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531화 (531/538)

531. 챕터64. 진입하다 (5)

“대감!”

모두가 감상에 젖어 있자, 본대가 온 걸 환영하듯 시원하게 공성포를 쏴대고 있던 화기대장이 달려와 손을 흔들었다.

흡사 친우를 반기듯 허물없는 모습을 보이자, 네 장군의 표정이 살짝 날카로워졌지만... 연오랑은 히죽 웃으며 녀석을 반겼다.

“고생했다.”

“흐흐.”

오래전. 원래 역사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거용관 공략을 통해 역사에 데뷔한 인물. 박강.

소년 박강은 거용관에 화포를 쏴대며 역사에 이름을 올렸는데, 십여년이 지난 지금도 화기대 총지휘관이 되어 또 다시 거용관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연오랑은 박강의 상황보고를 들으며, 물끄러미 거용관 일대를 바라봤다.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려 산세를 살피자, 묘한 지세가 눈에 들어온다.

흡사 계단식 논을 만든 것 마냥, 거용관을 마주보고 매끈하게 깎인 산 능선.

한 그루의 나무도 없이 잡풀만 무성하게 자라서, 꼭 양지바른 무덤 터처럼 확 트인 터라...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저게 아직도 남아 있네.’

“저거... 그거 맞지?”

“예. 기억하시네요.”

“기억 못할 리가 있나.”

히죽히죽 웃는 박강을 보며, 연오랑 또한 피식 웃고 말았다.

저 흔적은 십여년전에 거용관을 공략할 때, 포대를 만들기 위해 깎아놨던 흔적이었다. 지금도 충분히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저렇게 멀쩡하게 방치됐다는 게, 뭘 뜻하겠는가.

‘북평군은 거용관 밖으로 나오지도 못 했나 보군. 대충 흙을 파서 깎아내기만 했어도, 포대로 써먹지 못했을 텐데 말이야.’

연오랑은 그런 생각을 하며, 시선을 거용관으로 돌려 망원경으로 유심히 살펴나갔다.

‘역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저게 과연 성벽이 맞나?’하는 의문이었다.

과거 거용관을 함락시켰을 때. 조선군은 남은 화약과 거용관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화약을 동원해서 거용관을 무너뜨렸다.

외성벽과 내성벽은 물론이고, 관문도시 안의 모든 건물을 불태워버리지 않았나.

그때의 피해를 아직도 복구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성문과 성루는 당연하고 심지어 성벽의 본래 모습도 온데간데없고, 그저 담벼락 정도로 보이는 토벽이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다.

‘십년도 더 지났으니까... 알아서 무너졌겠네.’

성벽 속을 흙으로 채워 넣는 건 역사가 오래된 거용관도 마찬가지인데, 화약으로 토성을 감싸고 있는 벽돌과 석재를 전부 부셔버리지 않았나.

십년 넘게 속살을 드러내고 비바람을 맞았으니, 토성이 토사가 되어 무너지는 건 당연한 말.

진짜로 관리조차 못했는지... 바람결에 휩쓸려 날아온 잡풀씨앗이 싹을 피워서, 비탈길처럼 흘러내린 토사 곳곳에 잡풀이 솟아 있는 게 보였다.

“...”

시선을 더 당겨 화기대를 살피자, 더더욱 가관이다.

화포를 보호해야할 토벽조차 없었으니, 참호가 없는 건 당연한 말. 헌데 그렇게 무방비인 상태로 공성포 수십문이 성벽 100미터 가까이 전진해 있었다.

“적 포격은 확실히 없나 보군.”

“예. 성벽이 저 모양이 됐는데, 화포를 올릴 수나 있겠습니까. 저희가 쏘는 족족 얻어맞고 있습니다. 무너뜨린 곳도 꽤 되고요.”

박강은 자신의 공적을 자랑이라도 하듯, 완전히 무너져서 성 안쪽이 훤히 보이는 성벽 구멍 곳곳을 가리켰다.

녀석의 말대로 성벽에 구멍이 뻥뻥 뚫린 형태라서, 당장 들이쳐도 충분히 성벽 안으로 돌진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지. 토사가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굳어지면서 비탈길이 만들어졌잖아? 저 정도 경사각이면 말을 타고 토벽을 올라갈 수 있을 거 같은데?’

