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5화 (5/122)

오줌과 스카웃 (3)

* * *

사쿠니스 고원, 저물녘.

하늘에 거대한 밤의 장막이 드리워졌다.

악마들의 시체로 해발이 더 높아진 구릉 위를, 희미한 금빛 그림자가 올라간다.

흰 면사에 가벼운 경장만 갖춰 입은 성녀다.

“용사님.”

거대한 검을 땅에 꽂고 있던 풀플레이트의 용사가 고개를 돌린다.

본디 은색이었을 흉갑과 어깨 견갑은 거무튀튀하게 물들어 예전의 빛을 찾아볼 수 없다.

“쓸데없이 뭐 해요. 이럴 시간에 잠이라도 한숨 더 자지.”

“오늘은 이겼잖습니까. 우리 힘으로.”

“주라칸 변경백, 그 좆만 한 놈이 철갑병 천 기만 보내 줬으면 나았을 거예요. 불알을 달군 집게로 뜯어버릴 새끼.”

성녀라기엔 파격적으로 걸쭉한 욕설. 그러나 이번 생과 이전 생, 또 이전 생을 거치며 무수히 들어 온 터라 익숙하다.

용사, 박건은 검을 들지 않은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악마의 피를 얼마나 뒤집어썼는지, 말라붙은 피딱지가 건틀릿 안에서 바스러졌다.

“불알 뜯을 놈들이 참 많네요.”

사쿠니스 고원의 점령전은 격렬했다.

사흘 밤, 사흘 낮을 내리 싸운 연합군은 서부 능선을 침략하려던 악마들을 밀어냈다.

하지만 회전력부터가 다르다.

악마는 지옥 밑바닥에서 계속 수태되지만 인간들은 소년이 청년으로, 병사가 기사로 성장할 시간이 부족하다.

연합군을 지원해야 할 영주들은 병력을 보내기는커녕 성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

천사는?

드높은 천상, 그 빌어먹을 비둘기 새끼들은 교황청에 계시를 내릴 때나 잠깐 날아와 깃털을 퍼덕거리곤 사라진다.

ㅡ대악마들의 공세가 갈수록 거세집니다! 불타는 군대가 저렇게 밀려들어오는데, 천상은 왜 저희를 돕지 않는단 말입니까!

ㅡ돌아가거라, 용사여. 우리는 세계의 규칙에 얽매인 존재들. 현신해 싸우려면 대가가 필요하다.

박건의 어금니가 뿌드득 갈려나갔다.

“빌어먹을 비둘기들.”

“비둘기?”

성녀가 금빛 눈동자를 깜빡거렸다. 짧은 순간, 박건의 마음에 안타까움이 퍼진다.

이 이타적인 여자는 회차가 몇 번을 반복돼도 인류를 위해 생명을 불사른다.

자기가 성황청과 교단··· 철왕국 백성들의 신실한 도구임을 모르는 걸까.

“그만 들어가죠, 바람이 찹니다.”

“용사님 고환도 얼어붙나요?”

“자꾸 그러면 내일부터 말 안 할 겁니다.”

구릉을 내려가는 길은 춥고 축축했다.

곧 꺼질 생명처럼 깜빡거리는 막사들의 불빛을 굽어보며, 박건은 생각한다.

어떻게 죽여야 하는가?

아니면,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

건은 눈을 번쩍 떴다.

머리맡으로 손이 올라갔지만 잡혀야 할 칼자루가 없었다.

몇 초 후에야 긴장했던 근육이 풀렸다. 이곳은 마경의 검은 땅이 아닌 대한민국, 그의 방이다.

‘돌아왔었지.’

무슨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은 안 나고 시트만 흠뻑 젖어 있었다.

거실로 나가니 가족들은 셋 다 없었다. 냉장고에 한영주의 글씨로 포스트잇만 붙어 있었다.

[1. 푹 쉬기, 2. 휴대폰 잘 보기]

“아, 휴대폰.”

충전도 안 한 것이 생각나, 뒤늦게 잭을 꽂자 스마트폰이 켜졌다.

쭉 꺼져 있던 폰에는 문자와 카톡, 전화들이 잔뜩 들어와 있었다.

그는 알람을 대충 넘기며 들어온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건아, 너 어디야?

-아니 형, 얼루 샜어!

-제발 우리 좀 살려 줘라, 강당으로 와!

전역식 중 사라진 그를 애타게 찾는 전우들의 문자부터,

-박건 언제 나옴?

