왕조가 있었음에도, 지방호족이 버젓이 살아 있었지 않나.
헌데 이젠 새로운 형태의 자치정부를 맛본 이들이, 과연 과거의 왕조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번 건 아예 왕조차 없는 집단합의체 인데?
귀족으로 변모할 호족들을 다 때려잡지 않는 이상, 왕조로 발전하는 건 정말 어려울 거다.
“헌데... 이게 단순히 중국을 분열시키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군. 네가 말한 그 그물을 더 촘촘하게 만들려는 것이냐?”
“흐흐.”
연오랑은 세종의 말에 실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북직례를 공격하면 한족이 우릴 경계하고 욕할 건 뻔한데, 굳이 우리가 욕을 먹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다른 욕받이를 내세워야죠. 게다가 그 욕받이가 울타리에 갇혀서 평생 나오지 못하게 만들어서, 한족을 옭아매는 철창이 되면 더 좋고요.”
“음.”
“맞는 말이야.”
연오랑의 말에 세종과 태종 모두 고개를 신나게 끄덕였다.
과거 개혁이 시작 될 때. 세종과 태종은 연오랑의 의견에 동조하며, 명확한 비전에 맞춰 움직였다.
중국통일왕조가 등장하는 걸 막고 중국을 이겨먹으려면, 어떤 대전략으로 움직여야 하는 가.
이 문제의 해답은 생각해보면 간단하면서도 어려웠다.
첫째는 나라를 갈아엎더라도 조선 자체의 체급을 끌어올려, 설령 중국통일왕조라 할지라도 쉽사리 덤벼들지 못하게 만든다.
이를 위해서 개혁이 시작됐다.
둘째는 중국을 계속 분열하게 만든다.
조선은 원정까지 가면서 중국의 칭왕자를 대신 제거했고, 호족연맹을 통해 판을 짰고, 강화조약을 체결하면 완전히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게 될 거다.
셋째가 방금 세종이 말한 포위망 구축하기.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무수한 세력들을 전부 친조선파로 만들어서, 조선과의 전쟁에 전력을 쏟지 못하게 만든다는 계획이지.
“동쪽은 아국이 있고.”
“일본을 끼워 넣는 건...?”
“굳이 그 놈들을 끼워서, 클 여지를 줄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놈들은 그냥 지금처럼 장사나 하면서 일본 내부에서만 놀게 놔두는 게 최선일 겁니다.”
“하긴... 왜구 놈의 성질이 죽었다고 해도, 그 본성이 어디가진 않을 테야.”
태종과 세종은 만담을 하며, 냉큼 머릿속에서 일본을 지워버렸다.
“맞습니다. 막부가 요새 중앙집권을 한다고 노력하곤 있지만, 그것도 슬슬 힘이 벅차고 있지 않습니까? 괜히 막부에 더 힘을 쥐어줄 필요가 없으니, 지금 이대로 유지하는 게 상책입니다.”
연오랑 또한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규슈는 꾸준히 중국, 조선과 무역을 하면서 막부의 통치에 슬쩍슬쩍 각을 세우고 있는 중. 애초에 따로 놀던 이들이 돈 맛을 봤는데, 규슈의 다이묘들이 막부의 통치를 좋아할까.
다만 싸웠다가는 중국과 조선이라는 무역상대를 잃을까봐, 서로 양보와 타협을 하고 있었다.
일본 북부 지역은 착착 조선의 영향권으로 흡수되고 있는 중이다.
안 그래도 중앙에서 밀려나 낙후되어 있던 지역이, 조선과 다이렉트로 이어져 꿀을 빨기 시작했는데 이걸 싫어할 리가 있나.
처음에는 대마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그 조선군을 두려워 한 게 사실이지만, 웃기게도 조선은 일본에 군사력을 투입할 필요도 못 느꼈고 투입할 여력도 없었다.
안 그래도 함선이 부족해 죽겠는데, 지금 판을 벌려 놓은 곳이 어디 한두군데여야 말이지.
그렇다보니 어째 시대를 한참 뛰어넘어서, 조선은 통치식민지가 아니라 경제식민지처럼 조차지와 일본을 대했다. 일본에서 사람과 광물자원, 원자재를 가져오고, 그 대가로 온갖 조선물산을 파는 걸로 말이다.
이렇게 시대에 맞지 않는 온건한, 어쩌면 무심할 정도로 장사에만 몰두하고 있으니... 조차지에 대해 부정적이던 다른 영지의 다이묘들이 “우리도 조차지 만들어주시죠!”라고 매일 같이 서신을 보내고 있었다.
막부는 막부 나름대로 열심히 다이묘들을 통제하려고 애쓰고 있었는데, 이렇게 각자 별개의 돈줄이 생긴 다이묘들이 얼마나 막부를 따를까.
