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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소드 마스터-508화 (508/538)

508. 챕터62. 유인하다 (1)

“여기에 놓으면 됩니까?”

“어. 빨리빨리 삽으로 퍼서 섞어라.”

“예.”

어설픈 한어가 들려왔건만, 다들 냉큼 알아듣고서 천으로 대충 코와 입을 막고서 석회와 모래, 자갈을 계속 섞어댔다.

“신기하군.”

“신기한 게 아니라 놀라운 거지. 저렇게 빨리 부두가 만들어질 줄이야.”

“이걸로 확실해 졌네. 조선에게 요동은 그냥 밟고 지나갈 발받침에 지나지 않았어.”

조선에서 금주로 들어갈 수 있는 가장 첫 번째 요새를 활짝 연 이들.

요동군 백호장이자 산동호족의 방계 집안 출신인 이혁, 산고방, 장소홍은 무섭도록 확장되고 있는 부두를 보며 중얼거렸다.

부두는 개판이 되어 있었는데 한쪽에선 본토로 떠나는 이주민들이 배에 올라타고 있었고, 반대쪽에선 조선에 자재를 싣고 온 조선함선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리곤 순식간에 박살난 금주요새의 파편과 바윗돌들을 바다에 쑤셔 넣고 그 위에 삼물회를 부어 석회부두를 만들고 있었다.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도, 요동수군이 부리던 부두에서 족히 3배는 확장된 상태였지.

그렇게 휙휙 바뀌어 가는 부두의 모습이 꼭 자신들의 처지 같아 보여, 뭔가 묘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그나저나...”

“...?”

“이제 어찌할 셈인가?”

이혁의 물음에, 둘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처지가 바뀌어도 너무 바뀌어서, 당최 어떤 게 최선이고 최고의 선택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 그 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가문 또한 그러했다.

“자네는?”

“나는 가문에서 나와 장사나 해볼까 생각 중일세.”

“...?”

둘도 이런 생각을 안해 본 건 아니지만, 이혁이 벌써 마음을 정했다는 것에 놀라 눈이 커지고 말았다.

“뭘 그렇게 놀라나. 어차피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나?”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말일세.”

“큭. 더 고민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나. 우리 예상보다 조선이 훨씬 강했고, 산동의 본가는 큰소리 뻥뻥 친 것 치고는 영 힘을 못 쓰는 것 같더군. 그치들은 조선을 도와 요동을 칠 것처럼 말은 잔뜩 해놓고선, 요동에 발이나 디뎌봤나? 오히려 빼느라 바쁘지.”

이혁은 쓴웃음을 숨기지 않고서, 저기 서서히 멀어져 가는 무수한 함선을 가리켰다.

산동의 본가를 비롯해 산동호족들은 요동호족을 산동으로 실어 나르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고, 심지어 그 이주비용을 요동호족에게서 뜯어내고 있었다.

“그러니 이리저리 재봐야 남들에게 뒤쳐질 뿐이지. 안 그런가? 그나마 우린 싸우지 않고 빨리 항복한 탓에 조선군이 좋게 봐주고 있으니, 이런 호감이 사라지기 전에 얼른 기회를 잡아야지.”

“그렇군. 허면 어떻게 하려고?”

“그야 북으로 가야지. 비단길 무역에 한발 담가야 하지 않겠나? 흥주라고 하던가? 복여위의 몽골인들과 함께 신도시를 짓는다고 하더군. 지금 끼어들면 한몫 단단히 챙길 수 있을 걸세.”

“으음... 복여위라.”

“쩝. 그놈들이 그렇게 쉽게 항복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복여위가 잘나갔던 것도 다 옛말 아닌가.”

장소홍의 빈정거림에, 둘은 피식 웃고 말았다.

하루아침에 처지가 바뀐 요동을 보는 것도 놀랍지만, 그보다 더 놀란 건 복여위가 칼 한번 휘두르지 않고 그대로 조선에 귀부했다는 점이었다.

이게 심양과 요양을 빨리 항복시키기 위해 퍼트리는 헛소문인가 했는데... 진짜로 복여위의 수장 야치부르가 요양에 머무는 태종에게 와 고개를 조아리는 게 아닌가.

