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1. 챕터62. 유인하다 (4)
“가... 가서 식솔들을 모두 불러 모아라. 마을 사람들도 전부 깨우고!”
“요동놈들이 또 약탈하러 오는 겁니까? 어르신?”
“지켜봐야 알겠지만, 일단 모아!”
“예예.”
운가주는 가솔에게 명을 내리고선, 그 또한 집안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부스스한 머리를 긁으며 가솔들이 전부 깨어 장원 공터로 모이기 시작했고.
‘후우...’
운가주는 가병들의 꼬락서니를 보며, 절로 한숨이 내쉬어졌다.
가병은 다 해봐야 삼십 남짓이었는데, 갑옷을 입은 이는 고작해야 넷. 그 외에는 맨몸. 박도를 들고 있는 이들이 열여섯에, 나머지는 창도 아닌 몽둥이나 봉을 들고 있었다.
‘무장을 더 시켰어야 했는데...’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 와서 후회하면 뭐할까.
무장을 시키는 것도 다 돈이 드는 일이고, 말이 밀수지 그냥 바다에서 서로 거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었나.
산동호족이 운가를 등쳐먹을 일이 없고, 운가도 산동호족과 거래를 끊을 리가 없으니 무력을 준비할 필요가 있었겠나.
궁극적으론... 애초에 돈이 많았으면 다른 가문에게 밀릴 일도 없었을 거고, 밀수를 하러 왔다지만 이렇게 촌구석까지 몰릴 일도 없었다.
“가자...”
“예! 나리!”
운가주는 가병들을 이끌고 부두로 향했다.
다들 모이긴 했는데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마을주민들의 시선이 온통 운가주에게 쏟아졌고, 운가주는 다시금 한숨을 푹 내쉬곤 모두를 챙겨 따라오게 했다.
수평선을 가로지르며 등장한 배는 어느덧 부두 코 앞까지 와 있었고, 아무리 봐도 멈춰서거나 다른 곳으로 갈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저거... 무슨 깃발인가?”
“모르겠습니다.”
“자네는 아나?”
“저도 잘...”
7척의 배의 선수에는 검은색의 작은 깃발이 꽂혀 흔들리고 있었는데, 그간 봐왔던 산동,요동호족들의 상선깃발과는 확연히 달랐다.
보통은 가문의 이름을 박아 넣는 게 일반적인 상선 깃발인데, 저 검은 깃발은 뭔지 모를 기하학적인 문양이 박혀 있었으니까.
저게 조선군이 사용하는 소대깃발인 건 꿈에도 몰랐을 거다.
이윽고 서로의 얼굴이 보일 정도로 배는 다가왔고, 두더지마냥 갑판 위로 머리통이 하나둘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시커먼 갑옷이 눈을 가리고, 쿵쿵. 갑판 위에 완전히 올라온 연대병들과 마을주민들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저... 저건!?”
“조선군!?”
시커먼 두정갑을 보고 화들짝 놀란 이들이 한마디씩 내뱉었고, 동시에 시선이 한쪽으로 모였다.
‘진짜 조선군이라고?’
운가주 또한 마찬가지. 흔들리는 뱃전 위로 올라오는 조선군을 보며,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 눈만 끔뻑거렸다.
‘이런...’
자기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봤고, 동시에 선택지 하나는 지워졌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 나온 마을 주민들 중에서 제대로 무장을 갖춘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낫, 도리깨, 봉등을 쥐고 있긴 한데, 저걸 보고 조선군이 겁이나 먹겠나.
어찌해야 하나 고민을 하기 무섭게, 조선군이 답을 재촉했다.
쉐엑! 선수에 있던 조선군이 갑자기 화살을 쏴댔고, 부둣가에 몰려 있던 마을 주민들 발 앞에 퍽퍽 꽂히기 시작했다.
“으아악!”
“조선군이다!”
“도망쳐라!”
화살에 맞은 이는 한명도 없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다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등을 보이고 도망쳤고.
운가주의 가병들 또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지, 하나같이 운가주를 노려보며 ‘안 도망칩니까?’라고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도망? 여기서 도망가면 뭐 달라지나?’
