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탕 속 상어 (5)
* * *
S#.12 유곽 안
첨벙, 첨벙.
냉탕으로 들어간 최승, 해협을 건너는 모세처럼 탕 안을 횡단해 반대편으로 나온다.
양복에 묻었던 피는 말끔하게 빠지고 대신 목욕탕 물이 시뻘겋게 물들어 있다.
마대휘 : 너 이 새끼, 정연우 따까리냐?
문 앞에 선 최승. 나가려다 말고 돌아서서는 복잡한 수화를 한다.
최승 : (자막으로) 따라오면 죽는다.
수화를 알지 못하는 마대휘, 멍하니 선 사이 문이 닫히며 암전.
*
오늘 분 촬영이 끝났다.
다들 세트장 밖으로 나왔지만, 박건은 아직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양복 차림 그대로였다.
보조출연자들이 우르르 모여들어 한 마디씩 던진 탓이었다.
“진짜 장난 아니시더라고요. 저 다음 씬에도 보출*로 올 겁니다. 쭉 나오시죠?”
“몇 년간 스턴트 뛰면서, 현 감독님보다 몸 잘 쓰는 배우님은 처음 뵀어요. 왜 따로 디렉팅이 없었는지 알겠더라니까.”
“배우님은 꼭 뜨실 겁니다. 오늘 촬영분 방영될 날만 기다릴게요.”
“감사합니다. 아유, 예. 잘 되실 겁니다.”
덩달아 신이 난 매니저, 박선이 형 대신 쏟아지는 덕담에 답한다.
결국 몰려든 사람 대부분이 사진을 찍고 사인까지 받아 갔다.
마지막으로는 매니저를 대동한 용준상이 다가와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나도 사진 한 장 됩니까?”
“예, 물론입니다.”
“근데 정말로 연기를 안 배웠다고요? 대사는 둘째 치고 호흡부터 야생인데.”
“이번이 처음입니다.”
“은 작가님이 조커가 아니라 히든카드를 데려왔네. 나중에 액션 좀 가르쳐 줘요.”
“언제든 말씀 주십시오.”
용준상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휴대폰 번호까지 교환하곤 떠나갔다.
세트장 안의 상황을 못 본 매니저만 따라가며 캐물었다.
“준상아, 안에서 뭐가 어땠는데 그래? 말 좀 해 봐!”
용준상이 사라지자 박선과 박건 형제가 나종모 PD에게로 다가왔다.
“차에 좀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옷이 다 거기 있어서, 오늘 다른 촬영은······.”
“아, 없어요. 있어도 빼 줘야지. 갈아입을 데 없으면 우리 집 써도 돼요.”
“감사합니다, 피디님!”
두 형제는 물을 떨어뜨리며 멀어졌다.
뒷모습을 지켜보던 나종모 PD는 촬영감독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어때요, 김 감독님?”
촬영감독은 말없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말해 뭐 해요. 미쳤지.”
“이거, 편집실 가자마자 은 작가한테 쏴 줍시다. 그 양반 또 신나서 밤샘작업하게.”
“우리도 이 기세로 달려야죠. 보니까 저 친구, 아주 실전파에 강심장이에요. 오디션 때도 장난 없더니 지금은 거의······.”
“괴물이지. 자, 얼른 가요. 1화 방영일까지 떡밥 다 풀려면 바빠.”
촬영감독이 부리나케 달려간 뒤, 나종모 PD는 JNBC 홍보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팀장님. 난데요.”
-아, 왜, 또! 주말 끝날 때까지는 홍보팀 파업, 폐업이야!
“우리 내기한 거 기억나죠?”
-······은 작가 조커?
“예. 쪽박이 아니라 대박이니까, 약속한 대로 준비해요. 이거 보고 안 지리면 요로결석 환자야.”
*
그날 밤, 커뮤니티에 움짤 한 장이 올라왔다.
제목 : 서울개 폭탄좌 정체 공개 ㄷㄷㄷㄷ
(최승의 사우나 등장 움짤)
킬러였음...ㄷ
?? 물에서 나오는데 눈빛 뭐임?
ㄴ무슨 피칠갑 상어 올라오듯 나오네;
ㄴ아니 몬가... 몬가 미쳤는데...
