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챕터63. 뒤를치다 (1)
“...”
산해관주의 시선은 산 능선에서 옮겨가, 엉망이 된 산해관 성벽 위로 향했다.
성루는 이미 박살난 지 오래. 다른 곳은 성벽 꼭대기 부분을 노리고 포탄을 쏴댄 탓에, 꼭 톱니가 부러진 톱 마냥 군데군데 무너져 내린 흔적이 여실히 보였다.
특히나 바다 쪽 성벽은 타격이 심했고, 내륙 쪽 성벽 또한 처지가 닮아가는 중이었다.
고지대에 위치한 천진항의 포대를 공격하기 어려웠던 것처럼, 높은 선해관의 성벽 위를 정확히 타격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일.
그러니 조선군은 성벽의 꼭대기이자 모서리, 끄트머리를 노리고 포탄을 쏴댔다. 뭐랄까. 성벽을 무너뜨리는 느낌보다 성벽 꼭대기부터 갉아먹어서, 비스듬하게 깎아낸다는 느낌이랄까.
조선군의 이런 공격은 화포와 화포병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성벽이나 화포와 달리 화포병은 살과 피로 이뤄진 사람이라는 게 문제였다.
재수 없게 포탄을 정통으로 맞아 사망한 경우 보다, 부서지면서 사방으로 비산하는 성벽조각에 두들겨 맞아 사상당한 화포병이 너무 많았다.
당장 목숨이 위험하진 않더라도, 전력으로 투입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정도로 상처입은 화포병들이 매일 같이 쌓여간 거지.
허나... 참호에 익숙하지 않더라도, 산해관주와 장군들 또한 바보는 아니지 않나. 토벽으로 만든 포대가 효과를 보이는 걸 직접 목격했고, 얼른 조선군이 하는 방식을 따라했다.
그 결과가 바로. 무너진 성벽 위쪽에 흙무덤처럼 군데군데 쌓여 있는 포대였다. 산해관 성벽은 너무 두툼해서, 성벽 위에 저렇게 흙무덤을 쌓아도 공간이 남았으니까.
‘다만... 너무 늦었지. 진작 따라했어야 했는데...’
산해관주는 작게 혀를 차고 말았다.
이제 와서 후회해 본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조선군과 싸워보지 않았다면, 애초에 뭐가 문제였는지도 몰랐을 거다.
사실 포대라고 부르긴 하지만, 호족연맹은 물론 북평군 마저도 포대라는 개념에 대해서 정확히 인지하고 있지 않았다.
애초에 포가에 대한 개념이 부족해서, 성벽에 대충 거치해서 쏴대는 게 전부였지 않나.
“왜 포대를 만들어 화포병을 방어하지 않지?”라고 물을 수도 있지만... 해답은 단순했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지금까진 이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옛 명나라 시절의 주적은 몽골이었고, 화약병기가 없는 그들은 어떻게든 대충 화포를 갈기는 것만으로도 타격을 줄 수 있었다.
명이 망하고 중국이 쪼개진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화기는 개발하는 것도 유지하는 것도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 무기였고, 명이 망한 후 내전이 벌어졌을 때에 화포를 제대로 활용하는 세력이 없었다.
연왕부 내전 때도 마찬가지였고, 북평부가 만들어져 요동과 으르렁거릴 때조차 화포는 주력이 아니었다.
결국 시대를 뛰어넘어 화포를 주력으로 사용하는 조선군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는 거지.
그러니 화포 중심의 화력전, 공성전을 경험해 보지 못한 이상, 제 아무리 북평부라고 할지라도 포대라는 걸 만들 생각을 했겠는가.
동등한 무기체계를 갖춘 상대와, 서로 마주보고 진짜 화포를 사용해서, 포탄을 사정없이 주고받는 전투를 북평군은 산해관에서 처음 겪었다.
이게 얼마나 파괴적일지 감히 상상도 못해봤고 말이다.
그리하여 전쟁의 흐름이 변한 걸 산해관은 피로써 느끼고 깨닫고 말았는데, 그 진통과 대가가 너무나 뼈아팠다.
