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537화 (537/538)

537. 챕터65. 분쇄하다 (2)

“다만... 언제까지 저렇게 버티고만 있을 순 없을 텐데? 적 궁병대를 믿는 건가? 아니면 화포를 쓰려고?”

“글쎄요...”

대대장은 자신도 확신하지 못해 답을 흐렸다.

다만 만약 화포를 방열하기 위해 시간을 끄는 거라면, 그건 조금 위험하다.

포가가 없어서 재장전 시간이 느리더라도, 어쨌든 화포는 화포.

이렇게 근접한 거리에서 맞으면 제 아무리 무장이 충실한 조선군이라도 피해가 안 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이대로 들이박는 것도 애매하네.’

기병의 돌파력은 무시할 수 없으니, 적을 쉽게 밟아버릴 수도 있을 거다. 다만 조선군의 포진은 2키로에 달할 정도로 길게 늘어선 적 전열의 양익을 포위할 정도로 길고 얇게 펼쳐져 있었다.

이대로 들이박으면 선두 제대는 밟아버릴 수 있어도, 그 뒤에 포진하고 있는 후속 제대가 기다렸다는 듯이 파고든 기병을 포위할 거다.

그러기 위해서 저렇게 듬성듬성 격자무늬를 그리듯, 제대끼리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거니까.

‘물론 머릿수가 비슷하니 제대로 집어삼킬 수 있는 아군이 많지는 않겠지만... 대감의 성향상 굳이 불필요한 피해를 감수할 생각은 없겠지.’

이고는 연오랑의 지휘를 직접 받아본 경험이 적긴 하지만, 그래도 풍문은 지겹도록 들어왔지 않나.

자신은 조선제일무사라고 칭하면서도, 어째 그는 철저하게 물량과 무장, 훈련도로 승부를 보는 정석적인 전술을 좋아했다.

그러니 힘껏 밟아버릴 수 있음에도, 요리조리 간을 보면서 느긋하게 갉아 먹고 있는 걸테고 말이다.

“어떻게 하려고 하나...”

이고는 연오랑의 머릿속을 읽으려 애써봤다.

오래전 동북방에 살던 시절의 경험과, 착호군 1기로 구성된 원정군에서 시작된 서책 두께의 전투보고서.

지금껏 조선군이 싸돌아다닐 때마다 제출된 전투보고서는 사람 키를 넘을 만큼 쌓였고, 그 전투보고서를 바탕으로 고급지휘관 학교라 할 수 있는 훈련원에선 시대를 뛰어넘는 전략과 전술을 가르쳤다.

그 모든 과정을 훌륭한 성적으로 이수해 연대장이 된 이고였으니, 그는 머리에서 김이 나도록, 다음 수를 예측해봤다.

‘아마도...’

그가 아지랑이처럼 아른 거리는 실마리를 잡으려던 찰나. 부웅! 부웅! 지휘부에서 전고와 함께 소라고동 소리가 울리더니 전령이 다시금 날개를 펼치듯 날아들었다.

“저기 보시죠.”

“...”

전령이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대대장은 전열 중앙을 가리켰고, 이고는 무슨 명령이 떨어진 건지 예상할 수 있었다.

“결국 참지 못한 모양이군.”

“그런가 봅니다.”

이고와 대대장은 그리 중얼거렸고, 전령이 보내온 명을 받기 무섭게 조심스럽게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적 전열 중앙에선 끝끝내 참지 못한 적 제대가 “와아아!” 기운찬 함성을 내지르며 무작정 돌진하는 게 보였다.

반대로 조선군은 놀라지도 않고,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말머리를 돌려 슬그머니 뒤로 퇴각.

그러면서도 꼬리가 잡힐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속도를 맞춰 유인했고... 적 제대가 자신들이 어디에 와 있는지 깨달았을 때는 이미 사신이 눈앞에 와 있었다.

“크헉!” “컥!”

적들의 비명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동시에.

“쳐라!”

“깊게 들어가지 마라!”

“갉아 먹어!”

