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5. 챕터62. 유인하다 (8)
그렇게 상륙병력의 마지막 퍼즐이라 할 수 있는 화기대가 하선하고 있을 때. 부둣가 중앙에선 전령을 담당하는 특전대 기병들이 부산스럽게 오가고 있었다.
“무기고를 점령했습니다.”
“동쪽에 위치한 화약고를 찾았습니다. 화포와 화약. 모두 아직 배분되지 않은 듯 합니다.”
전령들은 바쁘게 오가며 성내로 진입한 병력들의 성과를 읊어댔고.
“무탈하게 진행되는 군요. 장군.”
“그래야지.”
보고를 받은 이들은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천진 상륙병력을 총책임지는 장군인 최윤덕 또한 마찬가지.
겨우 육군기병 1개 대대와 해군병 1만명으로 상륙한 것치고는 굉장히 매끄럽게 전황이 흘러가고 있었다.
‘다만 이게 과연 우리가 잘하는 걸까? 아니면 천진수군이 그만큼 엉망인걸까?’
최윤덕은 어느 한곳도 불타지 않아서, 연기조차 피워내지 않고 있는 천진항을 굽어보며 생각에 잠겼다.
상륙작전이 어려운 건 자명한 이치이고, 그만큼 서로 격렬하게 뚫고 막다보면 격양되기 마련.
그로 인해 백성들이 피해를 입거나 도시 자체가 엉망이 되기 십상인데... 지금은 상리에 벗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멀리서 보면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지 의심할 정도로, 분위기가 이상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해군병이 잘 싸워주는 것 같나? 아니면 천진수군이 엉망인 것 같나?”
“둘 다 인 것 같습니다. 아마도 산동상인들을 통해 들은 소식이 사실이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그럴 거야.”
‘요동이나 북평부나, 하여간 파벌이 문제군.’
최윤덕은 돌아가는 상황을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북평부의 뿌리는 연왕부에 닿아 있고, 연왕부는 명이 중국을 석권한 후. 요동을 지원하게 위해 만들어졌다.
연왕은 북원잔당 및 여진과 몽골의 준동을 막는 임무를 맡았고, 연왕부는 자연히 중국전역에서 모인 병사들이 주둔하는 한편 북직례 호족들의 지원을 받았다.
문제는 명이 망하고 나서 연왕부가 북평부로 바뀌면서 발생했다.
다른 모든 지역이 그렇겠지만, 북직례는 특히나 다른 지방에서 온 병사들이 많았고, 이 병사들을 묶기 위해선 자연히 군벌과 군부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연왕부 내전이 펼쳐진 건, 어쩌면 북평부의 군벌들이 연왕과 손을 잡은 북직례 호족들을 밀어내서 그들의 땅과 이권을 차지하기 위한 다툼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이렇듯 호족과 외부군벌이 그 어느 지역보다 복잡하게 섞여 북평부는 태생적 한계로 인해 파벌 싸움이 극심할 수밖에 없었다.
군벌은 지지기반이 없으면 도적떼와 다르지 않으니, 그 군벌이 호족으로 변모하든 뭘 하든 어찌됐건 이권을 차지해야 하는데... 북직례라는 한정된 땅 덩어리 안에서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선, 결국 서로를 뜯어먹는 방법 말곤 없지 않나.
북평부가 유독 팽창의 야욕을 뿜어낸 건,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이었을 수도 있다.
“맞나?”
“그렇습니다. 지금까지의 북평부의 모습을 보면, 분명히 그러합니다.”
“그래서 천진항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었겠지.”
“예...”
최윤덕의 말에 부함장들이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진수군도 북평군부 파벌 중 하나였을 거고, 천진수군이 있을 때는 꽤나 힘이 강한 파벌이었을 거다.
요동과 산동의 무역선을 약탈하며 얻는 수익은 결코 만만치 않고, 북직례 내부에선 이들을 대체할 방법이 없었을 테니까.
허나 조선이 천진수군을 박살내면서 천진항을 둘러싼 파벌은 급격하게 힘을 잃었을 거다. 무역약탈이 없으면 과연 천진파벌. 수군으로 이뤄진 파벌이 존재해야 될 이유가 있을까.