훈련시키기도 힘든 화포병들 중. 당장 전투에 투입할 수 있을 정도로 온전한 병사들은 고작해야 3할 정도 밖에 안 남았으니까.
어쩌면 이렇게라도 살려 낸 게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화포병들은?”
“포격을 당할 위험이 그나마 줄어들어서, 성벽 위에 오르는 걸 무작정 겁먹고 있진 않습니다.”
“음...”
함께 전장을 살피고 있던 천호장은 산해관주가 뭘 묻는지 재깍 알아차리고 답을 내놨다.
“그나마 다행인 건가...”
“...”
산해관주가 씁쓸하게 혼잣말을 내뱉자, 천호장은 차마 대꾸를 못하고 말을 흐렸다.
방금 전에 자기 입으로 위험하니, 성벽 근처로 가는 걸 만류하지 않았나. 천호장조차 그렇게 파악했으면, 성벽 위에 직접 올라 있던 병사들의 심정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성벽 위는 그야말로 사지가 되어, 화포병들은 흙으로 대충 쌓아 만든 토벽이 없었으면 두려워서 성벽에 다시 올라가지도 못했을 테니까.
“후...”
한숨과 함께 산해관주의 시선은 성벽 위에서 멀어져, 이번엔 성 밖으로 향했다.
조선군이 파 놓은 참호는 백미터 쯤 되는 거리까지 접근한 상태. 그 뒤로 저 멀리 조선군 진지가 아스라이 아른 거렸다.
멀리서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딱딱 각을 맞춰서 만들어 놓은 숙영지가 곳곳에 박혀 있었다. 얼마나 크게 만들었는지 내륙 쪽 산맥이 시작되는 부분부터, 파도가 몰아치는 바위 해안가 근처까지 숙영지가 펼쳐져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 놓은 사각 목책 안에는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게르 수백개가 빼곡하게 박혀 있었고, 그 외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임시 건물들도 부지기수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두드러지는 건, 바다 쪽에 만들어 놓은 숙영지. 너무 멀어서 정확히 뭘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지만, 대충 감이 오지 않나.
저들은 지금 바위해안에 흙과 모래를 쏟아가며 간척하고 있었고, 그 말인 즉 보급을 위한 임시항구를 만들고 있다는 뜻이었다.
저것만 봐도 조선군의 의지를 알 수 있었다. 저렇게 까지 준비를 하고 있다면 산해관이 함락되지 않는 이상 조선군이 손을 털고 포기할 가능성은 확실히 적어 보였다.
반대로 산해관은 그만큼 힘든 공격을 막아야 했고 말이다.
머릿속에 가득 찬 불길한 상념을 떨쳐내듯, 괜히 투정이라도 부리는 것 마냥 산해관주는 말을 토해내고 말았다.
“조선군은 백문이 넘는 화포를 가져왔다지? 그것도 크기 다른 화포를 섞어서 말이야.”
“예. 정확한 건 아니지만, 참호와 토벽의 개수를 헤아려 본 결과 그러했습니다. 물론 조선군도 아군을 속이기 위해 가짜로 만든 참호와 토벽이 있겠지만...”
“그래도 최소한 백문이 넘는단 말이지. 그래. 화포야 그렇다 쳐도 대체 화약을 어떻게 보충하고 있는 걸까. 지금껏 군선에서 쏴댄 화약을 생각하면 말이 안 되지 않나?”
모두가 궁금해 했던 질문을 산해관주는 다시금 꺼내들었고, 천호장은 눈을 부릅뜨고서 한마디 던지고 말았다.
“산동 놈들이 돈에 눈이 멀어서, 염초를 마구 팔아 넘겨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
이게 정답일지 확신하지도 못하지만, 천호장은 그렇게라도 화풀이 대상이 필요했는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산동이라...”
산해관주 또한 이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다만 산서상인을 통해 주워들은 정보에 따르면 산동 초석광산의 주 고객이 조선인 건 맞지만, 그래도 이건 솔직히 너무 많았다.
