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4. 챕터62. 유인하다 (7)
성루와 성문 위 성벽을 차지한 병력은 백명을 조금 넘는 수지만, 반대로 말하면 백명이 넘는 수비병력이 있는 셈이다.
성벽 위에 넓게 퍼진 것도 아니고, 오롯이 성문 위에만 뭉쳐 있으니 천진수군으로선 성문을 돌파하는 것도, 성문 옆 계단으로 오르는 것도 쉽지 않은 게 당연.
어쩌면 성문으로 나가려는 시도 자체가 의미가 없을 지도 모르겠다. 공성전 아닌 공성전이 성 안에서 펼쳐지는 꼴이니, 성문을 공략해봐야 성 밖으로 나가는 꼴 아닌가.
이러면 성문과 성루를 공략할 의미가 없다.
“어리둥절해 보이는군.”
“그렇지 않겠나? 자신들이 거꾸로 포위를 당한 셈이니,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 힘들 겠지.”
“아군이 몇이나 되는지도 파악하기 힘들 거고.”
“그렇지.”
1중대장과 2중대장은 느긋하게 활시위를 당기는 부하들 뒤에서 대화를 나눴다.
“중대장님! 저건 어떻게 합니까!”
부하의 외침에 둘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고, 연대병 중 한명은 성 안쪽이 아닌 성 밖을 가리켰다.
옷차림으로 봐선 천진수군은 아니고 그냥 백성으로 보이는데, 성벽 위에 올라간 우중충한 검은 무리를 보고서 냅다 도망치고 있었다.
“됐다. 그냥 놔둬.”
“어차피 알려질 거다.”
두 중대장은 각기 답을 하고선, 서로 눈을 마주치며 피식 웃고 말았다.
이들의 목표는 모두 달성했다.
포대를 정리했고, 천진항의 병력이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고 있다. 성 밖의 문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난 문제.
천진항이 함락됐다는 소문은 어떤 식으로든 천진도시로 전해질 거다. 굳이 밖에서 얼쩡거리는 백성들을 죽여 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나.
어쩌면 차라리 저들로 하여금 일찍 알려지는 게 더 나을 지도 모른다.
“그렇겠지?”
“아마도. 그럴 거야.”
둘은 자신들. 그리고 천진에 상륙하고 있는 병력의 궁극적인 목적을 들었기에, 그리 판단하고 말았다.
두 중대장은 한가롭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지만, 쉑쉑! 성루에 올라 있던 연대병들은 연신 화살을 날리느라 바빴다.
명령체계가 일원화 되지 못한 탓에 천진수군은 중구난방으로 성문 근처로 달려오고 있었고, 연대병들의 화력을 뚫고 성벽계단을 오를 만큼 체계적이지 못했다.
문제라면 화들짝 놀란 적병이 죄다 성문으로 몰려오고 있는 탓에, 흡사 축차공격을 하듯 계속해서 밀려온다는 점.
“화살을 아껴라!”
“지휘관만 맞춰!”
두 중대장이 외치기 무섭게. 쉐엑! 앞에 서 있던 연대병 넷이 일제히 한곳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중구난방으로 몰려오는 적병이니, 당연히 앞에서 혹은 옆에서 대도를 지휘봉마냥 휘두르며 외치는 독전관이 있었는데, 퍼퍼퍽. 제대로 갑옷도 입지 못한 탓에 연대병의 화살에 맞고 단박에 침묵하며 쓰러졌다.
“피... 피해!”
“도망쳐라!”
그리곤 지휘관이 죽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두서없이 달려오던 적병들이 비 맞은 개미떼마냥 일제히 흩어지는 게 아닌가.
골목길 사이사이로 흘러들어가는 적병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자니, 어처구니가 없는 걸 넘어서 웃기게 보일 지경이었다.
군기가 빠진 건지, 아니면 항전의지가 없는 건지 모르겠는데, 어째 적병은 맞서 싸우기 보다는 도망칠 기회만 노리고 있는 것 같았다.
다만 그럼에도 적병은 계속 몰려왔고, 두 중대장의 머릿속에 ‘계획이 틀어지나?’라는 우려가 살포시 밀려오려는 찰나.
“저기!”
“후발대가 옵니다!”
“와아아!”
