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챕터62. 유인하다 (9)
“식량으로 지금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다면 아낄 필요야 있겠나? 어차피 군량은 앞으로 계속 올 테니까 말이야.”
“알겠습니다.”
최윤덕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뒤따르던 부관들 몇이 얼른 부둣가로 되돌아갔다.
육군기병, 해군병, 화기대 순으로 하선시킨 신형조운선은 이미 되돌아갔고, 지금은 군량과 보급품을 실은 신형조운선이 부둣가에 있는 상황.
천진에 보급하는 건 전혀 문제가 안 되니, 잠깐 고생하는 걸로 천진백성들의 적대심을 해소시킬 수만 있으면 충분히 해볼만 한 일이다.
이윽고 일행은 천진항 중앙에 위치한 관아 근처에 도착했고, 기다렸다는 듯이 몇몇 중대장들이 달려와 구두보고를 이어나갔다.
“아군 사상자는 21명. 적병은 대략 203명으로 추산됩니다.”
“오...!”
“좋군.”
중대장의 보고에 모두가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고난하고 지난할 것 같던 상륙작전이었으나, 어째 요동에서 싸울 때보다 희생이 더 적어 보인다.
“제대로 안 싸운 게 확실하군?”
“그도 그렇지만, 아국이 천진을 불사른 후에, 천진수군병들은 제대로 된 훈련조차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군역 대신에 노역을 했다고 하는데...”
“노역?”
최윤덕의 의아한 듯 되묻자, 중대장은 얼른 답을 이어갔다.
“천진과 천진항 사이의 황무지를 개간하는 일을 맡았다고 했습니다. 가끔씩 치수공사에 동원됐다고도 하더군요. 게다가 대부분 군선보다는 어선을 타고 나갔다고 했습니다.”
“어선이라...?”
“선소가 있는데, 보시겠습니까?”
최윤덕은 주변의 부함장들을 돌아봤고, 그중 한명이 자진해서 살펴보겠다고 하고선 떠나갔다.
“그래서. 군선은 안 만들고 어선을 대신 만들었다? 헌데 왜 보이지 않았지?”
“해하강에 있다고 합니다. 육군병들이 확인하러 성 밖으로 떠났습니다.”
“아...”
“하긴, 아국해군이 시도 때도 없이 천진 앞바다를 오갔으니, 걱정돼서라도 숨겨둔 모양입니다.”
“아국의 어선과 비교할 바가 못 되지만 어쨌든 있어서 나쁠 건 없지 않겠습니까? 어선도 모두 챙기는 게 좋겠습니다.”
“물론.”
최윤덕 또한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하강은 천진을 관통해 발해만으로 빠져나오는 강으로, 미래와 달리 천진항의 규모가 한참 작은 이 시대엔 천진항 옆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군선이 없을 거라 예상했고, 또 있더라도 별반 상관없을 거라 생각하고 후순위로 미뤄뒀었는데... 천진수군은 예상보다 더 해서, 군선을 아예 만들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계속 걸음을 옮겨 안쪽으로 향하자, 으리으리한 장원이 그들을 맞이했다.
천진항의 관아치고는 꽤나 커서, 뭐랄까... 아주 작은 황궁과 비슷한 느낌을 줬다.
“특이하군. 천진항에 살던 호족 장원인가?”
“예. 이야기를 들어보니, 호족 장원을 사들여 연왕이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그는 정작 여길 사용하지도 않았지만 말이죠.”
“연왕이라...”
최윤덕은 옛 망령의 이름에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원래 역사에선 명나라의 새로운 전성기를 열었어야 할 인물이지만, 지금 역사에선 운석핵꿀밤과 함께 사라지지 않았나.
그 탓에 왠지 모르게 피식 웃음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조선이 옛 명의 성세를 뛰어넘어, 이렇게 연왕의 땅이었던 천진까지 노리고 있으니까 말이다.
“충성!”
“오셨습니까.”
활짝 열린 문을 열고 들어가자, 미리 정리하고 있던 해군병들이 최윤덕 일행을 맞이했다.
