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525화 (525/538)

525. 챕터63. 뒤를치다 (8)

“설마.”

“저거 진짜 공성사다리인가?”

“그래 보입니다.”

“허...”

박무양은 난장판이 된 전장을 뚫고 온 후속 제대 중, 몇몇에서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걸 보며 중얼거렸다.

화포의 포각은 이미 고정된 거나 마찬가지.

눈 앞의 모든 곳에 적이 깔려 있으니 먼 거리에선 철환을 가까운 거리에선 조란탄을 알아서 쏘고 있었다.

그런 피해를 뚫고서 기어코 선두제대가 강바닥을 지나쳐 무릎까지 빠지는 강물에 발을 디뎠는데... 그 중에서 몇몇이 긴 나무사다리를 들고 온 게 아닌가.

아마 철환과 조란탄에 맞아 본래 사다리의 주인들이 죽은 모양인데, 뒤따르던 병사들이 어떻게든 그걸 목숨으로 사수하며 들고 온 모양이다.

“조잡하지만 진짜 사다리군.”

“...”

둘은 공성사다리를 보며 난장판이 된 와중에도 침묵에 잠겼고, 박무양은 찰나의 찰나를 쪼개 머릿속의 태엽이 맹렬하게 돌아갔다.

‘공성사다리는 문제가 안 된다.’

적들 입장에서야 비장의 한수일지도 모르지만, 조선군 입장에선 아니다.

난하에 등장한 조운선 함대는 말 그대로 성벽이고, 그 성벽을 뚫기 위해서 공성사다리가 필요한 건 당연한 말이니까. 성벽을 향해 다가와 본들 올라오지 못하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붙잡을 곳도 없는 갑판벽을 기어오를까. 성벽 아래에서 돌팔매질을 할까. 아니면 화살만 계속 날릴까.

뭐가 됐든 저들이 갑판에 오르기 위해선 올라갈 수 있게 도와줄 도구가 필요하고, 그건 공성사다리 아니면 진짜 공성전에 쓰이는 운제 밖에 없는 거지.

그러니 공성사다리를 쓸 거라는 건 이미 예상된 일이었고, 당연히 그에 맞춰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문제는 적들이 공성사다리를 가져왔다는 게 아니라...

“요 며칠 만에, 저런 걸 만들고 준비했다라...?”

“빨리도 너무 빠르군요.”

둘은 확실히 공성사다리로 보이는 물건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사다리야 흔하게 쓰는 물건이니 특별할 게 없다.

다만 그 크기가 2층을 넘어갈 정도로 큰 물건은 흔한 게 아니고, 또 일상생활에서 쓰이지 않는 저런 물건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 것도 수상하다.

이게 뜻하는 바는 하나.

“저놈들... 진짜로 공성을 훈련하던 자들이군.”

“예. 만약 우리가 아니라 고정되어 있는 진짜 성벽이었다면, 운제를 가져왔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같은 결론을 내린 박무양과 오손의 표정은 밀랍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수십개가 넘어가는 공성사다리. 나무로 만드는 거니 대충 만들 수 있다곤 해도, 병력을 긁어모으기도 바쁜 사이에 저것까지 준비할 순 없다.

“진짜로 요동을 노리기 위해 준비한 병력이란 말이지?”

“산해관에 머물기엔 부담이 너무 크니... 난하 일대의 도시에서 주둔했던 모양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난하 일대의 호족과 군부파벌 사병들은, 다른 싸움에서 전력을 소모당하는 대신 오롯이 요동과 전쟁이 터졌을 때 공성을 담당하기로 했겠지.”

“광녕성을 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음.”

박무양과 오손은 퍼즐을 맞추듯, 서로 문답을 하며 해답을 찾아냈다.

함대장과 8척의 함장 모두가 서로 긴밀하게 깃발 신호와 망원경으로 서로 의견을 주고받고, 전투를 지휘하고 있을 때.

수족이 되어 움직이고 있는 해군병들 또한 수족답게 손을 바쁘게 놀리고 있었다.

선수루에 올라 넓적한 사각방패에 몸을 숨기고 얼굴만 내밀고 있던 중대장.

“1,3,5소대 쉬어!”

그가 삐빅! 호각을 불며 외치자.

“후...” “후흡.”

조운선 중앙에 이열로 줄줄이 서 있던 병사들 중 일부가 풀썩 주저앉았다.