운가주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고, 그렇게 망설이는 동안에 쿠쿵... 작은 나루터에 요동군선이 옆구리를 비비며 멈춰 섰다.
쾅! 갑판지붕으로 써먹던 판자가 들리더니 나루터로 떨어졌고, 순식간에 나무다리가 된 판자를 밟으며 기병들이 하선하기 시작.
“히랴!”
다그닥.다그닥. 우렁찬 함성과 함께 삐걱거리는 부두를 밟으며 기병들이 질주하기 시작했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운가주 일행을 지나쳐 옆으로 스쳐지나갔다.
“흐헉.”
“헉...”
자신들에게 돌격해 오지도 않았는데도, 몇몇 사람들은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고 두려움에 물든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반대로 조선기병은 시위하듯 편곤을 붕붕. 소리나게 돌려대고, 또 이따금씩 캉캉! 땅을 때리며 겁을 줬다.
편곤에 맞아 파이는 땅바닥과 돌멩이들이 꼭 자신의 미래처럼 보이는 걸까? 마을주민들은 편곤이 부딪칠 때마다, 양손으로 자기 머리를 감싸며 움찔 거렸다.
‘허...’
이런 꼬락서니로 싸우긴 뭘 싸우나.
운가주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애써 겁을 밀어냈고, 비명을 내지르듯 한 마디 하고 말았다.
“모두 무기 버려!”
“...?”
“다 죽기 싫으면 빨리 버리라고! 어서!”
운가주는 그리 외치고선, 자길 따라하라는 듯 어색하게 들고 있던 박도를 내팽개쳤다.
타타탕! 기다렸다는 듯이 마을 주민들은 무기를 내다버렸다.
조선군을 내려준 함선이 나루터 옆 뻘밭으로 비켜나자, 또 다른 함선이 멈춰서더니 다시금 조선기병을 토해내기를 반복.
검은깃발을 든 기병들이 줄줄이 내리더니 마을주민을 향해 다가왔다. 모두의 눈동자가 한 곳으로 쏠리자, 눈빛을 이기지 못한 운가주가 다리를 벌벌 떨며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조선군 또한 겁도 없이 성큼성큼 말을 몰아 다가왔고, 운가주는 냅다 손을 번쩍 들고선 목청을 높였다.
“항복하겠습니다! 연태 장가에게 연락을 받았습니다!”
영문 모를 말에 조선군도 놀란 걸까? 걸음을 멈추더니 서로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더니, 누군가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운가주 앞으로 다가왔다.
“산동의 연태 장가라고?”
“예. 그렇습니다. 장군.”
중대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산동이 여기에도 개입한 건가?’라며 중얼거리고선, 이내 결정을 내렸다.
산동이 개입하든 말든 상관이 있나. 쉽게 항복하면 어쨌든 좋은 것 아닌가.
“그래서 항복하겠나?”
“옙!”
“좋아.”
중대장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줄줄이 하선하는 조선군 뒤로 요동수군이 헐레벌떡 뛰어오기 시작했다.
북직례의 모든 어촌마을에 연대기병이 중대단위로 상륙을 하는 동안. 신형조운선에 올라탄 본대는 천진을 향해 매섭게 질주했다.
이들 또한 날이 밝기 무섭게 천진 앞바다에 도착했고, 어스름한 새벽녘을 가르며 천진항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천진항은 천혜의 입지를 가진 장소고, 원나라 이전부터 항구로 사용되던 곳. 조선군이 천진항을 불바다로 만들고 천진수군의 군선을 전부 불태워버렸다고 해도, 지형을 바꿀 순 없지 않나.
천진수군의 군선이 전부 침몰해서 암초처럼 변했어도, 그걸 대비해 신형전함이 아닌 밑바닥이 평평한 신형조운선을 가져온 조선군. 바다에서 상륙을 가로막을 장애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산해관으로 갈 신형전함의 엄호를 받으며, 신형조운선이 일제히 상륙을 시작했다.
“하선 준비!”
“하선 준비!”
