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0. 챕터62. 유인하다 (3)
“이것도 중요한 일이니, 공을 세우지 못한다고 실망하지 말게.”
“예.”
“자네도 해군에 들어오려고 이렇게 자원한 거지?”
“그렇습니다.”
산고방이 눈빛을 번뜩이자, 중대장은 곰가죽으로 된 가죽투구를 들어 올리며 히죽 웃었다.
“앞으로 훈련을 받으면서 배우겠지만, 아국은 명령을 어기고 쓸데없이 공훈에 목메는 걸 좋아하지 않아. 적군 하나 더 죽인다고, 주 전장에 속했다고 해서 공훈이 늘어나는 게 아니라는 거지.”
“...”
“뭐. 요동군과 다르니 바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겠지만, 공훈에 목을 매고 무리를 했다가는 자네 목만 날아가는 걸로 끝나지 않을 걸세.”
“명심하겠습니다.”
잔소리처럼 들리는 말이지만, 산고방은 귀에 꼭꼭 새겼다.
이윽고 어스름한 아침햇살과 함께 어촌마을의 형상이 아른 거리고, 요동수병들은 기합을 맞춰가며 열심히 노를 저어댔다.
쿠쿵... 부두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작은 나루터에 군선이 옆구리를 비벼댔고,
“이랴!”
히힝! 중대장이 먼저 갑판을 올라 부두로 넘어가자, 꽉꽉 차 있던 연대기병들이 줄줄이 부두를 넘어 마을로 달려갔다.
“포위부터 한다. 1소대 앞으로.”
“옙!”
1소대장이 이끄는 20기의 기병이 먼저 튀어나가 마을 외곽을 돌며 감싸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먼지구름이 일어나 마을을 흔들자,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려던 마을주민의 졸음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1소대가 마을을 지나쳐 후방으로 돌아가기 무섭게, 2소대, 3소대가 줄줄이 부두를 건너 마을로 접근했고, 그때쯤엔 이미 마을 사람들이 전부 깨서 어찌할 바를 몰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여긴 큰 가문이 없나보군?”
“지역 유지도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자네들 때문에?”
산고방은 중대장의 물음에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요동수군이 북직례 해안가를 마구 약탈하지 않았나. 그렇다보니 재산이 좀 있는 지반은 해안가를 떠나 북직례 내륙으로 자리를 옮겼다.
애초에 그 정도 재산이 있으니까 지역 유지 행세를 했던 거고, 그러지 못한 이들은 계속 해안가에 남아서 살 수밖에 없었던 거지.
“그... 그래도 심하게 약탈을 하진 않았습니다. 특히나 북직례 백성들을 데려가지도 않았고요.”
“...”
나름 양심에 찔리는 게 있는지, 산고방은 더듬거리며 웅얼거렸지만... 중대장은 산고방이 말하지 않은 내용을 떠올리며, 피식 웃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걸 변명이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만, 요동백성들도 건수하지 못하는 요동이 북직례의 백성들을 납치해서 써먹을 수나 있겠나.
노예나 노비도 엄연히 사람이니 의식주의 문제를 책임져 줘야 하는 법. 노예라고 해서 무작정 공짜노동력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니까.
요동이 여력이 돼서 데려갈 수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데려갔겠지.
중대장과 산고방이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마을을 포위한 병력들은 거침없이 진입해 들쑤시기 시작했다.
고작해야 1개 중대지만 완전무장한 중기병 백기다. 병사가 없는 어지간한 마을 하나쯤은 그냥 짓밟아 버릴 수 있는 무력. 이곳. 기껏해야 100호도 안 되는 촌구석 어촌마을이 저항하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지.
“짐 챙겨서 나와!”
“가족들 다 챙겨라!”
“쓸데없는 거 버려! 그걸 왜 가져 가냐!”
말에 탄 조선군은 활시위를 걸어놓고 살기등등한 눈빛을 뿌려댔고, 열심히 노를 저어 온 요동수군들은 어린아이마냥 촐랑거리며 마을 주민들을 끌어냈다.
