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528화 (528/538)

528. 챕터64. 진입하다 (2)

‘전통을 버리겠다라... 오롯이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

연오랑은 쿠타리가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는 조선이 어떻게 성장했는지 봤다고 했고, 말 위에 탄 전사가 몰락하는 걸 느꼈다고 했다.

이게 뭘 뜻하겠나. 화포가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하는지 음으로 양으로 느꼈다는 거겠지.

그 화포가 기병을 대체할 수도 있다는 것도, 설령 대체하진 못해도 하다못해 지난날처럼 기병이 무적으로 군림하는 걸 막을 수 있다는 걸 알아차렸을 거다.

왜? 조선이 지금껏 화포를 앞세워 수많은 적들을 꼬꾸라지게 만들었으니까.

이건 요왕부가 원나라와 똑같이 통치했다가는 조선, 산동, 하남, 심지어 몽골남부연맹에게도 밀릴 수 있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요왕이라? 한마디로 쪽팔렸다는 말이군.’

한번 더 쿠타리가 말하지 않은 깊숙한 속내를 파고 들어 끄집어냈다.

자신이 요왕이라는 걸, 왜 저렇게 강조했겠나.

잠깐 명에게 복속하긴 했지만, 요왕은 무려 몽골제국시절부터 있었던 동방3왕가의 맥을 잇고 있다.

헌데 그의 입장에선 근본을 찾을 수도 없는 아다이가 칸이 되어 버젓이 성장하고 있고, 더더욱 근본조차 없는 몽골남부연맹 또한 요왕부를 뛰어넘을 정도로 성장했다.

널리고 널린 항명출신 천호장들이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진 요왕부를 앞서나가면, 자존심에서 상처를 입는 게 당연하지.

‘마지막으로... 요왕이라는 자리가 그를 압박하고 있어.’

방금 말한 요왕이라는 자존심 문제와 함께, 실질적인 문제가 그를 자극하고 있었다.

예전처럼 각자 자기의 권역에서 따로 놀면 “너는 너대로 살아라. 나는 나대로 살겠다.”라고 모른 척 넘길 수 있지만, 조선으로 인해 천지가 개변했다.

요왕부로서는 알지도 못했던 저 먼 남방의 소식과 물산이 등장했고, 비단길을 통해 저 먼 서방세계의 소식과 비단길 연합이라 불리는 유목민족국가의 소식이 들려온다.

한족이 말하는 천하와 천명이 깨지고, 온 천하가 통교하는 시대가 도래한 이상. 이젠 요왕부도 눈 감고, 홀로 잘났다고 살 수 있는 시대가 아닌 거지.

이러한 변화가 가장 극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곳은 바로 동북방.

비단길의 시작점이자 종착점인 곳 답게, 가장 격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곳이 조선북방이었다.

문제는 유목민족은 개개인의 활동범위가, 농경민족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다는 점이었다.

비교할 대상이 없고, 만날 수 있는 자들이 자신과 비슷한 생활을 한다면, 구체적인 불만과 불평이 나오지 않는다. “쟤들이나 나나 거기서 거기지 뭐.”라며, 타성에 젖은 삶을 살 가능성이 높겠지.

허나 요왕부 백성들은 조선, 몽골남부연맹, 아다이, 북여위와 접하고, 국가를 넘어 개별 부족끼리 흔하게 교류하며 살고 있었다.

헌데 모두가 비단길을 통해 삶의 질이 눈에 띄게 바뀌고 있으니, 요왕부 백성들이 혼란을 느끼는 건 당연한 말.

이러한 혼란은 “왜 우리는 저런 풍요를 가질 수 없지?”라는 불평으로 표출되어, 궁극적으론 “요왕은 뭐하는 거야?”라는 불만으로 성장하는 거지.

요왕은 지난 십여년간 이러한 변화를 몸으로 느꼈고, 민심이 흔들린다는 것 또한 느꼈다.

그러니 결론은 하나다.

어떤 식으로든 조선과 손을 잡고 부를 축적해 민심을 다독여야 했고, 그 과정에서 북직례까지 차지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건 없는 거지.

