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7. 챕터61. 넘어가다 (11)
“지금의 추세가 꺾일 일은 없어 보이니, 조차지의 번영은 계속 될 게 분명한데... 아직 한참 멀었지만, 끝이 다가오면 어떻게 될지 다들 불안할 겁니다.”
“...?”
“아국이 쉽게 조차지를 포기할 거라고는 저들도 생각하지 않을 터. 허면 남는 건 충돌인데... 전쟁을 각오하고 싶겠습니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할 거면, 차라리 지금 기회에 확실히 해두는 걸 저들 또한 바랄지도 모릅니다.”
“조차지를 넘기는 것과 상원회를 만들어 호족이 명실상부하게 지배층이 되는 것. 이 둘을 놓고 보면 당연히 후자에 무게가 실리겠죠?”
연오랑이 옆에서 살살 약을 치자, 세종과 태종 모두 긍정의 미소를 지었다.
땅이 넘쳐나는 중국호족이, 한줌도 안 되는 조차지 때문에 조선과 목숨 걸고 싸우겠는가. 조선의 제안과 인정을 받아 상원회가 만들어지면, 이제 중국땅이 전부 자기 땅이 될 판국 아닌가.
소탐대실도 이런 소탐대실이 없을 거다.
“호족은 그럼 됐고... 한족 백성들의 민심이 문제인데.”
“조차지에서 올라오는 보고에 따르면 민심도 나쁘지 않습니다. 각 조차지의 상황에 따라서 오히려 조차지를 넘기는 걸 더 좋아하는 곳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세종은 가볍게 지난날 올라온 보고서의 내용을 풀었다.
조차지는 건설될 때부터, 중국도시의 빈민층을 끌어 모아 완성됐다. 거지떼 골칫거리가 사라진 것만으로도 호족들이 좋아했는데, 그 거지떼 당사자는 오죽하겠나.
다들 조차지 인근에 살면서 “조선 없으면 우리 다 굶어죽는다!”라며 빌붙어서 살고 있었다.
다른 도시의 백성들도 빈민들이 사라졌으니 반응은 당연히 나쁘지 않았고, 그 세월이 십년 가까이 지나지 않았나.
조차지라는 생경한 방법으로 땅을 임대했다고 받아들이기 보다는, 그냥 “조선땅이구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남부지역 조치지의 경우에는 오히려 조차지가 도시 안정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했습니다. 동부해안도시는 일찌감치 호족들의 판세가 정리되었지만, 남부해안도시는 한족과 이족, 회회인들이 섞여서 조금 복잡하니까요.”
“아국의 연대병이 조차지에 주둔함으로서, 호족끼리 무력으로 충돌하는 걸 미연에 방지하고 있다는 거군.”
“예. 또한 아국이 남부해안도시를 위협하던 해적들을 정리했는데, 그걸 모르는 중국 백성들이 있겠습니까? 아국이 해적의 발호를 막아준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 아예 본격적으로 눌러 앉는 걸 좋아할 지도 모릅니다. 남부지역은 이족이 많아 한족만큼 중화사상에 빠져 있는 건 아니니까요.”
“음.”
태종은 충분히 이해가 되어,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광서, 광동, 복건은 유혈사태까진 가지 않더라도 정세가 혼란한 감이 없지 않아 있고, 호족들이 그렇게 시끄러우면 백성들 입장에서도 불안하기 마련.
조선의 조차지가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는 게, 오히려 안정감을 느끼게 해줄지도 모른다.
심지어 호족들 사이에서도, 서로 믿기 힘든 곳에서 만나기 보다는 모두에게 안전한 조선조차지에서 만나는 게 속편하고 안전하지 않나.
남부에선 조차지가 어째 의도치 않게 만남의 장소가 되었고, 그에 맞춰 무역은행에 예치되는 액수가 덩달아 늘어가고 있었다.
“그 외에 조차지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는 조차지가 있는 줄도 모르는 한족 백성이 태반이니, 딱히 문제는 없을 겁니다.”
