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6. 챕터65. 분쇄하다 (1)
어렴풋한 아침 햇살을 뚫고, 밥 짓는 연기가 숙영지에서 피어오를 때.
조선군과 몽골군은 자연스럽게 분리되어, 숙영지 포위를 시작했다.
몽골남부연맹은 예전 항명출신 천호장 시절을 벗어난 지 한참 됐다.
화포가 없어도 공성을 할 줄 알았고, 유목군대라면 전매특허처럼 활용하는 스웜전술도 할 줄 알았고, 중무장 기병처럼 매서운 돌격도 할 줄 알았다.
나아가 그 시절에야 천호장이니 만호장이니 하면서 자기들끼리 제살 깎아먹기를 하며 아웅다웅했지만, 지금은 하나가 되어 오로지 산서만 두들겨 패지 않았나.
이젠 만 명에 가까운 병력이 움직여도, 이런저런 군말할 필요도 없이 물 흐르듯 각자 할 일을 찾아 움직이게 됐다.
그런 몽골군이 한참을 멀어져 후방으로 돌아갈 때.
조선군 또한 슬그머니 진형을 바꿔갔다.
언제나처럼 연대 단위로 묶여 있던 병력은 소대단위로 잘게 쪼개졌고, 그 소대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이빨로 변해 벌판을 가득 채우며 길게 늘어섰다.
“많군.”
“예. 우리도 많고, 적도 많군요.”
연대장 이고는 옆에서 나란히 달리는 대대장과 대화를 나누며, 망원경으로 꾸준히 적진을 살폈다.
먼터무의 아들이자 착호군에서 성장해 연대장까지 오른 이고.
그는 동북방에서 꾸준히 야인여진을 잡아들이며 활동했고 요동정벌에도 종군했지만... 이렇게 많은 적군과 아군이 한 전장에서 부딪치는 걸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거용관 전투가 있긴 했지만... 그건 화기대와 요왕부가 다 처리해서, 연대기병들이 활동할 일도 없었으니까.
“후...”
그런 만큼 자연히 가슴이 두근거려 호흡이 힘들 정도였고, 옆에 선 대대장 또한 히죽 웃으며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대장도 이고와 마찬가지로 동북방 여진출신이었으니까.
조선에게도, 명에게도 치임만 당하던 자신들이, 이렇게 중원이라 할 수 있는 북직례에 와서 싸우게 될 줄 누가 알았겠나.
모든 연대병이 전부 그러하겠지만... 나이가 많은 여진인 일수록, 어쩌면 조선인보다 더욱 감회가 깊을 수밖에.
“떨리십니까?”
“자네는?”
“흐흐. 그럴리가요.”
대대장은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마냥 웃음을 흘리며, 툭툭 자신이 쥐고 있는 활을 가볍게 때렸다.
서방에서 들여온 새로운 아교와 방수청을 발라 만든 각궁은, 꽤나 쌀쌀한 날씨에도 최상의 상태를 자랑할 만큼 품질이 좋았다.
예전과 비교하면... 딱딱하게 굳은 활체를 풀기 위해서, 화롯불 앞에서 주무르던 시간을 거의 반으로 줄여줄 정도로 말이다.
‘하긴 이런 무장을 하고서 겁을 먹으면, 그게 더 민망한 일이겠지.’
이고는 힐끔 대대장의 무장을 살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상의 철판을 겹쳐서 리벳으로 고정해, 활동성 대신 방어력을 끌어 올린 개량된 두정갑.
안장에 걸치게끔 등허리에 넓적한 고정된 화살집에는 유엽전 20발이 담겨 있었고, 안장 뒤편에는 비스듬하게 꽂아 넣은 편곤이, 반대편에는 기창, 끝으로 허리춤에는 기병용 장도가 말발굽의 박자에 맞춰 흔들리고 있었다.
조선군은 기병의 병종 차이를 무시하고, 상비군으로 키우면서 완전체 기병으로 훈련시켰다.
창을 들면 창기병, 궁을 들면 궁기병, 마갑을 끼우면 중기병, 없으면 경기병 등등. 한명의 기병이 뭐든지 다 할 수 있게끔 훈련을 시켰지.