습관처럼 쓱 주변을 훑어보는데, 어째 바닥에 핏자국이나 전투의 흔적은 보이질 않았다.
“싸움이 없었나?”
“예. 쉽게 항복했습니다. 포로로 잡아놨는데 보시겠습니까?”
“됐네.”
최윤덕은 중대장의 말에 가볍게 손을 내젓고선, 혹시나 싶어서 한마디 곁들였다.
“잘 대해주고 있나?”
“물론입니다. 장군. 싸우지도 않고 알아서 항복했는데, 굳이 박하게 굴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잘했다.”
중대장이 혹여나 ‘잘못한 건가?’싶어 말을 흐리자, 최윤덕은 얼른 칭찬을 던져줬다.
“정보는 뽑아내고 있나?”
“예. 확실히 예상대로 천진파벌의 장군들을 향한 적개심이 상당했습니다. 아무래도...”
“...?”
최윤덕이 계속 말하라는 듯 눈빛을 뿌리자, 중대장은 씁쓸한 미소를 숨기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천진수군이 몰락한 후로,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 푸대접을 당했던 모양입니다.”
“음.”
“허허...”
“천진항에 남아 있던 백호장들은 정작 파벌에 제대로 속하지도 못했지만, 천진수군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음...”
오면서 했던 예측이 정확히 맞아 들어가자, 최윤덕을 비롯한 부함장들 모두 쓴웃음을 토해내고 말았다.
휘적휘적 걸음을 옮겨 관아의 중앙에 있는 청사로 향하자, 시끌시끌한 소음이 밀려들었다.
딱히 지시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움직이고 있다. 소대장으로 보이는 이들이 어디선가 주워 온 탁자를 쫙 깔아놓고서, 관아의 서류를 빼와 확인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잘하는군.”
“요동에서부터 해왔던 일이라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음.”
최윤덕이 조용히 중얼거리자, 부함장 중 하나가 히죽 웃으며 답을 던졌다.
사실 최윤덕이 최고지휘관으로 이들을 이끌고 있다지만, 그는 육군 출신 아닌가. 그렇다보니 부함장들 입장에선 자기 수하라고 할 수 있는 해군 출신 하급지휘관들이 퍽 자랑스러워, 어깨에 절로 힘이 들어가는 모양이다.
“충성!”
“계속해라. 정리가 끝나면 보고 할 준비를 하고.”
“옙!”
“알겠습니다!”
최윤덕이 쓱쓱 손을 흔들며 지나치자, 경례를 했던 소대장들의 손놀림이 더욱더 빨라졌다.
최윤덕 일행이 관아를 살펴보는 동안, 중대장과 소대장들의 보고가 속속 부함장들의 손에 취합되어 모여들었다.
“화약고에 화약이 비축되어 있긴 한데, 아군이 쓰기에는 애매해 보인다고 하는 군요. 뭐. 못 써먹을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믿고 쓰긴 힘들겠군.”
“예. 그래 보입니다.”
흑색화약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이상 도토리 키 재기나 다름없지만... 그래도 거듭해서 개량된 조선의 화약은 세계 최고수준 아닌가. 아무리 북평부의 화포와 화약기술이 발전했어도, 조선보다 못하는 건 당연.
목숨 걸고 화포를 다뤄야 하는 화기병들 입장에선, 조선화약이 아닌 북평군 화약을 쓰는 건 영 못마땅한 모양이다.
“그래도 예비용으로 남겨두게. 혹시 또 모르니까.”
“예. 그리 지시하겠습니다.”
부함장 중 한명이 부관을 시켜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기 무섭게, 다른 부함장이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 화포는 총 48문이 있는 걸로 파악됐습니다.”
“그것밖에 안되나?”
최윤덕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부함장들 또한 의아해서 시선이 쏠리고 말았다.
썩어도 준치라고, 그래도 북평부 아닌가. 아무리 화포가 비싸고 만들기 어려운 물건이라고 해도, 요충지인 천진항을 수비하는데 화포가 저것밖에 안 된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사실 조선군이 워낙 화포를 중시하고 좋아해서 그렇지, 48문도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니다.
