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530화 (530/538)

530. 챕터64. 진입하다 (4)

북직례는 중국 기준으로 일개 성에 불과하지만, 무려 한반도와 엇비슷한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막말로 조선군은 조선본토를 고작 몇 달 사이에, 완전 정복한다는 거창한 목표를 세운 거지.

물론 북직례는 한반도처럼 끝도 없는 첩첩산중이 아니라, 어딜 봐도 지평선이 보이는 평원이 대부분이라지만... 이 넓은 땅을 그렇게 단기간에 정복하는 건 당연히 어렵지 않나.

이게 가능하기 위해서는 적병들이 조선군이 원하는 전장으로 알아서 기어 나와야 했다.

아무리 전쟁 준비를 오래 했어도, 체급에 맞지 않는 많은 군호를 지정해 놨어도, 북평군이 호족 및 군발파별의 연합체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이는 중국의 다른 호족연맹과 마찬가지로, 지역방위군의 성격을 깊게 띠고 있어서 자기 동네에서 벗어나면 전투력이 약해지기 마련.

또한 도시나 마을의 성곽에 기대어 짱박혀 있는 적을 상대하는 것 보단, 평원에서 거하게 회전을 벌이는 게 훨씬 쉽지 않나.

‘이래서 추수가 끝난 다음에, 전쟁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지.’

온통 평원과 황무지 밖에 없는 북직례 인데, 추수까지 끝나서 밭조차도 휴지기에 들어간 지금. 어느 곳을 가더라도 전마가 날뛸 수 있는 최고의 전장이 만들어졌다.

전부 기병으로 구성된 조선, 요왕부 군대에겐, 적들이 성 밖을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지리적 이점을 먹고 들어가는 거지.

‘성동격서 일 수도 있고, 시간차 공격일 수도 있고, 뭐가 됐든 북평군은 열심히 동쪽으로 가고 있을 테니까.’

성동격서라고 하기에는 동쪽에서 후려갈기는 손찌검이 너무 강해서, 북직례 전체가 휘청거릴 정도 아닌가.

산해관의 무게감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으니, 북평부는 산해관이 무너질 것 같은 위기감에 혼이 나갔을 거다. 앞뒤 가리지 않고 일단 동쪽으로 보내는 일에 집중하겠지.

‘하지만 그게 쉽게 될 리가 있나. 보나마나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을 거야.’

군대는 이동하는 것 자체가 작전이라고 하지 않았나. 원활한 보급 계획이 뒷받침 되지 않는 이상 쉽게 대병을 옮길 수도 없다.

헌데 사정이 급하니 어떻게든 움직였을 텐데... 안 그래도 파벌싸움이 심한 북평군이 원활한 보급을 지원받을 수 있을까.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판국이니 어쩔 수 없이 도와준다고 해도, 각 파벌은 이 와중에도 서로를 골탕 먹이는 짓을 결코 멈추지 않을 거다.

천하의 조선군이라도 산해관을 쉽게 뚫을 수 없을 거라고 믿고 있을 터... 이 과정에서 반대 파벌의 힘을 약화시켜놔야, 전쟁이 끝난 후에 좋은 입지를 차지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면 행군계획이든 숙영계획이든 다 엉망이 되는 거지.’

이렇게 준비해 놨던 최적의 경로로 이동하지 못하고 시간이 끌릴수록, 장병들의 사기는 더욱 떨어지고 좋은 전장을 찾는 건 힘들어질 터... 이 때 대군의 기병을 이끌고 옆구리와 뒤통수를 후려친다면 승리를 따내는 건 더욱더 쉬워질 거다.

“북평부는 거용관이 뚫려서 북쪽에서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할 테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래야지.”

혼자만의 생각을 가볍게 풀어낸 연오랑은 자신만만하게 말을 끝맺었고, 요왕 쿠타리 또한 염원과 희망을 담아 대답을 받았다.

북평부는 요동과 요서의 정보를 얻지 못한 지 오래 됐다.

요동과는 꾸준히 사이가 안 좋았고, 잠깐 손잡았던 타안위가 요왕부에게 집어삼킨 후론 실낱같은 정보망도 끊어졌다. 조선의 눈치를 봐야 했던 요왕부는 북평부와 연을 맺지 않았으니까.