눈앞에 파도처럼 몰아치는 검은 물결을 보며, 연대병들은 흡사 승리라도 한 것 마냥 함성과 함께 활을 쥔 손을 허공에 마구 흔들어댔다.
쿠르르. “끄억!” “피해라!”
우렁찬 말발굽소리는 실체보다 빠르게 날아와 성문을 강타했고, 뒤이어 따라온 피의 수레바퀴가 성문을 향해 달려오는 적병 무리의 뒤통수를 때렸다.
퍽퍽. 휘몰아치는 편곤은 어김없이 적병의 머리통을 깨부셨고, 미처 피하지 못한 적들은 전마의 가슴팍에 치여 대나무 쪼개지듯 옆으로 튕겨나갔다.
아까 포대에서 봤던 후속 기병대. 그들이 항구 쪽 성문을 돌파해 일직선으로 관도를 가르며 성루를 향해 달려온 것이었다.
“음...”
“계획대로 되는군.”
두 중대장은 자기가 말을 하고서 스스로 납득하곤,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위에서 보니 더 잘 보였는데, 후속 기병대는 소대별로 찢어져 거미줄처럼 엮여 있는 도로를 종횡무진 누비고 있었다.
딱히 적병과 맞서 싸우는 건 아니었지만, 제자리에서 반전할 수 있을 정도의 너비를 가진 도로를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허나 위에서 보니까 기병대의 움직임이 한눈에 읽히는 거지, 시야가 꽉 막힌 골목길과 관도에 차 있는 적병 입장에선 온 사방에 조선군 기병대가 가득 찬 것처럼 느껴지지 않겠나.
기병대는 양을 모는 몰이꾼으로 변신한 듯, 적병을 직접 깨부수는 게 아니라 기병 그 자체의 위용을 뽐내 위협하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확실히 반응을 못하는 군.”
“적들이 느끼기엔, 이미 성내가 함락당한 것처럼 보일 거야.”
“음.”
두 중대장은 계획대로 잘 흘러가는 것 같아, 입가에 절로 미소가 머물렀다.
“하선!”
“정렬!”
쿵쿵쿵. 날 듯이 나무사다리를 타고 내려온 해군병들은 삐빅! 연신 호루라기를 불어대는 소대장을 따라 부둣가로 달려갔다.
군화발에 짓이겨진 나무부두는 연신 삐걱삐걱 고통을 호소했지만, 해군병들은 멈추면 죽는다는 듯 맹렬하게 부두를 건너가 공터에 정렬을 이어갔다.
선발대로 뿌려진 기병대는 말 그대로 흩뿌려졌다.
그들은 명확한 목표 없이 성내를 종횡무진 돌아다니면서 천진수군이 뭉치지 못하게, 또 성내가 이미 함락됐다는 착각을 심어주기 위해 움직였다.
포대와 성벽을 장악한 기병대도 마찬가지. 적들이 느끼기엔 이미 조선군이 성내로 들어와 성벽을 장악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겠나.
허나 그건 모두 허수였고, 진짜는 지금 상륙하는 해군병들이었다.
“소대별로 모여!”
깃발을 높이 치켜든 소대장이 연신 호루라기를 불며 부하들을 긁어 모았고.
“후...”
제자리에서 발구름을 구른 소대원들은 투구 밖으로 깊은 호흡을 내뱉으며,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 두근거리는 심장을 다독였다.
이윽고 5척의 신형조운선에서 병력이 모두 하선을 끝마치자, 무려 1개 연대가 부둣가에 정렬을 끝마쳤다.
안 그래도 큰 신형조운선에 전마가 아닌 병력을 꽉꽉 채워서 왔으니, 한 척당 못해도 이백명 넘게 타고 오지 않았나.
병력을 모두 토해낸 신형조운선은 끼익! 부둣가의 모래바닥을 장대로 밀어내며 부두에서 멀어졌고, 그대로 후진하듯 뒤로 밀려났다.
“진격!”
대대장인 부함장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천천히! 발맞춰서 움직여라!”
소대별로 찢어진 해군병들이 척척. 듣기만 해도 위협적인 발소리를 내며 성문을 넘어 성내로 진입을 시작했다.
해군병이지만 전부 장창을 쥐고 있고, 또 하나같이 검은 두정갑을 입고 있지 않나. 기병대가 파도처럼 연거푸 밀어닥쳤다면, 해군병들은 해일처럼 묵직하게 관도와 골목길을 점거해 나갔다.