“더불어 땅을 완전히 팔아치운 건 중국호족 아닙니까. 땅을 판 사람이 욕을 먹어야지, 산 사람이 욕을 먹진 않겠죠. 만약 아국이 강압적으로 빼앗았다는 명분을 내밀면, 그 땅을 빼앗긴 호족이 오히려 욕을 먹지 않겠습니까?”
“...”
연오랑이 실실 웃자, 태종 또한 피식 웃고 말았다.
뭘 선택해도 결국 호족이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외통수다.
“우리가 조용히 입 다물고 은근슬쩍 넘어가면, 중국호족들이 알아서 민심을 다독일 겁니다. 아예 말을 안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지금도 빌려 준 거, 계속 빌려줬다고 한족 백성들이 생각하게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있죠.”
“그렇게 십년, 이십년쯤 지나면, 중국 백성들은 조차지가 자연스럽게 조선땅이라고 인식하게 될 거고 말이지.”
“넵.”
“...”
‘아직도 부족한가?’
연오랑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 태종을 보며, ‘여기서 뭘 더 뽑아 먹으려고 하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결국 또 입을 열고 말았다.
당연히 이어지는 수순이건만, 그걸 꼭 직접 귀로 듣고 싶은 모양이다.
“이렇듯 남방정책을 통해 아국이 바다로 나아가면, 자연스럽게 해군력 또한 강해질 겁니다. 범선이 민간으로 흘러가면 자연히 배를 다룰 줄 아는 선원이 늘어날 텐데, 신형무역선이나 전함이나 다루는 방법은 똑같지 않습니까? 또 제해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해군력을 증강해야겠지요.”
“그렇겠지.”
“먼 훗날. 만약 중국통일왕조가 들어선다면, 아국의 강력한 해군력은 중국의 두툼한 뱃살을 찌를 수 있는 치명적인 비수가 될 겁니다.”
“...?”
중국통일왕조와 군사력을 이야기해서 그런지, 태종은 눈빛을 반짝이며 관심을 숨기지 않았다.
“만약 중국통일왕조가 등장해 아국을 노린다고 치면, 그들이 할 수 있는 게 뻔하지 않습니까. 요서회랑을 통과해야하니, 일단 북직례를 차지한 요왕부와 한판 해야 할 겁니다.”
“그야 당연한 말.”
이런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샌드백 삼아서 북직례를 요왕부에게 넘겨준 거니까.
“만약 북직례마저 중국통일왕조가 집어삼킨다면, 아국은 요서회랑에 요새를 빼곡히 심어서 방어해야겠지요. 옛 수,당나라처럼 백만대군을 동원하든 뭘 하든, 화포로 무장한 아국의 요새를 쉽사리 뚫고 올 수 있겠습니까.”
“...”
끄덕끄덕. 태종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려고 요서회랑을 직접 차지하고, 또 산해관을 완전히 박살내기로 작전을 짰으니까.
“요서회랑을 뚫지 못한다면 몽골초원을 지나 흥안령을 넘어오는 방법 밖에 없는데, 그러면 또 몽골남부연맹과 아다이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렇지.”
스무고개를 하듯 말하는 연오랑을 보며, 태종은 또 다시 탄성을 흘렸다.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는 초원에서 기병으로 무장한 몽골군과 대판 싸우려면, 중국통일왕조 또한 피똥을 싸며 덤벼들어야 할 거다.
당연히 뒤에선 조선이 몽골남부연맹과 아다이를 지원해 줄 생각이고 말이다.
원래 역사에서 그 대단한 영락제는 수십만명을 동원해 막북원정을 수차례 감행했고, 대충 성공하긴 했다.
허나 승리의 뽕맛에 취해 말을 안 해서 그렇지, 후유증과 뒷수습으로 명나라가 휘청거렸지 않나.
힘 다 빠진 북원잔당을 상대하는데 그 정도라면, 조선의 지원을 받는 몽골남부연맹과 아다이는 오히려 원정군을 상대로 승리할 지도 모른다.
“이렇게 육로를 통해 침공하는 게 힘들다면, 결국 바다로 나와야 하는데... 해전이야 말로 중국이 자랑하는 머릿수 싸움이 안 통하는 전장 아닙니까.”
“그러하다.”
드디어 마음에 들기 시작했는지, 짝! 태종은 가볍게 박수를 치며 답을 했다.
