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2. 챕터62. 유인하다 (5)
“됐다!”
훌쩍 뛰어내려 나무다리를 고정시킨 선원이 목청을 높이자.
“가게!”
그 모습을 살피던 갑판장이 삐빅! 호루라기를 불며 외쳤고.
“히랴!”
중대장은 말 위에 올라타 조심스럽게 나무다리를 타고 부두에 발을 디뎠다.
히힝! 땅에 발을 디디자 드디어 살 것 같은 걸까? 전마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연신 투레질을 했고, 중대장은 그 기세를 몰아 가볍게 박차를 차며 앞으로 나아갔다.
쿠쿵.쿠쿵. 중대장의 뒤를 따라 기병은 계속 하선을 이어갔다.
‘훈련한 대로 잘 하고 있네.’
꽤 높은 언덕길을 내려오는 꼴이건만, 기병들은 능숙하게 하선을 이어갔다. 산지가 많은 조선땅에서 돌아다닌 게 확실히 효과가 있는지, 전마든 연대병이든 두려움 없이 나무다리를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정렬!”
삐빅! 중대장 뒤로 소대장들이 검은 깃발을 들고 모여들었고, 이윽고 2개 소대를 태운 신형조운선에서 병력이 모두 상륙했다.
‘다른 곳은...’
중대장은 힐끔 고개를 들어 옆을 바라봤고, 다른 부두 또한 그와 똑같이 움직인 연대병들이 부두를 건너와 포구 앞에 정렬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하나.둘...’
휘날리는 중대 깃발을 세어보니 선발대 2개 중대 전체가 무탈하게 하선한 모양.
‘좋아!’
이미 전략목표는 세워뒀으니 뒷일은 알아서 할 터, 이젠 자신들이 할 일만 잘 하면 그만 아닌가.
“진격!”
“진격!”
삐빅! 중대장은 호루라기를 불며 목청 높여 소리치고선, 앞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등 뒤에 걸어놨던 편곤을 어느새 빼어들고, 2열 종대로 모인 2개 소대가 중대장의 뒤를 바짝 따랐다.
“가로막는 건 모두 치고 가라!”
“히랴!”
선두에선 중대장은 붕붕. 편곤을 허공에 휘두르며 외쳤고, 소대원들 모두 어느새 편곤을 꺼내들고 따라했다.
천진항의 수비군은 조선군이 상륙할 때까지도 제대로 방비를 못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조선함대가 아른 거릴 때까지 그냥 지켜만 보다가, 신형조운선이 부두에 몸을 비비기 시작하자 그때서야 보고가 들어간 모양.
수비군이 화들짝 놀라 성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기병 중대가 먼저 성문을 향해 쇄도했다.
‘지독하게 부셔놨군.’
중대장은 눈앞에 보이는 성문. 아니 성문 흔적을 따라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오래전. 천진공략 당시 천진부두를 감싸고 있는 성벽을 다 때려 부셨는데, 가장 맹폭을 퍼 부운 곳은 단연코 성문이었다.
맞추기 좋게 바다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문 위에 “날 맞춰 주시오!”라고 외치듯 거대한 성루까지 올려놨는데 이걸 가만 놔뒀겠는가.
천진공략 당시에 성루까지 다 때려 부셨고, 그 후에도 천진을 재건하려 할 때마다 와서 성문을 계속 두들겼었다.
그래서일까. 중대장의 눈앞에 보이는 성문은 성문이 아니라 그냥 성문터만 남아 있었다.
성루 자체가 아예 다 박살나서 없어졌는데. 그 파편들마저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백성들이 집을 짓는다고 다 주워간 것 같았다.
성문 또한 아예 없는 걸 넘어서, 아예 위쪽이 뻥 뚫려서 성벽이 중간에 끊어진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어차피 매번 올 때마다 부셔댔으니, 수리조차 포기한 모양이군.’
허나 천진항 수비군이 수리를 포기 했어도, 성 밖 천진부두 근처에서 살던 백성들은 성 안팎을 계속 오갔을 것 아닌가.
게다가 부서진 성벽조각 또한 주워서 집을 짓는데 사용했는지, 어째 성문으로 향하는 길은 생각 외로 멀쩡했다.