물론 이 셋은 그걸 직접 보진 못했지만, 그 대신 북쪽에서 끝도 없이 밀려든 몽골인들이 금주, 복주를 지나 조선 도시로 지나쳐 가는 걸 직접 봤다.

딱 봐도 몽골인처럼 보이는 무리가 수십, 수백두의 말과 가축을 몰고 가는 걸 봤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지.

“흥주라...”

“요동이 끝장난 이상 비단길 무역은 완전히 조선이 차지할 거고, 산동의 본가가 아무리 애걸해봐야 조선이 꿈쩍이나 하겠나? 그럴 바엔 차라리 나와 우리 집안이 오히려 힘을 키워서, 산동 본가에 떵떵거릴 수 있게 되겠지.”

이혁은 히죽 웃으며 장밋빛 미래를 읊었고, 둘 또한 히죽 미소가 번졌다.

요동가문이 산동의 방계라지만 막말로 산동의 밑에 있었던 건 아니지 않나. 이제 슬슬 입장이 뒤집혀 바뀌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리고 지난날 본가가 거들먹거리던 떠올리면, 충분히 약올릴 의향이 있었고 말이다.

“다만... 조선에서 가업을 일구는 게 생각만큼 쉽 진 않을 걸세. 자네들도 들었지? 용가가 괜히 어깃장을 부리다가 조선군에게 박살이 난 거 말이야. 그들 외에도 요서와 요동 북부에서 피바람이 불었다더군.”

“들었네.”

산고방의 말에 이혁과 장소홍은 살짝 얼굴이 굳어졌다.

다시 생각해봐도 조선군에 일찍 항복한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들도 익히 들었던 바.

자기 잘난 맛에 살던 요양파, 심양파 호족 중에서 살아남은 집안을 꼽는 게 죽은 집안을 꼽는 것보다 쉬웠을 정도니까.

“죽어야 할 심양과 요양의 건방진 놈들은 저렇게 꽁무니를 말고 도망가는데, 변방의 집안들만 작살이 났지 않나.”

“사실 그놈들도 죽어도 싼 놈들 아닌가? 그간 우리한테 했던 짓을 떠올려 보게.”

이혁은 으드득 이를 갈았고, 둘 또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요동호족들 간의 파벌 싸움은 수십년간 이어왔으니... 자신들을 깔아뭉개던 이들이 지리멸절한 건,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쳐도 무방한 일이니까.

“다만 아까 말했듯, 기업법이라는 게 상당히 까다롭더군. 용가가 괜히 작살난 게 아니야.”

“분할 말이지? 하지만 그것도 나름 기회가 되지 않겠나?”

“모든 집안이 다 반기는 건 아니라서 그렇지.”

“음...”

자고로 호족이라 함은 집성촌에 모여 살거나, 따로 살더라도 근처에 머물면서 가주를 중심으로 위계질서를 갖춰 사는 게 일반적이었다.

헌데 조선의 무역도시에서 만난 기업집안들은 요동호족이 보기엔 집안이라고 부르기도 뭐할 정도로 작았다. 그땐 “뭐지? 벼락부자인가?”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라 조정에서 강제로 그렇게 만들었던 것.

직계를 제외하고는 사촌, 육촌들을 전부 찢어서, 각각의 개별적인 집안으로 분리해야 했던 거다.

“다른 집안이야 시끄럽든 말든 나와 무슨 상관인가. 내 가문은 시원하게 사업을 나눠가졌고, 나도 이제 어엿한 가주가 됐단 말이지.”

이혁은 시원하게 웃어댔지만, 장소홍과 산고방은 슬쩍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들의 집안은 친척들끼리 꽤나 시끄러웠으니까.

“뭐... 자네가 알아서 하겠지만, 조선조정이 꽤나 깐깐하니 조심해야 할 걸세. 조가가 치도곤을 당한 건 들었지?”

