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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소드 마스터-524화 (524/538)

524. 챕터63. 뒤를치다 (7)

“흔들리긴 하는 군.”

“흔들리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만... 애매하군요.”

박무양과 오손은 검은 연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좌우를 번갈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두 번의 일제포격이지만, 적들이 언제 이런 포격을 당해봤겠나. 그것도 이곳은 엄폐물이 전혀 없는 허허벌판이다.

온 사방으로 튕겨나간 포탄은 볼링공이 되어 적병을 후려쳤고, 대충 오와 열을 맞춰 달려오던 적들을 움푹 움푹 파먹으며 진영을 무너뜨렸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오히려 밀집되어야 하는 전열이지만... 쾅쾅! 굉음과 함께 불꽃이 터질 때마다 옆에 있던 동료가 사라지는데, 이걸 보고서 두려움에 떨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

가장 앞서서 달려오던 전열은 조금씩 무너져서, 군데군데 구멍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선두에 위치한 적들은 자포자기했는지 오히려 함선을 향해 있는 힘껏 달려오고 있었고, 후위에 위치한 적들은 바로 코앞에 펼쳐진 참상을 보고서 오히려 뒤를 돌아봤다.

하나 된 발걸음에 맞춰 기세 좋게 쿵쿵 울리던 대지는 순식간에 피바다로 변해버렸고, 온 사방에선 비명소리와 함께 절단되고 부서진 사지가 널려 있다.

그걸 보고서 제정신을 찾을 수 있는 병사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순식간에 혼란에 빠진 병사들 중 일부는 진영을 무시하고 앞이 아닌 뒤와 옆으로 뛰쳐나가기 일 수.

“계속 전진하라!”

“도망치면 죽음 뿐이다!”

허나 그렇게 진영을 뭉개며 빠져나오는 적들을 향해, 어느새 달려온 독전대 기병대가 큼지막한 박도를 마구 휘둘러대며 탈주병들을 처단했다.

누군가는 나아가고, 누군가는 도망치고, 누군가는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와중에도, 전체적인 흐름은 생각만큼 쉽게 조선군에게 넘어오지 않았다.

‘병력차가 월등하니 당연한 건가.’

박무양은 깨질 듯 깨지지 않는 적 진영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겉으로 보이는 화포의 화력은 경천동지라 불러도 무방하지만, 내실을 따져보면 막상 또 그렇지도 않았다.

훈련이 잘 된 정예병이라고 해도 1분에 한발 정도 쏘면 아주 잘하는 거다. 게다가 이 시대의 포탄은 쇳덩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전열을 이루고 달려오는 적을 한 번에 몰살 시킬 수가 없다.

수십개의 제대로 쪼개져 오는 적들을 한줄 정도는 날려버릴 수 있어도, 제대 전체를 날려버릴 수가 없는 거지.

해서 북평군 병사들에게 시각적 충격은 어마어마하게 가할 순 있어도, 실질적인 피해는 느껴지는 것만큼 크지 않았다.

‘더욱이 북평군도 지난날 전쟁의 전훈을 배우긴 배웠나보군.’

박무양은 점점 가까워질수록 묘하게 넓어지는 적 진영을 살피며 그리 생각했다.

야전화포가 등장하고 나서, 그걸 활용하는 조선군은 변화하는 전장에 대해서 공수 양면으로 머리가 깨지도록 연구해야 했다.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화포를 쏠 수 있을까. 반대로 어떻게 하면 화포를 더 안 아프게 맞을 수 있을까.

조선군뿐만 아니라 중국도 화포를 사용하니, 가상적국을 중국통일왕조로 상정한 이상 연구를 안 하면 더 이상한 일이지.

하여 나온 결론은 원래 역사의 방법과 유사했다.

고대로부터 이어내려 온 앞뒤로 빽빽하게 채운 제대를 형성하는 게 아니라, 흡사 전열보병마냥 두께를 줄이고 넓게 펼치는 식으로 제대를 만드는 거지.

하지만 이 경우에는 사기가 쉽게 무너지고, 제대가 많아져 지휘하기 힘들어진다는 문제가 있었다.

애초에 이 시대의 진법과 진법훈련이라는 게 생겨난 건, 훈련도가 미흡한 징집병을 어떻게든 도망치지 못하게 만들어서 전투력을 유지시키기 위함이니까.