-9시래매 ㅇㅇ 진작 끝내고 차 탔을 텐데

-아니 얘 전화기 꺼져있어

-? 아줌마한테 전화하니까 집에도 안 도착했다는데?

-뭔 일 생긴 거 아냐 진짜??

걱정 그득한 친구들의 단체 메신저와,

-형, 어디야? 부대에선 출발했다는데··· 전화기 꺼져 있다고 엄마가 걱정하셔. 위치 찍으면 일 끝나자마자 태우러 갈게!

동생의 긴박한 문자까지.

연락들을 하나씩 읽고 나자 돌아왔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이곳은 죽어도 처음으로 돌아가지 않고, 일어날 때마다 주변을 경계할 필요도 없다.

용사의 업은 비로소 끝난 것이다.

그는 문득 허기를 느꼈다.

‘배고프다는 기분이 이런 거였군.’

냉장고에 먹다 남은 잡채와 밑반찬들이 남아 있었다. 건은 압력밥솥을 열고 반쯤 찬 밥통을 통째로 가져왔다.

전이(轉移)의 충격으로 떠오르지 않던 기억들이 차차 되살아났다.

수십 번을 죽은 N회차. 용사 박건과 그 동료들은 불타는 지옥의 최심부에 당도했다.

그리고 다섯 대악마 중 둘째인 죄악의 베리알을 쓰러뜨리기 직전까지 갔다.

싸움은 그 어느 때보다 처절했다. 다른 영웅들은 모두 죽고 망나니 헌트와 제국의 2황자, 철왕국의 성녀만 옆을 지켰다.

마침내 성검이 베리알을 그은 순간, 지옥의 하늘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어떻게 됐더라?

ㅡ용사님, 날 봐요!

성녀가 뭔가를 소리치던 것은 기억난다. 열린 하늘에서 빛과 함께 천사들이 나타났던 것도.

그것이 전부였다.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는 전투복 차림으로 부대 뒷산에 누워 있었다.

“귀환 조건은 다 못 채웠을 텐데.”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제 와서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꿈인가. 아니면 지독한 정신질환?

그렇게 여기기엔 지난 삼십 년의 세월이 지나치게 생생하다.

건은 차분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어젯밤, 자기 전에 몇 가지 조율을 해야 했다.

몸은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지나치게 날카로워진 육체의 감각이 문제다.

방문 밖의 가족은 물론, 20층 밑에서 길을 지나는 행인들의 발소리까지 들리는 통에 한동안 잠을 설쳤다.

‘임무로 나온 분쟁지도 아니고, 서울 한복판에선 너무 과해.’

그래도 이 정도면 먹고 살 걱정은 없다.

경찰이나 경호원을 해도 되고, 몸을 쓰는 아르바이트도 나쁘지 않다. 지금의 육체라면 매일같이 공사판에 나가도 돈은 잘 벌 것이다.

돌아가야 돼. 아직 대악마 두 놈이 남았다.

용사 박건이 머릿속에서 중얼거렸다.

어딜 돌아가, 새끼야. 죽지도 못하고 삼십 년을 굴러 놓고.

이쪽 세상의 박건이 이를 갈며 받아쳤다.

“그만.”

관자놀이를 누른 채 중얼거리자 웅웅거리던 목소리들이 사라졌다.

아직 설명되지 않은 일들이 너무 많다.

생각해 보면, 지구로 돌아온 것부터가 수상쩍은 구석이 많다.

분명 성녀가 말했던 대악마는 다섯.

그 중 셋을 죽였고, 네 번째 놈을 끝장내기 직전 강제로 전이했다.

진짜 귀환 조건을 숨겼던 걸까? 아니면 그 사이 세계에 어떤 변수가 발생해서?

잠시 고민하다, 건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토록 바랐던 귀환이다. 하지 못한 일이 남았더라도 그 세계의 사정일 뿐, 돌아와서까지 영향을 받는 것은 수지가 안 맞다.

‘게다가 기억도 잘 안 나고.’

베리알과의 싸움 직전··· 마경의 야영지에서 성녀가 무엇을 말했던가?

격렬한 싸움 속, 회차별 기억은 어그러지고 뒤틀리며 몇 단락씩 누락되어 있다.

용사 박건이 아닌 인간 박건의 원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도.

“아.”

건은 멍하니 아래를 보았다.