선수에 올라 있던 갑판장의 외침에, 선창에 있던 연대병들의 손길이 부산해졌다.
이들 또한 선두는 해군보병이 아닌 육군기병.
선창에서 갑판 위로 올라오는 계단은 널빤지를 대충 덧대어 경사를 만들어놨고, 그거로도 모자라 갑판 일부를 뜯어내 전마가 빠져나오기 쉽게 해놨다.
빠르게 하선하기 위해서 연대병들은 다닥다닥 붙어 줄을 맞추듯 꼬리를 물었고, 일부는 천천히 고삐를 잡고 갑판 위로 올라왔다.
확 트인 전경과 함께 시원한 바람이 눈을 시리게 만들었다.
“후...”
가장 먼저 올라온 중대장은 바로 보이는 천진포구를 보며, 가볍게 심호흡을 가다듬었다.
목에 걸고 있던 망원경으로 포구를 살피자, 자기도 모르게 감상평이 흘러나왔다.
“역시 방비가 안 되어 있군.”
“매번 와서 부셨는데, 뭐 얼마나 복구 했겠나.”
“하긴...”
중대장과 갑판장은 소속이 다른 탓에, 서로 공대를 하며 말을 나눴다.
눈앞에 보이는 천진항구는 오래전 습격의 흔적을 여실히 담고 있었다.
화약고 대폭발이 일어났다고 듣긴 들었는데, 직접 눈으로 보니 진짜 그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저쪽 성벽 한귀퉁이가 완전히 무너져서 어색하게 구멍이 뻥 뚫려 있었으니까.
부둣가와 바로 맞닿아 있는 거리는 포격과 화마에 공격당해 대부분 무너지거나 불에 타서 흔적만 남아 있었다.
복구조차 힘들었는지. 아직도 검게 그을린 나무기둥과 건물 담벼락이 여기저기에 남아 있었고, 부둣가 양측면의 성벽은 죄다 무너져 흉물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상점이 널려 있어야 할 거리는 온통 흙먼지에 쌓여 있었고, 그 버려진 대지 위에는 움막처럼 생긴 뭔가가 제멋대로 올라와 있었다.
“전에도 와 봤나?”
“산해관을 치고 나서 살펴봤네. 딱히 달라진 건 없어 보이는군. 저기 움막들 보이나?”
“음.”
“저게 다 천진항에서 일하던 백성들이 사는 집이네. 천진수군이 몰락하고 나서 다들 할 일을 잃었지 않나. 고기잡이배도 드물어져서, 빈민처럼 살고 있네.”
“수군병이 아직 남아 있나?”
“정확히는 모르나 아마 있긴 있을 걸세. 지난날 천진공략 때. 천진수군이 많이 죽은 건 아니니까. 북평군이 어떻게 배치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천진수군 중 일부를 북직례 남부로 이주시켰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네.”
“음...”
이건 중대장도 들었던 이야기인 터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을 성벽에서 조금 더 끌어내려 부둣가로 향했다.
부두 중 태반이 무너져 있었는데, 그럼에도 남아 있는 숫자가 꽤 됐다.
과연 천진항이라고 해야 할지... 과거 영광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 부둣가에서 바다로 삐져나온 부두의 길이는 나무부두 치고도 상당히 길었다.
그런 부두가 대충 세어 봐도 5개가 넘어가는데, 복구를 해서 저렇게 된 건지 아니면 안했는데도 저렇게 남은 건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안 나오는군?”
“아마 방심하고 있을 걸세.”
“방심?”
중대장이 어이가 없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갑판장은 피식 웃으며 설명해줬다.
조선해군이 천진수군을 몰살시키고 난 후. 끊임없이 발해만 안쪽으로 전함을 보내 천진항의 복구를 방해했었다. 아무 때나 그냥 뜬금없이 와서 포격을 날리고 가는데, 어디 무서워서 살 수가 있나.
복구는 당연히 지지부진. 북평부 관리들이나 일을 해야 하는 천진수군이나, 둘 다 맥이 빠져 축축 처질 수밖에 없었다.
다른 곳으로 떠날 수도 없는 천진백성들만 개고생을 하면서, 점점 처지가 빈궁해졌지.