설령 재건을 한다고 한들, 과연 재건한 천진수군으로 조선해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까.
“힘들다고 보지 않았겠나?”
“아마도 그랬을 겁니다.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아국으로 인해 힘이 꺾여버린 수군파벌을 북평부의 다른 파벌이 되살아나게 놔두지 않았겠지요.”
“그랬을 거야.”
‘그래서 천진이 공격 당한지 수년이 지났는데도, 전혀 달라진 게 없었겠지.’
호족도 섞여 있겠지만, 역사가 짧은 군벌, 군부 파벌인 만큼 힘을 잃으면 급격하게 주저앉는 건 당연한 말.
수군을 재건하는 건 막대한 비용이 들어갈 테고, 이 비용 또한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니 북평부 예산에서 갈라먹어야 한다.
아마도 북평부 파벌은 천진수군이 날아간 기회를 이용해, 아예 그들을 날려버리고 천진수군에게 들어갈 예산을 자기 쪽으로 당겨오기 위해 노력했을 거다.
“하지만 천진파벌 또한 그냥 막연히 말라 죽기만을 기다릴 순 없었을 테니... 억지로라도 천진수군의 틀만큼은 갖추려고 했겠지.”
“예. 천진항에 병사들이 아직 남아 있는 걸 봐선, 그게 확실할 겁니다.”
군벌인 이상 휘하 병사가 없으면 힘을 완전히 잃는다. 그들은 호족마냥 장원이나 대토지를 가지고 있지도 않으니까.
그러니 배가 없는 천진수군이라고 할지라도 이들을 수군호에 묶어 놓고 천진항과 천진에 박아놔야, 파벌이 살아남고 티끌만큼의 예산이라도 뜯어낼 수 있는 법.
물론 그 예산이 과연 천진수군에게 돌아갈지, 아니면 군벌 지휘부나 호족집안의 뒷주머니로 흘러갈지는... 굳이 따져보지 않아도 자명하겠지만, 어찌됐건 천진수군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을 거다.
“문제는 천진수군병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지금과 같은 상황에 대해선 알고 있을 거고, 겉으로 표현하지 못해도 불만이 있지 않겠나?”
“분명 그럴 겁니다. 배가 없으면 수군호를 해체해 다른 지역으로 돌릴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아니면 아예 군호에서 벗어나 군역에서 해방될 수도 있겠지요.”
“허나 천진파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단 말이지...”
군호제를 유지하는 이상, 천진항의 백성들은 천진항을 떠날 수가 없다.
헌데 배가 없으면 먹고 살 길이 막막하고, 몇 안 되는 고깃배로 물질해서 먹고 사는 것도 한계가 있기 마련.
차라리 다른 곳으로 이주하거나 농사라도 지으면 좋겠는데, 천진파벌은 죽었다 깨나도 수군호 해체를 허용할 리가 없다.
결국 파벌에 속한 고위지휘관이나 호족은 예산을 빼먹으며 흥청망청 부귀를 누리더라도, 수군호에 속해 있는 백성들에게는 그 영향이 미치지 않으니 천진항 자체가 말라 죽어갈 수밖에 없는 거지.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우리가 천진으로 밀고 들어왔을 때, 과연 천진수군병들 중에서 누가 천진항을 지키기 위해 싸우겠나.”
“...”
“차라리 자신들의 고혈을 빼먹는 천진파벌이 없어지고, 아국이 자신들을 다스려주길 바랄 지도 모르지.”
“...”
최윤덕이 찹찹한 마음을 토해내며 결론을 내리자, 부함장들 모두 쓴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대답하지 않아도,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나 보다.
“그래서 이렇게 쉽게 점령되는 것 아니겠나? 우릴 두려워하는 백성들도 많겠지만, 우리만큼이나 천진파벌을 싫어하는 백성들이 많을 테니까 말이야.”
“예.”
“뭐... 아국 입장에선 잘 된 것 아니겠습니까?”