그렇게 중대장이 이끄는 선두가 성문으로 진입하고, 동시에 어느새 따라붙은 다른 중대, 소대기병들 또한 줄줄이 꼬리를 물고 이어 붙었다.
그런 기병대의 앞을 향해 달려오는 건, 이제야 변고를 알아차리고 움직인 천진 수비군들.
‘흐음... 천진수군인가?’
선두에 서서 달리는 중대장은 고개를 살짝 숙여 맞바람을 피하면서, 저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천진수비군을 빠르게 훑어 내렸다.
아무리 봐도 천진수군에 속한 이들인지, 무장을 갖춘 꼬락서니가 형편없다.
제대로 된 갑옷을 입은 이는 드물고, 한족들이 좋아하는 비갑만 오른쪽 팔뚝에 차고 있었다. 들고 있는 무기 또한 제각각. 다만 수군이 맞는지 창보다는 박도나 작살처럼 생긴 단창이나, 삼지창 비슷한 걸 쥐고 있었다.
‘대기병 방진은 짤 줄 모르겠군.’
“돌격!”
중대장은 생각을 끝마치기 무섭게 편곤을 높이 쳐들었고.
“와아아!!”
뒤따르던 중대원들 모두가 중대장을 따라 편곤을 들어올리며 기합을 끌어올렸다.
“어...!?”
“마.. 막아!”
“어떻...?”
반대로 뭔 일인지도 모르고 대충 챙겨 입고 달려온 천진수군들은 황망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눈이 빙빙 돌아갔다.
천진이 박살난 후. 예전에는 천진수군도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처럼 날선 반응을 보였었다.
허나 조선군이 천진항에 온 게 어디 한두번인가. 한두번을 넘어 연 단위로 시비를 걸어왔으니, 무뎌져도 한참 무뎌지고 방심을 넘어 확신을 갖게 됐지.
다만 작년부터 조선군이 산해관을 두들기기 시작하자 분위기가 묘해졌다. 포격. 그것도 바다에서 쏘는 함포사격만으로는, 산해관을 함락시킬 수 없는 걸 어린아이라도 알았다.
허면 그건 시선을 돌릴 유인작전이자 성동격서일게 분명하니, 언제든 천진을 다시 한 번 노릴 수 있다는 뜻 아니겠나.
하지만... 기다리다 지쳐 죽겠다.
반년이 넘도록 산해관만 주구장창 두들기다가 천진을 스쳐지나갔으니... 천진수군 입장에선 어떤 심정이겠나.
오늘도 어제와 똑같은 그날인 줄 알고 있었으니, 갑자기 조선군이 상륙했다는 말에 반응이 느려질 수밖에.
도무지 믿기지가 않지만, 까라면 까야지 별 수 있겠나. 해서 이렇게 대충 헐레벌떡 뛰어왔는데... 그들 눈앞에 소문만 무성했던 조선기병이 떼로 달려오고 있었다.
“쳐라!”
“하!”
미칠 듯이 말을 몰아가는 연대기병과 방진도 짜지 못하고 어설프게 대로를 따라 우르르 달려오고 있던 천진수군.
둘의 충돌은 누구나 예상했던 방향으로 흘러갔다.
선두에선 중대장의 편곤이 휘릭! 춤을 추기 무섭게, 퍼퍽! 땅에서 솟구친 편곤의 자편이 수군의 박도를 때리고도 여력이 남아 수군의 얼굴을 가격했다.
“컥.” 단발마의 비명만 내지르며 선두에 선 수군이 쓰러졌고, 우르르. 뒤를 이은 기병의 말발굽소리에 비명소리조차 파묻혔다.
기병을 정면에서 막는 게 어디 쉬운 일이며, 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던가.
꾸준한 훈련을 통해 강심장을 키우고, 전마가 생각보다 겁이 많다는 걸 인지하고 창끝을 세울 수 있어야 버틸 수 있는 거다.
천진수군은 대기병 훈련을 해본적도 없고, 또 무방비하게 기습을 당하면서 방진조차 짜지 못하고 대로를 따라 우르르 몰려오지 않았나.