멀어서 들리지도 않지만, 이고는 다른 연대의 중대장과 소대장이 무슨 명령을 내렸을지 머릿속에 훤히 그려졌다.

자신의 부하들이라도 똑같이 했을 테니까.

연대기병은 돌진하는 적 제대에 맞춰 뒤로 밀려났지만, 적 제대는 홀로 돌출되어 있던 탓에 양옆에 위치했던 조선군 전열에 흡수된 꼴 아닌가.

작은 포위망 안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셈이 됐으니... 결말은 굳이 말할 것도 없다.

양 옆에서 치고 들어온 기병들은 화살 대신 편곤과 기창을 들고 적 제대를 분쇄하며 돌파했고, 그렇게 양쪽에서 찌르고 들어오자 제대는 순식간에 3등분으로 분할.

피 냄새를 맡고 달려온 상어떼처럼, 연대기병은 군진이 깨져 흩어진 적병들을 갈기갈기 찢어먹었다.

아주 정석 중에 정석적인 움직임.

북평군은 조선기병의 돌파를 받아내고 이렇게 삼면 포위를 할 작정으로, 끝끝내 버티고 있던 건데... 어째 그 함정에 북평군이 걸려들고 말았다.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군.”

“별 수 있겠습니까.”

슬금슬금 뒤로 병력을 물리면서, 이고와 대대장은 잘 보이지도 않는 저 먼 전장과 바로 코앞에 있는 적 제대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적군은 무려 일만오천이고, 백명을 한 제대로 묶었을 테니 못해도 150개의 제대가 전열에 포진되어 있었다. 예비대도 있겠지만, 어쨌든 엄청나게 많은 수.

이걸 바둑판의 돌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백호나 천호쯤 되는 지휘관이라면 전장을 조망하며 상황을 읽을 수 있다지만... 무시무시한 적 기병을 코앞에 두고 있는 일반 병사들, 그것도 징집병들이 그런 평정심을 유지하기를 바라는 건 욕심이다.

‘조금만 가면 닿을 것 같은데.’ ‘창 한번 찔러보지도 못하고 이대로 계속 화살만 맞고 있으라고?’ ‘한걸음에 달려가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

그리고 이런 생각은 병사들뿐만 아니라, 제대를 책임지는 백호도 하기 마련.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이들은 자기합리화를 하듯 망상을 하기 마련이고, 결국 명을 어기고서 왁! 하고 연대기병을 향해 달려든 거지.

그렇게 몇몇 제대가 물에 녹은 소금처럼 녹아 없어지자, 전열은 이가 빠진 톱니처럼 듬성듬성해졌다.

허나 그래도 적 지휘관은 바보가 아닌지, 부우웅! 둥둥둥! 북소리와 나팔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면서 흔들리는 전열을 붙잡으려고 하고 있었다.

“...”

“...”

이 묘한 형태의 줄다리기는 땅에 파묻혀 있던 해가 몸을 완전히 꺼낼 때까지 계속됐다.

조선군이 다가가면 슬쩍 물러나고, 반대로 북평군이 전진하려하면 이번엔 조선군이 슬쩍 물러난다.

그러는 와중에 다른 제대와 속도를 맞추지 못한 제대가 돌출되면, 연대기병은 사방에서 달려들어 물어뜯었다.

그럼 화들짝 놀라서 적 제대는 다시 움츠려 들어 푹 숨기를 반복.

전투가 시작된 지 어느덧, 순식간에 한 시간이 훌쩍 흘러갔다.

파도처럼 전열 전체가 이리저리 움직이다보니, 어느덧 숙영지 마을에서 1키로미터는 떨어진 지점까지 와 있었다.

허나 북평군 병사들은 자기가 어디에 와 있는지도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기병에 온통 시선이 쏠려 있는 탓에, 풍랑에 휩쓸린 나뭇잎처럼 전장 어디론가 흘러왔다고 느꼈을 따름.

창을 쥔 손은 벌벌 떨렸고, 땀에 찌든 투구에선 찌든 냄새가 풀풀 풍기고, 날도 차가운데 이마에서 질질 흘러내린 땀방울이 눈을 찔렀다.