“암. 그 멍청한 놈들은 눈치를 보고 움직였어야지. 왜 그렇게 급하게 날뛰었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이혁은 과거 경쟁자였던 조가가 망신당한 걸 떠올리며, 실컷 비웃어줬다.

요동반도의 많은 가문처럼 조가 또한 조선군이 들이닥치자, 사병 및 부하들을 이끌던 조씨 지휘관이 냉큼 항복해버렸다.

문제는 조가에선 “싸우지 않고 항복했으니, 챙겨주겠지?”라고 생각하고서, 조선관원에게 접근해 이권을 달라고 노골적으로 굴었던 것.

요동에서 산동으로 넘어가는 이주 운송의 입찰에서, 자기 집안을 더 챙겨달라고 말이다.

그 결과. 요동호족들의 혹시나 하는 기대를 무참히 깨버리듯, 조선은 조가를 사정없이 짓밟고 가산을 정리해 요동에서 쫒아 내버렸다.

고작? 저런 청탁으로 조선이 이렇게 과격하게 나올 줄은 또 몰라서, 한동안 다들 사리냐고 정신없었지.

“하지만 또 우리처럼 조용히 있으면서 조선조정의 시책을 따르는 이들은 그냥 놔둔단 말이지.”

“조선관원들이 뇌물이 안 먹히는 건 익히 들었지 않나. 이젠 시대가 바뀐 걸 알아야지.”

“그래도 빡빡해도 너무 빡빡한 것 아닌가.”

“글쎄...”

셋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뇌물과 꽌시로 대표되는 인맥은 요동에서도 그대로 적용됐지만, 앞으론 이게 절대 불가능해졌으니까.

여수구죄법으로 인해 중국상인, 조선관원 가리지 않고 목을 날려 온 세월이 십여년이 넘었다.

요동상인 또한 이걸 모를 리가 없었는데... 어째 외국상인을 대하는 것보다 조선상인을 대하는 태도가 더 까다로웠다. 요동에서 조선으로 적을 옮긴 게 더 빡셀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뇌물과 인맥이 안 통하는 게, 꼭 나쁜 건 아니지 않나?”

“그야 그렇지만...”

“지금은 좋지만, 앞으로가 힘들어지겠지.”

다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헷갈릴 정도로 묘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빠른 일처리와 좋은 일감을 따내기 위해서 뇌물과 인맥을 동원하는 건, 이 시대의 거래생리상 당연한 이야기였다. 조선만 유독 깐깐하게 구는 거였지.

허나 “이게 과연 나쁜가?” 라고 묻는다면, 답하기 애매했다.

조선에 넙죽 항복한 이들은 요양파, 심양파에 밀려있던 군소가문들. 이들은 뇌물과 인맥을 통해 이득을 얻은 경우보다, 오히려 반대세력에게 밀려 일감을 잃어본 기억이 더 많으니까.

앞으론 그럴 일이 없을 거라는 게, 오히려 기분 좋은 일이지.

또한 요동출신이 조선인이 되었으면, 이제 경쟁상대는 다른 조선인이 될 텐데... 차라리 신분을 가리지 않고 전부다 깐깐하게 구는 게 오히려 이득 아니겠나.

이제부턴 진짜로 실력 싸움을 해야 하는 시대가 찾아오지 않을까.

“다만...?”

“그 어사부라는 감찰기관이 무서워서 그런 것도 있지만, 뭐랄까...”

장사를 하기로 마음먹은 이혁은 이미 조선관원을 만나봤기에, 둘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뭔가?”

“그보다는 우리뿐만 아니라, 조선기업집안조차도 아래로 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말이야.”

“...?”

“감히 어디 조정의 일에 이래라저래라 하냐. 라는 느낌이랄까? 뇌물을 받았다가 걸리는 걸 두려워하는 정도가 아니었네. 오히려 무시하는 느낌에 가까웠지.”

“흐음...”

“그래서 가문에게 이권을 허락하지 않은 건가...”

“그럴지도.”

꼭 이혁이 콕 집어서 말해서가 아니라, 다들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지 금세 납득했다.