그들의 발밑에도 길쭉한 사각방패가 넘어져 있었고, 중대장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소대원들은 사각방패를 세우고선 들뜬 숨을 가다듬었다.

어차피 갑판벽에 막혀 전황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데,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사방을 살필 필요가 있을까.

하나 같이 죄지은 사람들 마냥, 귀를 덮은 두정갑 투구를 믿고 고개를 푹 숙이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

사방에선 천지를 찢어발기는 화포의 굉음이 귀를 때리고, 옆에선 동료가 당기는 활시위의 소리가 칼날처럼 스쳐지나가고, 어깨를 맞대고 바로 옆에 있는 동료에게선 들뜬 호흡소리만 들려온다.

팅팅! 적들이 쏘아댄 화살은 말 그대로 눈 먼 화살이 되어 마구잡이로 떨어지고 있었기에, 개중에는 비스듬히 걸치고 있던 방패에 맞고 튕겨나거나 운 좋으면 방패에 폭폭 박히고 있었다.

“...”

“...”

적들의 비명소리와 고함소리가 뒤섞여 몸이 움츠러들고 털끝이 쭈뼛해진다만, 이럴 때야 말로 명경지수처럼 잔잔한 마음을 유지해야 하는 법.

소대원들은 배운 대로 훈련한대로 중대장의 명령에 따라 깊게 들숨날숨을 내쉬며, 용광로처럼 뜨겁게 달아오른 어깨를 주물러댔다.

“유엽전이 아니군. 일반 화살촉이야.”

옆에 있던 동료는 팅하고 방패를 맞고 튕겨 나온 화살을 주워서,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그가 쥐고 있는 화살은 송곳처럼 뾰족한 유엽전이 아니라, 사냥할 때 흔히 쓰는 작살형태의 화살촉을 가지고 있었다.

급해서 있는 대로 다 주워온 걸까. 아니면 북평군은 유엽전을 만들 돈과 인력이 없던 걸까. 그것도 아니면 일반 화살촉을 쓰다가 나중에 유엽전을 쓸 생각일까.

답을 알 수 없는 의문이 샘솟지만, 지금 중요한 건 저들이 유엽전을 쓰지 않는다는 눈앞에 보이는 진실 뿐.

“이거로는 두정갑을 못 뚫어.”

그는 흡사 자신에게 최면을 걸 듯 세뇌하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해군병들도 두정갑을 입는 건 육군과 마찬가지고, 개량된 두정갑은 내피에 강철판을 겹쳐서 만든 물건.

그러니 이런 화살은 철판을 뚫지 못할 게 분명하다.

‘맞는 말이야.’

그의 나지막한 말은 흡사 선언처럼 변해서, 동료들에게 역병처럼 퍼져나갔다.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힘들어서 인지 모르겠지만, 덜덜 떨리던 손이 점점 멈춰지고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의 고동소리 또한 진정해 작게 뼈를 울렸다.

그는 화살집에서 꺼낸 화살의 화살촉을 매만지고 있는 동료를 살폈다.

매끈하게 갈려서 긴 사각뿔 형태를 하고 있는 유엽전.

이 화살은 사슬갑옷은 물론이고 북평군이 주로 입는 찰갑과 가죽갑옷조차 뚫을 수 있을 거다. 게다가 북평군 중에선 갑옷을 입고 있지 않은 적이 허다하다.

그러니 이길 것이다.

이상한 삼단논법을 끼워 맞춰, 자기 멋대로 희망을 담은 상상이 현실이 되길 바라며 중얼거렸다.

“우리의 화력이 더 강하니, 적들도 오래 버티지 못할 거야.”

“그렇겠지.”

사방이 난장판인 와중에도, 드디어 호흡을 가다듬고 몸을 이완시킨 동료들이 작게 대화를 나눠갔다.

‘후... 그럴 거야. 그러니 버틴다. 먼저 지치는 사람이 진다.’

그는 동료의 말을 들으며, 훈련 때 교관들에게 들었던 금과옥조와 같은 격언을 떠올렸다.

실전은 훈련이 아니다.

내가 끝내고 싶다고, 멈추고 싶다고 해서 멈출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러니 모순되게도 생과 사의 갈림길 속에서, 체력을 보존하고 끈기와 인내를 가지고 전력을 다하지 않는 게 중요했다.