사실 기사대도 특수한 병종이 아니라, 기병 중에서 실력이 좋은 이들을 골라 만든 상위병과일 뿐. 판금갑옷을 입은 것도, 제식무장으로 채택하기 전에 미리 입어보고 효용성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지 특별한 취급을 받아서가 아니었다.
그랬기에 중기병치고는 살짝 부족하고 경기병 치고는 과한 무장을 하고 있으면서도, 이게 어색하다고 생각하는 조선군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무장을 대대장과 이고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모든 기병이 다 똑같이 하고 있으니... 자신감이 생기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예전에 비하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
이고는 개혁 이전부터 동북방의 조선 토관과 함께 어울렸던 터라, 가물가물한 옛 기억을 애써 떠올리며 웃고 말았다.
개혁 이전 조선군은 자비로 무구를 구입해야 했는데, 수요가 그리 많지 않아 비싼 건 당연하고 품질도 천차만별이었다.
통일성이 있는 듯 하면서도 없는 게, 이 시대 군대의 특징이니까.
개혁 이후에 달라진 점은 자비로 구입하는 건 맞지만, 개개인이 알아서 구입하는 게 아니라 군부에서 무구를 선제공하고 매달 녹봉에서 깎았다는 점.
흡사 미래에 할부금을 갚는 것과 같은 형태였다.
다만 대량으로 구입해서 가격이 훅 떨어진 건 물론. 똑같은 기준규격으로 생산한 물품을 군부에서 검수 후 일괄 구매했기 때문에, 품질이 상향되고 일정했다는 게 달랐다.
그 시절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고, 조선군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 몸으로 겪어 온 이고로서는... 지금의 조선군과 저 멀리 보이는 북평군이 얼마나 차이가 날지 뻔히 느껴졌다.
그러니 두려움보단 기대감이 앞설 수밖에.
이고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앞으로 나아갈 때. 부웅! 전열 뒤쪽에 위치한 지휘부에서 소라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힐끔 고개를 돌려 뒤를 살피자, 검은 깃발을 유독 높이 세운 전령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길게 늘어선 전열은 길어도 너무 길어서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으니, 명령을 알리는 전령이 사방으로 돌아다니는 건 당연한 말.
술래잡기를 하듯 이리저리 움직이는 전령들은 제대에 흡수되었다가, 흡사 침을 뱉듯 불쑥 튀어나와 다시 후방 지휘부로 돌아가길 반복했다.
이고에게 달려온 전령 또한 마찬가지.
그에게 명령을 알려 준 전령은 금세 되돌아갔고, 근처에 모여 있던 중대장, 소대장들은 되새김질 하듯 한 번 더 내린 이고의 명에 각자 자신의 부대로 돌아갔다.
“적들도 반응하는 군요.”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대대장은 망원경 너머로 보이는 적진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조용하고 느긋하게 다가왔다곤 한들, 무려 만기의 기병이 일제히 움직였다. 사람이 움직여도 그 정도면 지축이 흔들릴 정도인데, 기병이 움직이면 오죽할까.
쿵쿵쿵. 적병이 손톱처럼 보일 정도로 먼 거리지만, 적들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는 땅의 울림에 난리가 난 상태였다.
아침밥을 먹고 있던 걸 내던지고 움직이고 있었는데, 조선군을 보고서 황급히 전열을 형성하는 게 보였다.
날개를 펴듯 한자리에 모여 있던 적병들이 길게 늘어서 전열을 만들기 시작했고, 전장은 순식간에 끝에서 끝까지의 거리가 2키로미터에 달할 정도로 길어졌다.
다만 조선군이 등장한 게 너무 뜬금없는 걸까? 보이지 않아도 화들짝 놀란 기색이 역력한 게, 전열을 만들고 제대를 벌리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조선군이 성큼성큼 다가와 서로가 서로를 알아볼 정도가 되었는데도, 아직도 적 제대 중 일부는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헤매는 게 눈에 들어왔으니까.
아마도 적들은 “대체 북직례 내부 깊숙한 곳까지 조선군이 어떻게 왔지?”라고 당황하고 있지 않을까. 동부전선만 생각한다면, 여기까지 왔다는 건 이미 북평이 뚫렸다는 뜻일 테니까.
“쏴라!”
