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3. 챕터63. 뒤를치다 (6)
박무양이 이끄는 조운선 함대는 빠르게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거대한 성벽이나 마찬가지인 조운선이 줄줄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모습은 퍽 인상적이었고, 당연한 말이지만 멀리서도 그 모습을 관측할 수 있었다.
반대로 조운선 위에서도 난하 양쪽을 돌아다니는 정찰병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망원경을 가진 조선군 측이 더 정확히 알아볼 수 있었지.
특전대를 부려 적 정찰병을 처리할 수도 있지만, 산해관에서 몰려온 본대가 이미 정안진 코앞에 진을 치고 있는 상황.
중기병 오백이면 산해관에서 온 본대와 정면으로 부딪치는 건 힘들어도, 치고 빠지며 드잡이질은 할 수 있겠지만... 그들의 임무는 그게 아니지 않나.
특전대는 난하 중류와 상류로 올라간 함대 분견대와 연락을 취하는 게 더 중요했기에, 산해관 정찰병은 운 좋게 살아남아 함대의 움직임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본다고 해서 뭐 달라질 게 있겠나.
전장은 이미 정해져 있고, 북평군이 움직이는 것보다 해군 함대가 움직이는 게 훨씬 빠르다. 이쪽은 그냥 배 8척만 움직이면 끝이지만, 북평군은 수천명이 움직여야 하니까.
그렇게 새벽같이 출발한 함대는 강줄기에서 멀리 떨어져 따라오는 정찰병과 마주보며 전장에 진입했고... 이내 곧 무거운 분위기가 순식간에 전장에 깔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군 함대가 불태운 정안진 포구를 지날 때쯤.
벌통에서 벌이 쏟아져 나오는 것 마냥, 어설프게 세운 적 숙영지에서 적병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게 망원경의 둥근 시야에 들어왔다.
“미리 건너간 병력도 있겠지?”
“아마도 그럴 겁니다.”
박무양과 오손. 둘은 망원경으로 서서히 진영을 갖추기 시작한 적들을 보며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맨몸으로 강을 건너가 봐야 얼마나 갔겠습니까?”
“그야 그렇겠지.”
박무양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군이 난하의 포구를 불태운 게 고작해야 5일 전이고, 북평군이 온다는 소식이 전해진 건 3일 전이다.
아무리 미리 준비를 해놨어도, 병력을 소집해 수십키로미터는 떨어진 정안진까지 오는 데 고작해야 3일 밖에 안 걸렸을까.
병력을 긁어모으는 것 자체가 보급 문제를 야기하고, 행정조직에게 과부하를 일으켰을 테니까.
그러니 오자마자 무작정 강을 건너가기보다, 일단 임시 숙영지를 먼저 건설하고 병력 보존에 힘썼을 거다.
“게다가 그렇게 넘어간들 의미가 있을까요?”
“그것도 그렇지.”
북평군의 목표는 확실치 않지만, 어찌됐건 해군함대를 난하에서 몰아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서쪽의 병력이 동쪽으로 건너가 산해관 병력과 합류했다고 해서, 딱히 달라질 게 없는 거지.
“그리고... 우리가 확실히 빨리 움직인 것 같습니다. 저기 보이십니까.”
오손은 맨눈에도 보이기 시작하는 강변을 가리켰다.
정안진 일대가 도하지점으로 낙점된 건, 강줄기가 굽이치면서 동쪽 강변에 유독 넓은 모래톱이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수량이 많은 여름철에는 이곳 모래톱이 물에 잠기지만, 겨울이 찾아오는 갈수기에는 수량이 줄어들어 모래톱이 드러났던 거지.
“마른 강바닥을 건너오는 것까지 합쳐서, 강폭은 대략 오십보 정도 밖에 안 되는 것 같은데... 저기에 부교는커녕, 뗏목다리조차 못 놓지 않았습니까? 시간이 부족했나 봅니다.”
“음...”
박무양도 동의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변 근처에 뗏목이나 망태기와 같은 물건들이 두서없이 널브러져 있는데, 미리 도착한 병력을 동원해 도하 준비를 하긴 했던 모양이다.
“전투준비를 해야겠군.”
“옙!”