먼저 지치고, 먼저 퍼지는 쪽이 지고 죽는 거니까.

그랬기에 난장판인 와중에도 동료를 믿고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습사용 활과 전투용 활은 엄연히 다르고, 안 그래도 장력이 강한 각궁은 더욱더 그러했다.

아무리 명사수고 훈련을 많이 했어도 사람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는 이상... 쉬지 않고 무턱대고 쏴대면, 오십발만 쏴도 어깨가 부서져라 아픈 건 당연한 말.

그랬기에 함선에 퍼져 있는 해군병들은 적이 코앞까지 왔다는 두려움을, 동료가 대신 처리해 줄 거라는 믿음으로 대체해 이렇게 속편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던 것.

“2,4,6소대 쉬어!”

팅팅팅! 열 발을 천천히 일제사격으로 날린 다른 소대 동료들이, 중대장의 목소리에 맞춰 그대로 주저앉자.

“우리 차례군.”

“그래.”

순번을 갈아치우듯, 쉬고 있던 병사들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후...’

어깨에서 느껴지던 뜨거움이 사라진 병사는, 다시금 활시위를 점검하고서 갑판바닥에 꽂혀 있던 화살집에서 화살을 꺼내 걸었다.

저지대에서 고지대를 공격하는 게 왜 어려울까.

그야 밑에서 올려다보면 시야각 때문에, 고지대 꼭대기를 제외하곤 안쪽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허나 반대로 고지대 안쪽에서도 경계 끝까지 나오지 않는 이상, 시야각 때문에 바로 아래를 내려다 볼 수가 없다.

해군전함이 왜 천진포대를 정밀타격하지 못하고, 포대지대를 무식하게 때려 부셔서 깎았겠는가. 아예 가장자리 끝까지 나오지 못하게 만들어, 시야각을 내주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였지.

지금 조운선 중앙에 위치한 해군 궁병들도 똑같은 상황이었다.

“...”

앞을 봐도 발밑이 보이지 않으니 적잖게 두려움이 밀려든다.

적 궁병이 저 앞에서 제대를 갖추고 있는 게 분명하지만 보이질 않고, 저 밑에서 비명과 고함소리가 들리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이질 않는다.

그저 보이는 건, 저 멀리서부터 개미떼처럼 우글거리며 달려드는 적들 뿐.

다만 방금 전의 일제사격으로 적 궁병이 꽤나 상했는지, 아까보다 날아들던 화살의 양이 줄어든 것처럼 느껴져서... 그저 ‘적들이 꽤나 쓰러졌겠구나.’ 하고 짐작할 따름이다.

‘그럼 됐지. 뭐.’

그렇게 스스로 납득하며 두려움을 밀어내자.

삐빅! 호각소리가 들려오는 동시에 선수루의 갑판벽에 숨어 있던 중대장의 손이 한쪽으로 움직이고, 그 손에 쥐어진 짧은 깃발이 어디를 쏴야하는지 방향을 알리고 있었다.

쉬쉬싱! 모두가 시위를 걸기 무섭게 중대장의 깃발이 내려갔고.

“발사!”

해군병은 보이지도 않는 전장 어딘가에 있을 적 궁병대를 향해, 전과 똑같이 화살을 날려줬다.

보이지 않는 궁병들끼리의 난타전이 계속 이어지는 와중에, 힘겹게 공성사다리를 끌고 온 적들 또한 분투하고 있었다.

쾅쾅! 한번 터질 때마다 보이지도 않는 마수를 뿜어내는 조란탄에 갈려나가고, 쉭쉭! 쏟아지는 눈먼 화살에 맞아 쓰러지면서도, 적들은 강 위에 떠 있는 성벽을 향해 달라붙었다.

하나같이 제대로 된 갑옷에 팔뚝을 휘감은 비갑을 낀 정예병은 공성사다리 끝을 강바닥에 박아 넣고 달려 나갔다.

공성사다리의 다리는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쑥. 강바닥을 파고 들어갔고, 공성사다리 꼭대기에 묶여 놓은 밧줄을 쥔 병사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있는 힘을 다해 낑낑 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 긴 사다리를 위로 올리면, 끝을 박아 넣고 끌어당겨 큰 반윈을 그리며 위에서 떨어지게 만들어야 하지 않나.