헌데 요왕부와 조선이 손을 잡았을 거라고 상상이나 하겠나. 천하의 어떤 현자도 조선이 북직례를 요왕부에게 넘길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거다.

요동을 집어삼켜 소화시키기도 바쁜 조선이, 대병을 우회시켜 북쪽에서 내려올 거라고는 꿈에도 모르고 있겠지.

동부전선이 열린 지금 상황에서도 북평부는 “조선은 북직례를 정복조차 못할 텐데, 대체 왜 전쟁을 벌인 거지?”라는 의문에 사로 잡혀 있으니까.

“그럼...”

“...?”

요왕 쿠타리는 할 말을 다 했는지, 저쪽 한편에 눈길을 주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보지. 내일 거용관을 넘는 걸세.”

“예.”

연오랑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답했고, 요왕 쿠타리 또한 가볍게 목례를 하고선 왔던 것처럼 사라졌다.

그리곤 요왕과 연오랑이 이야기를 나누던 탓에, 게르 근처에서 서성거리며 기다리고 있던 인물이 냉큼 다가왔다.

“대감.”

“왔냐? 오래 기다렸냐?”

“아뇨. 방금 왔습니다.”

연오랑이 톡톡 가볍게 의자를 두드리자, 사내는 머뭇거리지도 않고 냉큼 그의 옆에 풀썩 엉덩이를 붙였다.

예의라곤 보이지도 않았지만, 둘의 인연이 어디 하루이틀인가. 아무렇지 않게 앉고선, 없는 사람의 뒷담화를 시작했다.

“요왕도 참... 이미 쌀이 익어 밥이 됐는데도, 안절부절 못하고 가만히 있질 못하는 군요.”

“나라의 명운이 우리에게 달렸는데, 너 같으면 속편하게 있을 수 있겠냐.”

“뭐... 그렇게 따지면 그렇긴 하지만...”

사내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저편을 향해 눈을 살벌하게 흘겨댔다.

“너한테도 가서, 귀찮게 했나 보지?”

“예.”

“크큭.”

사내는 고자질 하듯 냉큼 답을 했고, 그 능청스러운 모습에 연오랑은 피식 웃고 말았다.

‘이 자식도 진짜 많이 변했네.’

연오랑은 문관답지 않게 두정갑을 껴입고, 옆구리에 장도를 끼고 있는 사내를 보며 속으로 감탄을 흘렸다.

물론 사내가 제대로 무장한 걸 보고서 그런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뿌듯해서다.

‘이 녀석이 그 지독한 꼰대가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

연오랑은 아무도 모를 원래 역사를 떠올리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오래전 과거. 연오랑이 착호군을 만들어 조선을 쑤시고 다닐 때. 그는 착호군이 지나가는 곳마다 고을이나 마을에서 수재라 알려진 아이들을 긁어모았다.

원래 역사에서 있는 줄도 몰랐던 인물은 물론, 원래 역사에서 세종, 세조시기에 활동했던 관료들 또한 그 마수에 걸려들었다.

원래 역사의 그 어려운 과거시험을 합격했을 정도면, 당연히 어릴 적부터 싹수가 보일 수밖에 없으니까.

양반, 향리, 양민, 천민 가리지 않고 긁어모았는데,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그 시절엔 착호군에 들어가면 군역을 면제 받을 수 있을뿐더러, 착호군 행정관료로 활동하면 경력을 인정받아 중앙조정에 입조할 기회가 많았으니까.

그가 이런 이상한 짓을 한 이유는 원래 역사에서 근본성리학자로 성장하게 될 이들을, 머리가 말랑말랑한 어린 시절부터 데리고 다니면서 사상개조를 하기 위함이었다.

아무도 모르던 그 계획은 훌륭하게 성공했고, 십여년이 흐른 지금.

그 시절 꼬꼬마 아이들 모두가 자본유학의 선봉장이 되어, 조정관료로 성장해 각 부서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지.

그 중 한명이 바로 연오랑 옆에 앉아 있는 인물.

원래 역사에선 “훈민정음 같은 걸 뭐 하러 만듭니까. 멍청한 백성들은 그런 거 배워도 쓰지도 못할 겁니다.”라고 막말을 했다가, 세종에게 욕을 거하게 먹은 인물. 바로 정창손이었다.