다만... 조선군이 생각해 낸 해답을, 똑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북평군이 못 떠올렸겠는가.

그 결과가 지금 박무양의 눈에 보이는 모습이었다.

2열, 3열로 구성된 전열보병보다는 두껍지만, 전처럼 십여열이 넘게 뭉치는 기존 진법 제대보다는 얇은, 중간 형태를 띠게 된 거지.

‘아군이 상비군을 만들어 병사 개개인의 훈련도를 높여 제대가 깨지지 않게 만들었다면, 북평군은 탈주병을 처단하는 독전대와 바로 코앞에 위치한 고향을 지키려는 절박함, 선동과 날조로 만들어낸 조선군에 대한 악명으로 병사들을 붙잡아 두고 있는 거겠지.’

시대가 시대니 만큼 전쟁에는 당연히 약탈, 강간, 방화가 세트로 묶여서 진행되는데, 조선군은 오히려 이런 걸 안하지 않나.

터무니없는 진실은 역으로 헛소문이 될 가능성이 높으니, 북평부 백성들은 진실을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박무양이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적은 계속해서 몰려왔고 화포는 계속 불을 뿜어댔다.

어느덧 적의 선두에 있던 첫 번째 제대는 구멍이 송송 뚫려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지만, 그럼에도 끝끝내 강변을 향해 오고 있었다.

중요한 건 첫 번째 제대만 무너졌을 뿐. 그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제대는 선두를 방패막이 삼아 멀쩡하게 오고 있다는 점.

허면 저들 또한 흔들어 줘야 하지 않겠나.

“포각은 그대로 둬!”

“계속 쏴라!”

‘알아서 잘 하는 군.’

박무양은 검은 연기가 가득한 전장에서도, 용케 망원경으로 적진을 살피며 목청을 높이고 있는 화포장을 바라봤다.

조선군의 화포장은 화포병들 중에서 성적 순으로 진급한 이들. 화포에 관해서는 어쩌면 박무양보다 더 뛰어날 지도 모르니 딱히 명령을 내려줄 것도 없었다.

콰쾅! 포탄은 또 다시 강철의 비로 변해 적진을 헤집었고, 그럼에도 적들은 꾸역꾸역 강변의 성벽을 향해 달려왔다.

“으음. 악에 바쳐서 그런지 확실히 잘 버티기는 하는데...”

“전장이 우리에게 유리하지.”

“예. 적 제대가 점점 달라붙으면서 엉키는 군요.”

온갖 고함소리와 비명소리. 조선군이 울리는 전고소리와 북평군이 울리는 전고소리. 사방에서 펄럭이는 깃발소리와 황무지를 달구는 뜀박질소리가 귀를 때리는 가운데.

박무양과 오손은 매의 눈을 하고서, 전장을 유심히 살피며 중얼거렸다.

제대를 얇고 넓게 만들어서, 포탄의 피탄 면적을 줄이는 건 확실히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

다만 전장이 너무 나쁘다.

적들은 우격다짐으로 포격을 맞아가며 접근하여 어떻게든 달라붙을 생각이고, 이곳이 평탄한 전장이었다면 어쩌면 전열의 양 날개를 살려 조선군을 포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은 강이고, 함선은 강 위에 떠 있는 성벽이다.

아무리 제대를 펼치고 쪼개본다 한들, 강을 뛰어 넘어서 포위할 순 없지 않나. 나아가 결국 함선에 달라붙기 위해선 강폭이 좁은 모래톱으로 올 수밖에 없는 바.

적들은 조선군이 바라던 대로 흡사 깔때기에 빨려 들어오는 것처럼, 가까워질수록 서로 밀집하고 있었다.

“어쩌면 저런 상황이 저들에겐 더 익숙할지도 모르겠군.”

“그럴 지도요. 소규모 분열 제대는 고된 훈련 없이는 유지하기 힘들지 않습니까. 훈련을 해보긴 했어도, 적병들은 자신들이 뭘 했는지도 정확히 모를 겁니다.”

“설령 안다고 해도, 지금 상황에선 딱히 방법이 없고 말이지.”

“예.”

콰쾅! 두 사람은 화포의 굉음에 박자를 맞춰가며 대화를 이어갔다.

저 멀리 포격의 사정거리 밖에서 전장을 지휘하고 있을 적 지휘관들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이건 알면서도 빠질 수밖에 없는 수렁이니, 얼마나 속이 쓰릴까.