시간이 한참 지나. 조선해군이 산해관을 공략하면서, 천진에 대한 방해공작은 더욱더 심해졌다.
신나게 산해관을 두들기고 난 후. “잘 있나 보고 간다.”라고 말하듯, 유유히 천진항을 한 바퀴 돌면서 지나갔으니까. 그 세월이 벌써 반년이 훌쩍 넘었지 않나.
한동안은 기겁해서 병력을 배치하니 마니 난리도 아니었지만, 지금에 이르러선 “또 와서 보고 가냐?”라고, 눈길만 힐끔 주고 말 정도로 익숙해져 버린 거지.
“그 정도란 말이지...”
“그러네. 예전에 봤을 때는 화들짝 놀라서 성 밖으로 부둣가로 튀어나오곤 했는데, 근래에 이르러선 아예 나오지도 않더군.”
“반격하려고 포격을 한 적도 없고?”
“그렇네. 사실 화포가 몇이나 남았는지도 모르겠네. 저기 보이나?”
갑판장은 포구 양측면을 가리켰다.
천진항의 성벽은 부둣가 뒤에 세워져 있었는데, 그 끝은 포구를 감싸고 있는 얕은 구릉에 닿아 있었다.
저 양쪽이 과거에 천진항의 주요방어포대였는데, 지금은 조선해군의 포격훈련 목표가 되고 말았다.
산해관을 두들기고 온 전함이 시도 때도 없이 갈겨댄 터라, 구릉을 감싸고 있던 성벽은 잘게 부서져서 눈물방울처럼 구릉 아래로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 꼴이 되었는데, 저 안쪽에 포대와 화포가 몇이나 있는지 어찌 알겠나. 다만 지금까지 한 번도 반격을 한 적이 없으니, 없는 셈 쳐야지.”
“음...”
갑판장은 “나 잘했지?”라고 말하듯 히죽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었지만, 중대장은 차마 같이 웃을 수가 없었다.
상륙을 하자마자 중대장이 이끄는 중대가 해야 할 일이, 바로 저 포대를 점령해 무력화 시키는 일이었으니까.
중대장이 속으로 각오를 다지고 망원경으로 살피며, 진격로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자.
“준비하게.”
갑판장은 이제 코앞으로 다가온 천진부두를 보며 조용히 한마디 내던졌다.
땡땡땡! 상륙을 알리는 날카로운 꽹과리 소리가 울려 퍼지고, 중대장 또한 조심스럽게 전마를 갑판 위로 끌고 왔다.
전마는 흔들리는 바닥에 겁을 집어먹었는지 연신 투레질을 하며 신경질을 부려댔고, 중대장은 고삐를 짧게 잡고 녀석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전마를 안심시켰다.
“충돌 대비!”
“충돌 대비!”
복명복창이 연거푸 이어지고. 쿠쿵... 신형조운선은 부두 안쪽 깊숙한 곳까지 쑤시고 들어왔다. 일부러 이렇게 상륙하기 위해서 함선 바닥이 평평한 신형조운선을 타고 왔지 않나.
바닷물 속 모래톱이 함선 바닥에 갈리는 환청이 귀를 간지럼 태웠고, 함선 옆구리가 부두에 가볍게 부딪치자 시선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하선!”
“하선!”
배에 익숙하지 않은 육군기병과 전마가 정신을 되찾는 동안에도, 해군선원들은 딱 맞춘 톱니바퀴처럼 누가 명령하지 않아도 각자 할 일을 찾아 움직였다.
몇몇은 활차 도르래와 밧줄을 감아 돛을 거뒀고, 몇몇은 갑판벽 일부를 열어 출입구를 만들었고, 몇몇은 나무판자에 나무토막을 박아 발 받침대를 만들어 놓은 나무다리를 부두에 내렸다.
신형조운선은 요동군선의 못해도 3배 이상은 큰 배인터라, 갑판벽의 높이 또한 몇배는 높았다. 당연히 하선 또한 쉬운 일이 아닌터라, 나무다리는 길 뿐만 아니라 넓기 까지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