부함장 중 누군가 피식 웃으며 말을 했고, 다들 알게 모르게 미소가 번져갔다. 맞는 말이다. 북평부가 자기들 살겠다고 삽질을 연거푸 했으면, 아국은 그 과실을 취하면 그만 아닌가.
뭐가 됐건 일이 쉽게 풀린 건 좋은 상황이다.
“천진항에 남아 있는 백성들은 천진수군병의 가족이나 마찬가지니, 그들은 아국이 온건하게 대하기만 한다면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싸우지 않을 것이야.”
“명심하겠습니다.”
“하급지휘관들도 모두 숙지하고 있으니, 무턱대고 적들을 죽이고 있진 않을 겁니다.”
“그래야겠지...”
최윤덕은 ‘여기서도 요동만큼이나 복잡하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속으로 쓴물을 삼키고 말았다.
그랬다. 연대기병들이 적병을 모조리 죽이지 않고 흩트려놓는 이유도, 해군병들이 적극적으로 적을 섬멸하지 않고 도주하게 내버려 두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헌데...?”
“...?”
“천진수군의 상태가 그렇다면, 천진항에 미련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과연 적들이 아국의 유인작전에 당해주겠습니까? 만약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면 대계가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순 없을 게야.”
최윤덕은 부함장의 우려에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북평부 내부에서 파벌 싸움을 하는 것과 아국이 천진항을 장악한 건 전혀 다른 문제일세. 천진항을 얻은 이상, 저들이 그렇게 자랑하는 산해관이 무용지물이 된 걸세.”
“그렇지요.”
“천진항이 함락당한 이상, 아국이 진심으로 북평부를 공략하려는 걸 깨닫게 됐으니... 파벌과 관계 없이 저들은 우릴 막으러 올 수밖에 없어. 천진항이 뚫리면 천진이 지척이고, 천진이 뚫리면 북평이 지척이니까.”
“예...”
천진을 가로지르는 해하강은 북평에서부터 발해만으로 이어진다.
해군력이 월등한 조선이 만약 강을 거슬러 오르기 시작하면, 그땐 재앙이나 마찬가지일 터. 어떻게든 거기까지 가기 전에 막으려 할 거다.
“설령 천진항으로 오지 않는다면, 아국이 해하강을 거슬러 올라 천진을 긁어주면 되지 않겠나? 천진항이 장악당한 이상 시간은 아국의 편이지.”
“천진항을 가만히 놔두면, 아국의 병력이 계속해서 상륙할 수 있으니까 말이지요.”
“그렇지. 물론 아국도 전쟁을 오랫동안 할 수는 없지만, 북평부가 그 사실을 정확히 아는 건 아니지 않나. 그들로선 답이 없어. 반대로 아국 입장에선 천진항만 차지하고 요동을 정비하면서 느긋하게 움직일 수도 있고 말이야.”
“물론 아국은 그럴 생각이 없지만...”
“북평부 입장에선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군요.”
부함장들은 돌아가며 의견을 내놨다.
북평부는 조선의 속사정을 모두 알 수가 없으니 이런저런 추측이 난무하겠지만, 최악을 가정하면 조선이 천진항을 차지하고 버티면서 힘을 비축해 계속해서 전쟁을 이어가는 거다.
이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무조건 천진항을 수복하기 위해 올 수밖에 없는 거지.
“그럼... 계획대로 천진백성들을 전부 이주시켜야겠지요?”
“그래야지. 누구 좋으라고 여기에 남겨두겠나? 천진에 사는 백성들이 대략 4만명쯤 되나?”
“예. 거기에 북직례 해안가에 사는 백성들까지 합치면... 얼추 6만명쯤 될 겁니다.”
부함장이 다음 계획을 언급하자, 최윤덕은 ‘당연한 소리를 왜 물어보냐?’는 듯, 냉큼 답을 던졌다.
고위지휘관이니 만큼. 이들은 자신들이 왜 천진을 공략했는지, 또 왜 산해관을 무턱대고 두들기고만 있는지 알고 있었다. 심지어 북평부를 무너뜨리고 나서, 북직례를 요왕부에게 넘겨주려는 것까지 말이다.