연오랑은 그런 생각을 하며 의견을 물었고, 사단장들 모두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다시는 천하제일웅관이라는 이명으로 불리지 못하겠네.’

저게 어딜 봐서 천하제일웅관인가.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꼭 버려진 폐성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거용관의 중요성을 북평부가 모를 리가 없는데... 십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복구를 못 했단 말이지.”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아무래도 몽골남부연맹의 방해와 아군이 남구를 약탈한 게 가장 크게 작용한 것 같습니다.”

“음...”

연오랑도 그간 들은 소문이 있던 터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용관은 북직례로 들어갈 수 있는 출입구나 마찬가지. 당연한 말이지만 몽골남부연맹이 가만 뒀겠는가. 그들은 시도 때도 없이 거용관을 공격해서, 거용관의 재건을 꾸준히 막아왔었다.

‘게다가 남구라... 그럴 수도 있겠네.’

과거 조선군이 무너뜨린 보권성과 보권성의 보호 하에 있던 남구지역은 거용관의 보급기지이자 북평부의 군수물자 공장지대나 마찬가지였다.

조선군은 남구를 모조리 약탈하고 온갖 장인들을 납치해서 조선으로 데려왔는데, 그 중에는 벽돌 장인과 석공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저들을 조선으로 데려옴으로서, 조선의 벽돌제조기술이 발전하고 나아가 건축양식에 변화를 줄 정도였으니... 얼마나 많은 장인을 데려왔는지 더 말할 필요가 있나.

‘벽돌장인이 자기장인과 비슷하다고 한들, 장인을 마구 찍어낼 순 없을 테지. 게다가 자기장인으로 부려먹으면 돈이라도 벌지만 벽돌장인으로 부려먹으면 돈이 안 되잖아? 장인을 데리고 있는 호족이나 군벌파벌은 쉽사리 거용관과 남구로 이주시키지 않았을 거야. 언제 몽골남부연맹에게 납치될지 모르니까.’

연오랑은 북직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머릿속에 절로 그려졌다.

“비형.”

“예. 대감.”

“특전대와 저격대에서 연락이 왔나?”

“없었습니다.”

“무소식이 희소식 아니겠습니까.”

조비형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순몽이 너스레를 떨며 추임새를 넣었다.

“하긴...”

‘틀린 말은 아니야.’

허나 연오랑 또한 동의하고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용관이 있는 연산산맥은 한 성의 경계가 될 정도로 엄청나게 큰 산맥이고, 이곳에는 과거 칼간 상인들이 이용하던 밀수로가 많이 있었다.

과거 조선군이 철수하면서 밀수로는 그대로 몽골남부연맹에게 알려졌고, 그들은 매년마다 이 밀수로를 통해 신출귀몰하게 움직이며 북직례를 약탈했다.

북평부도 밀수로가 있는 걸 알고는 있지만, 어디 있는지도 모를 밀수로를 무슨 수로 전부 감시하고 막을까.

애초에 그게 불가능해서, 산 능선을 따라 만리장성을 쌓는 미친 짓을 벌였지 않나. 중국통일왕조는 중국전역에서 사람을 긁어모아, 문자 그대로 사람을 갈아가며 만리장성을 쌓았지만... 명이 망한 이상 북평부의 인구만으로는 꿈도 못 꿀 일이지.

그리고 지금. 여전히 멀쩡히 남아 있는 밀수로를 조선군 또한 이용해서, 본대가 모이는 동안 특전대와 저격대가 미리 연산산맥을 통과해 남구로 넘어가 정찰활동을 했다.

‘동부전선으로 지원군이 출발한 걸, 그래서 알 수 있었고 말이야.’

그 덕택에 시간차 공격이 가능해졌고, 본격적인 공성전을 시작할 수 있었던 거지.

거용관에선 대략 3천정도 되는 병력이 빠져나와 동쪽으로 향했고, 그들이 남구를 벗어나기 무섭게 공성포가 모습을 드러내고 포격을 시작.

거용관은 화들짝 놀라 지원군을 다시 불러들이고, 북평에 거용관이 공격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알렸겠지만... 특전대와 저격대가 전령을 가만 놔뒀겠는가.