‘뭔가 비장의 비법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이야.’
산해관주는 괜히 사기만 떨어뜨릴 것 같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속마음을 삼켰다.
허나 짐작이나 했을까. 그의 생각이 정답인 걸 말이다.
이 시대엔 중국조차도 오물을 활용해 함토를 만들어내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예전 조선처럼 아궁이와 처마 밑을 뒤져가며 함토를 찾거나, 초석광산을 활용했지. 북직례에는 초석광산이 없으니 전자의 방법을 써야했고.
그러니 조선이 염초밭을 만들고, 염초를 더욱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공급받기 위해 오물수거기업을 세웠다는 걸 짐작이나 했겠나.
조선이 아무리 외국과 무역을 많이 해도, 외국상인이 무역항을 벗어나 조선내지까지 들어오는 경우는 없었다. 오물수거기업에 대해서 알 일도 없었고, 상인의 입을 통해 들은 정보만으로는 염초제조방법을 훔쳐갈 수도 없었지.
그리하여 조선이 양전사업을 끝마치고, 전국의 모든 도시에 오물수거기업을 완성하고 수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지금껏 쌓아놓은 오물은 숙성이 완료되어 비료와 초석으로 변해 쏟아졌고, 조선에 사람이 불어나면 불어날수록 그 양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어쩌면 낭비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화약을 소모할 수 있었던 거고, 원래 역사와 달리 대구경 화포를 주력으로 사용할 수 있던 것이고 말이다.
“그러니 적들의 화약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건 그저 망상일 뿐인데... 밖으로 나갈 수도 없군.”
“...”
천호장은 가볍게 한탄하는 산해관주를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이미 대차게 한번 말아먹었으니까.
산해관이 산능선에 포대를 만드는 작업만 방해했을까.
야밤중에 몰래 성문을 열고 나가 참호와 조선군 화포병들을 공격해 보려 했지만... 조선군이 어째서 몽골과 여진을 두들겨 팰 수 있었는지 확인하는 사례가 되고 말았다.
조선군을 처음 봤을 때엔 “공성전을 하러 와서 뭔 기병을 저렇게 많이 데려와?”라고 생각했었고, 말을 타고 이동한 거지 진짜 기병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허나 그건 엄청난 오산이었고, 야습을 감행했던 별동대는 말 그대로 몇이나 되는지 파악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나게 많은 기병대의 말발굽에 밟혀 나갔다.
보이지도 않는 어둠 저편에서 몰아치는 비명과 굉음소리에 화들짝 놀라 지례 겁먹은 수문장이, 상황을 확인하지도 않고 성문을 무작정 걸어 잠그지 않았다면... 조선군 기병대가 별동대를 밟아버린 여세를 몰아 성문을 뚫고 들어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땐 그렇게 잘 막았다고 생각했는데... 조선군 참호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공성전의 핵심이 무너졌다.
“이젠 성문이 무용지물이 됐단 말이지.”
“그래도 성내로 함부로 진입하진 못할 겁니다. 녹각목 등을 활용해 적 기병에 대비할 준비는 끝냈습니다.”
“그래...”
천호장은 아까 벙어리가 된 걸 만회하듯, 이번엔 자신 있게 답을 했다.
성벽 위를 타격할 수 있는 유효사거리까지 조선군 화포가 다가왔는데, 성벽도 아닌 나무로 만든 성문이 남아나겠는가.
아무리 두껍고 튼튼하게 만들었어도, 화포로 쏴대는 포탄과 조선군이 쓰는 통나무탄에는 버텨낼 수 없는 법이다.
그 결과. 어처구니없게도 산해관의 진동문은 부서진 잔해만 남고 말았다.
그거로도 모자라... 워낙 성벽이 두터운 탓에 깊숙한 굴처럼 보이는 성문구멍에 대고, 이따금씩 조선군은 화포를 쏴댔다.
흡사 산해관의 생각을 읽은 것 마냥 “너희 성문 안쪽에서 방어하고 있지? 그거 화포로 다 부셔주마.”라고 외치듯, 용케도 성문구멍을 통과해 포탄을 날려 보냈던 거지.