허나 삼백만명이 넘는 한족을 흡수하진 못해도, 기껏해야 6만명쯤은 얼마든지 흡수할 수 있지 않나.
요동 전체를 재건하고 탈바꿈하는 와중이니, 6만명 정도는 거기에 껴서 처리할 수 있는 인구수다. 지금 조선은 그 정도는 소화시킬 여력이 있으니까.
“설령 북직례를 요왕부에 넘기더라도 천진항은 우리가 차지해야할 땅이지.”
“...”
“그러니 요왕부에게 수군을 재건할 기회와 역량을 남겨둘 필요가 있겠나? 그들이 움직이기 전에 우리가 다 털어가야 훗날을 대비할 수 있고, 또 그 정도 이득은 있어야 막대한 전비를 쓴 보람이 있지 않겠나.”
“그렇겠지요.”
요동을 차지해 발해만을 손에 넣었는데, 요왕부에게 바다로 나올 여력을 남겨둘 리가 만무.
조선이 천진을 공략하는 와중에, 모든 해안가에 육군기병을 상륙시킨 건, 이런 이유도 있었다.
북직례 출신 중에서 배를 만들 줄 알거나, 혹은 물질을 할 줄 아는 백성들을 전부 조선으로 끌고 가려는 의도였던 거지. 수지타산을 맞추는 건 둘째치고 말이다.
화기대가 모두 상륙해 화포를 연결해 성안으로 들어가고, 곧 이어서 포대로 올라가 성벽에 죽죽 배치되기 시작했다.
가져온 화포만 해도 무려 150문에 달했다. 아무리 구경이 작은 야전화포라고 해도, 성벽 위에서 쏴대는 화포가 150문이면 수성하는데는 큰 무리가 없을 게 분명.
성벽 위는 이미 조선군이 장악해 화포를 배치하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고, 성내의 천진수군 또한 해군병에 의해 강제적으로 해산되고 있었다.
이윽고 기다리던 보고가 날아들었다.
“장군!”
“...?”
“천진항 관아를 함락시켰습니다. 다만...”
“책임자는 아무도 없었겠지? 특히나 천진수군의 지휘관들과 호족들은 말이야.”
“예...”
부함장이 최윤덕을 대신해서 묻자, 보고를 하러온 특전대원이 할 말을 잊고 말을 흐렸다.
“그들은 아예 이곳에서 머물지도 않고, 천진에서 사람을 부려서 관리했던 모양입니다.”
“음. 천호장은 있었나?”
“아직 정확히 나온 건 아니지만... 항복한 요동병사들의 말에 따르면 백호장들만 이곳에 머물고, 천호장들은 천진에 있다고 했습니다.”
“역시!”
“결국 그랬군.”
다들 예상했던 추측이 맞아 들어가자, 한마디씩 곁들였다.
“지휘부를 이동하지.”
“예. 준비해 놓겠습니다. 충성!”
특전대원은 최윤덕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시 말을 달려 나갔고, 최윤덕과 부함장들은 부관 및 호위를 맡은 금군들과 함께 성 내로 조심스럽게 진입했다.
“...”
성내는 침묵과 억눌림이 뒤섞인 묘한 분위기에 장악당해 있었다. 조선군이 이렇게 뜬금없이 쳐들어 올 줄은 미처 예상을 못한 게 분명.
무심하게 지나치는 해군병들을 백성들이 두려운 눈길로 바라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굳이 뒤돌아보지 않아도, 담벼락 너머에서, 창문 너머에서 조선군을 살피는 눈동자가 온 사방에서 떨리고 있었다. 그 시선은 피부에 닿는 듯해서, 호위 금군에게 단단히 둘러싸인 지휘관들조차도 느껴졌다.
“가져온 식량을 풀지.”
“어차피 이주시킬 텐데, 효과가 있겠습니까?”
“이주를 하더라도 어차피 식량을 나눠줘야 하지 않나? 연산항이나 금주에서 배급하나, 이곳에서 배급하나 큰 차이가 없을 걸세. 어차피 하루아침에 천진백성들을 다 이주시킬 수도 없을 터... 못해도 5,6일은 걸릴 테니, 그 안에 다 까먹겠지.”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