피로도를 위해 전열의 선두와 후미를 교체하며 버텨야 하건만, 갑작스런 기습을 당하지 않았나.

자형관 지원군은 전장을 택해서 미리 준비하고 움직인 것도 아니고, 조선군이 북직례 내부로 들어온 걸 알지도 못했다.

그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는 걸 느끼고, 저 멀리 웬 기병대가 보이자, 밥을 먹다말고 황급히 전투준비를 한 거니까.

그러니 흔히 쓰는 좌익, 중앙, 우익으로 전열을 큼지막한 3개로 나누지도 못하고, 한 개의 전열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어쩌면 북평군의 이런 포진은 다행일지도 모른다.

만약 전열을 쪼개서 거리를 뒀다면, 전원 기병으로 된 조선군의 기동력으로 인해 각개격파를 당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전위와 후위도 없이 모든 병력이 함께 움직이면, 피로가 급격하게 쌓일 수밖에.’

언제 조선기병이 들이닥칠지 몰라서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잔뜩 굳어 있는 적병.

반대로 “쏠까? 말까? 쏜다?”라고 약을 올리듯, 활 시위에 화살을 올려놓고 느긋하게 손을 내리고 있는 연대병들.

이고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적과 아군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실 냉병기 시대의 전쟁은 가까이에서 보면 열정적이고, 멀리서 보면 정적이다.

어떤 전략과 전술을 가져와도, 결국 승부는 서로 얼굴을 맞대고 칼을 휘두르는 사람에게서 결정나는 법.

양측의 군대가 싸운다는 건 전열과 전열의 충돌이며, 선과 선이 부딪쳐 하나가 된다는 거다.

그 전열의 최선두에 선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칼을 휘둘러야만, 어찌됐건 승부가 난다는 거지.

문제는 사람은 쉽게 지치고, 또 쉽게 안 죽는다는 점이었다.

미래의 운동선수들도 스파링 몇 번 뛰면 기진맥진해지기 마련인데, 자기 목숨을 걸고 창칼을 휘두르면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겠나.

때리는 사람이나 막는 사람이나, 칼질 몇 번 창질 몇 번 하다보면 힘이 쭉쭉 빠져 다리가 풀리기 마련.

이러니 대병이 동원된 전투는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후다닥 끝나는 게 아니라, 서로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몇 시간씩 이어지는 게 보통이었다.

최선두에선 이들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피와 살을 쏟아내도, 전열이라는 하나의 군체는 절대 한순간에 무너지지 않고 몸싸움을 하게 되는 거지.

‘허나... 북평군은 우리처럼 싸우는 적과 만나는 건 처음일 터, 당황하고 있을 거다.’

쉐엑! 충분히 휴식을 취한 연대병들이 날리는 화살의 파공음을 들으며, 이고는 계속해서 적진을 유심히 살펴나갔다.

이렇듯 선과 선이 부딪치는 전장에서 전과를 올리고, 극심한 타격을 주고, 제대를 일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는 게 바로 궁병.

머리위에서 쏟아지는 화살은 선이 아닌 면의 공격을 할 수 있었기에, 같은 시간동안 맞서서 칼질을 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피해를 입힐 수 있었지.

헌데 북평군이 상대하는 건, 그냥 궁병이 아니라 궁기병이라는 점.

활을 쏘기 전에 달라붙으면 보병이 무장이 허술한 궁병을 붙잡고 늘어질 수 있지만, 궁기병은 보병이 달려들기 전에 냅다 내뺄 수 있지 않나.

과거. 몽골원정군이 칼간의 수비병을 상대할 때처럼, 조선군은 기병을 보병처럼 활용해 적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러니 답이 있겠어? 기병이든 보병이든 달라붙어야 어떤 식으로든 해법을 찾아낼 텐데 말이야. 아무리 몽골군이 북평군을 괴롭혀 왔어도, 이런 식으로 운용하는 상대를 만난 건 처음일거다.’

답답해서 머리를 쥐어뜯고 있을 적지휘관을 상상하며, 이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체력 안배는?”