이순몽이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한 건, 특전대와 저격대가 알아서 잘 처단하고 있었기에 따로 보고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럼 이제 저길 함락시키기만 하면 된다는 거군.”

“예.”

“물론입니다. 대감.”

연오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들 기운차게 답을 했고, 둥둥둥! 그에 호응이라도 하듯 화기대 근처까지 진출해 있던 요왕부 기병들 사이에서 우렁찬 북소리가 퍼지기 시작했다.

전고소리와 함께 펑펑펑! 잠시 쉬고 있던 공성포가 다시금 불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공성포는 야전화포와는 비교가 불가한 물건.

폭음마저도 그러해서, 한발 한발 쏠 때마다 협곡이 비명을 내지르며 메아리가 울려 귀가 아플 정도였다.

안 그래도 사정거리가 긴 공성포 인데, 고작해야 100미터 거리에서 쏴댔으니 그 파괴력이 오죽할까.

담벼락처럼 낮은 토성을 그대로 지나쳐 내성으로 쏟아졌고, 토성에 가려서 보이진 않지만 적들의 비명소리가 성 밖까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애써 지은 몇몇 건물들이 포탄에 맞아 사정없이 부서지는데, 전각이 무너지는 소리는 꼭 나무들이 신음을 흘리는 것처럼 밀려왔다.

“...”

“...”

끔찍한 포격에 잔뜩 겁먹은 거용관 병사들.

그들은 협곡길을 따라 꼬리잡기를 하듯, 끝도 없이 늘어서 있는 기병군단을 보며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고.

당장이라도 성벽으로 질주할 것처럼, 전마의 피를 달구는 요왕부 기병들을 보며 손발을 가만 놔두지 못했다.

허나... 누가 봐도 주력처럼 보이는 기병대지만, 진짜 주력은 따로 있었다.

연오랑을 비롯한 모든 이들은 폭음에 놀란 전마를 다독이며 계속해서 망원경을 움직였고, 다들 알게 모르게 한 곳으로 시선이 고정됐다.

‘나름 잘 하는데?’

연오랑은 망원경의 작은 시야로 보이는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기. 말에서 내린 몽골군이 산을 기어올라, 무너진 성벽 바로 밑까지 접근해 있는 게 보였으니까.

거용관은 협곡을 막아 세워서 만든 관문도시이고, 협곡 양쪽에 위치한 산비탈과 산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아놨었다.

허나 과거 조선군은 외성벽과 내성벽마저 다 무너뜨렸는데, 주 성벽보다 낮은 산성벽을 가만 놔뒀을까.

당연히 화약으로 폭파시켰고, 경사진 산비탈에 세운 성벽인 탓에 주 성벽보다 훨씬 더 무너져 있었다. 산성벽을 보수하는 건, 평지성벽을 보수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우니... 당연히 보수조차 못했겠지.

그리고 어제부터 미리 출전한 몽골군은, 거용관 양쪽에 위치한 산을 야음을 타고 기어올라 대기하고 있었던 것.

공성포의 막강한 포격으로 시선을 온통 잡아 놓은 탓에, 거용관 병사들은 몽골군이 산을 넘어와 거용관을 싸먹듯 포위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눈치였다.

그렇게 모두 준비가 끝나자. 부웅! 긴 고동소리와 함께 펄럭! 요왕부 깃발이 사방에서 휘날리기 시작.

“와아아!”

“쳐라!” “오오오!”

거용관 성벽 앞에서 진을 치고 있던 요왕부 기병들이 함성을 내지르자, 조선군도, 몽골남부연맹군도, 모두가 하나 되어 함성을 이어갔다.

거용관을 함성만으로 무너뜨리려는 듯, 우렁찬 함성소리가 노랫가락처럼 끊임없이 이어가고... 그 함성에 파묻혀 산을 기어오른 몽골군이 성벽을 넘어갔다.

하나둘씩 넘어간 병력은 양쪽 산을 합쳐서 1만에 가까웠고. 거용관 병사들이 뭔가 이상한 걸 느낄 때쯤에는, 어느새 거용관 안쪽 산중턱까지 내려와 포진을 끝마친 상황이었다.