천진항에는 첩자를 집어넣을 수 없어서 지리를 알지 못하지만, 어차피 전부 장악할 생각인데 굳이 따질 필요가 있나.
대대장은 멀리서도 우뚝 솟아 있는 전각을 향해 병력을 이끌고 움직였다.
쿵쿵쿵. 발맞춰 땅을 흔드는 진동과 굉음이 골목을 뒤흔들었고, 그 위력을 이기지 못해 담벼락 위에 올려 있던 기왓장들이 저절로 굴러 떨어졌다.
대대별로 전열을 이루던 제대는 성문을 나오기 무섭게 중대로 쪼개지고, 또 좁아지는 골목길에 맞춰 소대로 쪼개졌다.
다섯이 겨우 어깨를 맞대고 설 정도로 좁은 골목길을 두고, 우르르 달려오던 천진수군과 표정 없는 목각인형처럼 전진하던 해군병이 마주치자.
“저... 적이다!”
“온다!”
“막아!”
적병들은 비명인지 고함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었고, 해군병들은 떨리는 눈동자를 애써 감추며 얼굴을 굳히고 걸음을 이어갔다.
쿵쿵쿵. 선두에 선 해군병들은 장창을 앞에 세우고 철벽처럼 나아갔고, 그 모습에 절로 겁에 질려버린 적병들은 앞으로 돌진하는 게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엉덩이를 빼고 뒷걸음질을 쳤다.
뒤를 돌아보며 겁먹은 목소리를 내보지만, 뒤쪽에 있는 병사들은 앞에서 무슨 일이 펼쳐지는지 보이기나 하겠나.
“...”
둘 사이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서로의 표정이 읽힐 정도로 가까워지기 무섭게. 삐빅! 호각소리가 골목길의 정적을 깨부셨다.
“발사!”
쉐에엑! 선두에 선 창병 뒤를 따르던 후열의 해군병들은 일제히 활시위를 당겨 허공에 날려 보냈다.
선두가 아니고서야 어차피 적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지만, 굳이 적을 봐야만 사격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어차피 적이 앞에 있는 건 확실하니, 해군병들은 보지도 않고 그저 소대장의 명령에 따라 화살을 날렸다.
“끄억!” “켁!”
“화살이다!”
그리고 파공음과 함께 적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오자, 보지 않아도 제대로 들어간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다시!”
창병 뒤에 서서 소대깃발을 들고 있던 소대장이 목청을 높이자, 제자리에 멈춘 해군병들은 다시금 활시위를 당겼고.
“발사!”
쉐에엑! 수십발의 화살은 포물선을 그리며 아까의 궤적을 반복했고, 퍼퍼퍽! 섬뜩하면서도 묵직한 소리가 귓가를 찔렀다.
해전에서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화포고 그 다음이 화살 아닌가. 그런 만큼 해군병들은 한명한명이 명사수나 다름없었고, 지금까지의 훈련성과를 증명하듯 화살비는 제대로 적 제대를 무너뜨렸다.
“전진!”
삐빅! 호각소리와 함께 창병을 앞세운 제대는 골목길을 밀치고 나아갔고, 이내 곧 자신들의 발밑에 화살에 맞아 쓰러진 적병의 시체를 지나칠 수 있었다.
다만 화살에 맞아 사망한 이들의 수는 고작해야 일곱. 골목길을 가득 메우며 달려왔던 것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숫자니, 적들은 화살비가 쏟아지기 무섭게 곧장 꽁무니를 말고 도망친 모양이다.
“...”
아니나 다를까. 활시위에 화살을 얹혀 놓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해군병의 눈에, 기이하면서도 어처구니없는 모습이 들어왔다.
골목길에 오목하게 들어간 집의 문이 열려 있었는데, 적병들이 자신들의 무기인 박도와 창 따위를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게 보였다.
하나같이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고, 앉아 있는 몇몇의 땅바닥은 오줌이라도 쌌는지 색이 짙게 변해 있었다.
그 옆의 마루 한쪽에는 두려운 눈동자를 숨기지 못한 일가족이, 무단 침입한 병사들을 차마 내쫓지도 못하고 버들가지처럼 파르르 떨고 있었다.
“무시하고 간다.”
“옙!”