박무양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오손과 갑판장, 항해사를 거쳐 명령이 이어갔고 이내 곧 둥둥둥! 전고戰鼓가 울리며 가슴을 뛰게 하는 북소리가 멀리 퍼져나갔다.
돛대 꼭대기에 올라 있던 견시병은 재깍 손을 놀려 깃발신호를 보냈고, 뒤따르던 함선에서도 그 신호를 읽고 줄줄이 깃발을 바꿔 끼웠다.
“닻을 내려라!”
선두에 섰던 함선이 모래톱을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오손은 뒤를 살피며 명령을 내렸고.
“닻을 내려라!”
수병들은 복명복창하며 선수에 달려 있던 닻을 풀어냈다.
투르륵. 나무 닻과는 비교도 안 되게 무거운 쇠닻이 어린아이 손목만한 두께의 밧줄을 이끌고 강바닥으로 파고 들었다.
쿠쿵... 강바닥에 닻이 닿아 잠시 함선이 흔들리기 무섭게, 오손은 다시금 명을 내렸다.
“선미의 닻도 내려!”
“닻을 내려라!”
함선이 멈춰서기 무섭게 선미의 닻도 강바닥을 파고 들었고, 물살에 맞춰 흔들리던 함선이 앞뒤로 꽉 붙잡혀 요동이 잦아들었다.
바다를 누비는 범선 전함은 선미에만 거대한 닻을 장착해 사용했지만, 조운선은 강에서 사용하는 물건 아닌가.
돛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노도 사용하는 탓에, 조운선은 꼭 앞으로만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니 닻 또한 앞뒤에 달아놓고서 편의에 따라서 사용했던 거고.
풍덩! 선두의 함선이 멈춰 서자, 꽁무니를 물 듯 바짝 붙은 함선들 또한 연신 물보라를 피워내며 닻이 빠져들었다.
“역시... 수심이 너무 얕군요. 그래도 측량을 잘해서 모래톱에 걸리진 않았습니다.”
“음.”
오손은 직접 선수루의 갑판벽에 달라붙어 닻이 얼마나 풀렸는지 확인하고서 중얼거렸다.
“수심은 얼마지?”
“대충 3척 정도 될 것 같습니다.”
“강바닥에 안 긁힌 게 용하군.”
“흐흐.”
연오랑이 만든 근본도 없는 조선척은 미터법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에, 조선척으로 3척은 대략 3미터를 의미했다.
이러니 박무양은 놀람과 함께 감탄을 할 수밖에.
이렇게 수심이 얕은 곳까지 용케도 강바닥 토사에 걸리지 않게 온 걸 보면, 확실히 북방수로에서 활동한 경력이 도움이 됐나 보다.
8척의 조운선은 양쪽의 모래톱을 전부 막고서 멈춰 섰고, 거대한 방벽이 되어 북평군의 앞을 가로막았다.
“거참... 아무리 생각해도 요상한 전장이야.”
“예. 아마 적들은 갑갑해서 속이 터질 겁니다.”
오손은 망원경으로 적진을 살피는 박무양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려댔다.
조운선은 판옥선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지만, 엄연히 수송선이자 화물선이었다.
가장 아래 선창에는 노꾼들이 머물러 노를 저어 움직였는데, 조운선의 덩치가 오죽 크지 않나.
이걸 오롯이 노로만 움직이려면 노꾼이 너무 많이 필요한데... 수송선은 운용하는 선원이 적어야, 적재량이 늘어나고 유지비용이 줄어든다.
해서 함선의 크기에 비해 노꾼은 그리 많지 않았고, 그 대신 부족한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범선마냥 거대한 돛대 3개를 박아 넣었지.
그랬기에 선창 중앙에는 노꾼이 아닌 짐을 적재하는 창고가 존재했고, 그 위로 2층 선창이 따로 만들어졌다. 짐을 더 많이 싣기 위해선, 선창의 높이가 낮더라도 층을 따로 만드는 게 더 효율적이니까.
그게 끝이 아니다.
갑판의 갑판벽 또한 전함보다도 높았는데, 이것 역시 갑판 위에 수북하게 쌓아올린 짐이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조운선은 흘수선부터 갑판벽 꼭대기까지의 높이가 5미터를 넘어갔다.
“저들 입장에선, 우리는 강에서 솟아난 성벽이나 마찬가지란 말이지.”