“와아아!”

“가라!”

“멈추면 죽는다!”

동시에 만신창이가 된 적 제대 속에서, 누군지 모를 적 지휘관들이 외치는 고함소리가 소음에 섞여 들려왔다.

피와 살을 대가로 기어코 다가와, 이제 적진과의 거리는 고작해야 50보 정도.

“함장님!”

거리를 재는 일에 이골이 난 화포장은 아군과 적군 사이의 거리를 읽기 무섭게 벌떡 일어나 목청을 높였고, 오손과 박무양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눈이 마주쳤다.

“조란탄을 쏴라!”

“조란탄!”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복명복창을 하고선, 화포장은 겁도 없이 갑판 위를 뛰어다니며 화포병들의 어깨를 두들기며 각기 다른 명령을 지시했다.

몇몇 화포병들은 철환 대신 자갈주머니, 정확히 말하면 주머니가 아니라 잘 풀릴 수 있는 보자기에 헐겁게 담은 자갈뭉치를 포신 쑤셔 넣었다.

“발사!”

“발사!”

콰쾅! 철환을 토해내던 익숙한 굉음과 끼기긱! 자갈이 튀어나가며 철판을 긁는 것 같은 소름끼치는 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끄억!” “컥!” “크허헉...”

과연 조란탄의 위력은 명불허전.

매번 봐도 봐도 놀라워서, 조란탄을 쏜 화포병들조차도 좁은 갑판구멍 속에서 펼쳐진 참상을 보며 숨을 멈췄다.

다섯 손가락만큼 작으면서도 다양한 크기의 자갈은 우박처럼 전장에 쏟아졌고, 말 그대로 피보라를 일으키며 적 선두 제대를 그대로 집어 삼켰다.

자갈에 맞아 머리가 깨진 이들, 갑옷을 입고 있었음에도 그 괴력을 버티지 못하고 뼈가 부러진 이들, 재수 없게 바닥에 튄 파편에 맞아 다리뼈가 쪼개진 이들.

죽은 이들과 죽지 않은 이들을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하나같이 선두에 서 있던 이들이 태풍에 휘말린 갈대처럼 부서져 땅에 쓰러졌다.

“...”

“후위 제대도 제대로 맞았군.”

피비린내 나는 참상을 뒤로하고, 박무양은 정면에서 시선을 떼고 조금 멀리 살피며 중얼거렸다.

측면에 위치한 화포 10문 중 5문은 조란탄을, 5문은 그대로 철환을 쏴댄 바.

포신에서 나오기 무섭게 온 사방으로 비산한 조란탄은 멀리 나가지 못하고 선두제대를 휩쓸었지만, 철환은 전과 똑같이 날아가 선두 제대 뒤를 따라오던 후속 제대를 때렸다.

“계속 돌격!”

“조금만 더 가면 살 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적의 수는 너무 많고, 화포의 재장전 시간은 길기 마련.

조란탄에 맞아 적 선두는 반수가 날아갔는데도 무너지지 않고, 끝끝내 강변에 발을 디디고 강바닥을 뛰어오기 시작했다.

“음...”

“흠.”

박무양과 오손은 여전히 개미떼처럼 바글거리며 밀려드는 적들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자신들은 높은 갑판 위에서 전장을 내려다 볼 수 있지만, 적들은 자신들의 앞에 무슨 참상이 펼쳐지고 있는지 보이지도 않을 것 아닌가.

그런 탓인지 선두 제대가 육편으로 변해 땅을 붉게 물들고 있는데도, 후속 제대는 계속해서 함선을 향해 밀려들고 있었다.

현실을 도피하듯, 죽음으로 가는 행렬에 함께한 걸 잊고자 그저 정신줄을 놓고 함성을 지르며 다가왔다.

‘씁...’

박무양은 적들의 움직임을 보며, 작게 침음을 흘렸다.

조운선에 장착한 화포는 반쯤 고정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하고, 갑판구멍 밖으로 아예 포신을 내놓아도 갑판보다 더 밑으로 쏠 수가 없다.

그 말인 즉. 적들이 함선에 가깝게 달라붙으면 달라붙을수록, 화포의 사각으로 파고들 수 있다는 뜻인데... 조운선의 갑판이 오죽 높던가.