ㄴ올해 등장씬 탑5 무조건 들어간다
다음 장면은? 다음 장면은? 다음 장면은?
ㄴ그래서 대체 누구냐고 이거
ㄴ모름;;; 홈페이지에도 사진만 띄워 놓고 배우 이름도 없어 ㅋㅋㅋㅋ 컨셉 오짐
무슨 배역인지는 말해 줘라 나종모 은희욱 이 악마들아!!!
ㄴ(???) : 궁금하면 1화를 봐라
*
시간은 총알같이 흘렀다.
은희욱은 혼을 갈아 대본을 썼고, 배우들은 씬을 소화했으며, 제작진은 부지런히 떡밥을 날랐다.
첫 번째 미끼는 단연 최승이었다.
떡하니 홈페이지에 배역명과 사진을 띄운 의문의 남자.
처음 보는 얼굴에 배우 실명도 없다.
팬들이 은희욱이 데려온 무명 배우라고 짐작만 할 때, 돌연 쇼츠 하나가 떴다.
여태 꽁꽁 숨겼던 최승의 욕탕 혈투 씬.
영상미는 미쳤고, 끊는 타이밍은 더 미쳤다.
누가 봐도 제작진이 일부러 흘린 떡밥이지만 낚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최승은 누구냐, 용준상이랑 서희도에 주연이 하나 늘은 거냐, 대체 저 인간은 무슨 배역을 맡는 거냐······.
팬들의 원성이 방송국 게시판 지분 대부분을 차지할 즈음, 사진 한 장이 올라왔다.
서희도와 용준상이 최승과 함께 피칠갑을 한 채 브이를 그리는 촬영장 직찍.
“나종모는 내가 잡는다, 죄목은 악질 어그로꾼이며 형량은 칠십 년··· 피디님, 이번 생엔 못 나오시겠는데요?”
드라마 홈페이지와 공식 인스타를 들락거리던 조연출이 히죽거리며 댓글을 읽었다.
“뭔 소리야, 연출 뛰면서 들은 욕 다 합치면 이백 살은 살고도 남지.”
눈밑이 거무스름해진 나종모가 대꾸했다.
늦어진 오디션 덕에, 첫방 전부터 사전분량 확보를 위한 강행군 중이었다.
“반응들은 어때?”
“드디어 오늘이잖아요, 다들 난리가 났죠. 기대에 못 미치면 방송국 쳐들어올 기세예요.”
“이왕이면 빨리 오라고 해. 그래야 방영 전에 기사 한 줄이라도 더 날 거 아냐.”
“어휴, 그래서 몇 퍼센트 예상하시는데요?”
피로에 찌든 나종모의 눈이 번쩍 빛났다.
“무조건 20%. 최소 15%.”
“···너무 쏘신 거 아녜요? 상반기 싹쓸이라던 MBS 절망의 군주도 30% 겨우 찍었는데.”
“이시도는 가짜 군인. 우리 박건 씨는 진짜 군인. 그것도 특수부대 만기 전역자 출신.”
“예, 예, 어련하시겠어요.”
*
“검사님, 저희 먼저 들어갑니다.”
“예. 집 도착하면 아시죠?”
“아휴, 알겠어요. JNBC! 서울의 개!”
밤 8시 5분 전.
배영호는 같은 방 계장과 실무관을 퇴근시켰다.
그리고 검사실 TV를 JNBC에 맞추고, 서승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채널 고정했냐?”
-오버는··· 검사실 TV로 백날 틀어 봤자 시청률 집계 안 된다니까.
“마음이 중요한 거야. 직원들도 다 퇴근시키고 응원하려고 켰다.”
서승아는 혀를 차다가 물었다.
-아, 박건은 어디래? 같이 찍는 배우들이랑 모니터링하려나?
“집일걸, 부모님이랑 본대.”
-그럼 됐어. 시작하니까 끊어.
안 그래도 그러려던 참이다. 배영호는 문까지 닫아건 채 절친의 드라마에 집중했다.
광고가 끝나고, 잘 뽑힌 하이라이트 화면들이 착착 흘러간다.