“다들 알아서 잘 하는 군요.”

대답과 함께 대대장은 힐끔 앞에 포진해 연대병들을 가리켰다.

궁병이 그렇게 강력함에도 약점이 있다면, 다름 아닌 피로도.

활을 쏘는 건 보통 힘든 게 아니고, 제 아무리 천하장사라고 해도 속사로 화살을 쏴대면 4,50발 정도가 한계다.

보나마나 북평군은 어떻게든 꾸역꾸역 버티면 조선기병이 제풀에 지쳐 포기할 걸로 생각하고 있는데... 연대병은 그들의 속셈을 알아차린 것 마냥, 화살을 낭비하지 않았다.

푹! 한발 쏘고선 느긋하게 쉬면서 “들이칠까? 말까?”라고 약을 올리듯 어슬렁거렸다.

그리곤 긴장이 풀릴 때쯤, 또 쉭! 화살을 날리길 반복.

흡사 “끝까지 버티겠다고? 누가 더 빨리 지치는지 볼까?”라고 내기를 하듯, 알아서 체력 안배를 하며 화살을 날려대고 있었다.

허나. 북평군에게도 비장의 패가 남아 있었다.

쾅! 굉음과 함께 전열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올랐고, 동시에 조선군 전열이 움찔거리며 흔들렸다.

“화포?”

“...!”

이고와 대대장은 자신들에게 포탄이 날아오지도 않았건만, 자기도 모르게 고개가 휙 돌아갔다.

역시나 예상대로, 적들은 우격다짐으로 화포를 방열해 마구 쏴대기 시작했나 보다.

“몇 문이지?”

“연기가 겹쳐서 정확히 보이진 않지만... 못해도 40문은 넘어 보이는 군요.”

“허.”

예상을 했다지만 생각보다 많은 숫자에, 이고는 자기도 모르게 헛기침이 흘러나왔다.

‘꾸역꾸역 전열을 유지하면서 버텼던 게, 화포를 옮기기 위해서였나 보군.’

화포를 한자리에 모아두고 쏘면 좋지만, 반대로 조선군이 그곳으로 공격을 안 하면 그만 아닌가.

기병 돌격을 견제하기 위해서, 사방으로 뿌릴 수밖에 없었나 보다.

다만...

“재장전이 너무 느리군.”

“적은 포가가 없지 않습니까. 아무리 아군이 코앞에 있다고 해도... 쉽게 쏘는 건 힘들 겁니다.”

“흐음.”

‘어찌하려나.’

이고는 다시금 작게 신음을 흘렸다.

지금까진 조선군이 “니가 와라.”라고 했다면, 이제부턴 북평군이 “화포에 얻어맞기 싫으면 니가 와라.”라고 외치고 있는 거니까.

그리고 그때. 부웅! 소라고동 소리와 함께 전령이 달려왔고, 전황을 바꿀 명령을 내렸다.

“흔들려는 모양이군.”

“예.”

이고 또한 곧장 중대장, 소대장들에게 명을 하달했고, 삐빅! 온 사방에서 호각소리가 퍼지면서 조선군의 진영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고가 예측했듯 적들이 끝까지 버티면서 화포라는 변수가 튀어나왔으니... 이제 어느 정도 힘을 뺐겠다, 빈틈을 만들어 봐야 하지 않겠나.

두두두!

“히랴!”

“좌측으로!” “우측으로!” “달려라!”

좌익과 우익에 걸쳐 있던 연대병들이 슬금슬금 양 옆으로 늘어서면서, 점점 제대간의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코앞에 있는 조선군이지만, 옆으로 죽죽 늘어서기 시작하면 화포로 맞추는 건 쉽지가 않았다.

적들은 천진항 공성을 위해 화포를 가지고 왔으니, 조란탄이 아닌 돌탄과 철환 밖에 없는 터라 더더욱 그러했지.

이고가 이끄는 연대병 뿐만 아니라 다른 연대병 또한 정예한 건 마찬가지였고, 하나같이 화포의 위치를 파악하기 무섭게 말을 달리며 화살을 쏘아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