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529화 (529/538)

529. 챕터64. 진입하다 (3)

헌데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연오랑이 끼어들었고, 요왕부는 확장정책 대신 북직례를 차지하게 됐다.

‘요왕이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자고, 휘하 부족들을 앞서서 설득한 이유가 있었어.’

요왕 쿠타리는 요왕부를 과거의 영광을 뛰어넘는 건실한 왕부로 만들기로, 오래전부터 마음먹고 준비해왔다.

그런 입장에서 조선의 눈치를 봐가며 위태위태하게 확장하는 것보단, 북직례를 차지하는 게 훨씬 더 쉽고 안전한 일 아닌가.

그리하여 지금. 그는 그가 생각했던 요왕국을 넘어서, 옛 원나라처럼 한족까지 흡수해 다스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래서 전통을 버리니 뭐니 하는 말을 쉽게 했던 거군. 이미 그러고 있었으니까. 몽골인들을 진짜 귀족이자 행정가로 만들겠다는 선언도 마냥 허풍이 아니겠지. 이미 기틀은 잡아뒀으니까.’

이래서 조선의 지원이 많이 필요하다고 요청하는 걸 테다.

조선 학자들의 학문을 쏙쏙 빨아먹어서, 옛 원나라 시절의 조정이 아닌 개혁 후 조선과 유사한 조정을 만들 생각일 테니까.

“...”

연오랑은 묘한 눈길을 숨기지 않고 쿠타리를 바라봤고, 그는 모른 척 시치미를 떼며 초원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만 그는 요왕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 가지 의문이 솟아났다.

그간 요왕부에 관심조차 없던 연오랑조차 이야기를 듣자마자, 요왕이 하는 짓이 위험하다는 걸 알아차렸는데... 세종과 태종이 몰랐을까.

‘그럴 리가 없겠지.’

그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지금 역사의 조선은 명만 바라보면서 외부세계와 담벼락을 세운 장님이 아니다.

무려 남방무역과 북방무역의 교차지가 바로 조선.

돈이 모이는 곳에 정보가 모이는 법이니, 조선이야 말로 다른 나라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렇게 모인 정보의 종착점이자 꼭대기에 올라 있는 게, 세종과 태종 아닌가.

또한 무역항과 무역도시의 상인은 조정관원이고, 그들은 매일 같이 동향보고서를 작성해 조정으로 보냈다.

조선의 신학문 서적이 번역되어 수출되는 것도, 당연히 보고가 들어갔겠지.

‘그럼에도 내버려 둔 건... 가만 놔둬도 문제가 없다는 뜻이겠지.’

어쩌면 요동을 처리한 후에, 기회를 봐서 요왕부도 처리할 생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헌데 북직례를 끌어들이면서, 오히려 일이 잘 풀린 셈이 됐네.’

연오랑은 속으로 히죽 웃었다.

조선은 북직례의 안정을 위해, 후속지원을 할 생각이 분명히 있었다.

몽골인이 한족을 다시 지배하면 분명히 문제가 생길 텐데, 북직례가 흔들리면 산동과 하남 또한 흔들린다.

조선이 바라는 건 북평부를 싹 도려내서 그 자리에 요왕부를 꽂는 것. 이 과정에서 혼란한 시기가 오래가서, 정세가 흔들리는 걸 바라지 않았던 거지.

헌데 요왕부가 알아서 준비를 하고 있었다면, 혼란 또한 더 빨리 끝나지 않을까.

‘게다가 세종과 태종이 이 사실을 알면서도 북직례를 넘겼다는 건... 자신이 있다는 뜻일 거야.’

그는 세종과 태종이 그렸을 미래를 추론해 봤다.

조선이 저 먼 서쪽에서 온 루스인 포로를, 왜 그렇게 기를 쓰고 빨아들일까.

여러 이유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급격하게 체급을 키우기 위해선 외부에서 사람을 받아들여 인구수를 늘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국가 자체의 체급을 뛰어넘는 건 지난한 일.

요왕부가 북직례를 차지하더라도, 땅 크기로 보든 인구수로 보든 조선의 체급을 뛰어넘을 수가 없다. 앞으로도 마찬가지.