“...”

“그렇군요.”

연오랑이 긴 침묵 끝에 홀로 답을 내놓자, 요왕 쿠타리는 그의 속내를 읽은 듯 쓴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속으로 분명 ‘곰처럼 생긴 것과 달리 참으로 여우같구나.’라는 생각을 했을 거다.

“그래서 말인데, 조선으로 우리 학자들을 보내 교육받을 수 있겠나?”

“그건...”

구렁이 담 넘어가듯, 쿠타리는 은근슬쩍 자신에게 유리한 제안을 던졌지만... 연오랑은 대답을 회피했다.

허나 그의 표정은 밀랍처럼 굳어 단호하게 고개를 내젓고 있으니, 굳이 말로 듣지 않아도 불가능하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시대에도 유학을 가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지만, 조선이 그걸 허가하지 않은 건 기술유출 때문.

연오랑이 알려주거나, 전문화, 학문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기술과 학문은 고등한 수준이 아니었다. 오히려 난이도가 낮아서 쉽게 따라할 수 있기 때문에 기밀이 되었지.

그러니 조선 내부에 외부인을 들여와 수학하게 하면, 그 자체로 기술유출이 벌어지지 않겠나.

적어도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까지, 조선은 앞으로 수십년간은 전면적인 개방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가...”

하지만 요왕 쿠타리는 거부될 걸 알았는지, 딱히 실망한 표정도 짓지 않았다.

이미 협상할 때에 실패했고, 지금은 분위기를 타서 은근슬쩍 연오랑을 떠본 것에 불과하니까.

“대신 다른 비단길 연합의 나라처럼, 아국의 학자들을 보내 조언을 드리겠습니다.”

“상당히 많은 학자들을 보내주길 바라네. 그대가 알지 모르지만, 우린 그간 준비를 많이 했거든.”

“...?”

‘이건 또 뭔 소리야?’

연오랑이 영문 모르는 표정을 숨기지 않자, 쿠타리는 또 다시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조선이 성장하는 걸 보며, 우린 공부를 많이 했네. 말 그대로 진짜 공부네.”

“...?”

“왕부의 지원을 받아, 몽골어로 번역한 조선의 서적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나?”

“...!”

‘허. 이것 봐라?’

연오랑은 자신이 모르던 사이에 벌어진 일에 흥미를 느끼고선, 눈을 반짝거렸다.

아마도 조정에선 알고 있었겠지만, 그에게 알려줄 필요가 없었기에 가만히 있었나 보다.

‘그만큼 큰 문제가 아니었다는 거겠지.’

그는 그리 생각하며, 잠자코 쿠타리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다.

조선은 세계 곳곳에서 긁어모은 파편화된 기술을 모으고, 훈민정음을 완벽하게 보급하면서, 반 세기는 앞선 금속활자 인쇄기를 완성했다.

연구소와 연수원에서 매일같이 갱신되는 학문의 서적들을, 각 현청의 장서각에 채우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까.

인쇄기가 없었다면, 서적의 대량 보급은 불가능 했을 거다.

이 인쇄기는 민간에 풀리지 않았지만, 과거의 방식이 없어지진 않는 법.

이재理財에 밝은 몇몇 상인들은 훈민정음으로 작성된 서적을 외국어로 번역한 후, 필사해서 팔아먹기 시작했다. 물론 조정의 허락이 있어야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요왕은 창주에서 파는 상품 중에서 서적이 있는 걸 알아차리고, 조선 상인에게 몽골어로 번역한 서적을 주문제작했던 거지.

“아...”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을 하고 말았다.

익히기 어려운 한문 서적이 아닌 쉬운 훈민정음 서적이, 이런 나비효과를 일으킬 줄은 몰랐으니까.

“나는 요왕부를 일으켰네. 왕부는 그저 그런 군벌이나 천호장이 아니지. 우리에겐 나라를 다스릴 통치논리가 필요했네.”

“...”

“허나 천하의 중심이라던 명은 망했고, 원나라조차 따랐던 유학이 무너졌네. 옛 원나라의 방식을 고수하는 건 불가능해졌다고 해서, 내가. 요왕인 내가! 그저 무식하게 칼이나 휘두르는 여진이나 천호장들처럼 살 수는 없지 않나?”