싸우지 않고 항복하고 오히려 싸우려는 이들까지도 말려서 항복시켰으면, 요동호족들에게 조선이 뭔가 보답을 해주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허나 조선은 요동호족들에게 이권을 주는 대신, 무식하게 그냥 돈을 줘버렸다. 진짜로 금화와 은화를 줘버린 거지.

“생각해보면 어차피 우리가 조선에 속한다고 해서 지금까지의 사업을 안 할 것도 아니고, 조정이 거래를 금지할 것도 아니지 않나? 그러면 그냥 우리에게 이권을 조금 더 챙겨주는 게, 직접 돈을 주는 것보다 지출이 적게 들지 않겠나? 항복한 가문이 어디 한두군데도 아니고 말이야.”

“그야 그렇지.”

“그런데도 굳이 돈으로 해결한 걸 보면, 뭔가 의도가 있는 것 같지 않나? 특히나 나의 경우를 봐서도 그렇고 말이야.”

“흐음.”

“음.”

이혁의 말에 둘은 머리를 굴려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혁은 이가에서도 밀려서 요동군부로 투신할 정도로 입지가 크지 않았다.

이가가 분할한다고 한들 뭐 얼마나 받아낼 수 있겠으며, 사업체를 분할 받았다고 해서 그게 당장 현금이자 투자금이 되는 것도 아니지 않나.

허나 조선이 뿌린 돈이, 그걸 가능케 했다.

“자네 생각에는, 조선이 가문 분할을 빠르고 조용히 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투자금을 쥐어준 거라고 보는가?”

“아무래도 그런 의도도 있어 보이네.”

“경고의 의미도 있겠지? 조선은 요동군부와 다르다고 말이야.”

“그것도 있을 거고...”

이혁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휙 돌려, 저기 부두 밖에 지어지고 있는 거대한 부지를 가리켰다.

조선이 진출한지 뭐 얼마나 됐다고, 부두 안쪽 구석을 아예 싹 밀어버리고선 거대한 담장이 세워지고 있었다. 그 담장 위로 삐져나올 정도로 거대한 벽돌건물의 뼈대가 올라가고 있었고.

"저거 뭔지 알지?"

“은행...”

“맞아. 아무래도 조선은 우리 가문들의 자금을 전부 저 은행이라는 전장에 넣기를 바라는 것 같아. 당장 내가 받은 돈도 저 은행에 들어갈 테니까.”

“으...”

“끄응. 저거 믿을 수 있겠지?”

“왕실의 이름을 걸고 하는 건데, 문제가 생길 리가 있겠나? 전장을 상대 안 해본 것도 아니고.”

장소홍의 우는 소리에, 이혁은 피식 웃으며 우려를 떨쳐 보냈다.

의주 무역항에서 무역은행과 거래를 안 해본 것도 아닌데, 은행을 못 믿어서야 되겠나. 오히려 앞으론 자신들도 조선인이니, 은행을 활용하는 게 더욱 쉬워질 거다.

“자.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고. 자네들은 어떻게 할 건가?”

“나도 새롭게 기업을 만들어 볼까 하네. 다만 장사는 안하고, 그... 뭐더라? 수산기업을 만들어 볼까 하네.”

“물고기를 잡을 거란 말이지?”

“그렇지.”

장소홍은 히죽 웃으며, 자신의 계획을 털어놨다.

조선군이 금주를 휩쓸기 무섭게,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조선의 기업들이 몰려왔다. 그 중 가장 덩치가 컸던 건 조선기업들.

그들은 금주의 선소를 가지고 있는 가문과 벌써부터 합작을 준비하고 있었고, 또 선소를 가진 가문은 장인을 교육시키기 위해 의주로 유학을 보내려고 준비하는 등. 나름 복작복작했지.

“자네들도 조선에서 넘어오는 절인생선을 보지 않았나. 이곳에서도 염전이 만들어질 지는 지켜봐야겠지만, 조선의 소금값은 헐값이나 다름없으니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보네.”

“절인생선이라...”

이들 또한 조선에 널리 퍼진 소문을 듣고 먹어본 적이 있는 터라, 냉큼 고개가 끄덕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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