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탕 속 상어 (3)
* * *
‘왜 내 편을 들지?’
리딩 대기실에 들어가면서, 건은 갸웃거렸다.
맞은편의 여자와 남자의 뒷담화는 쭉 듣고 있었다. 상대할 가치도 없어 놔 둔 건데 갑자기 주연 배우가 와서 편을 들어줬다.
‘분위기를 중시하는 타입인가 보군.’
악의는 익숙하다. 소문을 퍼뜨리든, 뒤에서 욕을 하든, 물리적 위해만 끼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내버려둘 수 있다.
배우들이 전부 앉자 리딩실이 꽉 찼다.
미리 세팅돼 있는 카메라들 때문일까. 메이킹 필름까지 찍는 인기작의 열기, 손에 잡힐 듯 선연한 긴장감이 흐른다.
맨 마지막으로 들어온 나종모 PD가 문을 닫고 손뼉을 딱 쳤다.
“자, 안녕들 하십니까! 연출을 맡은 나종모입니다. 이쪽은 은희욱 작가님, 저쪽은 우리 화제성 열심히 띄워 줄 카메라들 1호기, 2호기, 3호기고요.”
가벼운 웃음이 돌았다.
“여기 계신 배우님들 전부 그렇겠지만, 저나 은 작가님이나 목표가 높아서요. 20% 안 넘으면 조정실 안 나간다는 생각으로 왔으니, 메이킹부터 티저, 1화부터 막화, 종방연 뒷풀이 순간까지 빡세게 달려 봅시다.”
PD의 출사표를 작가가 받는다.
“예, 목표치 높은 은희욱입니다. 어쩌다 보니 히트만 쳐 왔는데, 당연하지만 이번에도 칠 생각입니다.”
주조연들을 훑은 은희욱 작가의 시선이 잠시 박건에게 머물렀다가 떨어진다.
“귀하신 분들, 필요한 자리에 어렵게 모신 만큼 대본 잘 빼서 보답하겠습니다.”
그 자신감이 허투가 아니었음을, 은희욱은 리딩 첫 장면부터 증명했다.
<서울의 개> 시작 씬.
ㅡ살려··· 살려주세요······.
ㅡ뭐야, 김 경장! 이리 와 봐!
ㅡ119 불러, 엠뷸런스 오라고 해!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지구대로 뛰어들어온 조폭 한 명.
지구대원들이 붙어 구급차를 부르지만, 어딘가 어눌한 발음으로 살려달라는 말만 반복한다.
이상한 것을 느낀 경찰 한 명이 입을 벌려 들여다보자 어금니에 박힌 붉은 물체.
ㅡ피해! 폭탄이······!
말할 틈도 없이 사제폭탄이 터지며 조폭의 머리가 날아가고 근처 경찰관들까지 부상을 입는다.
일명 ‘지구대 테러’로 대서특필된 사건에 광수대가 호출되고, 강력 3팀의 마대휘가 조장으로 일임돼 범인을 쫓는다.
ㅡ이 새끼 이거, 레논파 마지막 생존자야.
ㅡ레논파요? 그 러시아 마피아 따까리 애들?
ㅡ어. 요 근래 안 보여서 싹 접고 잠수 탄 줄 알았더니, 이삿짐 싸려는 게 아니었어.
ㅡ그럼 이건······.
ㅡ실종, 사고, 상해. 어떤 놈들이 다 담그고 다니는 거야.
첫 배경부터 나레이션, 캐릭터들 옆에 적힌 지문과 대사 하나하나가 착착 붙는다.
대본 리딩임에도 실제 씬들이 눈앞에 스쳐지나갈 정도의 생생함은 덤.
마대휘 역의 용준상은 선 굵은 연기로 형사 역할을 소화했고, 정연우 역의 서희도도 연기력 논란을 불식시킬 열연을 선보였다.
뒤쪽에 앉아 있던 관계자들이 속삭였다.
“괜찮은데? 이 갈고 레슨 받는다고 언플 띄우더니, 늘긴 확 늘었어.”
“용준상이야 핀즈 엔터 보증수표고··· 근데 저 사람은 대사가 없나?”
시선이 모였다. 테이블 한쪽 구석, 앉아서 열심히 대본을 넘기는 남자.
유려한 얼굴은 조연이 아닌 주연급이라고 봐도 무방한데, 대놓고 후줄근한 차림새 때문에 더 눈에 띄던 사람이다.
다른 회사의 팀장이 받았다.
“그 사람 아냐? 최승 역.”
“아, 이번 작품 은 작가 조커.”
“하여간 저 양반 뉴페이스 좋아해. 김용후에 송지익, 윤태상까지 싹 까고 받았다더라.”
“근데 왜 이렇게 목소리 듣기가 힘들어? 은희욱 작가 픽이라고 소문이 자자해서, 리딩 때 확인 좀 할랬더니.”
처음 말을 꺼낸 실장이 으쓱했다.
“일부러 대사 줄인 거 아냐? 꽂아는 줘야겠는데 입 열면 깨니까.”
이제 극은 1화의 클라이막스로 치닫는다. 마대휘가 ‘정 인터내셔널’을 찾아내고, 정연우는 다음 목표물에 처벌을 단행한다.
“불길한 소리 마. 끼워팔기 역풍 맞으면 드라마 휘청거리는 건 순식간······.”
팀장이 질색을 하며 대꾸한 순간.
콰아아앙!
리딩장 한복판에서 폭탄이 터졌다.
*
깜짝 놀란 배우들 몇몇이 일어나고, 몇몇은 어깨를 움츠렸다가 헛기침을 했다.