원래 역사에서 정화대원정을 추진하면서, 엄청난 수의 함대를 만들었지만... 이 또한 그 후폭풍에, 나라의 재정이 바짝 말라 휘청거렸었다.
허나 지금 역사에선 중국통일왕조가 등장해도 명나라만 못할 텐데, 과연 그런 대함대를 만들 수 있을까.
배를 만드는 데 한두푼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원래 역사와 달리 범선 전함이 등장한 이상 그와 비슷한 체급을 가진 전함이 있어야 싸울 수 있다.
백만대군이 있다고 한들, 그 병력을 전부 배에 태우는 건 불가능하니, 머릿수의 우위를 기술력과 숙련도로 대체할 수 있는 게 해전인 거지.
결국 보다 크고 빠른 전함, 보다 많은 화포를 실은 전함이 우위를 차지할 텐데... 이건 중국보다 조선이 한참 앞서나가지 않겠나.
‘중국이 언제 해전에서 승리한 적이 있기나 한가?’
연오랑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비웃어줬다.
사람과 땅이 넘쳐나는 중국이니, 이들은 “뭐 하러 나가서 싸워?”라며, 그냥 시원하게 줄 거 내주고 내륙으로 끌어들여서 싸우는 걸 선호했다.
돈이 덜 들기도 하고, 미흡한 숙련도를 가릴 수 있으니까.
물론 바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파양호와 같은 거대한 호수에서 수전을 벌이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와는 비교할 수 없지.
“그렇게 아국이 중국해안도시를 초토화시키고 다니면, 제 아무리 중국통일왕조라고 해도 버틸 수 있겠습니까? 육상에서 요서회랑과 몽골초원을 뚫지 못해 붙잡혀 있는 동안 후방이 초토화되면, 자연히 내륙 깊숙한 곳에선 버티지 못하고 반란이 터질 겁니다.”
“지금껏 중국통일왕조가 숫하게 겪었던 일이니까 말이지.”
“예. 중국은 쓸데없이 너무 커서, 어느 한곳에서 피를 흘리기 시작하면 분명히 반대쪽에선 들고 일어날 겁니다.”
“음.”
태종이 확실히 넘어오자, 연오랑은 쐐기를 박았다.
“아국이 만들어 놓은 평화는 앞으로 수십, 수백년을 이어가게 될 겁니다. 이렇듯 평화의 시대에 접어들게 되면 자연스레 군비축소를 말하고, 군부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겠지요.”
“그렇겠지.”
이건 역사 이래로 누누이 있어왔던 일이고, 미래에도 마찬가지다. 전쟁도 안 나니 군비를 다른 곳에 쓰자는 주장은 당연히 나오기 마련.
“허나 미래를 위해서라도 비수는 꾸준히 갈고 닦아 예기를 유지해야 하니, 아국은 남방정책을 통해 계속 바다로 나가서 해군력 증강과 전함의 발전을 자연스레 이끌어 내야하지 않겠습니까?”
“...”
“큭.”
연오랑은 “당연한 이치죠?”라고 말하듯 어깨를 으쓱거렸고, 세종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역시나 이번에도 나라를 판돈으로 걸고 도박판에 뛰어드는 구나.’
세종의 머릿속에,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
지금까지도 계속 그래왔는데, 이번에는 수십, 수백년의 미래를 걸고 판돈을 올렸다.
녀석의 말대로 해군력 증강과 남방정책은 한두푼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문제는 중국통일왕조라는 불안감을 계속 불어넣는다면, 결코 군비를 축소시킬 수 없다. 허면 그 불어난 군비를 맞추기 위해서라도 조선의 덩치가 성장해야할 것 아닌가.
무턱대고 군비만 올렸다간, 나라가 제풀에 지쳐 고꾸라질 테니까.
어떻게든 군비를 뽑아내기 위해 남방으로 나가 뭐든 돈이 될 만한 물산을 찾아내야 할 거고, 설령 그게 힘들면 땅이라도 넓혀서 군량이라도 확보해야 할 거다.
남방정책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조선은 “멈추면 덩치에 깔려 죽는다!”라는 위기감을 가지고, 아득바득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거지.