요왕부가 커지는 것보다 조선이 커지는 게 더 빠를 테니, 요왕부를 북직례에게 넘겨줘도 문제없다고 판단했을 거다.

‘그리고 이 범상치 않은 요왕이라면, 조선의 의도 또한 파악하고 있을 터... 그래서 이렇게 팍팍 지원하라고 꼬리를 치는 거겠지.’

이 또한 한편의 연극과도 같은 정치모략인 터라,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세어 나오고 말았다.

“...”

“...”

서로가 서로의 머릿속을 탐하며 간보는 시간이 지나가고, 요왕은 다른 사안을 꺼냈다.

“다만 우려되는 일이 있네.”

“무엇입니까?”

“우리땅을 조선에 넘기게 되면, 조선의 강역이 흥안령까지 확장되게 될 걸세. 그러면 비단길 또한 변화가 일어날 텐데... 아다이와 제왕부가 문제 되지 않겠나?”

“음.”

연오랑은 요왕 쿠타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리고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밀약으로 인해 조선은 요왕부의 강역을 차지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이 영역에는 흥안령 산맥이 전부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은 혹시나 미래에 서쪽에서 밀려올 위험을 차단하기 위해서, 서쪽 국경선을 방어하기 쉬운 형태로 확정하려 했다.

그 말은 즉. 흥안령 산맥을 방어선으로 삼으려면, 당연히 흥안령 산맥 전체를 조선땅으로 만들어야 했지.

흥안령 산맥 동쪽 평원지대까지만 차지하면, 드넓은 요서평원 전체를 수비해야 한다. 이게 가능할 리가 없다.

흥안령 산맥을 어중간하게 갈라놓으면, 고지대를 놓고 국지전이 벌어지거나 산맥 지형에 따라 방어선이 들쑥날쑥해져서 후속지원이 힘들어진다.

그러니 몽골초원과 닿아 있는 서쪽 초입까지, 전부 조선땅으로 만든다.

대병을 투사하기 힘든 좁은 산맥 도로에 들어오기 무섭게 반격을 가하거나, 산맥에서 게릴라전을 펼치거나, 산맥 도로를 따라 만든 산성요새를 바탕으로 지연전을 펼쳐서, 요서에 있을 지원군을 불러 오는 게 최선.

해서 이번 밀약을 통해서 조선이 얻어낸 땅은 어마어마했고, 심지어 연산산맥 북쪽의 열하까지 조선의 강역에 포함되게 된 거지.

“그러면 비단길이 어떻게 되겠나. 흥안령 산맥을 끼고 북상해 남하하는 지금의 경로보다, 바로 열하를 거치는 게 더 빠르지 않겠나?”

“몽골남부연맹과 아국이 국경을 맞대게 되면, 아다이와 제왕부가 비단길 무역에서 소외되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 북방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보는 거군요.”

“...”

“그리고 아국이 그렇게 아다이와 제왕부와 각을 세우면... 비단길을 건사하기 위해 북방에 시선이 쏠린 아국이, 북직례를 차지한 요왕부를 제때 제대로 지원해 주지 못할 거라고 우려하는 것일 테고요.”

“...”

요왕 쿠타리는 연오랑의 해석에, 반달 눈을 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곧장 해석하는 걸 보며 꽤나 감명 받은 모양새다.

하지만 진실은 연오랑이 똑똑한 게 아니라, 몇 달간 조정관료들이 머리가 빠개져라 계산한 결과였다.

비단길의 종착점은 조선이니 흥안령 산맥이 끝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진짜 종착점은 창주를 비롯한 북방신도시다. 요동을 차지한 지금은 요양과 심양이 되겠지.

한마디로 드넓은 요서평원을 어떤 식으로든 지나와야, 진짜 조선에 도착한다는 뜻이다.

헌데 창주에 무역도시를 만든 까닭이 뭔가. 수로를 통해서 곧장 북방신도시와 이어지기 때문 아닌가.

“아국이 흥안령을 차지한다고 해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시라무렌 강을 이용하더라도, 대릉하와 소릉하를 이용하더라도, 열하를 차지하더라도, 결국엔 육로로 이동하는 건 필연입니다.”