“으악!” “비켜!”
“여... 옆으로 가라고!”
선두에 선 기병이 수군진영을 파고들자, 칼로 썩은 무를 잘라내듯 수군진영은 알아서 붕괴해 양쪽으로 뜯겨 나갔다.
콰쾅! 퍽퍽!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편곤의 돌풍은 작은 풍차로 변해서 기병대의 옆에서 빙빙 돌아갔고, 재수 없게 그 권역에 들어온 수군들은 머리통이 깨지거나, 어깨가 박살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끄억.” “켁...”
뻥 뚫려 버린 중앙으로 기병대가 질주하고, 그 기병대가 피의 톱니바퀴를 돌리며 진영을 더욱 무너뜨리자. 양 옆으로 밀려난 천진수군이 어떻게 됐겠는가.
자기들끼리 우당탕탕 끼이고 넘어지고 엎어지고 밀리면서, 각자 들고 있던 무기에 스스로 찔려가며 온갖 비명이 대로를 수놓았다.
퍽퍽. 옆에서 밀려오는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가장 가장자리에 있던 수군은 발이 꼬여 넘어졌지만, 다른 수군들은 눈앞에 보이는 검은 파도를 피해 그저 몸을 날려대니 동료가 넘어진 것도 몰랐다.
그렇게 자기도 모르게 동료를 밟으며 옆으로 튕겨나갔고, 동시에 그 또한 발이 걸려 넘어지기 일 수.
“컥...”
“미. 밀지마!”
“끄엑.”
옆에선 머리통이 펑펑 터져나가고 있는데, 밑에 깔린 동료의 비명소리가 다른 동료의 귀에 들어올 리가 있겠나.
대로를 감싸고 있던 수군들은 흡사 파도를 맞은 모래성처럼 양 옆으로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후하!’
천진수군이 제 발로 지옥도에 파묻혀 압사당하고 있는 동안. 수군진영을 완전히 관통해버린 중대장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편곤을 빙빙 휘둘러 피를 털어냈다.
동시에 빠르게 주위를 살피고선 삐빅! 호루라기를 불며 외쳤다.
“좌측으로!”
“하!”
뒤따르던 소대장들 또한 마찬가지로 대답과 동시에 삐빅! 호루라기를 불었고, 개미떼처럼 줄줄이 따라오던 기병대는 일순간에 뚝 끊겨서 반으로 쪼개졌다.
이미 출발할 때부터 작전목표는 정해져 있던 바. 중대장은 물론 소대장들 또한 숙지하고 있었기에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마음으로 움직였다.
성문 근처로 달려오던 수군을 짓밟아버린 기병대는 곧장 두 갈래로 찢어져 양 옆으로 향했다.
‘성 안도 엉망이긴 엉망이군.’
살짝 속도를 줄인 중대장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천진백성들을 뒤로하고, 재빠르게 주위를 둘러봤다.
함포사격은 성 밖의 부두뿐만 아니라 성 안쪽으로도 떨어진 게 분명. 대충 흘기면서 살펴보는데, 여기저기 지붕이 무너진 집이 한두채가 아니다.
사합원 형태의 집도 있고, 조선의 양식과는 다르지만 어쨌든 초가집이나 기와집으로 보이는 건물들이 줄줄이 이어졌는데, 멀쩡한 거 절반. 망가진 거 절반일 정도로 엉망이었다.
보면 볼수록 정말 지독하게 두들겨 팬 모양이다.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으니, 북평부가 왜 천진항을 완전히 재건하는 걸 포기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부서진 것에 비해서 거리가 난잡하지 않다는 것이겠지.’
중대장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쓰레기나 장애물 대신 먼지구름만 풀풀 나는 맨땅을 달려 나갔다.
이들이 달리는 길은 바다로 향해 있는 성벽을 끼고 양옆으로 가는 길. 이쪽은 사람이 오갈 일이 드문 탓에 확실히 어지럽혀질 일도 없었던 모양이다.
과거. 천진은 직고라 불렀고, 연왕이 정난의 변 당시 천진으로 개명했던 곳.