소대장 또한 그 모습을 봤는지, 소대원들의 동요를 느끼기 무섭게 목청을 높였다.
선발대이자 상륙군의 목표는 적병을 하나라도 더 죽이는 게 아니라, 최대한 빠르게 적병을 해산시키고 천진항의 영역을 확보하는 것.
이미 항전의지를 잃은 적을, 민가를 뒤져가며 하나하나 찾아서 잡아 죽일 필요가 없었다.
“후속부대가 처리할 거다. 계속 전진하다!”
“합!”
소대장은 다시금 흔들리는 부하들을 다잡았고, 모두는 우렁차게 대답하며 발걸음을 옮겨갔다.
선발대로 투입한 1개 연대는 골목길과 관도의 너비에 맞춰, 중대나 소대로 쪼개져 부두쪽에서부터 일제히 밀고 나갔다.
흡사 성긴 빗자루로 도시를 쓸어버리듯, 길이란 길은 모조리 틀어막고서 내륙 쪽으로 밀고 나갔다.
부족한 병력은 계속해서 충원되는 후발대가 채워줄 게 분명.
“정렬!”
“1중대!”
선발대가 말끔하게 밀고 지나간 부둣가에선 어느새 상륙한 또 다른 연대가 제대를 맞춰 정렬을 끝마치고 있었다.
이윽고 모든 병력이 하선해 제자리를 찾자, “진격!” “선발대를 따라라!” 삐빅!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호각소리에 맞춰, 척척. 발을 맞춰서 성내로 진입했다.
시가전인 듯, 시가전이 아닌 듯, 뭔가 애매한 상륙작전은 조선군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탄력이 붙었다.
“막아!”
장창을 쥔 선두가 굳건하게 버티며 전열을 지키는 동안. “끄억!” “컥!” 무작정 박도를 쥐고 달려온 천진수군은 해군병들에게 가까이 붙어보지도 못하고 가시에 찔려 쓰러졌다.
비록 대기병장창은 아니지만 해군병이 쓰는 장창도 충분히 길지 않나. 굳이 힘들게 휘두르고 찌르고 할 것 없이 우직하게 자리만 지키고 있으면, 두려움과 조바심을 이기지 못한 적들이 알아서 달려와 창끝에 몸을 박았다.
“쏴라!”
진짜 무섭고 피해를 야기 시키는 건 역시나 화살비.
앞은 장창벽에 막히고 옆은 담벼락과 담장에 막힌 적병들에게, 쉐에엑! 짐승털 투구와 가죽 투구를 쓴 조선군 머리 위로 날아오는 화살은 사신의 손길과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피하지도 못하게 날아온 화살은 그 누구도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이승의 문턱을 넘게 해줬고, 기세 좋게 조선군을 향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더 많은 이들을 저승으로 향하는 배에 태워 보냈다.
부두를 통해 계속해서 밀려오는 해군병들은 성내로 투입됐고, 무려 50척에 가까운 신형조운선이 자리를 비켜주고 돌아가자 부둣가는 더욱더 부산스러워졌다.
“조심! 조심!”
“옆으로 옮겨!”
“여기 못을 더 가져와!”
부두에 달라붙은 신형조운선에선 지금까지의 어설픈 나무다리가 아닌, 못으로 고정된 진짜 다리가 만들어졌다.
선원들은 죄다 갑판 위로 올라와 밧줄과 도르래를 붙잡고 용을 썼고, 부두에 내린 선원들은 홋줄을 묶어 놓는 말뚝인 계선주에 새롭게 밧줄을 묶어 다리를 고정시켰다.
안 그래도 상륙하기에도 바쁜 와중에 이런 공사를 진행한 건, 그만큼 중요한 물건을 내려야 하기 때문.
“끙차!”
“하나! 둘!”
선원들은 야전화포의 포가를 조심스럽게 굴려 조운선 밑으로 내려 보냈고, 밧줄로 칭칭 감싼 포신을 나무다리에 태워 미끄럼 태우듯 내려 보냈다.
야전화포인 만큼 함포에 비해 한참 작지만, 그래도 화포는 화포 아닌가. 사람 손으로 들고 옮기엔 무리가 있고, 그 숫자 또한 만만치가 않다.
병력을 먼저 쏟아낸 탓에, 이 한척의 조운선에 30문 가까운 야전화포와 화포병들이 타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