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527화 (527/538)

527. 챕터64. 진입하다 (1)

조선군에게 있어서 게르는 그저 야전막사, 야전숙소에 지나지 않지만, 몽골인들에게 게르는 집이자, 신분을 나타내는 증명이며, 권위를 상징하는 위엄 아닌가.

그랬기에 연오랑은 왕족만 쓸 수 있는 거대한 게르에 머물 수 있었지만... 그는 속으로 ‘쓸데없이 뭐 하러 이렇게 크게 만들었나.’라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게르 앞에 놓여 있는 나무로 만든 접이식 의자에, 푹 꺼지듯 앉아서 잠시 기다리고 있자... 기다리던 손님이 다가왔다.

“전하.”

연오랑은 벌떡 일어나, 호위도 없이 혼자서 덜렁덜렁 걸어 온 인물에게 고개를 숙였고.

“용연군.”

그 또한 인사를 받고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흐음.’

연오랑은 말없이 초원을, 그리고 앞에선 사내를 살폈다.

흔하디흔한 몽골식 변발을 하고, 초기 착호군 마냥 맹수갑옷을 입은 사내.

연오랑 또래로 보이지만, 날 때부터 키워온 위엄이 절로 뿜어 나오는 사내.

명에게 항복하여 우랑카이 3위가 되었다가, 명이 망하고 나서 다시 요왕부로 부활한 자들의 왕. 과거 동방3왕가 시절에 마지막 요왕이었던 아자스리의 손자 중 한명인 쿠타리.

원래 역사에선 명이 일으킨 역사에 파묻혀, 역사에 발자취를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던 인물이 그 앞에 버젓이 서 있었다.

‘요왕 쿠타리라.’

연오랑은 다시금 그의 이름을 혀에 굴려봤다.

운석핵꿀밤으로 인생이 뒤바뀐 이들이 어디 한둘이겠냐만, 쿠타리 만큼 극적으로 바뀐 이도 없을 거다.

미래의 연오랑은 쿠타리를 당연히 몰랐고, 게임 캐릭터로도 구현되지 않은 걸 보면 역사에 족적을 남기지 못한 게 분명.

허나 명이 망한지 40여년이 흐른 지금 역사에선...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지도 못하는 인물이 경쟁자를 모두 제거하고, 다시금 중원을 할퀴기 위해 이 자리에 서 있었다.

“앉으시지요.”

“음.”

연오랑의 말에 요왕 쿠타리는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그는 미래의 해수욕장에나 있을 법한 해변의자가 퍽 낯선지, 묘하게 늘어지는 느낌을 조심스레 받아들였다.

일국의 왕을 앞에 두고 이렇게 건방지게 굴 수 있겠냐만... 연오랑 아닌가.

천하에 알게 모르게 퍼진 백호장군이라는 위명은 둘째 치고, 그는 공주의 부마이며 왕자들인 대군을 제외하면 가장 높은 품계에 올라 있는 용연군이다.

게다가 아무리 왕이라고 한들, 국가 간의 힘 차이를 무시할 수 없는 바.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 조선의 대귀족이라면, 요왕부의 왕과 맞먹어도 딱히 이상할 건 없지 않나.

해서 처음에는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색했지만, 얼굴을 맞댄지 한참 된 지금은 그냥 얼렁뚱땅 대충 대했다.

연오랑이야 원래 제멋대로 구는 인물이고, 요왕 쿠타리는 조선의 눈치를 봐야하는 인물이니까.

“이제 진짜 시작인데...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각양각색일세. 불안감. 두려움. 기대감 모든 게 뒤섞여 혼돈으로 치닫고 있지만 그럼에도...”

“...?”

“기대감이 가장 크지. 드디어 중원에 발을 딛게 되니까. 그 옛날 선조들조차 하지 못한 대업이지 않나.”

“예.”