“...”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홀려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런 대화만으로도, 쿠타리가 왜 요왕이 된 건지 알 것 같다.

그는 유목민족인 몽골인의 한계를 뛰어넘어, 진짜 나라를 다스리는 왕으로서의 신념과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걸 아랫사람들에게 납득시킬 위엄과 힘 또한 가지고 있었을 테고.

‘말박이 놈들 중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천하가 쪼개져 난리가 난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의 길을 찾아야했는데 해답은 가까운 곳에 있더군.”

“...”

”조선 말일세. 그대가 이끌어낸 개혁 이후의 조선은 특히나 그러했지.”

뻔뻔하게 그에 대한 공치사를 늘어놓는 쿠타리를 보며, 연오랑은 다시금 살포시 얼굴이 붉어졌다.

아마 여기서부터 조선에 대한 관심이 시작됐을 거고, 조선 서적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갔을 거다.

연오랑의 자본유학이 등장하기 전, 조선 사상계가 분열하면서 별의별 사상이 다 튀어나왔다. 중국 또한 마찬가지.

이렇게 만들어진 다양한 사상서는 의주를 통해 온 사방으로 퍼져나갔을 거고, 성리학을 대체할 새로운 통치 이데올로기를 찾던 요왕부는 이것저것 공부하며 “뭐가 좋을까?”라며 연구 했겠지.

그리고 이렇게 퍼져나간 사상서 중에선, 자본유학도 있었다.

“그대가 만든 자본유학은 퍽 감명 깊었네. 허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야 각 나라의 사정에 맞춰 빈틈을 채워 넣으면 되는 일. 그런 면에선 차라리 옛 성리학보다 나은 점이 있더군. 융통성이 있으니까.”

“...”

“또한 조선이 어째서 저렇게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지 지켜보니...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더군. 학문을 백성들에게 널리 뿌렸다지? 그래서 우리도 그렇게 하기로 했네.”

“허...”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조선이 훈민정음을 퍼트린 것처럼, 요왕부 백성들에게 몽골어를 익히게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아무리 새로운 사상서를 통치논리로 받아들였어도, 그거로는 백성들에게 몽골어를 배우게 할 수 없을 텐데요?”

“맞네. 이런 사상서는 나나 왕부의 관료들이나 관심이 있을 뿐. 백성들이 관심을 가질 서적은 아니지 않나?”

연오랑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훈민정음이 있기 전에, 중국과 조선조차도 글을 아는 이들이 흔한 건 아니었다.

헌데 몽골어를 유목민족에게 익히게 하다니, 이것만으로도 요왕의 힘이 느껴진다. 조선 농부보다도 더욱더 글의 필요성을 못 느끼던 게, 유목민족이었을 테니까.

“그래서 어찌하면 좋을까 고민했는데, 꽤 좋은 서적이 있더군. 조선의 수의학과 의학, 약초학, 사냥술 서적이 얼마나 큰 효과를 발휘했는지 그대는 모를 걸세.”

“...”

“쉽게 믿기지 않나 보군?”

민망해서 답을 하지 않았지만, 용케 표정을 읽고서 쿠타리는 피식 웃고 말았다.

“...”

그리고 그 웃음을 받은 연오랑은 일이 어떻게 돌아갔을지, 맹렬하게 머리를 굴려 과거를 거슬러 올라갔다.

‘생각해보면 불가능한 게 아니야. 조선 농부들에게 훈민정음으로 적힌 농업학이 소개되고 난 후. 다들 알아서 익히면서 폭발적으로 농업학이 성장했잖아? 요왕부 백성들에게는 수의학을 비롯한 학문이 농업학이나 마찬가지였겠지.’

평생을 말 위에서 살며 수렵, 목축, 유목을 하는 요왕부 백성들에게, 가축을 키우고 기르는 건 인생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이들에게 수의학과 사냥술과 같은 학문은, 특별한 사람이 익히는 특별한 학문이 아니라 일상학문과 마찬가지일 터.