쿵쿵쿵! 운이 좋은 건지, 아니면 훈련이 잘 된 건지, 낑낑 거리며 수직으로 번쩍 들린 공성사다리는 조운선의 갑판을 향해 쿵쿵 떨어졌다.

사실 운이 좋은 게 맞았다.

이들이 준비해 놓은 공성사다리는 조운선의 갑판보다 높은 광녕성의 성벽을 기준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니 사다리의 높이가 갑판보다 높았던 거지.

허나 지금은 해자나 다름없는 강이 존재했고, 거기에 사다리를 박아 넣을 수는 없지 않나. 그렇다보니 함선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공성사다리를 박아 넣을 수밖에 없었고, 그로인해 용케 공성사다리가 갑판에 걸칠 수 있었던 거지.

그리고 그렇게 만든 공성사다리를 향해 적들이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11소대!”

“12소대!”

“온다!”

“준비!”

삐빅! 갑판벽에 바짝 붙은 화포병들은 연신 화포를 쏴대고, 그 뒤에 위치한 궁병들이 화살을 쏴대는 와중에.

2층에 머물고 있던 해군병들이 소대장의 부름에 응해, 우르르 좁은 갑판에 투입됐다.

이번 작전은 수개월 전부터 준비해왔으니, 당연히 적들이 공성사다리를 투입할 경우에 대한 비책을 준비해 놓기 마련.

순식간에 올라온 소대원들은 허리춤엔 전투도끼를 다른 한손엔 장창을 쥐고, 화포병들과 함께 갑판벽에 포진했다.

사실 조운선을 개조할 때. 전함처럼 선창 2층에 갑판구멍을 뚫고 화포를 배치하려 했다. 그래야 포격도 하면서 갑판 위에선 마음껏 싸울 수 있으니까.

허나 조운선은 전함이 아니니, 선체 구조 자체가 달랐다. 선창 2층에 구멍을 뚫었다가는 아예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갑판벽이 무너질 정도로 말이다.

어쩔 수 없이 횡하니 뚫린 갑판 위에 화포를 배치할 수밖에 없었고, 화포를 빼곡하게 배치하면 백병전 자체가 불가능해지지 않나. 하여 타협점을 찾은 게 현측에 10문의 화포를 띄엄띄엄 배치하는 것.

선창 2층에서 올라온 병사들은 그렇게 화포병들 사이의 빈공간을 파고 들어, 방해되지 않게 자리 잡고서 장창을 찔러대기 시작했다.

“와아아!”

“올라라!”

힘겹게 사다리를 오르는 적병과 그 사다리 근처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격려와 응원을 내뿜는 적병들을 향해.

장창으로 무장한 소대원들은 그들의 기대를 무참히 박살내 줬다.

어깨쯤까지 올라와 있는 갑판벽은 그 자체로 방패이자 받침대나 다름없고, 소대원들은 그 갑판벽에 기대어 포진했다.

“하나!”

소대장의 외침에, 장창을 꼬나든 소대원들은 흡사 작살을 내리 꽂듯 장창을 들고 자세를 잡았고.

“합!”

기운찬 함성과 함께 갑판 근처까지 운 좋기 기어 올라온 적들을 향해, 무심한 창날을 꽂아 넣었다.

“끄억!” “컥!”

창날 끝에서부터 느껴지는 반탄력에 소대원이 장창을 회수하자, 어디 맞았는지 모르겠지만 적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공성사다리에 굴러 떨어졌다.

공성사다리가 비스듬하게 세워졌다고 해도, 거길 손을 쓰지 않고 올라올 수 없는 법.

“히힉!” 위에서 빛살처럼 내리 꽂히는 창날을 피하려고 목을 움츠리고, 한 손으로 사다리를 붙잡고 다른 한손으로 박도를 휘둘러보지만... 애꿎은 허공만 휘저었다.

말 그대로 빛살. 해군병들도 육군병과 똑같이 무기술 집체훈련을 받았고, 선상백병전을 대비해 창술을 익혀오지 않았나.

지금처럼 기이한 공성전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사실 크게 다를 건 없었다. 바다에서 싸울 때도 워낙 선체가 높은 전함은 항상 적 함선보다 위에 있었기에, 높이 차가 달라졌을 뿐 해군병들이 하던 훈련과 크게 다를 게 없었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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