착호군 시절부터 함께한 정창손은 군수부로 들어갔고, 나름 승승장구해서 지금은 막중한 임무를 띠고 이곳에 와 있었다. 그는 이번 원정군 보급대의 지휘관이었으니까.

“기왕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요왕은 제가 요동에서 출발할 때부터 와서 달라붙었다니까요.”

“뭐라도 뜯어먹으려고 그랬겠지. 그들로선 이런 식으로 보급하는 걸 처음 봤을 테니까.”

“그야 그렇지만, 그게 한 달 넘게 지속되면 제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거머리도 저런 거머리가 또 없습니다.”

공성포가 포함되어 속도가 느린 보급부대는, 요동정벌이 시작할 때 이미 요동을 떠났었다.

그때부터 들들 볶였으면, 지겨울 만도 하다.

“...”

연오랑은 푸념하는 정창손을 보며,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 시대에 조선만큼 보급부대를 충실하게 운용하는 군대가 있던가.

모든 면에서 조선을 본받으려 하는 요왕으로선, 수십문의 공성포를 끌고 수만명의 보급품을 끌고 움직이는 정창손의 보급부대는 충격 그 자체였을 거다.

당연히 시시콜콜 캐물으며 “이건 어떻게 하는 거냐.” “보급부대는 어떻게 구성됐냐.” “어떻게 나눠주는 거냐.” “무슨 품목이 있냐.” 등등.

장난감 가게를 찾은 아이마냥, 요왕은 매일같이 찾아와 들들 볶았겠지. 그리고 요왕도 왕이니, 정창손은 차마 “귀찮게 굴지 말고 좀 가라.”라고 말도 못하고 불만을 꾹꾹 눌렀을 거고 말이다.

연오랑은 정창손은 이런저런 푸념을 들어줬고, 한참 입을 풀은 정창손은 진지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이제 진짜로 거용관을 넘을 거죠?”

“그래야지. 왜?”

“더 이상 못 버팁니다. 이제 슬슬 위험해졌어요.”

정창손은 미리 준비를 해놨는지, 도표와 숫자로 가득한 보고서를 내밀었다.

“벌써?”

“벌써라뇨. 지금 여기에 모인 병력이 몇인 줄 잊으셨습니까. 무려 9만이라고요. 9만.”

연오랑이 보고서를 힐끔 살피자, 정창손은 죽는 소리를 하며 입을 털었다.

“생초를 먹이는데도, 벌써 한계에 오고 있단 말이지.”

“예. 지금 당장은 사기가 올라서 가만히 있는 건데... 몽골남부연맹에선 슬슬 말이 나오려고 하고 있죠.”

“음...”

그는 보고서를 읽으면서, 정창손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과거. 연오랑이 조선을 말박이의 나라로 마음을 먹었을 때. 가장 문제가 되었던 건 역시나 말먹이였다.

이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초원 몽골족마냥 일반적일 땐 생초를 적극 먹였고, 별식으로 건초나 사료곡물을 먹였지.

허나 조선의 군마는 서양에서 들여온 말과 교접해 품종개량이 꽤나 이뤄져서, 몽골말보다 덩치가 조금 더 컸다.

이 말인 즉. 그만큼 더 많은 말먹이가 필요했다는 뜻.

결국 지금 모인 9만 기병. 9만필이 훌쩍 뛰어넘는 말들을 먹이기 위해서, 이곳 거용관과 칼간 사이 일대의 초지가 박살나고 있는 거지.

“아무리 보상을 받기로 했다지만, 겨울을 날 초지가 완전히 박살나면 몽골남부연맹이 더 많은 걸 바랄 지도 모르죠. 원흉이 된 요왕부와 시작부터 삐걱거리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몽골남부연맹이 비록 산서북부 일부를 차지하고, 또 루스인 포로, 산서에서 납치한 한족을 활용해 농사를 적극적으로 진행하고 있다지만, 아직도 유목생활을 하는 이들이 꽤 많았다.