“그것도 그냥 성벽이 아니라 해자까지 있는 셈 아니겠습니까.”
조운선을 공략하려면 마른 강바닥을 넘어 강물을 헤엄쳐 와야 하는데, 이게 해자와 다를 게 뭔가.
박무양과 오손을 그리 중얼거리며, 이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적진을 계속 굽어봤다.
저들은 확실히 이 불리한 전장에서도 한판 붙어볼 생각인지, 망원경으로 보이는 모든 곳에서 병력을 집결해 진영을 짜고 있었다.
다만...
“저기.”
“음?”
“대부분 비슷한 깃발인 걸로 봐서... 당산 일대에서 긁어모은 병력인 것 같습니다.”
“허면. 준화와 난주의 병력은 다른 도하지점을 노리고 있다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크지 않겠습니까? 물론 산해관 병력이 이곳으로 온 걸 보면, 이곳이 주 전장이겠지요.”
난하를 따라서 아래에서부터 당산, 난주, 준화가 자리 잡고 있었고, 이곳에 난주와 준화의 병력이 오지 않았다는 건... 아직 도착하지 않았거나 다른 곳을 노린다는 뜻 아니겠나.
“게다가 아예 다른 깃발도 여럿 보입니다. 아마...”
“호족사병이나 군부의 사병이겠지?”
“예. 어쩌면 북평 일대에서 급파한 병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북평부도 요동이나 다른 호족연맹과 마찬가지로, 군호를 통해 징집하는 일반병과 상비군과 흡사한 사병이 공존했다. 그리고 그걸 티내기라도 하듯, 다른 깃발과 보다 좋은 무구로 무장했고.
“아마 다른 곳에서도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겠어. 허나 할 수 있는 건 없으니 일단 우린 이곳에 집중해야 할 터... 그렇다 쳐도 1만이라.”
“급한 대로 박박 긁어서 온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많긴 많군.”
“...”
박무양은 자기도 모르게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적들이 포진한 진형과 깃발의 수. 진형의 형태를 보면 대략 숫자를 어림잡을 수 있는데, 생각보다 많았다. 그만큼 해군의 움직임이 위협적이라는 뜻이리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적이 접근하길 기다릴까요? 아니면 먼저 칠까요?”
“음...”
박무양은 오손의 물음에 잠시 고민에 빠졌다.
적들이 화포를 가져왔는지 아닌지 모르지만, 어쨌든 아군의 화력이 더 강력하다.
나아가 강변과 함선 사이의 거리는 고작해야 50미터도 안 된다. 적들이 충분히 화살을 날릴 수 있다는 뜻.
과연 끌어들여서 일제포격을 퍼붓는 게 이득일까. 아니면 활의 사거리보다 훨씬 긴 화포의 사거리를 이용해 먼저 때리는 게 이득일까.
잠시 고민하던 그는 빠르게 답을 내렸다.
“먼저 쏜다. 과연 적들이 얼마나 군율이 잡혔는지 봐야겠다.”
“옙!”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오손은 명령을 전파했고, 이내 곧 견시병은 철탄을 쏘라는 뜻을 담은 녹색 깃발을 새롭게 꽂았다.
“준비!”
“준비!”
서쪽에서 1만에, 동쪽에서 오천의 병력이 동시에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하자. 화포장의 명령에 따라 갑판 위가 부산해졌다.
조운선에 장착한 함포는 20문으로, 양쪽에 각각 10문씩 배치되어 있었다. 조운선의 갑판벽이 너무 높아서, 함포를 쏘기 위해 갑판에 구멍을 내야 했을 정도.
그렇게 만든 구멍 뒤로 함포가 빠져나왔고 화포병들은 화약주머니와 어린아이 머리통만한 철탄을 장전하고서, 힘껏 동차를 밀어 갑판구멍으로 포신을 집어넣었다.
함선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적들이 짐작이나 할까 모르겠다만... 적병들은 성큼성큼 몰려오기 시작했다.
“진영을 풀지 않는군.”
“싸워보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느슨하게 풀면 진영이 유지나 되겠습니까? 징집병들은 다 도망가 버릴 겁니다.”
“음...”