단순히 개명만 한 게 아니라 이곳을 나름 재건축했었다. 직고는 원나라 때부터 대도. 북평으로 물류를 옮기는 핵심 항구였고, 연왕부를 만들면서 그 중요성은 더욱 커졌으니까.
그래서인지 천진항은 나름 알아보기 쉽게 도시계획이 되어 있던 터라, 반쯤 부셔졌어도 길을 헤맬 일은 없었다.
‘저기군.’
아니나 다를까. 성벽을 옆에 두고 계속 달리다보니 저 앞에 우뚝 솟은 구릉이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피 묻은 편곤을 다시금 허공에 털어내 안장에 끼워 넣고, 등뒤 허리춤에 달린 넓적한 화살통에서 각궁과 함께 화살을 꺼내 쥐었다.
말 위에서 움직이는 것치고는 물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웠고, 중대장이 먼저 무기를 바꾸자 뒤따르던 연대병들 또한 활을 손에 쥐었다.
“무기를 든 자는 알아서 쏴라!”
“옙!” “하!”
중대장은 목청 높여 소리를 치고선, 어느새 성큼 다가와 협곡절벽처럼 눈앞을 가로 막고 있는 성벽을 가리켰다.
다다닥.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는 기사는 완전히 기병으로 편제된 육군병의 필수소양 아닌가.
핑! 중대장이 화살을 시위에 걸기 무섭게, 곱게 휘어진 각궁이 몸을 비틀며 파공음을 날렸고. 쉬익! 화살은 저 앞에 얼쩡거리던 웬 병사의 몸에 박혀 꼬리를 흔들었다.
쉐에엑! 중대장이 모범을 보이자 뒤를 따르던 연대병들도, 그에 질세라 화살을 날려댔다.
목표가 딱히 있겠나. 그냥 보이는 병사들을 향해서 마구잡이로 화살을 날려댔다.
조선군은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상륙해서 기병대가 성안으로 파고 들었다.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후속부대도 기다리지 않고 그저 미친 듯이 달리는 중.
보고를 받은 천진수군의 지휘관조차 지금 뭔 상황인지 모를 판국인데, 이제 막 아침잠을 몰아내며 깨어난 천진수군들이 사태를 정확히 인지할 리가 없지 않나.
온 사방에서 “조선군이 쳐들어왔다!” “후퇴하라!” “성문을 지켜야 한다!” “여기로 모여라!” 등등.
정확한 명령을 받지 못한 하급지휘관들이 마구 내리는 명령소리가 도시를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고, 그런 명령소리마저 집어삼킬 정도로 천진백성들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러니 저렇게 따로따로 움직이며, 훈련받은 대로 집결지로 가려는 천진수군이 거리에 가득했던 것.
쉑쉑쉑! 퍼퍼퍽! 기병대는 적이 맞아죽든 말든 신경도 안 쓰고, 손가락이 아프도록 마구잡이로 화살을 날려댔다.
그리고 그렇게 도망가는 이들과 비명을 내지르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혼란의 불길은 더욱더 커져만 갔다.
“저기다!”
중대장은 활을 들고서 다시금 목청을 높였다.
드디어 목표를 찾았다. 저기 성벽을 따라 비스듬하게 경사가 진 언덕길. 저기가 바로 이들이 찾던 목표다.
‘오를 수 있겠군. 예상대로야.’
중대장은 속으로 히죽 웃으면서 성벽 옆에 달라붙었고, 머뭇거리지 않고 성큼성큼 언덕길을 올라갔다.
이들의 목표는 천진항 양쪽 구릉에 위치한 포대였다.
아무리 중국에 사람이 넘쳐난다고 해도. 저 높은 구릉까지 화포를 올리고 화약을 옮기려면, 계단보다는 비탈길 형태로 올라가는 길을 만들어 놓지 않았겠나.
참모부의 예상이 딱 들어맞아서, 천만다행이도 말을 타고 오를 수 있는 언덕길이 성벽에 붙어 있었다.
‘하긴 천진수군도 소달구지나 우마수레에 화포를 올려놓고 옮겼을 거 아냐?’
중대장은 분위기에 맞지 않게 속으로 피식 웃고선, 계속해서 앞으로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