자기도 모르게 열기에 차올라 주먹을 불끈 쥐는 요왕 쿠타리를 보며, 연오랑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동방3왕가는 칭기즈칸 시절부터 동북방의 왕가가 되었고, 원이 들어서면서 원 황실과 묘한 알력관계를 이어갔다. 몇 차례 거대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결국 원 황실에 밟혔지.

그런 과거를 잊지 않은 요왕부에게 원 황실의 고토였던 대도. 북평을 차지한다는 건, 그 어떤 대업보다도 더 큰 대업일 터... 역사를 만든다는 열망이 진중을 휩쓸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테다.

“게다가 한 자리에 이렇게 많은 대군이 모인 적이 있었나? 벌써부터 방심하면 안 되지만, 그 누구도 우리가 질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네.”

“...”

연오랑은 다시금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전쟁에 요왕부는 나라의 존망을 걸었다.

문자 그대로다. 나이고하를 불문하고 말을 타고, 활을 쏘고, 칼을 휘두를 수 있는 모든 남성을 동원했다.

인구수가 20만명이 조금 넘는 요왕부에서, 무려 5만에 가까운 병력을 뽑아 한자리에 모았으니까.

모 아니면 도. 이번 전쟁에서 이기면 북직례를 차지하는 거고, 지면 요왕부가 멸망하는 거지.

그럼에도 분위기가 나쁘지 않은 건 요왕부 병력 5만에, 조선군 기병 2만, 화기대와 보급대 오천, 끝으로 몽골남부연맹의 기병 2만명이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려 총 병력 9만오천에 가까운 기병 대군이 한 자리에 모였는데, 그 누가 전쟁에서 질 거라고 생각하겠나.

물과 기름과 같은 이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는 것 자체가, 이미 승기를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다.

“허면... 정리는 잘 끝나셨습니까? 내일이면 출병인데 말입니다.”

“얼추 다 끝났네. 사소한 대립이 있긴 하지만, 전쟁에 영향을 주진 않을 걸세.”

“흐음...”

지난 일을 떠올리기만 해도 골치가 아픈지, 요왕 쿠타리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고... 연오랑은 ‘진짜냐?’라고 한번 더 되묻듯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무례한 행동이지만 뭐 어쩌겠나. 그만큼 중요한 일인데.

“제가 계속 되묻는 게 주제 넘는 행동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중요한 사안이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아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하를 위해서 드리는 말씀이니까요.”

“알고 있네. 그러니 걱정 말게.”

“예.”

쿠타리가 한번 더 자신만만하게 답하자, 연오랑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뭐. 일이 꼬이면 손해는 요왕이 보는 거니까.’

속으론 딴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과거. 조선은 요동정벌을 천명했으나 연오랑이 끼어들면서 거대한 전쟁으로 방향이 틀어졌고, 북평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물밑에서 복잡한 밀약이 오가기 시작했다.

조선군이 북상해 요동을 압박하는 수개월 동안, 장막 뒤에선 혀를 칼로 삼아 끊임없는 싸움이 벌어졌던 거지.

당연한 말이지만 요왕부는 조선의 제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나라 간의 거래에 있어서 미래를 위해 당장의 손해를 감수하는 경우도 있고, 정치적인 이유로 손해를 자처하는 경우도 있다.

허나 북직례를 요왕부에게 준다고? 이건 조선 입장에선 너무나도 큰 손해 아닌가. 조선의 속사정을 알지 못하는 한,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제안이었지.

요왕부가 차지한 땅이 북직례에 비해 몇 배는 크다지만, 쓸모 있는 땅을 생각하면 비교자체가 불가했다.

나아가 북직례의 인구수는 요왕부와 비교할 바가 못 된다. 땅보다 사람이 더 중요한 이 시대에, 거꾸로 된 선택을 하는 건 음모이자 암계일 게 분명.

“북직례와의 전쟁에서 요왕부를 화살받이로 써서 멸망시키는 게 아닌가?”라는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조선은 우여곡절 끝에 어떻게든 이들을 설득했고, 요동을 큰 싸움 없이 정복하면서 진의를 보였다.