박무양은 개미떼처럼 몰려오는 적병들 뒤로, 무서운 기세로 박도를 휘두르며 돌아다니고 있는 일단의 기병대를 살폈다.
‘독전대군.’
이 전장에서 기병은 전혀 쓸모가 없는데, 저렇게 기세를 올리며 돌아다닐 필요가 없다. 다른 이유일게 분명하다.
이윽고 적들은 화포의 사거리인 오백미터까지 순식간에 접근했고, 흐물흐물하게 한 덩어리로 보이던 적들이 점점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이제 망원경으로 보지 않아도, 적들의 움직임이 맨눈으로 보이기 시작.
“...”
“...”
임시로 방패를 겹쳐 만든 선미루에서, 박무양과 오손은 망원경으로 동쪽과 서쪽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온 사방에서 북소리와 함께 유독 날카로운 나팔소리가 퍼지고 있었기에, 서로 의견을 주고받지 못하더라도 서쪽의 당산군과 동쪽의 산해관 병력이 동시에 공격을 오고 있었다.
오백미터의 거리는 점점 줄어들어 어느덧 사백미터를 지나 삼백미터까지 좁혀졌고.
포격을 담당하는 화포장은 박무양이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명을 내렸다.
“발사!”
“발사!”
포신에 뚫린 점화구를 따라 불꽃이 파고 들기 무섭게, 콰콰쾅! 매캐한 화약냄새와 함께 검은 연기가 시야를 가리며 피어올랐다.
8척의 함선. 160문의 함포가 동시에 불을 뿜어내자, 천지가 찢어지는 것 마냥 굉음이 하늘을 가르며 땅을 뒤흔들었다.
쿠쿵! 쿠쿵! 조운선조차도 그 충격에 몸을 비틀어댔고. 양쪽에 박아 넣은 닻 덕택에, 흡사 빨래를 쥐어짜는 것 마냥 함선이 비명을 지르며 흔들렸다.
“오...!”
“와!”
갑판벽에 붙여 놓은 구조물을 붙잡고서 중심을 잡은 화포병들은, 흔들리는 시야를 저편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트렸다.
휘윙! 콰쾅! 순식간에 적진으로 날아간 강철의 비가, 갈고리로 땅을 파내듯이 적진을 휩쓸어버리는 게 보였으니까.
너무 멀어서 정확히 뭔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가 없지만, 멀리서 봐도 검은 무리가 우르르 무너지고 동시에 피보라가 일어나는 건 보였으니까.
“다시 장전!”
“장전!”
놀라는 건 놀라는 거고, 화포병들은 몸에 익은 기억대로 반복동작을 이어갔다.
조운선을 타고 다니던 탓에 전함을 탄 해군병만큼 실사격은 많이 안 해봤지만, 포격훈련은 꾸준히 해오지 않았나.
반동으로 튕겨 나온 동차를 끄집어내고, 포신 안쪽을 마대걸레로 닦아 탄매를 치우고, 화약주머니와 격목, 철환을 순서대로 삽입하고, 납작한 나무판이 달린 꼬챙이로 꾹꾹 눌러 장전을 완료.
“발사!”
“발사!”
콰콰쾅! 또 다시 날아간 포탄은 슬슬 깨지기 시작하는 적 진영에 다시금 틀어박혔다.
“으악!” “크헉!” “히헉!”
적병들은 어느새 용케도 다가왔는지, 멀리서 들리는 비명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철환은 볼링공이 되어 허공을 질주해 땅에 닿았고, 적병은 볼링핀이 되어 철환에 맞아 온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쿵쿵! 보이지도 않게 날아온 포탄은 경보하듯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달려오던 적병에게 부딪쳤고, 퍼퍽! 직격타를 맞은 적병은 단발마의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배와 등이 하나가 되어 큼지막한 구멍이 뚫려버렸다.
그러고도 힘이 남은 포탄은 궤적이 비틀려 땅에 튕겼고, 튕겨나가는 동시에 적병의 발을 치고 나갔다.
“끄악!” 무릎 아래가 완전히 분리된 적병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동시에, 그 뒤에 있던 적들 또한 줄에 걸린 것 마냥 우르르 넘어졌다.
하나같이 한쪽 발이 날아가거나, 사방에서 튕긴 잘린 사지에 맞아 넘어진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