“하지만 그래도 버틸 수 있습니다.”
“당연한 말. 천하제일관은 이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시시각각 절망의 손길이 다가오건만, 산해관주와 천호장은 여전히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물론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게 맞고, 또 수성이 힘든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허풍도 아니었다.
조선군의 패는 모두 까였다.
조선군 참호와 포대가 성벽 코앞까지 왔다고? 산해관 또한 토벽 포대를 완성한 이상 서로 타격을 주는 건 힘들다.
그렇다고 산해관 성벽 자체를 포격으로 부수는 건, 지금까지 앞도적인 화력을 보여준 조선군이라도 결코 쉽지 않다.
산능선을 깎아서 포대를 만드는 걸 방해하지 못한 건, 분명 타격이 크다. 각산장성이 위험해지고, 진동문 서쪽 방면의 성벽과 성벽 안쪽이 포격을 당할 테니까.
하지만 극복할 수 없는 문제는 아니다. 아무리 포탄이 강력해도 그것만으론 모든 건물과 병사를 죽일 수 없으니까.
결국 산해관을 함락시키려면, 시대의 흐름을 거스른 조선군이 다시 옛 시대로 회귀해야만 한다.
오래전 중국을 넘봤던 수많은 이민족이 그러했던 것처럼, 운제나 공성사다리를 동원해 성벽을 기어올라야 하고, 성문을 돌파해 성내로 진입해야 한다.
성벽 위에서 피와 살이 비처럼 쏟아지는 전투가 이어질 텐데, 조선군이 아무리 정예하다고 한들 사다리를 올라오는 동안에도 정예할 순 없는 것 아닌가.
그리고 산해관 성벽은 정말로 두꺼워서, 그 위에서 진영을 짜고 서로 싸워도 될 정도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땀냄새와 피냄새를 맡으며 엉겨 붙으면, 조선군이 그렇게 자랑하는 화포조차 무용지물이 된다. 아군의 머리 위에 포탄을 쏟아내는 꼴이 될 테니까.
‘한데 과연 그걸 조선군이 감당할 수 있을까?’
산해관주는 머릿속에 앞으로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그려보면서 생각을 이어갔다.
이렇게 화포가 무용지물이 된 이상, 이제 공성과 수성의 핵심은 과연 얼마나 많은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지금까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조선군의 병력은 그리 많지 않아. 아무리 많아도 3만명을 넘지 못할 거다. 물론 기병이 많긴 하지만 과연 복잡한 산해관 내에서 기병이 얼마나 활약할 수 있을까.’
지금 역사의 산해관은 관문도시의 성격보다 요동의 광녕성 공략을 보급도시에 가까운 성격을 띠고 있었다.
두터운 외성벽과 내성벽도 갖추었지만, 내륙 쪽은 어지간한 대도시를 방불케 할 정도로 민가와 군수시설, 숙영지, 숙소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여기서는 제 아무리 조선기병이 상대라고 해도, 충분히 머릿수와 지리적 이점을 활용한 전투가 가능한 거지.
‘하지만 아군은 이미 2차 지원군이 도착한 상태.’
산해관은 생산성이 없는 관문도시고, 아무리 북평부가 요동을 공략하는 것에 진심이라고 해도 병사들을 산해관에 처박아 놓을 수는 없는 법이다.
군호제를 따르고 있는 이상 병사들은 군역 기간을 제외하면 농사를 짓는 게 일반적이었고, 실제로도 이래야만 세수가 걷혀 북평부가 유지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조선전함은 이미 몇 달 전부터 산해관을 두들겨 왔었고, 산해관주는 혹시나 싶어서 지원 병력을 요청했다.
물론 조선이 산해관을 공략하기 위해선 요동을 먼저 정리해야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지만, 혹시 또 아나.
조선이 미쳐서 요서회랑에 병력을 상륙시켜, 요동이 아닌 산해관을 육로로 공격할 수도 있는 일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