퍼 온 반찬은 물론, 가득 차 있던 밥통까지 소가 핥아먹은 양 싹 비어 있었다.

“뭐라도 빨리 해야겠네.”

*

“야, 박건. 그래서 어떻게 된 건데?”

“뭐가?”

볏짚삼겹살 집은 손님들로 시끄러웠다. 삼겹살을 뒤집던 배영호가 다시 물었다.

“어제 뭔 일 있었냐고. 나랑 쟤랑 아줌마한테 연락 받을 때까지 걱정했다.”

“그래, 솔직히 말해. 군사기밀이면 묻어주고 아니면 계속 캘 거니까.”

왼쪽에 앉은 서승아도 심문에 합류했다.

말을 안 해 주면 끝이 안 날 기세라, 건은 준비해 온 변명에 살을 붙였다.

“부대에서 한숨 자고 나오다가 차 놓쳤다. 휴대폰은 배터리 없어서 꺼졌고, 집에 도착하니까 선이가 맞고 왔더라. 그거 해결하느라 연락을 못 했어.”

지금 그는 친구들과 만나고 있었다.

단톡명 ‘개노답 삼남매’, 입대 전부터 절친하던 초등학교 동창들의 모임이다.

단발에 정장, 깔끔한 블라우스 차림의 서승아가 눈썹을 찌푸렸다.

“맞고 와? 누구한테?”

“회사 선배.”

“근데 그걸 왜 네가 해결해, 그냥 나한테 연락하고 신고부터 접수해야지.”

“너한테 왜?”

서승아는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건과 자신을 번갈아 가리켰다.

“너는 갓 제대한 민간인, 나는 3년차 변호사.”

“아.”

“아는 무슨 아야. 배영호, 얘 진짜 좀 이상해지지 않았냐? 술 안 깨서 그런 줄 알았는데 눈빛이 수상해.”

“야, 이제 하루 됐잖아. 나도 군법무관 전역하고 며칠은 정신 못 차렸다.”

배영호와 달리, 서승아는 영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풀지 않았다.

“병원 한번 가 봐야 되는 거 아냐? 전역 앞두고 짬 시키는 게 제일 좆같다고, 특수부대랍시고 말년에 빡센 작전만 굴리다가 PTSD라도 온 거면 진짜 소송 건다, 내가.”

듣고 있던 배영호가 질색했다.

“넌 무슨 여자애가 그런 말을 쓰냐?”

“다 니들 따라다니면서 배웠지. 억울하면 군대 얘길 하지 말든가.”

“건아, 이게 맞냐? 훈련소도 안 가본 짬찌가 아는 척은 아주······.”

건은 대답 대신 소주를 쭉 마셨다.

그나마 가족들은 기억이 나서 다행이지, 다른 인간관계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서승아··· 배명호··· 친한 친구들은 물론이고, 먼저 전역하거나 아직 부대에 있는 전우들도 얼굴이 흐릿하거나 희미하다.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충성!

그때 우렁찬 경례 소리가 들렸다.

서로를 야무지게 물어뜯던 두 동창의 시선도 고깃집 대형 TV로 쏠렸다.

화면에는 베레모를 쓴 남자 배우가 여군 장교에게 경례를 붙이고 있었다.

서승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인기긴 인기네.”

“아, 절망의 군주? 우리 직원들도 다 저 얘기 하더라, 이시도가 인생 캐릭터 찾았다고.”

“난 재미없어. 무슨 갓 임관한 소위가 남미로 날아가서 전쟁을 막아? 배우 얼굴이랑 연출빨로 미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듣고 있던 배영호가 씩 웃으며 물었다.

“전직 특수부대원으로서 어떠냐, 저런 쌈마이 판타지군대물이 판치는 걸 보면.”

서승아가 냉큼 받았다.

“말해 뭐 하냐, 쟤가 저기 있었으면 고증 완벽한 특작물 한 편 뽑혔을걸.”

“그럼 뭐 하냐, 우리 같은 사람들은 방송이랑 인연 없는데. 저기 뭐야, 넌 변호사 예능 나가고 쟤는 군인 예능 나가서 얼굴 박는 게 최고 홍보라니까.”

“지는 공무원이라고 쏙 빼네.”

화면이 바뀌었다. 포화가 쏟아지는 분쟁지, 흙먼지 하나 안 묻고 나아가는 주인공을 보던 건이 무심하게 말했다.

“연락 왔는데? 오디션 보러 오라고.”

두 앙숙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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