“발사!”
이고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삐빅! 호각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고, 연대장인 이고조차 활을 높이 올리고 활시위를 당겼다가 풀어냈다.
쉐에엑!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모를 화살비는 전염병처럼 조선군 전열을 휩쓸었고, 쉐엑! 쉑쉑! 두서거니 앞서거니 하면서 모든 연대병이 화살을 허공에 날려 보냈다.
백보를 넘을 정도로 먼 거리지만, 이 허허벌판의 평원에서 장애물이 있을 리가 있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조준사격을 할 수도 없고, 병력이 워낙 많아서 일제사격도 할 수 없지만, 표적은 넘치고 넘친다.
저기 가물가물하게, 추수를 기다리는 곡식처럼 솟아 있는 덩어리에 화살을 날려주기만 하면 그만인데... 이것저것 가릴 필요가 있겠나.
“쏴!”
“체력을 관리하면서 계속 쏴라!”
중대장과 소대장은 흡사 발사 신호를 알리듯, 박자를 맞춰 호각을 불어댔다.
삑! 소리를 내며 그 자신도 활시위를 당기고, 삑! 소리와 함께 대충 겨눈 상태에서 활시위를 놓았다.
“후...”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쉬었다가, 다시 반복.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화살은 마구잡이로 적진에 쏟아지는데, 무려 만 명의 궁수가 쏘아대는 터라... 이고는 저 멀리 보이는 제대가 겹쳐 보이자, 끝도 없는 화살비가 하늘로 치솟았다가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피해는?”
“거리가 멀 긴 하지만... 그래도 효과는 있어 보입니다. 픽픽 쓰러지는 군요.”
이고는 뒷전에서 퉁퉁! 활시위가 튕기는 소리를 들으며 물었고, 옆에 선 대대장은 시위를 당기는 걸 잠시 멈추며 대답했다.
유효사거리에 아슬아슬하게 걸렸으니, 화살 한방을 맞았다고 즉사시키는 건 어려운 법.
허나 거대한 송곳처럼 생긴 유엽전은 갑옷을 완전히 관통하진 못해도, 맨살 정도는 쉽게 파고들 수 있다.
물론 손가락 한두마디 정도 밖에 파고들지 못하겠지만, 그게 어딘가. 사지든 몸통이든 화살에 맞아 몸에 구멍이 뚫리면, 힘이 풀려 주저앉기 마련이지.
“크헉.” “헉!” “아악!”
저 멀리 보이는 적진에서 적들이 내지르는 비명소리가 화살비에 섞여 들려왔다.
비록 전열과 제대의 전면부 밖에 보이지 않지만, 눈에 보이는 곳곳에서 제대 후위가 무너져 제대에 빈틈이 생기는 게 보였다.
“계속 쏴라!”
“전진!”
이고와 대대장이 딱히 명을 내리지 않아도 연대병은 계속해서 화살을 날려 보냈고, 그러는 와중에도 꾸준히 앞으로 나아갔다.
백보 쯤 되던 거리는 순식간에 오십보까지 줄어들었고, 적들의 얼굴이 보일수록 화살의 위력은 강맹해졌다.
이젠 적들이 화살에 맞고 픽픽 쓰러지는 게, 확실히 눈에 보였으니까.
“갑옷을 제대로 챙겨 입은 많지 않군. 방패도 마찬가지고.”
“나름 기습 아닌 기습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방패가 있다고 한들, 모든 병력에게 다 들려줄 순 없었겠지요.”
“음.”
둘은 기계적으로 화살을 날려대면서도 대화를 이어갔다.
나무판자만 있어도 만들 수 있는 게 방패라지만, 사실 방패도 나름 비싼 무구다.
나무방패에 금속을 두르는 것도, 가죽을 두르는 것도, 심지어 그냥 맨 나무판을 잘라 붙이는 것도, 전부 다 돈이 들어가는 일.
‘자형관은 지금껏 공격 한 번 당한 적이 없는데, 과연 방패를 그렇게나 많이 가지고 있을까. 천진항을 공성하려면 방패가 당연히 필요하겠지만, 급하게 연락을 받았으니 몇 개 만들지도 못했겠지.’