이런 유목민들은 여름-겨울에 맞춰 다른 초지로 이동해 가축을 길렀는데, 이번 원정으로 인해 겨울 초지가 다 작살나면... 결국 다 굶어 죽는 상황이 펼쳐지지 않겠나.

지금은 딱 간당간당한 상황까지 와 있어서, 말은 안 해서 그렇지 몽골남부연맹은 당장이라도 싹 다 가버리길 바라고 있을 거다.

“계획한 것보다 소모가 더 빠른 거 같은데... 이유가 뭐냐?”

“상인들이 너무 많이 왔습니다. 내쫓을 수도 없고요.”

“음...”

몽골남부연맹이 이번 원정에 동참한 이유는 따로 있지만, 어찌됐건 이 땅은 몽골남부연맹의 땅이다.

상인들 또한 몽골남부연맹 출신으로, 이번 전쟁특수를 노리고 한탕하려고 몰려들었는데... 사정을 봐서라도 쫓아낼 수 없는 노릇.

몽골남부연맹도 호족연맹처럼 천호장끼리 연맹을 맺은 터라, 그들도 속사정을 따지면 퍽 골치 아파질 게 분명했다.

“내일이면 거용관을 넘을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확실히 넘을 수 있겠죠?”

이미 판을 다 깔아놨지만, 정창손은 혹시나 싶어서 되물었고.

“요왕부는 목숨을 걸고 넘을 거다. 그치들은 되돌아갈 곳이 없으니까.”

“예.”

연오랑의 확언에, 정창손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말먹이가 걱정되는 건 요왕부도 마찬가지. 그들로선 전쟁을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힘이 깎이는 건 바라지 않을 테니, 어떻게든 거용관을 넘으려 할 거다.

‘이래서 개전시기를 이때로 잡은 건데... 진짜 아슬아슬 하네.’

연오랑은 표정관리를 하며, 속으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요동정벌을 추수가 끝나기 전에 진행한 건, 요동의 수성역량을 깎아내고 그 뒷수습을 조선이 지원함으로서 요동민심을 사로잡기 위해서였다.

반대로 북평부 정벌을 추수가 끝난 시기로 잡은 건, 좋은 전장을 확보하려는 이유와 더불어 약탈을 통해 군량 및 말먹이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밀이든 콩이든 뭐든... 추수를 끝내고 나서 생긴 짚은 유용한 생활용품이니, 함부로 버릴 리가 없지 않나.

빈부고하를 막론하고 북직례 백성들의 집에는 곡식가마니와 함께 짚단도 잔뜩 쌓여 있을 터, 그걸 말먹이로 활용할 계획이었던 거지.

“알았냐? 보급대도 출정 준비를 끝내놔라.”

“알겠습니다.”

모두가 오늘만을 기다려왔던 터라 날이 밝기 무섭게 게르가 걷히고, 거대한 군세가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미 거용관 근처에서 숙영하고 있던 터라, 거용관 바로 앞으로 가는 건 순식간이었고...

“오...”

“허허. 저게 거용관이라니.”

“오랜만이군요.”

“엉망이군.”

연오랑과 함께 말머리를 나란히 하며 걷고 있던 이들.

오래전 착호군 시절부터 함께 해온 이들로, 그 시절엔 천명을 이끄는 연대장이었으나 지금은 오천명을 이끄는 사단장이 된 이순몽, 유은지, 조비형, 하경복이 각각 다른 감상을 내뱉었다.

‘진짜 끝이 다가오는 군.’

연오랑 또한 점점 눈앞에 들어오는 거용관을 보며, 그들과 같은 감상을 내뱉고 말았다.

십여년전에 거용관을 무너뜨리면서 천하에 조선을 각인시켰고, 그 때 이후로 조선은 날개가 달린 듯 승승장구를 이어왔다.

어렴풋이 남아 있던 중화와 사대는 중국의 자존심 중 하나였던 거용관을 무너뜨리면서 조선에서 지워졌고, 원래 역사와는 완전히 다른 조선으로 탈바꿈하게 됐지.

그 역사의 시작이 거용관이었는데, 지금 이렇게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위해 또 거용관을 찾았다.

이러니 조선 개혁을 위해 지금껏 숨 가쁘게 달려온 연오랑으로선, 온갖 감정이 밀려와 가슴이 뜨겁게 차오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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