두 강 모두 요하와 이어지지도 않고, 요동과 이어지지도 않는다. 어쨌든 육로나 해로를 통해 요서로 옮겨와야 하는데... 과연 이게 창주, 새롭게 완성될 흥주로 직행할 수 있는 수로를 활용하는 것보다 효율이 높을까.

앞으론 요하를 비롯한 요동의 수계까지 활용할 수 있으니, 지금처럼 북방을 빙 돌아가는 수로를 이용하지 않아도 되는데?

“...”

“게다가 요동에서 요서로 가기 위해선 요택을 넘어가야 하지요.”

요택의 악명은 하늘을 찌르고, 조선이 요동과 요서를 차지했음에도 요택은 쉽게 손대기 힘든 난제다.

날벌레가 황충처럼 날아다니는 이 늪지대를 매몰해서 쓸만한 땅으로 만들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지 아무도 모른다.

여길 통과하는 길을 만드는 건, 정신 나간 짓이지.

“흐음.”

연오랑보다 흥안령 일대의 지리에 박식한 요왕 쿠타리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슬슬 알아차렸다.

수로와 육로의 수송량은 아예 비교조차 불가한 바, 비단길을 수로로 이어져야 효율이 높아지니 지금 상태에서 딱히 변할 게 없다는 거지.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순 없을 터...”

“먼 미래에 벌어질 일 아니겠습니까? 지금 당장 문제가 생길 일은 없을 겁니다.”

연오랑은 요왕 쿠타리의 반문을 가볍게 날려 보냈다.

언젠가 비단길 루트가 더 가깝게 바뀌겠지만, 그건 먼 미래의 일. 지금 당장 요왕부를 지원하는 건 문제 없다는 뜻이니까.

허나 요왕 쿠타리는 연오랑이 말하지 않은 속내를 알아차렸다.

반대로 해석하면... 지금 당장은 아다이와 제왕부를 가만 놔두겠지만, 언젠가 새로운 비단길 루트를 완성하면 그때는 어떤 식으로든 처리하겠다는 뜻이니까.

‘아마도 복여위를 신속시킨 것처럼 일이 진행되겠군.’

“안 그런가?”

“...”

요왕 쿠타리는 형형한 눈빛을 숨기지 않고 자신의 추리를 늘어놨고, 연오랑은 히죽 웃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말해 뭐하겠는가.

요왕부도 처리했으면, 이제 흥안령 북쪽 끝자락에 붙어 있는 제왕부도 처리해야지.

미래에는 신발에 들어간 돌멩이처럼 걸리적거릴 텐데, 그걸 가만 놔둘 필요가 없지 않나.

“흥안령 서쪽에 위치한 아다이는 크게 신경 쓰지 않겠지만, 아마도 제왕부는 정리가 될 겁니다. 대충... 한 세대쯤 지나면, 굳이 싸우지 않더라도 쉽게 조선에 신속되겠지요.”

“...”

무역항과 무역도시가 만들어 질 때부터, 조선은 서쪽 유목민들을 경제적으로 예속하기 위한 계략을 꾸미지 않았나.

지금이야 옛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이 고위층에 자리 잡아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하겠지만, 시간이 흘러 조선의 단물을 받아먹고 큰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과연 그때도 조선에 편입되는 걸, 무작정 거부할 수 있겠나.

칼 한번 휘두르지 않아도, 더 좋은 땅과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알아서 조선에 귀부할 거다.

연오랑은 이러한 개조과정이, 고작해야 한 세대면 완성된다고 보고 있는 거지.

“...”

흡사 선언을 하듯 단정하는 연오랑을 보며, 요왕 쿠타리는 가슴이 시큰해졌다.

요왕부가 만약 그대로 흥안령 일대에 머물렀다면, 제왕부와 똑같은 처지가 됐을 테니까.

‘자. 이제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알아들었을 테니... 더욱 열심히 북직례에 몰두하라고.’