분명 방금 전, 마대휘의 대사 다음에는 사채업자 금고가 폭발하는 씬이 있다.
제작비 빵빵하기로 소문난 JNBC니 특수효과도 아낌없이 지원될 것이다.
문제는 여기가 대본리딩장이고, 그 효과음을 낸 것이 배우란 점이다.
“······박건 씨?”
박건은 아무렇지 않게 목을 풀었다.
“예. 몰입감을 살리려고, 나레이션에 있는 대로 쳐 봤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뭘 어떻게 한 거예요, 방금 진짜 폭발 소리였는데?
“그러니까. 난 내가 너무 몰입해서 헛 게 들리나 했잖아, 이 나이에.”
입을 떡 벌린 나종모 PD가 묻고, 곽중일이 껄껄 웃자 리딩장 전체로 웃음이 번졌다.
끝이 좋으면 무명 배우의 애교지만, 분위기가 망하면 떠 보려는 미친놈의 발악이다.
“놀라셨으면 죄송합니다. 사실 제가 이것저것 효과음을 좀 낼 줄 알아서··· 대본에 내레이션이 풍부하더라고요.”
촬영 내내 묘하게 우호적이던 서희도가 양쪽 엄지를 치켜들었다.
“와, 이거 메이킹필름 썸네일용으로 딱이다. 한 번만 더 해 주면 안 돼요?”
뒤쪽의 매니저가 안절부절못하면서 엑스 자를 그렸지만, 박건은 흔쾌히 끄덕였다.
“대본에 있는 것들은 다 됩니다.”
이내 다양한 효과음이 선보여졌다. 무표정으로 폭발음, 발소리, 총소리까지 내는 통에 카메라를 잡고 있던 스탭들도 감탄했다.
“저 정도면 성우 못잖은데······?”
“굳이 후시 때 넣을 필요가 없겠다. 성우가 뭐야, 에코만 주면 그냥 인간 이펙터네.”
난데없는 개인기 퍼레이드에 나종모 PD를 비롯한 연출진은 미소를 금치 못했다.
말이 좋아 메이킹필름이지, 이런 리딩장에서 건질 수 있는 장면은 뻔하다.
미친 연기, 누구와 누구의 환상 케미, 저런 타이틀로 조회수나 뽑자는 사전작업인 것이다.
그런데 무명 신인이 뜬금없이, 그것도 임팩트 넘치는 개인기로 어그로를 끌어 준다면?
“타이틀 하나는 일단 나왔네.”
나머지 리딩은 한결 풀린 분위기에서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물론 끝날 때까지 최승의 대사는 없었고, 관계자들은 아쉬움을 삼키며 일어섰다.
본인들 배우의 작품에 웬 미친놈이 들어왔다는 소식만 얻고서.
*
메이킹필름용 인터뷰까지 끝난 뒤, 일어서는 건을 서희도가 잡았다.
“저기, 최승 형. 오늘 고생 많았어요.”
“아닙니다. 대사도 없어서 이펙터 노릇만 했는데요.”
“푸흡, 그게 진짜 대박이었어요.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박건입니다.”
“서희도예요, 잘 부탁해요.”
서희도가 인사를 하고 나가자, 이번엔 곽중일이 두툼한 손을 내밀었다.
“오늘 재밌었어요. 촬영장에서 봅시다.”
“예, 많이 배우겠습니다.”
“나중에 나도 그, 성대모사 좀 알려주고. 이놈의 회사 중역 이미지가 잘 안 떨어진단 말이야.”
오늘 리딩장의 씬스틸러는 단연 대사 하나 없이 임팩트를 챙긴 건이었다.
‘분량 뽑으려고 어지간히 설치네.’
‘됐어, 급 안 되면 저런 거라도 해야지.’
조연 배우들의 매니저 쪽에서 수군거림이 들렸으나, 불만을 표출하는 사람은 없었다.
메인 연출진들이 저렇게 좋아하는데, 시비를 걸어 봐야 본전도 못 찾는다는 걸 잘 아는 것이다.
박선은 방송국 복도로 나오자마자 호들갑을 떨었다.
“형, 어떻게 한 거야? 진짜 이펙터로 튼 효과음보다 리얼하던데. 그런 거 원래는 한 번도 안 보여줬었잖아.”
전이 15년차쯤인가, 엘프 여왕을 만나러 대수림에 갔던 적이 있었다. 시험이라는 명목으로 용사의 힘을 빼앗겨 합기를 쓸 수도 없었고.
덕분에 맨몸에 칼 한 자루만 들고 다니며 야생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거기 거인들은 청력이 좋았으니까. 동물 흉내만 잘 내면 사냥이 쉬웠지.’
예전 짬밥을 되살려 개인기를 좀 써 봤는데, 연출진들이 좋아하는 걸 봐선 성공적이었다.
“그냥 잡기야. 부대에서 배운 거.”
“···어우, 심장 떨려 죽는 줄 알았네. 갑자기 그걸 할 생각을 하냐, 거기서.”
건은 희미하게 웃었다.
다른 시간대에 다른 차원이지만, 오랜만에 실력을 발휘한 기분이 썩 괜찮았다.
“열심히 하자며.”
“어? 응, 그치.”
“그럼 우리 분량은 직접 챙겨야지. 다른 배우들한테 안 묻히게.”
그 말에 박선의 눈빛도 활활 타올랐다.
“좋아. 나도 더 열심히 할게. 아주 그냥 불판에 장작 넣다가 쓰러질게.”
“매니저가 배우보다 먼저 쓰러지진 말고.”
“미안, 형보다 체력 좋으면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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