이쪽도 나름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일본은 저력이 있는 건 확실하니까, 괜히 건드려서 국제사회로 편입시킬 필요가 없지. 막부에 명분만 주는 꼴이니까. 그렇다고 전쟁이 터져서 전국시대로 돌입하는 것도 곤란하고, 하나로 뭉치게 놔둘 수도 없잖아? 그냥 지금처럼 계속 빨대 꽂힌 생체저금통이 되어 있는 게 나아.’
연오랑은 이런 생각이 떠올랐고, 보나마나 세종과 태종 역시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그는 미래를 알고 이런 예측을 하지만, 세종과 태종은 지난날 왜구를 부리던 일본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남쪽의 대월과 참파. 대월의 확장이 멈추면서 참파도 슬슬 안정세로 돌아갔으니까, 대월도 여유가 있겠군.”
“예. 아국이 참파와 밀접해지면서 대월과의 사이가 애매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대월이 아국과 적대하진 못할 거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나아가 아국과의 관계는 둘째 치고, 대월이 아국보다 더 싫어하는 게 중국통일왕조일 겁니다.”
“그렇겠지.”
세종은 대월과 중국과의 옛 원한을 떠올리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이 망하면서 대월과 붙어 있는 광서의 월족 등의 소수민족은 중국보다 대월을 더 지지했다. 당연히 원래 역사보다 대월의 영향력이 훨씬 강력하니, 중국을 더욱 견제하는 건 당연한 말.
나아가 조선이 확 눈깔이 돌아서 해군을 동원하면, 대월의 수도와 해안도시는 다 박살나지 않나. 당연히 조선과 척을 치면 안 되지.
참파의 경우에는 완전히 조선으로 붙었다.
안 그래도 대월에 밀리던 놈들에게 조선이라는 뒷배가 생겼는데, 이걸 거부할 리가 있나.
조선이 팔아치운 강철 맛을 한번 보더니 아예 눈이 뒤집혀선 “대월과 싸우게 강철 좀 주세요!”라고, 남주도에 와서 매일같이 애걸하고 있었다.
다만 조선보다 더 거지인 참파가 대금으로 지불할 게 뭐 있겠나. 남는 건 땅 밖에 없는 터라, 현항(다낭)과 성항(깜라인) 조차지는 계속해서 커져만 가고 있었다.
여기서 커피와 향신료 등을 직접 재배할 수 있는 조선으로서는, 이게 결코 나쁜 상황이 아니었고 말이다.
“서쪽의 사천, 대리, 섬서몽골. 모두 아국의 동맹은 아니지만...”
“적어도 중국통일왕조에 냉큼 손을 잡아줄 세력은 아니죠. 게다가 아국과 손을 끊으면 손해를 막심하게 보게 될 텐데, 쉽게 손을 끊겠습니까?”
“아국을 대신해 더 큰 이득을 줄 수 있는 세력은 중국내륙의 호족연맹인데, 그 치들이야 말로 어쩌면 적대세력이니까?”
“사천과 대리는 적대세력까진 아니더라도, 서로 합쳐질 세력은 결코 아닐 겁니다.”
연오랑의 단언에, 세종 또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대리는 조선과 나름 긴밀한 관계가 형성되고 있었다.
대리는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길 누구보다 바라는 나라. 백족이 다스리는 대리는 내부의 한족 영향력을 줄이고 싶어 하니, 당연히 내륙호족연맹과 손을 잡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나아가 중국내륙으로 영역을 넓히지 못한다면, 나아갈 길은 남쪽 밖에 없는 바. 그들은 조선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지금까지도, 동남아시아의 인도차이나 반도를 향해 슬금슬금 남하하고 있었지.
동시에 대월의 확장을 은근슬쩍 눈치를 주면서도, 또 홍강을 함께 사용하면서 친분을 다지고 있는 중.
하여간 대월과 대리는 적보다는 친구와 가까운 사이고, 둘 다 조선과 친해지길 바라고 있었다.
사천의 경우에는 한중의 오이라트를 막느라 정신이 없는데, 이들이 바라던 무기. 화포를 제공해 준 게 바로 조선이다.
그 이후로도 사천의 상인들이 대리를 넘어와 남주도로 오곤 했으니, 이들 또한 조선과 밀접해지길 바라고 있었다.
내륙호족과 나름 거래하고 있기는 한데, 그러려면 지랄 맞은 협곡과 지랄 맞은 물살로 유명한 삼문협을 지나가야 하는 바. 생각만큼 쉽게 대규모 거래가 이뤄지는 건 아니었지.
나아가 정치적으론 사천은 따로 놀 길 좋아하니, 중국통일왕조와 하나가 되는 걸 결코 바라지 않을 거다.
더불어 그 삼문협을 통과해야하니 사천이 내륙을, 내륙이 사천을 무력으로 노리는 것도 힘들고 말이다.
이렇기에 대리,사천과 조선과의 관계는 원교근공이라는 말의 찰떡 같은 예시라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