괜히 쓸데없이 이런 말을 했겠는가. 이건 요왕 쿠타리가 딴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우회적인 협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눈빛이 흐려졌다 밝아졌다 하면서 고심하던 요왕 쿠타리. 그는 항복을 선언하듯 쓴웃음을 짓고선, 다시금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미래를 논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봤는지, 당면한 현실을 읊는다.

“결국 내가 나아갈 길은 북직례라는 거군.”

“...”

“동부전선은 어찌 됐겠나? 계획대로 진행되었을 것 같나?”

“뭐... 무슨 일이 발생했든지, 결국에는 잘 되고 있을 겁니다.”

화제를 바꾼 요왕 쿠타리의 물음에, 연오랑은 저 먼 남동쪽에서 벌어지고 있을 전장을 떠올려봤다.

북평부 정벌을 위한 작전계획은 크게 두 개의 계획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첫째는 동부전선을 형성하는 거다.

동부전선이라고 뭉뚱그려 말하지만, 실은 천진항, 난하, 산해관. 이 세 곳에 전선을 만드는 거지.

이 전장은 아무리 못해도 수십키로미터는 떨어져 있어서, 서로 연계할 수 없는 각기 다른 전장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들의 목표는 북평군을 동쪽으로 유인하는 것.

천진항에 상륙한 병력이 천진이나 북평으로 진군하지 않고 천진항에 머물며 수성 준비를 하는 것, 난하를 완전히 틀어막지 않고 깔짝대는 것, 산해관에 전면적인 공성전을 하지 않고 포격전만 하고 있는 것.

이 모든 건, 북직례 사방에 퍼져 있는 징집병 및 호족, 군벌파벌의 사병들까지, 전부 엉덩이를 때게 만들어 동부전선으로 오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둘째는 동부전선이 형성된 후에, 거용관을 통과해 남하하는 작전.

이걸 위해서 연오랑이 이끄는 기병군단은 동부전선이 형성되기도 전에 사라졌다.

드넓은 요서평원과 흥안령을 지나 몽골초원을 질주해서, 이곳 거용관 코앞까지 오기 위해서 말이다.

동부전선의 상황에 맞춰 북쪽에서 공격을 하기 위해선, 멀어도 더럽게 먼 거리를 주파해 미리 도착해 있어야 했으니까.

‘연락을 할 수가 없으니 확신할 순 없지만... 잘 되고 있겠지.’

연오랑은 다시금 주문을 외우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전쟁은 혼자 하는 게 아니다.

사고思考할 수 있는 쌍방이 함께 하는 거니, 일방이 계획한 대로 진행되지 않는 건 고금진리나 마찬가지. 특히나 원거리 통신수단이라는 게 없는 이 시대엔 더욱 그러했다.

그러니 북방에 머물고 있는 연오랑이, 저 먼 동부전선에서 뭔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이나 하겠나.

결국 동부전선의 사정이 어떻게 되든 간에, 연오랑은 계획한 시각에 맞춰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동부전선의 상황이 잘 풀리기를 기도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실패하기도 쉽지 않잖아?’

다만 연오랑은 다시금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이렇듯 통신수단이 미흡한 만큼, 각 전장의 사령관은 독립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다. 착호군에서 발전한 조선군은 나름 임무형 지휘체계를 가지고 있었으니, 이 시대 기준으로 봐도 퍽 넓은 자율권을 보유했지.

주 전장에서 물러나든, 전투를 회피해 병력을 보존하든, 어떤 식으로 진군하든, 모든 건 사령관에게 달려 있는 바.

산해관을 담당한 김종서든, 천진항을 맡은 최윤덕이든, 난하를 맡은 박무양이든, “북평군을 동부전선으로 유인한다.”라는 명령을 어떻게든 수행하고 있지 않을까.

“그러니 우린 열심히 동부전선으로 이동하고 있는 적들을 밟아주면 될 겁니다.”

“지금쯤이면 파벌싸움에 이골이난 북평부조차도, 위기감을 느끼고 둥부전선으로 병력을 보냈을 테니까?”

“예. 그렇지요.”

연오랑은 흡사 먹이를 노리는 맹수마냥, 히죽 송곳니가 드러날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동부전선에서 시간을 끈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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