이때 쯤 되자, 요왕부로서는 딱히 선택지가 없었다.

요동을 정복한 전력으로 봐서 조선군과 싸우면 필패. 조선과 싸워서 멸망할 것인가, 아니면 북평부를 쳐서 북직례를 차지할 것인가.

어차피 망할 거라면, 그나마 살아날 가능성이 큰 쪽을 선택하는 게 낫지 않겠나.

해서 조선군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결론이 났고, 조선은 요동을 공략하는 동안 “우리는 최선을 다해 너흴 도울 것이다.”라는 신의와 성실을 보였다.

더럽게 무거운 공성포 수십문을 오천에 달하는 화기대와 보급대에 딸려서, 요동정벌이 진행되는 동안 요왕부의 강역을 통과해 이곳 거용관 코앞까지 보냈으니까.

이러한 움직임은 “우린 요왕부를 믿는다.”라는 신의를 보여준 것이자, “다시금 거용관을 무너뜨리겠다.”라는 성실을 몸으로 표현한 거지.

허나 연오랑이 방금 말하는 정리란, 이런 외부사정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내부정리를 확실히 끝냈다라... 어찌됐건 왕은 왕이라 이거지? 그저 운이 좋아서 타안위를 집어삼킨 게 아니라는 거겠지.’

연오랑은 침묵하며 초원을 바라보는 요왕 쿠타리를 힐끔 살폈다.

김칫국을 마시는 걸지도 모르지만, 연오랑과 조선은 요왕군을 모집해 거용관 코앞에 집결시키는 동안, 앞으로 북직례를 어떻게 다스릴 건지 미리 결정해 놓으라고 조언했다.

조선이 역사에 유례없는 중앙집권을 추구하며 나아가고 있다면, 요왕부는 아직 원나라 시절의 정치체계를 완전히 벗어던지지 못했다.

이들은 여전히 백호, 천호로 대표되는 봉건적 정치체제와 칸으로 대표되는 전제정이 섞여 있었으니까.

그나마 원나라 시절과 달라진 점이라면, 요왕부의 전신인 태녕위가 만들어질 시절에 명나라에 의해 강제적으로 얼추 가지치기가 되었다는 점.

명이 망하면서 우랑카이 3위의 역학관계가 깨지고, 조선이 여진을 복속하고 북방을 장악하면서, 그들 내부에서 투쟁이 벌어져 어느 정도 큰 덩어리로 뭉쳤다는 점.

끝으로 타안위를 힘으로 찍어 눌러 완전히 흡수해 버렸다는 점.

해서 봉건적 정치체제를 갖추긴 했지만, 전보다 칸. 요왕의 권위가 강력하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뭐... 어찌됐건 봉건제의 잔재가 남아 있으니, 북직례를 차지하고 난 후에 누가 어디를 다스릴 건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바.

조선은 승리가 당연하다고 말하듯, 전쟁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논공행상부터 하라고 제안했던 거지.

그런데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요왕 쿠타리는 해냈다.

‘이건 요왕이 그만큼 권위가 강력하다는 뜻인 동시에, 요왕가가 품고 있는 군력이 다른 천호장들보다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뜻이겠지.’

이러니 연오랑은 이어지는 민감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전하께선, 요왕부를 아국처럼 만들고 싶으십니까?”

“궁극적으론 그렇게 해야 할 테지만, 당장 진행할 생각은 없네. 솔직히 말해서 우린 그대들처럼 정교한 행정체계를 구축할 능력이 부족하니까.”

“...”

‘역시 약았단 말이지.’

연오랑은 요왕 쿠타리의 시원시원한 대답에, 히죽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하나 듣는 사람도 없고, 문서로도 남지 않는다. 그러면 시원하게 속내를 털어놓고, 뽑아먹을 수 있는 건 뽑아먹는 게 이득 아니겠나.