집안 하나를 챙길 때마다 수고비를 준다고 했더니, 아주 그냥 눈이 뒤집혀서 날뛰고 있었다.
그나마 과격하게 진행되지 않은 건, 조선군이 지켜보고 있는 것도 있지만 요동수병이 약탈할 만큼 가치 있는 게 없었기 때문.
“중대장님. 짐을 모두 내렸습니다.”
“예비마에 실어 놔라. 곧장 움직일 거다.”
“옙. 충성!”
지켜보고 있는 와중에 연대병 중 하나가 경례하고 사라졌고, 산고방은 떠나가는 연대병을 따라 시선이 돌아갔다.
뭔가 하고 봤더니, 안장이 없는 전마의 등 위에 가마니가 쌓여 있었다.
“저건...?”
“콩가마니일세. 이 녀석들도 밥은 먹어야지.”
“헉...!”
산고방이 놀라거나 말거나, 중대장은 자신이 타고 있는 전마의 목덜미를 가볍게 두들겼다.
‘저게 말먹이었다니...’
조선의 가마니가 요동의 가마니에 비해 뭔가 색다르긴 했지만 가마니는 가마니 아닌가. 조선군은 몽골군처럼 전투식량이라고 해서 개개인이 군량을 소지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저건 대체 왜 가져왔을까?‘ 싶었는데, 저게 건초 대용일 줄이야. 요동에선 사람이 먹을 콩도 없어서 난리였는데, 전마한테 먹인다고 하니 기가 막혔다.
‘부피가 큰 건초 대신 콩으로 대체하려는 것 같은데... 그럼 얼마나 빨리 움직이려고 하는 거지?’
동시에 이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한줌도 안 되는 병력이지만, 이렇게 뿔뿔이 흩어진 기병대가 한둘이 아니니, 전부 모이면 그 또한 무시하지 못할 병력수가 될 것 같았다.
‘으음...’
“그나저나 정말 깡촌이군.”
“...”
상념에 빠져 있는 산고방을 뒤로하고, 이윽고 마을 사람들이 전부 모이자 중대장이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아무리 촌구석에 살고 있어도, 그간 조선이 북직례에 해온 게 있는데 저 시커먼 두정갑으로 무장한 조선군에 대해서 모를 수 없는 법.
나아가 이들은 요동이 조선에 정복당한 건 몰라도, 산해관이 공격당하고 있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산해관에 지원을 한답시고, 이 거지 깡촌까지 와서 특별세금을 뜯어갔으니까.
물론 아무리 배운 게 없는 어부들이라도 그게 진짜 군비로 들어갈 거라고는 누구도 믿지 않았고, 누군가의 뒷주머니로 들어갔을 거라고 확신했다.
“너흰 조선으로 가게 될 거다. 조선으로 가면 집과 식량, 일거리를 제공해 줄 거다. 반대하는 사람 있나?”
“...”
“...”
손아귀에 기병용 장도를 꺼내놓고 외치고 있는데, 여기다대고 감히 반문을 할 수 있을까.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조차 없이, 마을주민들은 입을 꾹 다물고 눈만 굴려댔다.
“그럼 타라!”
“옙!”
“움직여라!”
중대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요동수병들이 마을 주민들을 끌고 갔고, 다들 떨어지지 않는 발을 애써 굴리며 군선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다 탈 수 있겠지?”
“조금 빡빡하긴 하지만 다 탈 수 있을 겁니다. 먼 바다로 나가는 것도 아니고, 해안을 따라 조금만 가면 될 테니까요.”
“음.”
‘그나저나... 생각보다 말을 잘 듣는데? 너무 촌구석이라서 소문이 안 퍼진 건가. 아니면 오히려 요동과 가까워서 다른 소문을 들은 걸까.’
중대장은 답을 찾지 못해 머리만 복잡해졌다.