“쏴라!”

“발사!”

저 멀리서 고래고래 소리치는 백호장들의 명령소리는 쉐에엑! 먹구름이 깔린 하늘처럼 검은 소나기를 쏟아내는 화살비 소리에 먹혀버렸다.

동시에 그에 화음을 맞추듯, 쾅쾅쾅! 또 다시 재장전을 끝마친 공성포가 성벽 안쪽으로 포탄을 쏘아댔다.

정면에선 방진 한,두열을 한방에 쓸어버리는 포탄이 날아들고, 양 측면에선 고지대를 점거한 몽골군이 지형적 이점을 살려 더욱 강맹해진 화살비를 날린다.

포탄을 피해 성벽 안쪽에서 포진하고 있던 거용관 병사들이, 이 판국에 전열을 형성하고 방진을 제대로 짤 수나 있겠나.

저 멀리서 들리는 거용관 병사들의 비명소리는, 전열 한참 뒤에 위치한 조선군에게까지 들려왔다.

“말 위에서만 싸우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군요.”

“아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생각보다 꽤 하는데요?”

“그러게 말일세.”

망원경으로 전장의 상황을 살피던 사단장들은, 흡사 강평을 하듯 한마디씩 던졌다.

“여진이랑 붙어먹은 세월이 오래 되서 그런가...?”

“그것보단 동방3왕가가 초원 몽골에 비해 조금 유별나잖아? 다들 비슷하게 따라가는 거겠지.”

“예.”

“흐음...”

이순몽의 혼잣말에 연오랑이 대꾸하자, 다들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흔히들 몽골족이 말 위에서만 잘 싸우는 줄 알지만, 만주땅에 살던 동방3왕가 출신은 사정이 조금 달랐다.

만주땅은 몽골초원만큼 척박한 땅이 아니다. 유목, 사냥, 목축, 심지어 농사와 어로漁撈까지 가능한 땅이지.

당연히 동방3왕가 출신들은 순수한 유목민족이라기보다는, 뭐랄까 여진인처럼 수렵민족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러면 당연히 말에서 내려서도 나름 잘 싸우는 법.

요왕부 병사들은, 그러한 추측을 증명하듯 피로서 뽐내고 있었다.

제대로 된 공성도 아닌, 거용관 성내에서 벌어지는 전투가 격화되는 와중에 부웅! 부웅! 이번엔 색다른 고동소리가 진중에 울려 퍼졌고.

“돌격!”

“히럇!”

협곡의 제일 선두에 위치해 있던 요왕부 기병들이, 일제히 박차를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공성포로 인해 성문은 아예 사라졌고, 토성벽 위에 위태위태하게 올라와 있던 궁병들도 다 성내로 퇴각했고, 거용관의 화포는 무용지물이 되어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기병돌격을 막을 방해물이 전부 사라졌으니, 물량을 앞세워 시원하게 밀어버리면 그만.

조선군만큼이나 군량문제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요왕부이니, 기회를 놓치지 않고 머릿수로 밀어버릴 작전인가 보다.

두두두! 말발굽소리가 천지를 진동했고, 수만필의 말이 땅을 박차기 시작하자 진짜로 지진이라도 난 것 마냥 땅이 울렸다.

성벽을 향해 기병이 달려드는 건 당랑거철처럼 보이겠지만, 머릿수가 압도적이면 상식이 깨지는 법.

벌떼처럼 우르르 달려드는 요왕부 기병들은 땅을 새카맣게 물들이며 성벽을 향해 돌진했고, 공성포가 박살내 놓은 성벽 구멍을 향해 급류에 빨려가듯 성 안으로 쇄도했다.

“와아아!”

“달려라!”

끝도 없이 줄줄이 이어지는 요왕부 기병행렬의 뒤론, 역시나 거용관을 빨리 함락시키고 싶은 몽골남부연맹 기병이 줄줄이 따라붙었다.

둘 다 몽골인들이라서 무장에는 차이가 없지만, 깃발이 다르지 않나.

요왕부 기병들이 휘날리는 깃발조차 하늘을 가리는데, 몽골남부연맹의 각 천호장들이 휘날리는 형형색색의 깃발이 무지개를 피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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