한마디로 저 먼 뜬구름 잡는 학문이 아니라, 익히지 않으면 무조건 손해를 보게 되는 필수학문인 거지.

요왕부는 조선서적을 번역한 몽골어 서적을 구입한 후에, 그걸 필사해 각 부족에게 뿌렸을 거다.

각 부족에선 이 서적의 가치를 알고서 어떻게든 몽골어를 익히며 알아서 필사했을 거고, 밑으로 밑으로 퍼져 일반 백성들 또한 알아서 필사하면서 자연스레 몽골어를 익히게 됐겠지.

“맞습니까?”

“맞네. 조선어. 훈민정음이라고 하던가? 그만큼은 널리 퍼지진 않았지만, 그대 생각보다 훨씬 많은 백성들이 몽골어를 읽고 쓸 줄 아네.”

“...”

“조선의 도움이 컸지. 연필과 혼합지라고 하던가? 그거야 말로 우리를 위해 만들어진 물건 같더군.”

“아...”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 위에서 사는 유목민이 언제 먹을 갈고 붓을 적셔 글을 쓰겠나. 그냥 대충 끄적거려도 되는 연필이 훨씬 편하지.

나아가 혼합지가 등장하면서 종이의 가격 또한 급격하게 하락했다. 지금은 서방에서 들여온 아마가 북방에서 수확되면서, 혼합지의 품질은 올라갔으면서 가격은 더 떨어지는 현상을 보이고 있었지.

이 수확을 조선뿐만 아니라, 요왕부도 받아먹고 있었나 보다.

“호오...”

‘이야... 모르는 곳에서, 준비를 많이 했고만?’

연오랑은 다시금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이렇게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백성들을 억지로라도 늘린 이유가 뭐겠는가.

그가 처음에 말했듯. 요왕 쿠타리는 유목민족에 대한 흔한 편견인 무식한 칼잡이의 한계를 넘어서, 나라에 필요한 문인관료를 양성할 기반조건을 먼저 만들어 낸 거다.

물론 이 작업을 하면서 온갖 우여곡절을 다 겪었겠지만, 타산지석으로 삼을 훌륭한 선생이 있다.

천명이 사라진 시대에 전인미답의 미개척지를, 먼저 헤치며 나아가고 있는 조선.

제반사정이 다르니 조선과 똑같이 할 수 없지만, 얼추 같은 방향으로 나가면서 따라하기만 한다면... 보다 나은 왕부를 만들 수 있지 않겠나.

요왕 쿠타리는 그렇게 생각하고서, 조선이 모르는 사이에 야금야금 조선의 발걸음을 따라 밟고 있었다.

‘운이 좋았어. 크기 전에 지금 끼어 든 게 천만다행이야.’

연오랑은 가슴이 철렁해, 쿠타리 몰래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요왕부가 타안위를 쉽게 집어삼킬 수 있던 것도, 나아가 복여위를 복속하려고 했던 것도, 전부 조선을 따라하던 짓이다.

조선이 아무리 선진문물을 가지고 있어도, 몽골인 입장에선 말도 통하지 않는 조선보단 요왕부에 흡수되는 게 편하지 않겠나.

요왕부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진짜 나라로서 기틀을 잡아가고 있었으니까.

‘가만 놔뒀으면 제왕부까지 집어먹었을지도 모르지.’

조선이 끼어들기도 뭐한 게... 조선이 복여위를 신속시킨 것처럼, 요왕부가 복여위를 자발적으로 신속시키면 끼어들 명분이 없지 않나.

제왕부도 똑같은 전철을 밟아 빼앗겼을 수도 있다.

‘그러면 비단길을 유지해야하는 조선 입장에선, 요왕부와 적대하기 보단 오히려 요왕부와 손을 잡고 비단길을 안정시켰겠지.’

비단길만 잘 유지된다면 조선 입장에선, 제왕부, 복여위가 중간에 껴 있든 요왕부가 껴 있든 솔직히 상관이 없다.

다만 골치가 아파졌겠지.

요왕부의 덩치가 커지면 조선의 말을 잘 안들을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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