연오랑이 화포개발에 끼어들면서, 조선은 원래 역사처럼 천지현황으로 구별되는 화포로 발전하지 않았다.
소구경 화포를 없애고 야전화포, 함포, 공성포로 단일화 시키면서 대구경 화포를 전격적으로 도입했다. 안 그래도 조선초기 화포는 후기 화포에 비해 크기가 작았는데, 시대를 뛰어넘어 곧장 후기 화포의 크기, 어쩌면 미래에 서방에서 쓰는 화포와 유사하게 발전해 나갔다.
말이 좋아 야전화포지, 실상은 원래 역사의 현자총통과 비슷한 크기였으니까.
그리고 조선은 이런 화포를 활용해 지난 십수년간 중국을 두들겨 패고 다녔는데, 중국이라고 가만히 있었겠는가.
비록 포가에 대한 개념까지 훔쳐가진 못했지만, 조선화포만큼의 화력을 뿜어내기 위해서 중국 또한 발전을 거듭했고 화포에 일가견이 있던 북평부는 더욱더 그러했다.
그러니 북평부의 화포 또한 명나라 시절보다 훨씬 커지고 발전했으니, 48문이라는 수는 마냥 적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던 거지.
하지만... 그럼에도 북평부의 덩치를 생각하면 적어도 너무 적었다.
모두가 의아함을 품은 눈빛을 숨기지 못하자, 보고를 하던 부함장은 얼른 말을 이어갔다.
“그게... 포로들의 이야기를 취합한 결과. 예전에 천진이 공격당한 피해를 회복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군선에 실어놨던 화포가 다 바다에 빠지는 바람에, 그걸 아직도 보충하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아...”
“하긴. 족히 수백문은 날려먹었을 테니...”
과거 천진을 공격할 때. 말 그대로 천진수군의 군선을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불태워 침몰시키지 않았나. 그때의 여파를 아직도 회복하지 못한 모양이다.
“바다에서 몇 문 건져냈다고는 하는데... 아무리 천진항 앞바다의 수심이 얕다고 해도 쉽게 됐겠습니까.”
“그랬겠지...”
최윤덕은 충분히 이해가 되어,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난파되어 가라앉은 군선을 찾고 또 헤집는 것도, 그리 깨끗하지 않은 바닷속에서 밑바닥을 뒤져가며 화포를 찾는 것도, 그 무거운 화포를 끌어올리는 것도. 하나하나가 모두 시간과 목숨을 걸어가며 해도 불확실한 작업이다.
물질에 능한 천진수군이라고 할지라도, 목숨을 걸고 잠수해 인양작업을 할만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그것도 푸대접을 받아가면서 말이다.
“확실히... 천진파벌이 밀리긴 밀린 모양입니다.”
“수군이 제대로 편제를 이루기 위해선, 적어도 화포는 배치해야 했는데 말이야.”
“예. 아무리 중국의 수군이 화포를 활용하는데 미숙하더라도, 아국이 화포를 어떻게 쓰는지 봐왔지 않습니까. 전함을 만들지는 못하겠지만, 군선에서 화포를 써보려고 어떻게든 따라 했을 텐데...”
“알면서도 하지 못했다는 건, 반대한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겠지.”
“예. 수군이 크는 걸 싫어하는 파벌이 힘을 쓴 게 분명합니다.”
정치의 생리에 대해서 아는 고위지휘관들. 최윤덕 일행은 일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보지 않아도 머릿속에 그려졌다.
천진수군이 없어진 이상 수군에 배정된 예산은 다른 분야로 돌려졌을 거다. 허나 천진파벌이 가만히 있었겠나. 어떻게든 천진수군의 뼈대만 살려서 시간을 질질 끌었을 거다.
허나 수군의 재건이 불가능한 건 모두가 알고 있을 터, 시간이 지나면 어차피 실패할 테니 천진파벌은 자기 주머니를 채우는 일에 몰두했을 거다.
반대 파벌은 그런 천진파벌을 공격해 예산을 뜯어내, 자기 사람들을 채워 넣는데 정신이 없었을 터... 결국 천진항에 살고 있는 백호장들만,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 이리저리 굴러다녔을 거다.