북평부가 조선을 매도해온 건 분명할 텐데, 그렇다고 그들이 이 촌구석까지 와서 입방아를 찧진 않았을 것 아닌가. 저렇게 온순하게 말을 따르는 걸 보면, 단순히 칼이 무서워서가 끝이 아닐 거다.
‘그럼 북직례 내륙과 달리 이들은 아국 사정을 알고 있다는 건데...’
이게 가능하려면 답은 하나 밖에 없지 않나.
“밀수라도 했나?”
“예...?”
“아닐세. 자네들이 할 일은 알고 있지?”
“예.예.”
중대장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묻자, 산고방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을 태우고 다시 연산항으로 돌아가면 되겠습니까.”
“그러면 되네. 연산항에 도착하면 다시 명령을 받을 걸세.”
“알겠습니다.”
위와 같은 일은 북직례 동쪽. 모든 해안가 지역에서 벌어졌다.
본대가 천진으로 곧장 향했다면, 한 개 중대를 태운 요동군선은 해안가 모든 곳에 찔끔찔끔 상륙을 감행한 것. 북직례를 약탈해본 전력이 있는 요동수군을 길잡이 삼아 움직였던 거지.
그리고... 이들처럼 무탈하게 항복한 마을도 있고, 반항하다가 쓸려나간 마을도 있지만... 그들을 기다렸다는 듯이 항복한 마을도 있었다.
“어르신!”
“뭔가.”
천진 남쪽. 산동성 바로 위에 위치한 서고마을의 호족. 운가의 가주 운제. 그는 아침부터 시끄럽게 구는 가솔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특별한 일이 아니면 아침에는 소란스럽게 굴지 말라고 했는데, 또 뭐 때문에 저리 경망스럽게 구는 걸까.
“저... 저기!”
“...?”
“배... 못 보던 배가 오고 있습니다요!”
“뭐...!?”
운가주는 화들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고, 곧장 채비를 갖추고 발을 놀렸다.
서고마을은 북직례에 널려 있는 흔하디흔한 어촌마을이었고, 제 아무리 호족이라고 한들 내륙의 호족만큼 떵떵거리며 사는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운가는 서고마을의 토박이도 아니었고 말이다.
해서 몇 번 발을 놀리지도 않아 장원을 빠져나올 수 있었고, 마을 한귀퉁이에 솟아 있는 구릉에 오르기 무섭게 가솔이 말한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저기. 몇 안 되기는 하지만 진짜로 못 보던 배가 오고 있었다. 애초에 여긴 자신들이 배를 띄우지 않으면 돌아다니는 배가 엎다시피 하니, 못 알아차릴 수도 없다.
“표류하거나 길을 잃은 걸까요?”
“그럴 리가...”
운가주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내저었다.
서고마을은 천진보다 산동에 더 가까운 지역에 위치해 있어서, 산동상인들이 길을 잃고 찾아올 리가 만무한 곳.
“허면... 혹시?”
가솔은 조심스럽게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지만.
“아니. 거래 일이 아니지 않나.”
운가주는 이번에도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남은 건 요동수군인데... 헉!”
“어허.”
식솔이 재수 없는 소리를 하자, 운가주는 냉큼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산동과 밀약을 맺고 있는데, 요동수군이 그걸 어기고 여길 왜 오겠는가.
‘하지만 요동 놈들이니 또 약속을 어길 수도 있지 않을까?’
운가주는 불안감에 자기도 모르게 손톱을 깨물었다.
다만 이러나저러나 조금 가까이 와서 저들의 정체를 먼저 파악한 후에 판단해야 할 것 같은데... 문뜩 잊고 있었던 경고가 떠올랐다.
‘설마... 조선군인가?’
“...!”
운가주는 스스로 답을 찾기 무섭게, 몸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북직례가 아무리 큰 땅덩어리를 가지고 있어도, 모든 물산을 생산할 수는 없는 법이다. 게다가 이곳은 본래 원의 대도였던 곳이고 번왕 중에서 가장 강력했던 연왕부가 있었던 곳.
운하와 천진을 통해 끊임없이 강남의 물자가 오르내렸지.