아득바득 기어올라 왕위를 쟁취한 요왕은 필요하다면 언제든 허리를 굽힐 수 있을 정도로 융통성이 있었고, 그가 판단하기에 연오랑만 잘 꼬드겨 설득하면 조선에게서 더 많은 지원을 뽑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속내를 감출 것 있나.

‘자. 너희도 우리가 건재하는 게 좋지? 그러니 팍팍 밀어주라고.’라는 모습을, 연오랑 앞에서 만큼은 여실히 표현했다.

“우린 조선의 조언을 받아들인 비단길 연합의 나라들이, 어떻게 발전하고 체제를 이루는지 봤네.”

“예.”

요왕부는 비단길 연합에 끼지 못했을 뿐이지, 몽골남부연맹과 아다이가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지 똑똑히 지켜봤다.

아니다. 오히려 ‘저거 저대로 놔두면 우리가 위험하다!’라는 심정으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지.

“몽골남부연맹은 중국의 호족연맹처럼 변해서 더욱 굳건해 지고 있고, 반대로 아다이는 칸이 되어 중앙집권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

“하지만 생각만큼 쉽게 되진 않을 겁니다. 사람도 부족하고, 땅은 쓸데없이 넓으면서도 농사를 짓기에는 그리 좋지 않으니까요.”

“맞는 말일세. 그래서 우리도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살 수밖에 없었지만, 북직례를 차지하게 되면 한족을 아래에 두게 되지 않겠나.”

“예.”

“하여 고민한 바. 결국 조선의 조언을 받아들여, 그대들을 따라하는 게 최선이라는 결과가 나오더군. 원나라가 어떻게 망했는지 봤는데, 그 전철을 똑같이 밟을 순 없지 않나.”

“...?”

“나는 몽골인들을 단순한 지배층이자 말 위에 탄 전사를 넘어서, 진짜 귀족이자 전사이며 행정가로 만들 생각일세. 그래야만 우리보다 수십배는 많은 한족들을 무탈하게 다스릴 수 있을 테니까.”

‘허...? 이 양반 보게?’

연오랑은 거침없이 속마음을 털어놓는 쿠타리를 보며, 작게 혀를 내둘렀다.

말박이 성애자인 몽골 출신에게서, 이런 생각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으니까.

“왜. 이상한가?”

“...”

연오랑은 대답을 회피했지만 표정만큼은 완전히 숨기지 못했는지, 요왕 쿠타리는 한방 먹였다는 듯 피식 웃었다.

“우린 조선이 어떻게 변하는지 처음부터 지켜봤네. 우리의 한계 또한 여실히 깨달았지. 무역항에서 파는 상품 중에서, 조선의 서적이 꽤나 많은 걸 알고 있나?”

“예. 뭐...”

연오랑은 자세히는 모르지만, 꽤 많은 조선산 서적이 해외로 수출된다는 말을 듣긴 들었다. 그것도 한문으로 쓴 서책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으로 된 원본까지도 말이다.

물론 기술기밀을 품고 있는 서적은 반출이 불가하겠지만, 그게 아닌 온갖 서적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

다만 조선에 환장하는 일본이나 남방소국이 아니라, 요왕부까지 그렇게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대가 여진을 복속하고 신도시를 건설하는 데 앞장섰다고 들었네.”

“제가 다 한 건 아닙니다만...”

연오랑은 가식 없는 공치사에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편견을 버리고 곰곰이 생각해 보건데... 그 땅은 본래 우리 땅이었고, 여진 또한 한 때는 우리에게 복속해 있었지. 헌데 어째서 우린 그대들과 같이 하지 못했을까.”

후회와 한탄, 얕은 절망과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무리 우리가 말 위에서 생을 마치는 전사라고 해도, 바보는 아닐세. 전통을 고수하기에는 시대가 너무 많이 변해버렸어. 더 이상 말 위에 탄 전사가 천하를 지배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지. 나는 요왕일세. 나에겐 내 백성을 바르게 이끌어야할 책임이 있네.”

쿠타리는 거암을 파고들어 낙인을 찍듯, 요왕이라는 말을 무겁게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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