“맞나?”
“예. 말을 들어보니 그렇다고 하더군요. 거짓일 수도 있겠으나... 백호장들은 천진이 아닌 천진항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고 하니... 간계奸計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위략을 꾸미기 위해서 천진항을 희생하는 건, 배보다 배꼽이 더 클 테니까.”
“예.”
“천진항의 방비가 이것 밖에 안 되면... 반대로 천진과 북평은 더욱 철저하겠군?”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저희가 예상한 것보다 북평군의 전력이 약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나 화포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북직례에 동광산이 있다지만, 화포를 만드는 게 한두푼 들어가는 게 아닐 테니까요. 아마...”
“화포 또한 파벌에 따라 나눠가졌을 지도 모른다는 건가?”
“예. 뭐... 그럴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부함장 중 한명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고, 모두는 서로를 보며 미심쩍은 눈빛을 흘려댔다.
‘아무리 부패해도 그렇지, 화포를 빼돌려 자기주머니를 채웠을까?’라는 의심과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그리고 요충지에 맞춰 화포가 배치된 게 아니라, 파벌의 중심부에 화포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라는 의심이 교차했다.
“확신할 수 없으니 최악을 가정하는 게 좋겠지. 아무튼 북평군이 화포를 가져와 공성을 시도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게.”
“예. 알겠습니다.”
“성문은 어찌하는 게 좋겠습니까?”
“굳이 필요가 있나? 어차피 가옥을 헐어버려야 할 테니, 그 잔해로 성문을 아예 막아버리게.”
“알겠습니다.”
아직 전쟁이 제대로 시작되지도 않았지만, 이미 요왕부와 조선조정은 말을 다 맞춰놨지 않나. 천진항은 조선의 영구 조차지가 될 예정이니, 천진항을 어떻게 쓰던지 조선 마음대로다.
그 첫걸음이 이들 최윤덕 일행의 손에 달려 있다.
최윤덕은 세월의 흐름에 맞춰 겹겹히 쌓여 복잡하게 만들어진 천진항의 가옥들을 그냥 시원하게 밀어버리고, 다른 조차지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계획도시로 만들어 새롭게 채워놓을 생각이었다.
그러니 집을 부수는 게 뭐가 문제 일까. 어차피 이주해야하니 천진백성들의 사정을 봐줄 필요도 없을 거다.
“육군이 제때 준비되겠지요?”
“물론일세.”
다만 부함장 중 한명이 혹시 모를 불안감을 비추자, 최윤덕은 걱정말라는 듯 히죽 미소를 지어보였다.
공성전이라고 해서 무작정 성문을 닫고 수비만 하는 건 아니다. 때에 따라선 적의 공성병기를 파괴하거나, 전과를 확대하고, 보급을 힘들게 만들기 위해서, 성문을 열고 역공을 나가는 것도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니 부순 자재로 성문을 아예 막아버리는 건, 무작정 좋은 선택이 아닌데... 조선군은 공성전을 타계할 다른 방법이 있었다.
이미 부함장들도 알고는 있지만, 최윤덕은 다시금 확인시키려는 듯 말을 이어갔다.
“이미 육군이 상륙해서 북직례 해안마을을 점령했을 걸세. 해안마을 주민들 또한 이주 시켰거나 시키고 있겠지. 그러니 적이 천진항의 변고를 알아차리고 병력을 긁어모아 천진성벽 앞에 모습을 보이기 전에, 육군이 먼저 해안가를 무주공산으로 만들고 대기하고 있을 걸세.”
“예...”
“음.”
“1개 사단. 5개 연대가 동원됐는데, 북평부가 그걸 예상이나 하고 있겠나? 북평부는 아국이 그렇게 많은 병력을 단번에 상륙시킬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걸세. 어쩌면 저들보다 우리가 더 해안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자네들이 해온 작업 아닌가.”
최윤덕은 그리 말을 끊으며 부함장들을 바라봤고, 다들 그 눈빛에 맞서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