그렇다고 남방정책에서 손을 뗀다? 지금도 남방을 통해 엄청난 수익을 얻고 있는데, 앞으로 그 수익이 늘어나면 늘었지 줄어들 진 않을 거다.
또한 민간기업이 남방으로 진출하면 할수록 엮이는 사람이 많아져, 포기하고 싶어도 이해관계가 얽혀 포기할 수 없게 될 게 분명.
한번 발을 디딘 이상 빠져나올 수 없고, 호랑이 등에 올라탄 꼴이 될 텐데... 과연 이게 어디까지 가게 될지, 세종조차도 예상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이게 과연 나쁜가?’
스스로 되물어보지만 결코 그렇지 않으니, 헛웃음이 절로 나올 수밖에.
이미 중국을 이겨먹겠다고 나라를 뒤엎었고 지금도 계속 그러고 있는데, 미래라고 딱히 달라질 필요가 있겠나.
해전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결국 더 좋은 전함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거고, 자연스레 기술의 발전 또한 이끌어 내게 될 것이며, 이건 곧 조선을 살찌우게 될 거다.
‘나쁘지 않아. 나쁘지가.’
세종은 다시금 속으로 피식 웃으며, 속마음을 넌지시 흘렸다.
“내 예측이 맞느냐?”
“헤헤.”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연오랑은 나이값도 못하고 실없이 웃으며 뒤통수만 긁어댔다.
*****
시간을 다시 되돌려 현재.
심양을 함락시킨 육군 4개 사단. 20개 연대는 연오랑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고.
요양에는 태종을 필두로 한성에서 보낸 관료들이 요동과 요서의 통치를 시작하고.
광녕성의 요동군과 함께 서쪽으로 나아간 육군은 산해관을 향해 맹렬하게 포격을 이어가고.
요동반도 금주에선 산동과 하남으로 떠날 요동호족을 끊임없이 삼켜, 중국본토에 떨구고 있을 때.
어중간하게 붕 떠 있던 이들이 있었다.
바로 금주에 주둔하고 있던 요동수군들.
조선은 물에 밥 말아먹듯 순식간에 요동 전역을 공략해 후르륵 빨아먹었고, 전쟁은 채 한달도 지나지 않아 끝이 났다. 사실상 심양과 요양 포위전이 전쟁 중 절반을 까먹었으니, 진짜로 피와 살이 튀기는 싸움은 얼마 벌어지지도 않았지.
요동수군도 그러했다.
다른 누구보다도 조선전함의 위용에 대해서 잘 아는 게 요동수군 아닌가.
조선해군은 요동수군이 상대하지 못했던 천진수군을 박살냈고, 그 후로도 꾸준히 발해만을 비집고 들어와 순시를 하곤 했었다.
요동정벌이 시작되기 전에는 산해관을 두들겨 패러 간다는 명분으로, 요동반도 해안가에 바짝 붙어서 항해하며 해안을 측량했지.
조선해군이 이렇게 움직이면, 당연히 요동수군 또한 조선해군을 살펴보기 마련.
그리고 내린 결론은 “싸우면 우리가 무조건 지겠구나. 우린 전투전용 함선도 없고, 배에 실을 화포도 얼마 없잖아?”라는 것이었지.
조선해군에 대항해 발악하듯 수군을 증강시킬 수도 있지만, 누구 좋으라고 그런 짓을 하겠나? 요동군의 핵심인 광녕성주조차 군벌이 될까 두려워서 계속 갈아치웠는데, 요동의 목줄이라고 할 수 있는 요동수군을 강화하는 건 정치역학의 문제에 물려 계속 흐지부지 되고 말았지.
그 결과. 조선해군이 요동정벌을 시작하자, 대다수의 요동수군은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그대로 항복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지금.
“조심조심. 천천해 내려!”
“거기! 기울어진다! 밧줄 더 당겨!”
“오른쪽! 오른쪽으로 좀 더!”
요동수병들은 “대체 저건 뭔가?”라는 눈빛을 숨기지 못하고, 난장판이 된 부두를 구경하고 있었다. 물론 눈은 딴 곳을 보지만, 손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