헌데 명이 망하고 북평부가 들어서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북평부와 거래를 튼 곳은 산서밖에 없었는데, 그 산서마저도 섬서가 몽골의 세력권에 들어가고 그 후에는 몽골남부연맹이 산서북부를 두들기기 시작.
산서도 자기 앞가림을 하기 바빠서 북평부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긴 힘들어진 거지.
허면 어쩌겠는가. 북평부는 호족들을 위한 사치품 및 강남물산을 얻기 위해서 천진수군을 동원해 요동-산동, 요동-강남을 오가는 상선을 나포하거나 약탈해서 부족분을 충당했었다.
그랬던 시절도 잠시. 조선군에 의해 천진수군이 박살이 나자, 상황은 또 급변했다. 이젠 약탈로도 충당할 수가 없으니, 남은 건 밀무역 밖에 없지 않나.
그리하여 발해만과 닿아 있는 동쪽 해안가의 어촌마을에선 밀무역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사실 밀무역이라고 해서 뭐 별 건가. 발해만을 끼고 있는 북직례에서 산동, 요동은 엎어지면 코 닿는 거리. 그냥 어선을 타고 나가서 마주치기면 해도 거래하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
게다가 이 밀무역 상품의 최종소비처는 결국 북평부 고위관리들인데, 그들이 밀무역을 강하게 탄압할 리가 있겠나.
오히려 밀무역을 이권으로 삼아, 그 자리를 팔아먹으면서 파벌의 재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산동입장에선 북평부를 견제해야하니 밀무역의 품목에 대해서 제한을 뒀고, 당연히 사치품만 거래했다.
오히려 이건 그들도 반긴 것이, 이렇게 열심히 사치품을 사면 그만큼 군비를 덜 쓰지 않겠나.
결국 밀무역은 과거 천진이 있던 시절보다 더욱 활황을 이룰 수밖에.
‘그래서 한몫 단단히 챙기려고 왔는데... 어찌 이런 일이.’
운가주는 낙담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문제라면 운가주는 큰돈을 뇌물로 먹여서 이곳으로 이주한지 얼마 안 되서, 아직 본전도 못 찾았다는 점이다.
산동에서 칭왕자 제거작전이 펼쳐질 때. 조선군은 북직례 남부를 휩쓸고 갔다. 그 때 죽은 가문이 몇이며 망한 가문이 몇이던가.
그 자리를 놓고 치열한 알력다툼이 있었고, 동시에 밀무역이 성행하면서 해안가 호족들 또한 이합집산이 시작됐다.
운가의 경우에는 본래 하남 근처에 살았으나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알력싸움에 휘말려 밀려났다가, 뇌물을 열심히 먹인 결과 이곳 서고마을로 오게 된 거지.
그렇게 “이제 꽃길만 걸으면 되겠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문뜩 그와 밀무역을 하던 산동호족이 요상한 말을 했다.
‘조선군이 쳐들어오면, 싸우지 말고 바로 항복하라고 했지? 그러면 지금 처지에서 벗어나 크게 보답 받을 거라고 말이야.’
이게 말인지 방구인지 모르겠다만, 괜히 마음만 뒤숭숭해졌다.
조선군이 천진을 박살내고 난 후. 그 이후로도 꾸준히 천진을 정찰하면서 천진복구를 방해하지 않았나.
그런 놈들을 과연 믿어야 할지, 또 진짜로 이런 촌구석까지 올지 헷갈렸던 거지.
헌데 산동호족들의 경고가 현실이 됐다.
조선전함이 산해관을 두들기기 시작한 것.
해서 ‘이제 진짜 쳐들어오는 건가?’라고 기대 반, 우려 반으로 기다렸는데... 허송세월만 보내고 말았다.
쳐들어 올 거면 빨리 쳐들어 올 것이지, 대체 반년이 넘도록 산해관만 주구장창 두들기고 있는다고 산해관이 무너지겠나.
‘에잉 헛소리였군.’하고 무시하고 잊어먹고 있었는데, 그게 지금 현실로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