이고도 지휘관 회의에 참석을 했었기에 사정을 다 들었던 터라, 이 생각에 먼저 떠올랐다.
어쩌면 자형관 파벌은, 천진항 공성을 도와준다는 핑계로 천진 파벌에게서 방패값을 공짜로 뜯어낼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컥!”
적들의 비명소리와 함께 화살은 계속 날아가고, 피잉! 픽픽! 반대로 적진에서도 이따금씩 조선군 전열을 향해 화살이 날아왔다.
다만 너무 압도적으로 차이가 나는 터라, 적진에서 쏘는 화살은 조선군이 쏘는 화살비에 묻혀서 보이지도 않았다.
삼십보까지 다가온 조선군은 계속해서 거리를 좁혀 나갔고, 반대로 거리가 줄어들수록 적 전열 전면부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젠 곡사가 아니라 직사로 쏴대기 시작했으니, 빗나갈 확률은 줄어드는 데 위력은 더욱 강맹해진다.
선두 제대가 우르르 무너지는 건 당연한 말.
말 그대로 적 선두 제대는 화살비에 파묻혀, 소대가 한번 활시위를 당길 때마다 “크헉!” “컥!” 비명소리와 함께 퍽퍽! 화살이 몸통에 꽂히는 소리까지 소름끼치게 들려왔다.
“그래도 나름 버티는 군요.”
“그러게 말이야. 그래도 정예병이라 이건가.”
이고와 대대장은 적 제대 선두가 무너졌음에도, 전열 전체는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버티는 걸 보며 중얼거렸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과 덜덜 흔들리는 투구 속 적병의 눈동자가 보이는데도, 적병은 어떻게든 창을 들고 제대끼리 뭉치고 있었다.
적들이라고 이렇게 바짝 붙어서 화살을 쏴대는데, 다가오지도 않고 계속 생체 표적이 되어 버티고 싶겠나.
허나 어쩔 수 없다.
이대로 제대를 풀고 도망치거나, 제대를 풀거나, 반대로 달려들면... 조선군 기병이 일제히 쇄도해 들어올 걸 알기 때문.
그나마 이렇게라도 버티고 있으니 기병돌격을 해오지 않는 거지, 제대를 푸는 순간 사냥감이 될 거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었다.
‘아닌가. 병력이 너무 많아서 그러나...’
다만 적들의 뻔한 반응을 보면서도, 이고는 다른 생각이 불쑥 솟아났다.
이제 보니 적들은 버티는 것도 버티는 거지만, 선두 제대를 몸으로 갈아 넣으면서 부상당한 이들을 어떻게든 후미로 보내고 있었던 것.
“맞지?”
“예. 저기 보시죠.”
그의 물음에 해답을 던져주듯, 대대장은 적진 한편을 가리켰다.
이고의 시선이 닿는 곳에선 화살에 맞아 제대 선두 열이 우르르 무너지자, 부상당한 이들이 기어서라도 제대 옆으로 빠져 후미로 돌아가는 게 보였다.
“저래서 거리가 안 좁혀 지는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확실히 병력이 많긴 많군요.”
대대장은 다시금 화살을 쏘면서 중얼거렸다.
무려 일만오천에 달하는 병력이다.
북평군은 명나라 군제를 이어받았고, 이들도 몽골군과 비슷하게 소기, 총기, 백호, 천호로 이어지는 명령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곧 진법훈련이자 제대 형성으로 이어지는데, 보통은 백호가 하나의 제대가 되어 전열을 구축.
격자무늬마냥 백명으로 구성된 제대가 촘촘하게 포진해서, 멀리서 보면 거대한 뱀처럼 보이는 하나의 전열을 만드는 거다.
이런저런 진법은 서로 연계하듯 퍼져 있는 이 제대들을 자유자재로 움직여서, 적들을 포위하기도 하고 또 교체하기도 하는 거지.
지금도 마찬가지.
조선군이 계속 선두 제대를 무너뜨리며 압박을 하는데도, 조선군과 북평군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건... 전열 선두를 이루고 있던 튀어나온 제대가 뒤로 물러나고, 뒤따르던 제대가 그 자리를 차지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흡사 양파껍질을 까듯, 조선군은 북평군 제대를 한 꺼풀 한 꺼풀씩 까고 있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