만화처럼 이펙트가 들어간 컷들. 마대휘, 서희도, 그 밖의 조연들 끝에 잘 아는 얼굴이 나타나 화면을 응시한다.
고층빌딩 옥상에서 서울의 야경을 굽어보는 사내, 박건이다.
“오, 새끼. 수트빨 좋네.”
그러고는 본격적인 시작.
드라마 본편도 상당히 괜찮았다. 박진감 있는 연출, 얼굴 한 번쯤 본 적 있는 감초들의 열연에 속도감도 썩 좋다.
지구대에서 일어난 인간 테러부터, 좌천된 광수대 형사의 배경을 자연스레 조명한다.
이어 주인공 마대휘가 의문의 ‘조폭 사냥’ 사건을 파헤치며 치열하게 진행되는 시퀀스들.
그렇게 드라마는 감탄사가 나올 퀄리티로 40분간 달리다가, 별안간 뚝 끊겼다.
정작 시청자들이 기대하고 있었을 뉴페이스, 예고편부터 기대를 끌던 흠뻑 젖은 수트맨은 나오지도 않은 채로.
“오늘 나올 분량이 아닌가?”
눈을 깜빡이던 배영호는 친구에게 온 톡을 확인하곤 낄낄거렸다.
서승아 : [근데 건이는 언제 나오냐?]
서승아 : [???]
서승아 : [아 느낌 너무 쎄한데]
서승아 : [설마 이대로 끝이라고?]
서승아 : [나종모 은희욱 제발...제발..제발..]
서승아 : [방송국 놈들은 맞아야 돼]
*
-당신의 몸을 지키세요, 바디쉴드.
용준상이 안마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미소 짓는 광고가 나왔다.
채널을 돌려 버린 박열호가 어색하게 아들들의 기운을 북돋으려 애썼다.
“첫 화는 히든카드 숨겨두기, 그런 걸 거다. 너무 상심 말고 기다려 봐.”
“히든카드를 뭐 이렇게 꽁꽁 숨겨요? 거기 인간들이 얼마나 산전수전 다 겪은 프로인데, 혹시 피디한테 밉보였다거나 하는 건······.”
보는 내내 표정이 안 좋던 어머니, 한영주가 말꼬리를 낚아챘다.
“아니야, 엄마. 그 피디님 형한테 푹 빠져서 거의 광팬이야. 지난번에 사인도 받아 갔어.”
“그래? 선이 말이 맞아?”
“예. 지금 계속 찍고 있는데, 아마 다음 주부턴 분량 많아질 거예요.”
“그럼 다행이고. 아무튼 방송국 사람들은 믿을 수가 없다니까.”
젊었을 적, 광고모델 경험이 몇 번 있던 한영주는 영 안심이 안 되는 듯 혀를 찼다.
“그나저나 너희 차는? 촬영장 여기저기 옮겨 다니려면 필요할 거 아냐.”
박선이 제법 매니저 티가 나게 대답했다.
“경차 하나 몰지. 렌트카 사업 하는 형이 장기로 싸게 해 줬거든.”
“덩치도 큰 애들이 경차를 어떻게 타. 엄마가 하나 뽑아 줄 테니 같이 타고 다녀.”
듣고 있던 박열호가 놀라 입을 벌렸다.
“새 차를? 당신이 돈이 어디 있어서?”
“벌 거 더 벌고, 쓸 거 덜 쓰고 모았죠. 이달의 판매왕을 몇 번 했는데.”
“좋아, 그럼 아빠도 보태마. 그 뭐냐, 스타크래프트 밴? 이걸 연예인들이 많이 탄다더라.”
“···오버하지 말고, 당신은 밥이나 사요. 내가 알아서 적당한 걸로 해 줄 테니까.”
“아니, 나도 쌈짓돈 꽤 있는데······.”
박열호가 헛기침하는 것으로 가족 동반 드라마 시청은 일단락됐다.
다들 방으로 돌아가던 중, 한영주가 슬쩍 물었다.
“건아, 촬영은 괜찮아? 힘든 일은 없고?”
“예. 생각보다 재밌어요.”
대답한 박건은 웃었다. 전역 이후 생긴, 묘하게 초탈한 듯한 미소였다.
“그리고 더 재밌어질 것 같아요.”
*