적이 함선의 선체를 기어오르는 것이 어려운 만큼, 반대로 가까이에 붙은 적에게 불벼락을 내려주는 것도 어렵다.

허나 박무양의 상념은 번개치듯 빠르게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고, 그는 익히 훈련하고 경험한 것처럼 입이 절로 열렸다.

“사수 준비!”

“사수 준비!”

갑판장의 복명복창이 이어지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갑판 중앙에 열을 맞춰 서 있던 해군병들의 손에서 화살비가 쏟아졌다.

8척의 함선이 동시에 공격을 받는다고 해도 무방하니, 반격 또한 비슷하게 이뤄지기 마련.

화포에서 뿜어 나온 검은 연기를 뚫고, 쉐에엑! 하늘로 높이 솟구친 화살이 제 힘을 잃고 그대로 땅에 머리를 틀어박았다.

조운선의 갑판은 워낙 높아서, 중앙에 위치한 해군병들의 시야에는 적들의 모습이 보이지도 않지만... 어차피 물반 고기반 아닌가.

해군병들은 선수루에 올라서 적진을 살피는 갑판장의 명령에 따라, 기계적으로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온다!”

“적 궁병이다!”

쉐에엑! 해군병들이 화살을 쏘기 무섭게, 사거리까지 접근한 적 후속 제대에서도 화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해군병들이 쏴대는 화살도 적진에 마구잡이로 떨어지지만, 반대로 적 궁병들이 쏴대는 화살도 큼지막한 목표물인 함선을 맞출 수 있지 않나.

픽픽. 제 자리를 찾지 못한 눈먼 화살은 강으로 떨어지기도 했지만, 퍼퍼퍽! 갑판벽과 갑판, 선수루와 선미루의 누각을 가릴 것 없이 콩 볶는 소리가 요란하게 퍼져나갔다.

“생각보다...”

“적군요?”

갑판보다 살짝 올라온 선미루. 거기에 급조한 나무 방패를 쌓아서 방어해 놓은 선미루 위에서, 박무양과 오손은 겁도 없이 주변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적들이 쏴대는 화살과 해군병이 쏴대는 화살이 서로 이빨을 드러내며 서로를 물어뜯는데, 어째 머릿수가 현격히 부족한 조선군이 쏴대는 화살이 더 많은 느낌이다.

“역시 징집병들을 전부 긁어모아서 선두에 밀어 넣고, 정예병들을 후속 제대에 배치한 모양입니다.”

“이쯤 되면 선두나 후속이나 큰 의미가 없지 않나.”

“...”

박무양은 겁도 없이, 정확히는 방패벽과 갑옷을 믿고서 전장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 달려와 반쯤 갈린 적 궁병들은 강변에 서서 화살을 날려댔고, 해군병들은 적 궁병제대를 찾아낸 갑판장의 지휘에 따라 역공을 하고 있었다.

서로 누가 더 잘 맞추는지 겨루는 시험을 하듯, 양측 궁병들 사이에서 폭포수가 역류하는 화살비가 교차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서로 눈먼 화살을 날리고 있는 꼴이라서 난장판이 벌어졌지만... 이득은 조선군이 더 많이 봤다.

조선군은 적 궁병제대를 못 맞추더라도, 궁병 제대를 지나쳐 돌진하는 적병에게 눈먼 화살이 떨어졌으니까.

이렇게 쓰러진 시체가 하나둘씩 늘어날수록 장애물이 생겨나는 셈이라서, 알게 모르게 돌진 속도가 줄어들고 있었다.

반대로 함대는 검은 연기에 휘감겨서, 아래서 올려다보는 적들 입장에선 함선 위 갑판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고, 그만큼 적 궁병들의 정확도는 떨어졌고 말이다.

“그나마 산해관 쪽에서 화살이 더 많이 날아오는 군요.”

“아마도 저들은 나름 정예병일 테니까.”

탱.탱. 박무양과 오손은 방패벽에 소리내며 머리를 박는 눈먼 화살을 무시하며, 동쪽 전장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서쪽이든 동쪽이든 둘 다 똑같이 붉게 변해가고 있었는데, 그래도 산해관 출신이 있는 동쪽이 그나마 조금 나아보였다. 물론 거기서 거기인 터라, 크게 차이가 있는 건 아니었는데... 변수는 어째 서쪽 전장에서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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